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창간특집

  • 감내한 희생, 숨통 조인 가난… 어느 '잠긴' 마을의 절규 [수도권 운명을 닮은 '팔당' 이야기·(5·끝)]

    감내한 희생, 숨통 조인 가난… 어느 '잠긴' 마을의 절규 [수도권 운명을 닮은 '팔당' 이야기·(5·끝)] 지면기사

    팔당의 현재와 풀어야 할 과제는 # 개발 vs 보존, 50년 동안 이어온 '갈등' 산업 발달로 수질관리 더 강화하는 정부미흡한 생활시설 속 고립감 느끼는 주민 팔당댐 건설은 가난하고 헐벗었던 시절, 가난을 벗어나고자 국가가 선택했던 개발사업이다. 그 개발로 오히려 팔당은 더이상의 개발을 할 수 없게 통제됐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팔당호 수면처럼 '가만히' 두어야 하는 존재가 됐다. 그렇게 정부의 강력한 통제가 작동하는 동안 주민들은 수면 아래 숨죽여 희생을 감내해야 했고, 더이상 참을 수 없어 거리로 뛰쳐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50년이 흘렀다.50년, 그 수많은 이야기를 취재하며 중심에는 늘 팔당상수원 규제가 있었다. 상수원 인근 지역 주민과 정부가 반세기동안 대척점에 서 날카롭게 부딪힐 때, 그 빈틈을 정치권이 파고들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상황들 대부분엔 규제가 그 단서였다. 50년 이야기의 끝에 결국 '규제'를 짚어내야 하는 것도 그것이 팔당의 현재이기도 하고, 반드시 풀어내야 하는 미래이기 때문이다. # 지역 주민의 삶 피폐하게 만드는 '규제''고통 덜어주겠다' 공수표 던지는 정치권물 이용하는 수도권 눈치보며 약속 번복 ■ 규제에 또 규제… 특대고시 지정 배경은"물줄기가 같은데 왜 건너편은 규제를 풀어주고 여기는 묶어 두냐는 거지. 여기는 식당, 이발소가 다 못들어오는데 저쪽 강 건너는 건물이 막 높게 올라가거든."팔당호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잇는 남양주 조안면 주민 임춘일씨는 지역 토박이다. 그는 조안면이 속한 팔당수질보전특별대책지역 1권역에 가해지는 개발 규제를 떠올리면 부아가 치밀어오른다고 한다.임씨가 말한 1권역은 '팔당 대청호 상수원 수질보전 특별대책지역 지정 및 특별종합대책'에 명시돼있다. 특별대책지역은 물의 자정 능력 등에 따라 권역을 나누는데, 자정 능력이 낮은 1권역은 2권역보다 오염물질 배출과 토지 이용 등에 있어 더 엄격한 규제가 적용되고 관리된다.문제는 조안면과 같은 1권역에 해당하는 지역을 제외하곤 경기도, 나아가 수도권 지

  • 2500만 국민의 생명줄… 보듬은 평범한 영웅들 [수도권 운명을 닮은 '팔당' 이야기·(4)]

    2500만 국민의 생명줄… 보듬은 평범한 영웅들 [수도권 운명을 닮은 '팔당' 이야기·(4)] 지면기사

    # 댐 건설 이후 생계 이어온 백발의 팔당호 어부 1973년 당시 수몰민에 어업권… 오래된 목선 타고 고기잡이블루길 등 외래어종 '파수꾼'… 어업권 승계 불가능해 걱정오늘도 팔당호는 가을바람에 잔잔한 물결이 일렁인다. 그 풍경을 바라보자면 몹시 평화롭다. 그 평화에는 이곳을 지켜온 평범한 사람들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 팔당댐 건설 이후부터 이어온 백발의 팔당호 어부, 팔당 생태계를 연구하고 수질을 지켜내는 연구관, 또 변함없는 용수 공급을 통해 수도권 시민의 젖줄을 지키는 직업인들이 바로 그 평범한 이들이다. 그 이야기를 통해 들여다본 팔당의 50년은 곧 이들의 삶이기도 했다. 이들에게 팔당호를 지키는 일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지켜내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팔당호 1세대 어부 안호명씨윤슬이 반짝이는 여름이었다. 지난 7월15일, 광주 퇴촌면 뭍에서 3㎞ 남짓한 팔당호 중앙에 배 한 척이 떴다. 뱃머리에는 백발의 노인이 앉아있었다. 팔당호가 걸쳐있는 광주의 마지막 어부로 불리는 안호명(86)씨였다."(댐 건설 전에) 실개울이 흐르던 때엔 피라미 잡아먹고 달팽이 잡던 그런 곳이었죠. 전부 논밭이었고요. 그게 전부 댐 아래로 수몰됐어요. 땅을 많이 갖고 있던 사람은 (보상받아) 서울로 가고 나처럼 재산도 없고 땅도 많이 없는 사람들은 그때부터 이렇게 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이어나갔죠."정부는 1973년 댐을 만들면서 팔당 규제지역 수몰민 33명에게 어업권을 줬다. 안씨는 그 중 한명이다. 안씨는 댐이 생긴 후부터 팔당호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한두명 겨우 앉을 수 있는, 나무로 만든 목선이 그의 배다. 이날도 안씨는 그 오래된 목선을 타고 물살을 갈랐다."새벽 3시쯤 나가요. 전날 저녁6시쯤 쳐둔 그물을 걷으려고요. 피라미 같은 건 금방 죽거든요. (물고기를) 날씨가 더울 때는 새벽 12시쯤 나가서 그물 쳤다가 3시간 뒤에 걷어올 때도 있고요. 많이 못 잡아도 매일 그렇게 하고 있어요."그저 밥벌이가 궁해 시작한 일이었는데 안씨는 뱃일로 삼남매를 모두 키웠다. 그렇게 한평생을 살다보니 이제 뱃일

