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곁으로 다가온 예닐곱살 계집아이 "뭘 달라는 것이겠지…"
털린 줄 알았던 바지주머니에서 나온 붉디붉은 부겐빌레아 꽃잎 "이런~"
인도양 '노예의 섬' 잔지바르에서 만난 다리가 불편한 소년
비루한 구걸이 아닌 당당한 흥정 "예스, 아임 해피" 긴 여운


구슬목걸이에 나풀거리는 꽃무늬 블라우스를 보면 계집아이가 분명한데, 마을 남자들이 막대기를 들고 겅중겅중 하늘로 뛰어오르며 마사이 춤을 추고 돌아간 후였다.
안개처럼 허공을 채운 사바나의 흙먼지 속에서 꿈인 듯 생시인 듯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진원을 찾아가니 예닐곱 살쯤 된 계집아이다. 그 노래, 마사이 동요였는지 연가였는지 모르지만 들릴 듯 말 듯 내 귀를 파고들던 가늘고 여린 휘파람 소리.
다음 날, 도무지 낯선 여행자들의 호기심 따윈 상관없어 보이는 아이가 슬며시 내 곁으로 다가왔다. 뒤로 감춘 오른손에 신경이 쓰였다.

'보나마나 뭘 달라는 것이겠지' 나는 특별히 이 아이에게 마음을 쓰지 못한 채 몇몇 여행자들 속으로 묻혀갔고 그런 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아이가 종종걸음으로 쫓아오자 뭔가를 눈치챘는지 다른 아이들도 우르르 따라왔다.

대기해 있던 차에 오르는 순간 다급해진 아이가 내 바지주머니에 뭔가 슬쩍 하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짓이야!" 주머니가 비어있다는 걸 안 나는 소리를 지르며 아이를 쏘아보았고 아이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나를 피했다.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바지를 벗는데 흰 침대시트 위로 뭔가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이런! 붉디붉은 부겐빌레아 꽃잎이었다. 왈칵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그날 밤 나는 아이의 진심을 몰라준 내가 너무 미워 이불 속에서 조금 길게 울었다.

*당신 뜻대로
탄자니아, 다르 에스 살렘에서 대형페리로 3시간쯤 달려 인도양 서쪽에 위치한 노예의 섬 잔지바르에 도착한 날은 하늘이 거짓말처럼 파랬다. 배에서 내리자 마중이라도 나온 듯 꽃을 든 무슬림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많은 사람 속에서 소년과 눈이 마주친 건 우연이었을까. 이때다 싶은지 흰 치아를 드러내고 꽃을 흔들며 다가오는 소년은 다리가 불편했고 예상대로 꽃을 내밀었다.

묻지 않아도 안다. 그 섬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것이고, 그 의미로 꽃을 사라는 것이겠지. 나는 방금 도착해 숙소를 찾는 일이 우선이라 꽃을 살 여유가 없다는 걸 소년이 모를 리 없지만 그는 미소로 일관했고 집요하게 설득했다.
쉬어가려고 좁은 골목에 배낭을 내려놓자 이때다 싶은지 소년의 얼굴이 환해졌다. 나는 끝내 꽃값을 묻지 않았다. 물어보나 마나다. 꽃값은 'as you like it(당신 뜻대로)'일 것이다.

소년은 나 같은 여행자가 가장 관대해지는 날이 새로운 여행지의 도착 첫날과 마지막 날이란 걸 알고 있었던 걸까. 넓은 나뭇잎으로 작은 꽃송이를 감싸듯한 꽃은 신부의 부케를 연상하게 했다.
불편한 다리를 끌고 숲을 헤치며 꽃잎을 모아 꽃다발을 만들었을 소년, 주인을 만나지 못하면 시들 꽃이지만 주인을 만나면 가족들에게 웃음이 되는 꽃, 그러니까 소년에겐 꿈이 되고 희망이 되는 꽃, 더위를 식히며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자신이 왜 그곳에 있는 지를 소년은 잊지 않았다.
"이 꽃 예쁘죠? 그러니까 팔아주세요. 난 이 꽃을 팔아야 해요. 네? 네?" 숨넘어가는 소년의 설득에 마지못해 협상을 시작했다.

그리고 토닥토닥 어깨를 도닥여주며 평탄치 만은 않을 소년의 앞날을 격려해주었다.
신은 실수하지 않는다지만 소년의 다리는 신의 실수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소년이 믿음직스러웠던 건 보통 아이라면 불편한 다리를 탓하며 집이나 지켰을 텐데 비루한 구걸이 아니라 당당하고 적극적인 태도며 무엇보다 밝은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을 만큼 치른 대가가 꽃값인지 미소 값인지는 알 수 없으나 꽃이든 미소든 어느 것 하나는 그저 얻은 것 같아 무거운 배낭도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받은 돈을 동그랗게 말아 쥐고 멀어져가던 소년이 입을 귀에 걸고 손을 흔들 때 물었다. "아 유 해피?" "예스, 예스, 아임 해피" 예스를 반복하던 소년의 대답이 긴 여운을 남겼다.

잠시 후 소년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후 크리스털 같은 그의 웃음소리가 배낭에 올려둔 꽃다발 주변을 맴도는 환청을 들었던 것도 같다. 집을 떠난 지 여러 날, 나는 그 머나먼 아프리카 섬에서 두고 온 내 아이를 그리워하며 꽃다발 하나로 가뿐한 신고식을 마쳤다.
탄자니아는 내가 꿈꾸는 다양한 보물을 가진 나라다. 다음 코스가 바로 킬리만자로 산과 동물들의 천국 세렝게티 초원이라는 걸 상상하면 벌써 가슴이 뛴다. 나는 내가 꿈꾸던 야생의 삶을 텐트를 치고 밤을 보내며 생생한 관찰을 하게 될 것이다. 수많은 누떼와 얼룩말, 사자, 치타, 코끼리가 나를 반겨줄 것이다.
/김인자(경인일보 신춘문예 출신 시인·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