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외국어·가곡등 70여개 강좌 운영
‘배움의 재미’ 틀에 박힌 일상 뒤바꿔
여가시설·식당도 갖춰 ‘원스톱 복지’


지난 목요일 오후 구리 시내 중심가 한 강의실. 머리 희끗희끗한 학생들이 연방 호기심 어린 탄성을 내뱉는다. PC 모니터와 강사를 번갈아 보며 배우던 것은 이미지 편집 도구인 포토스케이프였다.

“이봐 없어지잖아. 세 번만 하면 없어진다니깐”, “우와 커졌어!” 거스를 수 없는 시대 흐름 속에 더러 무시당했을 이들의 반짝이는 눈빛에 강단의 선생님 또한 미소를 머금고 의욕을 부채질했다.

연간 1만여명의 노인이 ‘열공(열심히 공부하다)’에 빠진다는 이곳은 유례를 찾기 힘든 다양한 교과과정과 복지혜택을 원스톱 서비스하는 구리시 여성노인회관이다.

#젊은이들 부럽지 않은 우리만의 잉글리시

구리시에 사는 이정림(80·여)씨는 고령의 나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세련된 용모와 말투로 종종 뭇 할머니(?)들의 부러움을 산다.

이씨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일주일에 두 번은 꼭 구리시 여성노인회관을 찾는다. 영어회화 고급반 수업을 듣기 위해서다. 초보단계에서 시작해 벌써 5년째 영어공부에 전념한 결과, 매년 자녀를 만나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갈 때마다 불편함이 부쩍 줄었다.

지난 2009년부터 회관의 영어프로그램을 책임져온 박성길(66) 강사는 원래 전 세계를 누비던 종합무역상사맨이었다. 런던 주재 시절 수많은 외국인과의 업무에서 익힌 고급영어가 실전 중심 교육 프로그램을 짜는 데 밑거름이 됐다.

노인 학생들이 처음 수강하면 박 강사는 영어 실력이 빨리 늘기를 기대하지 않고 이문화(異文化)를 이해시키려 한다. 그래야만 외국과 외국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의 영어강좌는 회관 노인대상강좌 가운데서도 우수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생활영어 위주의 문법교육으로 브로큰잉글리시부터 교정한 뒤 배운 실력을 현장에서 손실 없이 활용할 수 있도록 오감교육을 추구한다.

영어로 한 주간의 일기를 발표해 질문을 주고받는다거나, 팝송을 통해 흥미를 유도하는 식이다. 어려운 발음은 약어까지 곁들여 설명한다.

회관 관계자는 “영어강좌에는 은퇴를 앞둔 공직자들의 관심이 특히 많다”며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인생 2막이 입소문을 타면서 이따금 젊은층이 수강문의를 해올 때도 있다”고 전했다.

#한 곡의 동요가 인생 180도 달라지게 해

83세 동갑내기인 차상용·유계정 할머니는 10년 전만 해도 각자의 집에서 쓸쓸히 시간을 보내던 평범한 노인이었다. 노인정 나들이나 TV 시청이 소일거리의 전부였던 두 할머니의 일상은 그 세대의 전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변의 권유로 회관에 컴퓨터를 배우러 갔다가 여생이 완전히 달라졌다. 고교 음악교사 출신인 컴퓨터 강사가 갑자기 동요 ‘나비야’를 부르자고 제안한 것이 발단이었다.

강사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 모두 무언가에 홀린 듯 열정적으로 박수를 치며 동요에 몰입했고, 한 곡 두 곡 더 부르다가 아예 가곡반을 개설했다. 구성원은 컴퓨터반에서 그대로 옮겨왔다. 구리시 여성노인회관의 유연한 대처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가곡반에는 현재 60여명의 할머니들이 매주 수요일 화음을 맞춘다. 수업 한 시간 전에 이미 자리가 차 있다. 할머니들은 “우리는 노래를 잘 하는 것이 아니고 노래를 듣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입을 모은다.

차상용 할머니는 “우리 나이에 속 터놓고 얘기할 친구가 어디 있겠느냐. 평소에도 집에서 가곡을 흥얼거리며 수요일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활짝 웃었다. 또 유계정 할머니는 “다리가 아프거나 머리가 아파도 가곡반에만 오면 씻은 듯이 없어진다”면서 우울증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고 소개했다.

가곡반은 구리시의 각종 행사는 물론, 대외 합창 경연대회를 다니며 은빛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노인들 도외시하면 우리 미래도 없어

구리시 여성노인회관은 사통팔달 한 장소에서 양질의 교육과 복지가 동시에 이뤄진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노인들의 여가라고 하면 흔히 게이트볼이나 장기·화투판 정도를 떠올리게 마련. 하지만 구리시는 이들을 위해 당구대와 탁구대를 마련하고, 영어와 중국어를 가르친다. 넓은 공간에서 에어로빅, 요가, 노래교실이 열리는 동안 한쪽에서는 블로그를 제작하고 커피를 내린다. 이렇게 운영되는 강좌가 70여개에 달한다.

모든 강좌는 4개월 1만원의 가격에 제공된다. 대부분의 지자체 노인강좌 수강료가 월 1만5천원선에 형성돼 있으니 매우 저렴한 편이다.

경의중앙선 구리역사 바로 앞에 위치한 회관 건물에는 목욕탕과 이·미용실, 식당이 갖춰져 있다. 노인들의 자존감을 지켜주고자 1천원의 동일요금을 받지만 사실상 무료나 다름없다. 도서와 안마기 등을 갖춘 1층 로비는 자연스럽게 혹서·혹한기 노인들의 쉼터가 된다.

이처럼 회관이 노인들의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한 데 대해 권용덕 총괄팀장은 “주민자치센터의 노인프로그램은 아무래도 미흡할 수밖에 없어 시는 2004년 개관 이래 회관의 전문성과 편의성 확보에 주력해왔다”고 말했다.

박영순 구리시장은 “어르신들을 도외시하면 우리의 미래도 없다”면서 조만간 여성회관을 분리, 노인회관만의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구리/김우성기자 wskim@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