  • 수질만 챙긴 규제… 주민들 삶은 바닥 [수도권 운명을 닮은 '팔당' 이야기·(3)]

    수질만 챙긴 규제… 주민들 삶은 바닥 [수도권 운명을 닮은 '팔당' 이야기·(3)] 지면기사

    팔당호를 곁에 두고 살아온 사람들의 목소리 # 일상의 제약 참고 견뎌온 강천심씨의 분노"비 오는 날 처마 하나만 설치해도 벌금냈는데그런 곳에 골프장 들어선다니… 그것도 5개나"# 한평생 조업 해온 어부 조구봉씨의 하소연"'대한민국서 가장 못사는 동네' 먹고살기 막막장사하다 검찰조사… 10대째 바뀐 게 없는 삶"# 팔당호 '마지막 뱃사공' 이귀현씨의 그리움"두물머리~남양주 귀여리 1㎞ 뱃삯 250원 시절황포 돛단배 하나 타고 서울 오가던 기억 생생"팔당의 강산이 5번 바뀌었다. 생태계도 변하는 강산을 따라 변화했고, 또 나름은 적응했다. 하지만 팔당을 둘러싼 인간사는 그렇지 못했다. 개발과 보전이라는 깊게 팬 갈등의 골은 여전히 메워지지 않고 있다. 정부가 주도한 팔당댐 개발로 주민들은 하루 아침에 삶의 터전이 바뀌었다. 조상 대대로 이어온 땅에 평범한 삶을 영위하고 싶은 주민들의 바람은 개발 이후 무너졌다.팔당상수원 보호라는 미명 아래 팔당호 인근 7개 지역 (용인·이천·광주·여주·양평·남양주·가평) 주민들은 모든 행위에 제동이 걸렸다. 살고 있는 팔당의 땅에선 자유로운 경제활동도, 일상적 활동에도 제약이 많아졌다. 그렇게 50년이 흘렀다. 역설적이게도 많은 주민들은 팔당을 떠나지 않았다. "팔당 인접지역의 불합리한 규제를 없애야 한다"는 주민의 하소연에 고향에 대한 애틋함마저 묻어난다. 팔당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주민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였다.■ 평범한 주부가 주민 대표가 된 사연"비 오는 날 처마 하나만 설치해도 벌금을 냈어요. 그게 상수원(보호구역) 규제 지역에 사는 주민의 삶입니다. 그런 광주에 골프장이 들어온다니요. 그것도 무더기로 5개나…."대규모 골프장이라니,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광주, 그것도 팔당 상수원지역에서 살아온 강천심 특별대책지역 수질보전정책협의회 광주시대표는 상수원 인근에 대규모 골프장 5곳이 건설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싶었다. 상수원 보호구역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이 곳 주민들은 일상의 모든 행위에 제약을 받

  • [창간 79주년·각계 축사] 참언론 위상 정립한 바른 눈·귀

    [창간 79주년·각계 축사] 참언론 위상 정립한 바른 눈·귀 지면기사

    임태희 경기도 교육감 안녕하십니까. 경기도교육감 임태희입니다. 경인일보의 창간 79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울러 경인일보가 경기·인천 지역은 물론 대한민국의 언론 발전을 위해 노력하며 신뢰받는 언론으로 성장시켜 오신 홍정표 대표이사 사장님과 임직원 여러분의 노고에 큰 박수를 보내드립니다.경인일보는 늘 그래왔듯이 독자의 눈과 귀가 되어 지역 발전을 이끌어 온 경기·인천의 동반자입니다. 격변하는 시대에 맞는 심층 취재와 해설, 논평을 통해 대안을 제시하며 참 언론의 위상을 정립해 가고 있는 경인일보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앞으로도 차별화된 뉴스를 통해 독자들에게 꾸준히 사랑받는 언론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랍니다.경기도교육청은 안정적이고 질 높은 공교육 체계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선생님과 학생이 기초를 닦아가는 학교 교육을 강화하겠습니다. 아울러 교육자원을 연결해 하고 싶은 것을 해볼 수 있는 공유학교의 확대와 어떤 이유로든 학업 중단 없이 교육받을 수 있도록 하는 온라인학교를 통해 교육의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를 만들어 가겠습니다. 경기도교육청이 만들어 가는 경기교육이 대한민국 교육의 혁신과 변화를 선도할 수 있도록 경인일보의 지속적인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 [창간 79주년·각계 축사] 정확·신속 보도 '세상 바꾼 동력'

