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은편 침대에 들어온 새로운 환자

잘 웃고, 잘 자고, 잘 쉬는 그의 모습

거슬리지 않고 편안함을 느끼게 돼

인간은 감정의 전파를 나누는 동물

행복한 사람 옆에 있으면 행복해져

김성중 소설가
김성중 소설가

전신마취 할 일이 생겼다. 수술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병원이나 수술에 관한 것이 아니다. 나의 병실친구, 강명자(가명)씨의 이야기다.

느닷없이 큰 수술을 받게 되어 뒤숭숭한 마음으로 나는 4인실 간호병동에 입원했다. 운 좋게 첫날은 아무도 없었기에 창가 쪽 명당자리에 당첨이 되어 짐을 풀었다. 짐이 좀 많았다. 열두 권의 책을 비롯해 독서대와 가습기, 허리쿠션과 작은 스탠드, 안대, 텀블러와 빨대컵, 아무튼 병원에 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편의를 도모해줄 온갖 사물들을 챙겨와 제자리를 잡아주니 커튼으로 가린 공간이 조금 아늑해 보였다. 노을이 지고 도시의 야경이 내려다보이자 먼 나라의 공항호텔에 온 느낌이 들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병원임에도 나는 장거리여행 중에 혼자 숙소에 누운 사람처럼 고독했다. 친절한 간호사들이 편의를 돌봐주었으나 4인실에서 혼자 보낸 첫날은 확실히 두려웠던 것 같다.

다음날 수술을 받고 돌아오니 맞은편 침대에 새로운 환자가 들어와 있었다. 65세의 안동 사람으로, 고향에서 남편과 함께 일군 공장 덕분에 걱정 없이 살다가 은퇴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나와 같은 진단을 받았다. 대화를 나눠보니 그녀와 나는 그때까지 살아온 인생에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같은 의사에게 같은 수술을 받고 같은 병실에 있다는 엄청난 우연으로 인해 금세 가까워졌다.

‘풀소유’에 가까운 내 침대에 비하면 강명자씨의 공간은 ‘무소유’에 가깝다. 휴지, 물티슈, 플라스틱 물통이 비품의 전부다. 그런데도 잘 웃고, 잘 자고, 잘 먹고, 잘 쉰다. 특히 잠이 부러웠다. 나는 안대에 이어플러그를 해도 기척이 붐비는 병원에서 낮잠 한 번을 제대로 못 자는데, 그녀는 머리만 대면 숙면에 들어가 옅게 코를 골았다. ‘새댁’(바로 나)이 인상이 좋아서 다행이라면서 눈이 마주치면 환하게 웃었다.

놀라운 사실은 잠귀가 밝고 소리에 예민한 내가 이상하리만치 그녀에게는 불편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 스스로에게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였다. 강명자씨는 잠들면 수분 내로 코를 골고 이따금 가족들과 통화도 하고 수술 후 가래가 생겨서 거북한 소리를 낼 때도 있다. 주의한다고 하지만 끊임없이 기척을 내는 편이다. 그런데도 거슬리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코골이를 들으며 독서에 빠져있던 나는 문득 그녀가 자기 공간에서 자기의 리듬으로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편안한 사람 옆에 있으면 같이 편해지는 거구나’.

말로 하면 당연한 소리지만 놀라운 발견이었다. 한 사람의 고유한 생체리듬이 텔레파시나 무선 와이파이처럼 공간을 같이 쓰는 사람에게는 저절로 공유되는 것일까? 말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고 그 영향을 주고받으니 말이다.

내가 이 가설을 검증한 건 세 번째 환자가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세 번째 환자는 무례하거나 까다롭게 굴지 않았음에도 함께 지내는 이틀간 이상하게 긴장이 되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신경이 곤두서 있다는 것이 저절로 감지됐기 때문이다. 네 번째 환자가 들어오면서 4인실이 모두 차자 병실은 확연히 공공장소같은 느낌을 띠었다. 강명자씨와 나는 이따금 눈이 마주치면 친근하게 웃고 과일이나 두유를 나누었지만 전처럼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퇴원이 결정되자 우리는 벼르고 별렀던 옥상정원에도 가 보았다. 환자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건 알았지만 다른 병동으로 들어가서 별도의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 그곳은, 혼자라면 구태여 가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둘이니까 혼자 하지 않을 일도 시도하게 된다.

“하이고, 여기 오니까 속이 뻥 뚫린다!”

여러 가지 꽃나무와 화초로 조경을 잘 가꿔놓은 정원에서는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새댁 때문에 이런데도 와 본다고 강명자씨는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행복한 사람 옆에 있으니 행복하구나,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인간은 감정이라는 전파를 나누는 동물이라고 덧붙이면서.

/김성중 소설가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