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만세운동이 한창이던 때, 수천의 조선인들이 대한의 독립을 외치며 뉴욕 거리를 활보했다. 그래서 한인 유학생의 허브였던 컬럼비아대학교 인터내셔널 하우스에는 여전히 성조기 옆에 태극기가 당당히 펄럭인다.
뉴욕은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3·1 만세운동 유적지가 살아 숨쉬는 땅이다. 3·1 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된 '동경 2·8 학생독립선언'은 뉴욕 맥알핀 호텔에서 열린 '소약속국동맹회의'의 영향을 받았다.
이 회의에서 일본과 조선 합병 무효를 주장하는 결의문이 채택됐고 이 소식이 적국의 땅, 동경(도쿄)에 전해지며 유학생들의 심장을 뛰게 했다.
뉴욕에서의 외침이 도화선이 된 3·1 만세운동은 들불처럼 조선 팔도를 뒤덮었고, 다시 바다를 건너 미국 뉴욕 한복판에서 한인들이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국내 3·1 만세운동을 기점으로 상하이, 연해주, 만주 등 해외 지역에서 적극적인 독립운동이 시작됐고, 미국 내에서도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특히 뉴욕은 한인 유학생을 중심으로 '조선문화회' 등 우리의 것을 지키기 위한 문화독립운동을 전개했고 3·1운동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 독립정신을 구현한다는 취지로 1928년 6월 뉴욕 최초의 한글신문인 '3·1 신보'를 발행하기도 했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