    [창간 79주년·각계 축사] 정확·신속 보도 '세상 바꾼 동력' 지면기사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미래를 향한 더 큰 도약, 경인일보 창간 79주년을 축하합니다! '경인일보' 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더불어민주당 대표 이재명입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수도권 최대 언론 '경인일보'가 올해로 창간 79주년을 맞았습니다. 이기윤 회장님과 홍정표 대표이사 사장님, 김영모 인천본사 사장님을 비롯한 모든 임직원 여러분께 축하말씀을 드립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창간된 '경인일보'는 '위국정론(爲國正論)'과 '문화창달(文化創達)'의 기치 하에 지난 79년 동안 빠르고 정확한 보도에 앞장서왔습니다. 단순히 지나쳤을지 모를 사건사고들도 '경인일보'의 지면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아 세상을 바꾸는 동력으로 작용했습니다.특히 최근 창간 79주년을 맞아 '경인일보'가 새 경영진 선임과 더불어 제2의 도약을 선포했습니다. 저널리즘의 원칙을 보다 굳건하게 정립해 우리 언론사에 또 하나의 위대한 이정표를 세워주길 기대합니다.거듭 '경인일보' 창간 79주년을 축하합니다. '경인일보'가 수도권 지역 1등 신문을 넘어 대한민국 최고 언론으로 발돋움하는 그날까지 저도 늘 관심을 가지고 응원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창간 79주년·각계 축사] 물러섬 없는 정론직필 길 응원

    [창간 79주년·각계 축사] 물러섬 없는 정론직필 길 응원 지면기사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안녕하십니까? 국민의힘 당대표 한동훈입니다. 수도권의 대표적 종합 미디어그룹 경인일보의 창간 79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경인일보는 대한민국 발전과정의 냉철한 관찰자이자 감시자로서 현대사 주요 국면을 투철한 사명감으로 기록해 왔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물러섬 없는 정론직필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특히 경인일보는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신문'이라는 기치 아래 지역 경제발전과 문화창달에 이바지하고, 각계각층의 소통과 화합을 이끄는 사명에 매진해왔습니다. 매일 각종 기사와 사설 등을 통해 국가적 사안들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일상과 밀접한 지역 민생현안들에 대해서도 심층적으로 다뤄왔고, 이는 지역 기반 매체들이 지향해야 할 모범적 언론활동의 귀감이 되어왔습니다.저 역시 정치인의 한사람으로서 경인일보의 객관적 보도와 귀한 제언에 늘 귀 기울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수도권의 민심, 각종 현안과 숙원사업의 추이를 세심히 살펴나가겠습니다.다시 한번 경인일보의 창간 79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홍정표 대표이사 사장님 이하 모든 언론인 여러분, 그리고 임직원 여러분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 [창간 79주년·각계 축사] '소외된 삶 조명' 사회귀감 행보

    [창간 79주년·각계 축사] '소외된 삶 조명' 사회귀감 행보 지면기사

    우원식 국회의장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국회의장 우원식입니다.경인일보 창간 79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홍정표 대표이사 사장님을 비롯한 언론인과 임직원 여러분 그리고 경인일보의 애독자 여러분께도 축하를 전합니다. 경인일보는 1945년 광복의 기쁨을 누리던 해 창간되어 지난 79년여간 경기 인천지역 각계각층의 삶을 담아내며 어느덧 경기·인천 지역을 대표하는 정론지로 거듭났습니다. 지역지만이 갖출 수 있는 시각으로 지역 내 소외된 곳을 비추고, 정론직필의 길을 걸어온 결과, '이달의 편집상'을 연속 11회 수상하고 한국바른언론인대상을 수상하는 등 뜻깊은 성과도 거두었습니다. 특히 경인일보를 통해 조명된 평택SPC 노동자 사망사고, GM부평노동자 보도 등 지역 내 노동자들의 삶을 조명한 행보는 제게도 큰 귀감과 울림을 주었습니다.부디, 경인일보가 앞으로도 흔들림 없이 신뢰받는 언론의 길을 걸어 오래도록 경기·인천 지역민들의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주길 바랍니다.다시 한번 창간 79주년을 축하드리며, 경인일보의 무궁한 발전과 건승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 [창간 79주년·각계 축사] 인천교육 역사 함께 쓴 동반자

    [창간 79주년·각계 축사] 인천교육 역사 함께 쓴 동반자 지면기사

    도성훈 인천광역시 교육감 오랜 시간 우리 곁에서 언론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경인일보의 창간 79주년을 인천 교육가족을 대표해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지금까지 '정론직필'의 뜻으로 인천시민과 늘 함께하며 흔들림 없이 창간 이념을 실천해온 경인일보에 박수를 보냅니다. 어려운 언론환경 속에서도 언론의 소명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시는 홍정표 대표이사 사장님과 김영모 인천본사 사장님, 임직원 여러분. 감사합니다. 또 지역 구석구석을 발로 뛰며 정확하고 공정한 보도를 위해 노력하시는 경인일보 기자님들. 더없이 감사합니다.우리 인천교육은 앞으로의 정책 방향을 "학교를 삶으로! 일상을 배움으로!"로 설정하고, 학생성공시대를 한층 더 새롭게 써내려 가고자 합니다. 인천교육 정책이 학생, 교직원, 학부모, 인천시민들에게 잘 전달될 수 있도록 경인일보의 많은 관심과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경인일보가 인천교육과 함께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인천교육이 만들어가는 열정과 감동의 현장에 늘 함께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경인일보가 전문화, 차별화된 신문이자 시민사회에 꼭 필요한 언론으로 자리하는 모습을 독자로서도 지켜보겠습니다.수도권 최고의 종합미디어 그룹으로 자리매김한 경인일보의 79주년을 다시 한번 축하드리며, 경인일보의 무궁한 발전과 건승을 기원합니다.

