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치열한 논쟁의 장인 한국학

방대한 자료 확보한 ‘자국학’ 계열

외부자의 시선으로 본 ‘지역연구’

근현대 경험 ‘사회과학’ 대상으로

어떻게 모두의 한국학 만들까 관건

옥창준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대학원 정치학 조교수
옥창준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대학원 정치학 조교수

최근 한국을 향한 국내외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학’이라는 말도 자연스럽게 널리 쓰이고 있다. 이번 칼럼에서는 이 한국학이라는 지식 체계의 형성과 전개 과정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1969년 2월8일자 동아일보에는 ‘서구학 전공 학도의 국학으로의 전환’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한국학에 대한 관심이 커지던 1960년대 중반의 분위기를 반영한 이 기사는, 당대의 지식 체계가 ‘양학’(洋學) 중심이었고 이에 지적 갈증을 느낀 신세대들이 ‘국학’(國學)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고 전했다.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나와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을 이해해야 현재의 좌표를 찾고 미래를 그려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곧 좌절을 경험했다. 합리주의적 서구학문의 방법론과 아직 자료 정리 단계에 머물러 있던 국학의 고증론 사이에는 여전히 큰 간극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학의 지적 세례를 받은 이들은 훌륭한 지적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무기가 있다고 해서 전장에서 반드시 승리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무기를 섣불리 다루다 보면 한국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접근하기 쉬웠다. 반대로,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방법론 없이 한문 서적만 들추며 공부하다 보면 연구자라기보다 ‘조사요원’ 수준에 머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거의 60년이 흐른 지금, 이 기사를 다시 떠올리는 이유는 한국학이 여전히 완성된 지식 체계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과 실천의 장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 전장에는 어떤 세력들이 참여하고 있을까.

먼저 내가 나를 연구하는 ‘자국학’ 계열이 있다. 이들은 한문 자료를 비롯해 각 분야마다 한 연구자가 평생을 바쳐도 다 정리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한 자료를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나’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남’이라는 거울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거울의 역할은 ‘지역연구’ 계열이 맡아서 해왔다. 외부자의 시선으로 한국을 연구해온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합리주의와 객관성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 지적 동력의 이면에는 복잡한 목적이 얽혀 있었다. 선교사적 열정, 식민 지배를 위한 정보 확보, ‘문제 많은 나라’를 관리하려는 세계경영의 기술 등이 그 배경이었다. 구미의 선교 단체, 조선총독부, 미국 정부와 재단 등이 이 지식 생산의 물주였고 이들의 시선에는 지배의 욕망과 한국인의 주체성을 경시하는 편견이 깃들어 있었다.

이처럼 ‘자료’를 지닌 자국학과 ‘방법론’을 지닌 지역연구는 오랜 시간 전장에서 치열하게 대립해 왔다. 지금은 ‘한국학’이라는 명칭 자체는 어느 정도 합의된 듯 보이지만 그 내용과 방향성을 두고는 여전히 견해 차가 크다.

그런데 최근 이 전장에 또 다른 차원이 더해지고 있다. 자국학이든 지역연구든 지금까지는 한국이 걸어온 과거와 전통에 주로 주목해 왔다. 그래서 인문학자들이 한국학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해 왔다. 그러나 근현대 한국의 경험은 한국이 사회과학의 대상이기도 하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과학자들은 아직 ‘한국학’으로의 전환을 본격적으로 이루지 못했다. 아마도 사회‘과학’이 지닌 보편성의 무게가 여전히 무겁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과학의 한국학적 전환은 어떻게 가능할까. 곧바로 ‘한국적 사회과학’으로 도약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먼저, 우리가 그간 ‘남을 어떻게 연구해왔는지’를 비판적으로 돌아보고 동시에 ‘남이 남을 어떻게 연구해왔는지’를 중심부에서 주변부까지 면밀히 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한국의 위상을 점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는 ‘내가 나를 알기 위해’ 또는 ‘남이 나를 알기 위해’ 한국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한국학이라는 전장의 관건은 나와 남을 넘나드는 우리 모두의 한국학을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는가에 있을 것이다.

/옥창준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대학원 정치학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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