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기본 원리는 ‘다수에 의한 지배’
모순 구조속 균형 찾지 못하면 ‘위험’ 봉착
진보진영의 우위 지속땐 여야 타협 어려워
정치 복원 위해 연정·연대의 틀 만들어야

미국의 모순적 헌정제도 중에서 핵심적인 것 중의 하나가 대표의 불평등성이다. 이는 연방제란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주(state)라고 하는 연방의 구성단위로부터 충원되는 상원 의원의 수가 그 지역의 유권자 수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각 주에 배당되는 상원 의원의 수가 인구와 비례하지 않음으로써 나타나는 불평등성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즉 인구가 많은 주가 작은 단위의 주를 숫자의 힘으로 제압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고안이라는 점이다. 상원은 전국적인 수준에서 다수 지배를 막기 위한 수단으로 디자인된 것이다. 19세기 프랑스 토크빌이나 영국의 밀 등의 자유주의 정치철학자들이 강조했던 다수의 전제(tyranny of majority)는 민주주의가 빠질 수 있는 오류 중 하나이다. ‘중우정치’의 명제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러면서도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기본 원리는 다수에 의한 지배(rule of majority)이기도 하다. 일견 모순되는 구조 속에서 균형을 찾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항상 위험에 봉착할 수 있다.
21대 대선은 더불어민주당의 압도적 우위 속에서 치러지는 선거다. 대선의 발화가 윤석열 정권의 비상계엄에서 비롯됐고, 작금의 국민의힘 후보 확정 과정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집권당으로서 국정을 담당했던 국민의힘의 구태와 퇴행이 민주당의 우위를 더욱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민의힘은 새벽의 정치쿠데타로 한덕수 후보를 옹립했다가 결국 당원들에 의해 김문수 후보가 지위를 회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실질적 정당성을 상실했다.
만약 민주당이 집권한다면 여권은 의회와 지방권력까지 포괄하는 강력한 집권세력이 된다. 권력이 한 곳으로 쏠리면 권력의 부작용이 나타나게 된다.
권위주의 정권에서는 여소야대의 분점 정부를 경험하지 못했다. 민주화 이후 처음 치러진 13대 총선거에서 여소야대 정부는 결국 인위적 정계개편으로 민주자유당이라는 거대정당의 여대야소 정권으로 바뀌었다. 여소야대가 국정운영에 상당한 걸림돌이 되지만 행정부의 수반이 의회를 보는 관점이나 태도가 전향적이고 민주적이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은 야당을 적대시하고 타협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야당 역시 다수 의석을 바탕으로 입법을 독주했다. 이는 헌법재판소의 탄핵 선고문에도 드러나 있다. ‘국회는 소수 의견을 존중하고 정부와의 관계에서 관용과 자제를 전제로 대화와 타협을 통하여 결론을 도출했어야 했다’라는 헌재의 탄핵 선고문이 이를 말해준다.
여소야대 정국에서는 대통령의 재의요구권으로 입법 등에서 의회를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남발하면서 행정부와 야당의 대립은 임계점을 넘나들었다. 여대야소 정국에서는 회고적 투표와 중간평가의 성격을 갖는 2028년 총선거 전까지는 여권을 제어할 수단은 사실상 전무하다.
압도적 다수의 의회권력과 행정권력을 거머쥔 여권이 지방권력까지 차지한다면 위축된 야당은 극한투쟁으로 나올 공산이 크다. 일방으로 기울어진 선거구도가 가져올 정국상황은 이러한 우려에 대한 제도적 고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의 진보진영의 우위가 지속된다면 계엄과 탄핵 정국에서 나타난 국민의힘의 성향으로 미루어볼 때 여야의 타협 문화가 복원된다고 예단하기 어렵다. 민주당 정권을 의회 독재로 몰아붙이고 극단적 투쟁으로 정치는 여전히 실종된 상황이 되기 십상이다. 민주당 역시 마찬가지다. 당 후보 개인을 위한 위인설법(爲人設法)을 아무 거리낌없이 밀어붙인다. 사법부 길들이기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민주당은 이러한 우려를 불식할 수 있는 대안을 국민 앞에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구여권의 인사들을 영입한다고 해소될 문제가 아니다. 권력분산을 전제로 한 개헌이나 보수와 진보가 상생할 수 있는 구도를 고민해야 되는 이유이다. 미국의 헌법입안자들이 대표의 불평등성에도 불구하고 각 주의 상원의 수를 같은 숫자로 배정했듯이 정치의 복원을 위해 연정이나 연대의 틀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때 대립과 증오의 정치 재연은 불보듯 뻔하다.
/최창렬 용인대 특임교수·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