  • [창간 79주년·각계 축사] 300만명 인천시의 '성장 길잡이'

    [창간 79주년·각계 축사] 300만명 인천시의 '성장 길잡이' 지면기사

    유정복 인천광역시장 경인일보 창간 79주년을 300만 인천시민과 함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인천과 경기를 대표하는 언론사로서 공정보도, 정론직필이라는 언론의 사명을 다하고 계신 기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언론사의 효율 경영을 책임지고 계시는 홍정표 경인일보 대표이사 사장님과 김영모 인천본사 사장님을 비롯한 임직원 여러분께도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1945년 태동한 대중일보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경인일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지역사회 목소리를 대변하며, 공정하고 전문적인 보도로 독자들의 신뢰를 받아왔습니다. 지방자치가 오늘날 모습으로 발전하기까지 지역 언론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특히 인천시는 올해 인구 300만명을 돌파하고 지역 내 총생산 104조원, 지역 내 총소득 118조원을 달성하며 경제도시로서 새로운 인천시대 막을 열었습니다. 인천형 행정체제 개편으로 지역균형발전과 미래 행정수요에 대비하고, 정부를 움직인 저출생, 주택 정책을 선도하고 있으며, 재외동포청을 유치해 전세계 1천만 한인 네트워크를 끌어안는 다양한 성과들을 이룬 그 과정에 늘 경인일보가 등대처럼 길잡이를 해주셨습니다. 앞으로도 경인일보가 인천 발전과 대한민국 미래를 함께 만드는 동반자로서, 활발하고 건전한 소통을 이끄는 주축으로서, 인천지역 발전에 함께해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 [창간 79주년·각계 축사] 지역 소통창구 역할에 깊은 감사

    [창간 79주년·각계 축사] 지역 소통창구 역할에 깊은 감사 지면기사

    김동연 경기도지사 경인일보 창간 79주년을 1천410만 경기도민과 함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로컬 저널리즘의 역사를 써 내려가는 경기·인천지역 대표언론으로서 책임과 역할을 다하고 계신 홍정표 대표이사 사장님을 비롯한 언론인 여러분의 노고에 깊은 감사와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1945년, 해방둥이로 창간한 후 지역민들의 든든한 동반자로 자리 잡은 경인일보는 1998년 경인지역 최초로 디지털 뉴스를 선보이며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걸맞은 언론의 모습으로 변화와 혁신을 거듭했습니다. 심도 있는 탐사보도 '경인 In-Depth', 옛 지면기사를 활용하는 기획시리즈 '레트로K' 등 다양한 방법으로 독자와 소통하며 지역언론 본연의 모습도 잃지 않았습니다. 경인지역에서 가장 많은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한 결과가 바로 경인일보의 저력을 보여줍니다.경기도는 "경기도가 바뀌면 대한민국이 바뀐다"는 마음으로 경제, 기후위기, 민생 등 우리 사회가 직면한 위기를 대한민국의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전환하기 위해 큰 걸음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경기도가 열어가는 그 길에 경인일보가 비판적 감시자로서 소중한 제언을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창간 79주년·각계 축사] 날카롭고 올곧은 '사회 감시자'

    [창간 79주년·각계 축사] 날카롭고 올곧은 '사회 감시자' 지면기사

    김진경 경기도의회 의장 경인일보 애독자 여러분, 그리고 임직원 여러분 반갑습니다. 경기도의회 의장 김진경입니다. 경인일보의 창간 79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갈수록 복잡다단해지는 언론 환경 속에서도 경기·인천 지역의 다양한 소식을 진실하고 공정하게 전해 주신 홍정표 대표이사 사장님을 비롯한 경인일보 임직원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지난 79년 동안 경인일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와 독자들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민의를 대변해 왔습니다. 아울러 올곧은 감시와 비판으로 시대의 문제를 지적하고, 효율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지역의 발전을 이끌어 왔습니다. 언론은 사회의 성장과 늘 함께 발을 맞추어 왔습니다. 때로는 날카롭게, 때로는 따뜻하게 지역 곳곳을 조명해 주신 언론의 노력 덕분에 우리 사회가 지속해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경인일보가 지난 79년이라는 시간 동안 경기도의 눈부신 발전을 함께해 왔듯, 앞으로 더 오랜 세월 도민의 곁에서 경기도의 더 나은 내일을 위해 힘써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또한 도민의 대의기관인 경기도의회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과 격려를 통해 더욱 강화된 자치분권과 지방자치의 길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창간 79주년·각계 축사] 현안 발굴·불공정 타파 최선을

    [창간 79주년·각계 축사] 현안 발굴·불공정 타파 최선을 지면기사

    정해권 인천광역시의회 의장 경인지역 최고의 대표 언론사로 정론직필의 길을 걸어온 경인일보의 창간 79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1945년 창간한 대중일보의 뿌리를 이어받은 경인일보는 79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국익을 최우선하는 신문' '각계각층의 소통과 화합을 이끌어가는 신문' '지역 경제발전과 문화 창달에 이바지하는 신문'을 표방하며 독자의 곁에서 정통 언론의 길을 걸어왔고, 이제는 수도권 최고의 종합미디어 그룹으로 성장했습니다. 또한 경인일보는 발로 뛰는 지역 밀착 보도를 통해 한국기자상, 편집기자상 등 각종 기자상을 수상했으며, 인천에 많은 애정을 갖고 송도국제마라톤대회, 푸른인천글쓰기대회, 바다그리기대회 등을 개최하여 지역사회에 공헌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바른 눈과 귀를 통해 지역 현안 발굴과 불공정·불합리 타파에 힘써 주시길 바라며, 열린 생각과 열린 마음으로 독자들과 지역 문제 등을 함께 고민해 주시길 바랍니다.인천광역시의회는 항상 경인일보를 응원하며 '함께하는 의정, 행복한 시민, 더 나은 내일'을 위해 항상 공부하고 연구하며 더 나은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의정활동으로 전국 최고의 광역의회를 만들어 나가겠습니다.경인일보의 창간 79주년을 다시 한번 축하드리며,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과 임직원 여러분의 가정에 건강과 행운이 함께 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 [창간 79주년] 30년 흐른 '송도 개척 프로젝트'… 인천의 꿈은 멈추지 않는다

