정부가 광복 70년을 기념하기 위해 임시공휴일을 지정하고 여러 가지 행사를 준비하고 있지만 인천시는 조용하기만하다. 인천보훈지청에 의하면 인천시민 가운데 건국훈장과 포장을 받은 순국선열은 31분이며, 애국지사로 훈장과 포장·표창장을 받은 애국지사는 281분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재일학도의용군 31분을 포함하면 343분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배출하거나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 도시이지만 이분들의 활동에 대한 인천시 차원의 관심과 예우는 미흡하기 짝이 없다.
조봉암 선생은 인천이 낳은 대한민국의 큰 인물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사회주의자로서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한 혁명가였다. 해방 후에는 좌우의 이념대립을 넘어선 평화통일론을 제창하였으며, 초대 농림부 장관과 국회부의장으로 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졌지만, 1959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사형을 당했다. 죽산의 억울한 누명은 2011년의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고 법적으로는 복원되었지만 명예회복과 재평가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죽산과 가족이 살았던 중구 참회전로 244번지는 언제 헐릴지 모를 형편이다.
홍진 선생은 한국독립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3·1운동이 전개되던 중인 1919년 3월 17일 홍진 선생은 ‘한성정부’를 조직하고 그 첫 회의인 13도대표자회의를 지금의 자유공원인 만국공원에서 열었다.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비상국민회의 의장으로서 30년동안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홍진 선생은 인천 관교동에 묻혔다가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홍진 선생의 기념비가 한 때 자유공원에 세워졌지만 무슨 이유로 사라지고 없다.
또 일제의 감시가 가장 엄혹한 시기인 1942년 인천조병창내에서 수십명의 노동자를 조직하여 무기 제조법과 무기 반출 등 과감한 항일투쟁을 펼치다 체포, 투옥되었던 황장연·김군희 선생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인천은 개항장으로 일제의 조선 침탈의 교두보였지만 한편으로는 민족운동과 노동운동 등 항일광복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펼쳐졌던 도시이기도 했다. 해외의 광복운동뿐 아니라 국내와 지역에서 광복운동에 투신했던 선열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오늘의 인천, 오늘의 대한민국은 바로 그분들의 고귀한 희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인천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을 재조명해야
입력 2015-08-12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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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3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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