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산벌'은 욕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정서를 정화해 정신 건강에 도움을 준다는 여러 정신분석학자의 주장을 유감없이 보여준 영화다. 보는 내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언어로 말싸움하는 영화를 만들 생각을 한 이준익 감독의 천재성에 혀를 내둘렀다. 영화 한 편으로 묵은 체증이 '훅~'날아가는 것도 드문 경험이다. 물론 싸우는 사람들은 고역이겠지만, 말싸움은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와 대리만족을 준다는 것을 이 감독은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모든 싸움은 처음엔 말로 시작한다. 먼저 누군가 비아냥거린다. 물론 그 말속에는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들어있다. 말을 듣고 상대방의 얼굴에서 "니가 나를 무시해"라는 표정이 읽힌다면, 싸움의 반은 승리한 것이다. 무시당했다고 느낀 상대는 으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호흡이 가빠지고 말이 거칠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아냥에도 표정이 없으면 좀 더 자극적이고 강렬한 발언을 쏟아부어야 한다. 이른바 '막말'이다. 사전에서 '막말'의 정의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딱 잘라서 하는 말, 또는 나오는 대로 속되게 하는 말이다.
요즈음 얼굴을 마주하고 삿대질하며 싸우면 '꼰대'라는 소릴 듣기 십상이다. 코로나 19 탓에 '비대면 말싸움'이 페이스북 같은 SNS를 통해 벌어진다. '막말 배틀'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장외 정치 논객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와 신동근 더불어민주당 의원과의 SNS 막말 배틀이 점입가경이다. "옥류관 주방장-문재인 대통령-신동근 의원-진중권 백성. 한반도 권력서열이 이렇게 되는 거냐"는 진 전 교수의 비아냥에 무시당했다고 느낀 신 의원이 '가학' '꼴값'이라는 저급한 용어를 사용했다. 이렇게 막말로 가면 진 전 교수가 반은 이겼다고 봐야 한다. "이쯤이면 막 가자는 거죠? (feat. 노무현 전 대통령)"라는 응수에 승자의 품격이 보이는 이유다.
정치를 언어의 미학이라고 한다. 상대를 이해시키기 위해선 온갖 미사여구로 설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거짓말이다. 우리 정치판은 저급한 비방과 막말의 홍수로 피폐해진지 오래다. 해학과 유머, 위트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사람을 동물에 비유하고, 시정잡배의 폭력적 언어와 저질 인신공격적 언사가 다반사다. 진 전 교수의 독설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이영재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