    [창간 79주년] 30년 흐른 '송도 개척 프로젝트'… 인천의 꿈은 멈추지 않는다 지면기사

    '송도 매립' 의미와 전망 지자체의 '자발적 시도' 드문 일동북아 국제비즈니스 허브 꿈꿔새로운 전략·실행에 미래 달려꼭 30년 전 '인천 송도 앞바다 매립 신도시 기공식'이 열린 1994년 9월10일. 김영삼 대통령과 최기선 인천시장 등 내빈들이 공사 시작을 알리는 버튼을 눌렀다. 연기가 하늘로 솟아오르고 행사장에는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인천의 꿈이 현실로 발을 들이는 순간이었다. 최 전 시장은 훗날 이날을 '인천의 새로운 역사가 열리는 날'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전망이 탄생하는 날'로 자서전에 기록한다.송도 매립은 새 역사를 쓰는 도전이었다. DJ정부 시절 청와대 건설교통비서관을 역임한 이인석 전 인천발전연구원장은 "돌이켜 보면 인천이 처음으로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 했던 첫 프로젝트였다"면서 "송도 매립 이전의 인천은 중앙정부가 내려주는 계획을 실행하는 손과 발 역할에 불과했다"고 말했다.지방자치단체가 스스로 무엇을 해보겠다는 시도는 드문 일이었다. 주안·부평·남동국가산업단지 역시 인천이 생각해낸 것이 아니었다. 송도 개발이 순탄할 리 만무했다. 정부의 수도권 억제 정책과 맞물려 어려움을 겪었다. '미래를 차단당한 도시 인천'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꾸겠다는 비전으로 정부를 설득했다. '지방분권화' '세계화'라는 외부 요인도 작용했다. 인천국제공항, 송도신도시 등을 아우르는 동북아 국제비즈니스 중심도시 프로젝트를 추진한 결과 현재에 이른다. 인천은 송도 매립을 기점으로 도시계획·산업·환경 측면에서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됐다. 2001년 인천공항 개항은 송도를 비롯해 청라와 영종이 2003년 국내 1호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되는 기회를 제공했다. 송도·청라·영종 개발은 인천의 도심을 다핵(多核) 구조로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산업적 측면에서 보면, 제조업 중심 도시에서 벗어나 글로벌 물류·서비스 허브 도시로 변모했다. 특히 셀트리온, 삼성바이오로직스 등 글로벌 기업 유치는 바이오 산업을 육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하지만 송도 개발의 이면에는 그늘이 존

  • [창간 79주년] 수도권 운명을 닮은 '팔당' 이야기 | "국가 발전" 외칠 때 생계 잃고 터전 떠난 원주민

    [창간 79주년] 수도권 운명을 닮은 '팔당' 이야기 | "국가 발전" 외칠 때 생계 잃고 터전 떠난 원주민 지면기사

    '개발과 보전' 가치로 본 50년 역사 '한강의 기적' 이루기 위해서는 팔당댐 건설 필연적수력발전소 유리한 지형… 수자원도 풍부한 최적지자본·기술 부족한 때, 프랑스 도움받아 1973년 완공이면엔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 수몰된 이들의 아픔도"필요에 의해 만들긴 했지만 형벌같은 비양심의 호수"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기 위해, 팔당댐 건설은 필연적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전후복구를 해야 했다. 숱한 전쟁의 역사에서 보듯 내전이 일어난 땅은 상흔을 씻어내기 어렵다. 전쟁이 남긴 굶주림, 가난을 벗어나려 서울을 위시한 수도권 곳곳에서 각종 산업과 개발이 일어났고 인재가 몰려들었다. 기반이 필요했다. 전기와 물이 절실했고 팔당은 이를 충족하는 매력적인 지점이었다.■ 가난한 시절, 경제개발을 위해 만들어진 팔당댐"1965년부터 1978년까지, 경제개발을 해야 되는 시기였어요. 주로 한강수계 쪽에 전력 공급을 목적으로 한 발전용 댐들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준공이 됐습니다. 그 중에 팔당수력발전소는 서울 중심부, 시청을 중심으로 동북방으로 35㎞ 지점에 설치됐고 잘 알다시피 팔당댐 상류 7㎞ 위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 양수리에서 물이 합쳐져 7㎞ 하류에 연결됐죠. 그게 팔당수력이 위치한 자리입니다."윤준희 팔당수력발전소장은 팔당댐 건설의 비하인드를 이렇게 설명했다."팔당수력은 좌측에 예봉산이 있고 우측에 검단산이 있습니다. 두개의 산이 만나 골짜기가 형성되고 암반이 있어 수력발전소를 건설하기에 매우 유리한 지형이었죠. 그리고 남한강과 북한강 물이 합류되며 수자원이 풍부했습니다. 이렇게 지리적 위치여건이 좋아서 최적지로 선정할 수 있었습니다."그러나 이를 구상하던 1960년대 우리는 지독하게 가난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수도권을 책임지는 수력발전소 건설지로 팔당을 집어내고 설계한 것도 프랑스의 도움이 컸다."한국전력공사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조선전업이라는 회사가 있었습니다. 조선전업에서 당시 주한프랑스 대사에 한강계 수력발전소 건설 지점을 조사

