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미술관서 열려… 이달 28일까지


베를린 기반 활동… 다채로운 회화 선사
낮은 채도·거친 터치 또 다른 단서 유발
모호한 얼굴에 읽을 수 없는 표정 '모순'
정체성 사라져… 현상 너머 감각 극대화


유현경 개인전
'다 큰 자식과 나이든 엄마(2023)'.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모호한 형태의 두 인물이 소실점을 향해 걸어간다. 크기만 봐서는 엄마와 아이의 모습 같지만, 키가 작은 인물에게서 어린아이의 싱그러움은 찾아볼 수 없다. 낮은 채도의 색감과 거친 붓 터치는 마치 또 다른 단서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작품의 이름은 '다 큰 자식과 나이 든 엄마(2023)'. 작품의 분위기가 자못 무겁게 다가온다.

유현경 개인전
여주미술관 '기적은니가내앞에와서있는거다' 전시실 내부 모습.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여주시 여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기적은니가내앞에와서있는거다'는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유현경 작가의 다채로운 회화 작품 24점을 선보이는 전시다. 과감한 붓질로 대상의 형체를 의도적으로 뭉그러뜨리듯 한 표현은 유현경 작품의 특징이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인물과 풍경은 캔버스 안에서 또 다른 의미의 형상으로 재현된다.

유현경 작가는 앞서 서울대 서양학과를 졸업한 뒤 2011년 독일의 슐로스 플뤼쇼브, 2014년 스위스 취리히의 로테 파브릭, 2016년 미국 뉴욕의 두산 레지던시 등 해외 레지던시에서 활동해왔다. 국내와 해외에서 개인전을 선보이는 한편, 아트페어에서 작품을 내보이며 활발하게 작품 세계를 펼치고 있다.

유현경 개인전
유현경 作 '"저는 사랑을 몰라요."(2021)'.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전시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강한 색감과 웅장한 풍경이 눈에 띈다. 설악산의 모습을 표현한 '좋아 #1(2019)'에서 산은 그 형태가 사라지고 이내 푸른 색감으로 해체된다. 작가는 설악산의 사계절,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평면으로 한데 구현해 담아냈다.

비닐하우스를 그린 '공장 노동자의 하루(2014)'에서는 이주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이 묻어난다. 작가는 비닐하우스에서 거주하며 고된 노동을 하는 이방인의 삶을 차가운 색감으로 붓질했다.

유현경 개인전
'무제'.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유현경 작가의 대표작인 인물화를 모아놓은 공간은 따로 마련됐다. 이곳에서는 얼굴을 알 수 없는 이들의 다양한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유현경 작가는 인물을 그릴 때 첫인상에서 맞닥뜨린 감정에 초점을 둔다고 한다. 눈, 코, 입이 모호한 인물들로부터 우리는 결코 표정을 읽어낼 수 없다는 점에서 아이러니가 피어난다. 그렇게 성별과 나이 등 인간을 둘러싼 모든 정체성은 사라지고, 캔버스 속에서는 오로지 색감과 굵고 얇은 선들의 조합만이 존재할 뿐이다.

유현경 개인전
여주미술관 '기적은니가내앞에와서있는거다' 전시실 내부 모습.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마지막 전시실에서는 가로 길이가 5m에 달하는 대형 작품, '패밀리 #1'을 만나볼 수 있다. 어딘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코끼리 세 마리의 모습이 각각 검은색, 회색, 하늘색으로 표현됐다.

코끼리는 무리에서 다른 코끼리가 죽을 경우 사체 옆을 지키거나 흙을 흩뿌리는 행동을 한다. 작품은 이런 '애도하는 동물'인 코끼리의 특성과 맞물려 독특한 감상을 자아낸다. 현상 너머의 감각을 극대화한 회화 작품을 살필 수 있는 이번 전시는 오는 28일까지 이어진다.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