  • [창간 79주년] 한강의 기적 마중물 '팔당' 50년史 빛과 그림자

    [창간 79주년] 한강의 기적 마중물 '팔당' 50년史 빛과 그림자 지면기사

    지역민과 함께… 어둠을 밝히는 희망으로 먹고 사는 문제 해결 위해 세운 댐인공의 힘에 180도 달라진 생태계지금도 개발-보전 가치 놓고 충돌 "인류의 역사는 대자연에 도전하는 인간 의지의 승리의 기록이며, 팔당댐 건설은 인간 의지의 승리를 증명하는 것입니다."1974년 5월 24일 팔당수력발전소 준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말했다. 한강수계를 가로질러 거대한 물줄기를 막아선, 콘크리트 '성벽'을 바라보며 이것은 '인간의 승리'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애초에 팔당댐의 운명은 정해졌다. 자연으로부터 승리를 거머쥔 인간에게 유용하게 활용돼야만 하는 숙명을 타고 났다.팔당댐을 비롯해 당시 박정희 정부는 1980년대 초까지 전국에 8개 댐 준공을 목표로 건설사업에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러한 댐 건설을 두고 언론에선 "80년대 초에 이룩할 중화학 공업 시대를 대비한 에너지 확보가 그 목적"이라는 정부의 의지를 전했다. 그만큼 목표가 분명했다. 일제치하와 한국전쟁, 반세기에 가깝게 찢기고 부서진 땅 위에 반드시 발전의 초석을 다지겠다는 의지였다. 모두가 헐벗던 시절, 먹고 사는 문제조차 해결이 쉽지 않았던 폐허의 땅에서 서울 한강을 배후로 댐을 건설하는 일은 그래서 인간의지의 승리라 표현할 수 있었다. 그렇게 50년이 흘렀다. 1974년에 팔당댐이 준공되고 자연스럽게 팔당호가 조성됐다. 이후로 2024년 현재까지, '팔당'은 수도권의 젖줄로 줄곧 기능해왔다.이렇게 부여된 숙명 탓에 팔당은 늘 외줄타기다. 국가 산업 발전에 기여해야 하면서도 깨끗하게 환경을 보전해야 하는, 모순된 두가지 조건이 늘 따라붙었다. 애초에 백두대간에서 흘러나온 물길을 막은 건 인간이다. 인공의 힘으로 자연을 개발했고 생태계는 180도 달라진 환경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쉽게 말하면 흐르는 물이 가진 속성에서 살았던 쉬리가 더 이상 살 수 없게 됐고, 고인 물에 사는 잉어가 살게 됐다. 팔당의 사람도 마찬가지다. 조상 대대로 뿌리내린 마을이 한순간에 수몰됐다. 국가발전이라는 명제

  • [창간 79주년] 수도권 운명을 닮은 '팔당' 이야기 | "경제 개발" 번질 때, 생태계 변화로 사라진 물고기

    [창간 79주년] 수도권 운명을 닮은 '팔당' 이야기 | "경제 개발" 번질 때, 생태계 변화로 사라진 물고기 지면기사

    세월 흘러 '인공호' 품은 자연 댐 건설로 상하류 오간 여울성 어종 살기 어려워지고1970년대엔 어업자원 도입 이유 배스·블루길 등 방류중하류 유속 느린 물에서 살던 토종 물고기 생존 위협여전히 다양한 어종 있는 건 조화 이루려는 생태계 힘"개발" vs "보전" 난제… 인간도 균형있게 풀어나가야 인간의 개입으로 조성된 '인공호수' 팔당호는 팔당의 생태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산에서 강으로, 줄기를 따라 흐르던 물이 가두어지면서 기존에 살던 생물이 사라지고, 살지 않던 새로운 생물이 서식하기 시작했다. 혹자는 그것을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 '파괴됐다'고 비관하지만, 그렇게 이미 50년이 흘렀다. 가둬졌을지라도, 그 환경에 걸맞은 생태계가 자리를 잡았고 나름의 질서로 변화에 적응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비록 인위적인 개발이지만 지난 50년, 자연은 인공호조차 품어냈다.■ 수중생태계 변화는팔당댐이 건설되고 가장 큰 변화를 맞이한 건 수중생태계다. 댐은 물고기에게 일종의 '벽'이 됐다. 본래 상하류 물길을 오가던 여울성 어종은 이곳에서 살기가 어려워졌다.수몰되기 전 팔당에 살던 여울성 어종은 현재도 새로운 물이 유입되는 팔당호 상류 지점에서만 살펴볼 수 있다. 팔당호로 유입되는 조정천과 호수가 만나는 지점이 그 예다. 이곳은 대부분 수심이 1m 이내다. 유속이 빠른 편이어서 하천 바닥에는 성인 머리 크기 정도 되는 호박돌이나 주먹돌이 깔려있다. 수중에 녹아있는 산소(용존 산소)가 풍부하다는 특성도 있다.상류에서 종종 보이는 어종은 쉬리, 참갈겨니, 돌마자, 참종개 등이다. 이들은 대체로 크기가 작은 편으로 큰 돌 사이에 숨어 지내는 경우가 많다.상류를 벗어나 중·하류, 본격적인 팔당호에 들어서면 댐 건설 이후 바뀐 수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다. 주로 유속이 느린 물에서 사는 정수성 어종이 서식한다. 그중에서도 잉어와 붕어가 많아졌다. 변명섭 한강물환경연구소 환경연구관은 '경제성'을 그 이유로 꼽았다."특히 정수성 어종 중에서도 붕어, 잉어가 많은 건 한국에서

  • [창간 79주년] 불가능했던 송도 매립, 1994년 역사가 뒤바뀌다

    [창간 79주년] 불가능했던 송도 매립, 1994년 역사가 뒤바뀌다 지면기사

    정부 '수도권 억제 정책' 극복 관건대한민국 미래 바꾼다는 명분 설득1994년 9월 10일, 대통령 참석 첫 삽 초고층 아파트 단지와 부러울 것 없는 공원, 유수의 첨단 바이오 기업과 국내외 유명 대학이 들어선 송도국제도시. 이국적인 풍경을 자랑하는 이 도시가 불과 삼십여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바닷물이 빠지면 시커먼 갯벌이 고스란히 드러나던 바다였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바다를 메워 지도를 바꾸는 일이었다. 이렇게 새로운 도시를 만드는 구상은 당시 기준으로 '전무후무한 역사(役事)'에 가까웠다. 1994년 9월10일 첫 삽을 뜨기 전까지 이 일은 '무모한 도전' 혹은 '가능성 제로'의 일로 치부됐다.정부의 수도권 억제정책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수도권 인구 집중을 해소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정부 방침대로라면 인천은 성장해선 안되는 도시였다. 정부 투자는 물론 민간의 투자 또한 불가능했다.1986년 인천시 도시계획국장을 맡아 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박연수 전 소방방재청장이 "인천은 미래를 차단당한 도시였다"고 설명한 이유다. 인천의 발전, 인천의 확장을 내세워선 안됐다. 정부 정책에 반기를 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인천이 아닌 대한민국의 지도와 미래를 바꾸겠다는 명분으로 정권을 설득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인천국제공항과 송도신도시 등을 아우르는 '동북아국제비즈니스 중심도시 프로젝트(안)'(1986)다. 홍콩·싱가포르를 능가하는 아시아 비즈니스 허브 역할을 할 '최첨단 정보화 신도시'를 만들고, 이 도시와 전 세계를 연결하는 첨단 허브 공항을 확보하면서, 국제공항이 입지한 영종·용유·무의도에 매력적인 종합 관광 휴양단지를 조성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매번 인천의 구상을 제대로 경청하지 않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설득했다. 전두환·노태우·김영삼 대통령 등이 이 계획을 보고 받았다. 1986년부터 1994년까지 박배근(3대)·이재창(4대)·심재홍(5대)·박종우(6대)·최기선(7대) 등의 관선 시장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이른 아침부터

  • [창간 79주년] '송도' 이야기… 눈부신 발전 | 물류·첨단산업 부상… 지각변동 이끈 '트라이 포트'

    [창간 79주년] '송도' 이야기… 눈부신 발전 | 물류·첨단산업 부상… 지각변동 이끈 '트라이 포트' 지면기사

    1990년 '영종도 신공항 계획' 탄력'공항·항만·국제도시' 연계 개발'한국형 실리콘밸리' 목표로 출발2003년 국내 첫 경제자유구역 지정전통제조업 벗어나 지역발전 견인운수·창고업 등 서비스 비중 늘고셀트리온·삼바 등 바이오 급성장입주기업 2천여개·종사자 6만여명송도 매립이 시작된 이후 30년간 인천은 산업구조의 대전환을 겪었다. 공항과 항만, 송도국제도시로 이어지는 '트라이 포트' 전략에 기반해 비약적 성장을 이뤘다. 매립으로 인한 도시 면적 증가와 함께 전통 제조업에서 벗어난 첨단산업 재편, 인천국제공항과 인천항에 의한 물류업 확대 등이 맞물리면서 급격한 팽창을 이뤘고 대한민국 제2의 도시로 거듭났다.■ 제조업 중심 도시에서 동북아 물류 허브로인천의 산업은 1962년 정부 주도로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힘입어 성장했다. 1965년 제4단지가 인천 부평에 만들어졌고, 이어 1969~1973년 제5·6단지가 주안에 들어섰다. 이곳이 현재의 부평·주안국가산업단지다. 인천 제조업체는 1970년 580개에서 1981년 1천824개로 대폭 늘며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위주로 전환됐다. 1985년에는 전국 최대 규모 중소기업 전용 산업단지인 남동공단이 인천에 조성되며 제조업 기반이 확충됐다. 1986년부터 1990년까지 인천의 총부가가치는 12조4천773억원에서 20조7천719억원으로 66.5%의 성장률을 보였다. 1990년대 들어서는 인천의 산업 성장이 둔화되기 시작했다. 제조업의 총부가가치 비중이 줄었고, 제조업과 비슷한 수준이었던 서비스업은 비중이 늘어났다.인천의 마지막 관선 시장이자 초대 민선 시장인 최기선 인천시장은 1993년 인천국제공항(Air port), 인천항(Sea port), 송도정보화신도시(Tele port)를 유기적 연계한 트라이 포트(Tri port)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처음 내놨다. 인천을 동북아 물류 정보의 중심 도시로 만들겠다는 비전이었다. 1990년 확정된 영종도 신공항 계획과 함께 송도 매립이 추진력을 얻었다. 1994년 9월 10일 '송도해상신도시'를

  • [창간 79주년] '송도' 이야기… 성장의 그늘 | '자연'과 바꾼 개발… 낙수 대신 빨대 '불편한 진실'

    [창간 79주년] '송도' 이야기… 성장의 그늘 | '자연'과 바꾼 개발… 낙수 대신 빨대 '불편한 진실' 지면기사

    과거 갯벌 서해 대표 황금어장 자랑 매립계획 17.7㎢… 점점 커져 3배로남은 부분 6.11㎢, 람사르습지 지정배곧대교 등 개발로 다시 위기 직면"갯벌은 세계가 인정하는 자연유산"인천 전체 개발효과 기대 어긋나수익성 확보 위해 아파트 들어서외부보다 내부 인구 유입 더 많아신·구도심간 격차 극대화 부작용송도갯벌을 매립한 인천이 경제자유구역을 중심으로 신성장산업 거점과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얻으면서 치른 대가는 가볍지 않았다. 바다를 메우면서 천혜의 갯벌이 사라졌고, '빨대효과'로 신·구도심 간 균형이 무너졌다. ■ '빌딩 숲' 이전… '천혜의 자연' 있었다과거 송도갯벌은 인천 서해 대표 갯벌로 '황금어장'으로 불렸다. 송도(연수구 옥련동)~척천(연수구 청학동)~동막(연수구 동춘동)~고잔(남동구 고잔동)~소래(남동구 논현동) 등 어촌계가 어업활동을 활발히 벌였다. 1970년대 대규모 조개 양식장으로 개발돼 백합과 가무락, 바지락, 동죽조개, 굴 등 패류가 가득했다. 1980년대 말까지 국내에서 생산되는 동죽조개의 90%는 송도갯벌에서 나왔을 정도다. 뻘꽃게를 비롯해 민어와 농어 등 다양한 어종도 송도갯벌에 서식했다. 3대째 송도갯벌에서 조업하고 있는 이동우(73) 척천어촌계장은 과거 풍요로웠던 송도갯벌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동우 계장은 "옛날엔 수백명이 넘는 어민들이 경운기 20여대씩을 끌고 들어가서 조업하곤 했다. 그렇게 (송도갯벌에) 나가기만 하면 돈이 벌렸다"며 "백합, 모시조개, 바지락, 소라, 낙지 등 안 나오는 게 없었다"고 회상했다.1994년 시작된 송도해상신도시 개발로 인해 송도갯벌은 점차 사라졌다. 당초 송도갯벌은 17.7㎢ 가 매립될 예정이었지만 송도국제도시가 2003년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되면서 규모는 점점 커졌다. 결국 여의도(2.9㎢)의 약 18배 규모인 53.45㎢ 가량이 매립돼 땅으로 변했다.이동우 어촌계장은 "어패류의 서식지가 다 파괴됐다. 송도갯벌을 자연환경 그대로 뒀더라면 환경이 어땠을지 종종 생각한다"고 말했다.인

  • [창간 79주년] 어긋난 동북아 비즈니스 허브… 송도국제도시, 다시 꿈꾼다

    [창간 79주년] 어긋난 동북아 비즈니스 허브… 송도국제도시, 다시 꿈꾼다 지면기사

    '동북아비즈니스 허브' 꿈꾼 초기 구상"아파트숲… 공항 100점, 송도는 50점""남은 땅 어떻게 쓰느냐에 미래 달렸다" 공항과 항만, 송도국제도시로 이어지는 '트라이 포트' 전략은 인천이 동북아 중심도시로 향하는 길이었다. 아시아의 중심공항(air-port), 황해의 중심항만(sea-port), 국제금융·정보통신 등이 결합된 텔레포트(tele-port)라는 3축을 토대로 한 발전상을 인천은 꿈꿨다.송도매립 30년이 지난 현재의 송도는 과거 꿈꾸던 모습과 얼마나 근접했을까. 송도는 여느 신도시처럼 대규모 아파트를 짓기 위한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베드타운은 애초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인천 세계화 전략의 핵심은 '텔레포트'로 요약되는 동북아시아의 비즈니스 허브였다.하지만 지금 송도를 두고 '송도매립 초기 기획자'였던 박연수 전 소방방재청장은 '절반의 성공'이라고 말한다. 그는 "인천공항이 100점이라고 하면, 송도는 50점밖에 줄 수가 없다. 아파트숲처럼 되어 버렸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않았다. 인천시는 송도에 미국의 실리콘밸리와 같은 정보화 신도시를 조성하려 했다. 이른바 '송도미디어밸리'였다. 1995년 12월 김영삼 정부의 정보화추진분과위원회는 정보지식산업단지 조성을 위한 사업주체로 삼보컴퓨터 이용태 회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미디어밸리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인천 송도신도시를 최적지로 선정했다. 1997년 인천시와 추진위는 공동 추진을 위해 기본 합의서를 체결한다. 하지만 투자 유치와 자본 조달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결국 이 프로젝트는 2000년 중단됐다.송도매립 초기단계부터 공직자로 참여한 윤석윤 전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차장 또한 지금의 송도 모습을 아쉬워한다. 그는 "베드타운이 아닌 동북아 중심도시, 아시아 비즈니스 허브를 꿈꿨다"면서 "공장과 아파트 만은 피하려 했다. 땅장사와는 달라야 했는데, 일반 신도시와 다른 게 하나도 없어 제일 아쉽다"고 말했다.희망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이 송도의 밑그림을 그린 주역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