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재판서 당당히 민족자결 논리로 맞섰다

(아래 사진)1907년 개교 당시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인천창영초교). 인천에서 휴학 시위와 철시 투쟁을 각각 이끌었던 두 청년이 독립운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을 상상해 AI를 활용해 제작. 일러스트/박성현기자pssh0911@kyeongin.com·미드저니 재가공
(아래 사진)1907년 개교 당시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인천창영초교). 인천에서 휴학 시위와 철시 투쟁을 각각 이끌었던 두 청년이 독립운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을 상상해 AI를 활용해 제작. 일러스트/박성현기자pssh0911@kyeongin.com·미드저니 재가공

“나의 행위는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므로 범죄가 아니오.”

1919년 10월9일, 재판정에서 이 말을 들은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형사부 이시카와 다다시(石川正) 판사는 ‘아직도 무죄를 주장하다니…’라고 생각하며 코웃음을 쳤다. 조선 독립을 주장하며 동맹 휴학을 주도하고 학교 전화선을 끊은 혐의(보안법, 전선법 위반)로 기소돼 1·2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인천창영초교) 3학년 김명진(1900~1965)의 상고 이유였다.1

“본건 상고를 기각한다.” 재판장의 음성과 함께 ‘탕, 탕, 탕’ 두드리는 법봉 소리가 경성복심법원 상고심 법정에 울려 퍼지던 순간, 이시카와는 바로 2주 전 다른 조선인 피고가 그에게 제출한 상고이유서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가 비웃었던 그 문장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106년 만에 확인된 두 청년 독립운동가의 연결 고리

일제가 만든 김삼수 지사 감시카드. 출처/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가 만든 김삼수 지사 감시카드. 출처/국사편찬위원회

3·1운동 법정에서 똑같은 문장으로 상고 이유를 밝힌 또 다른 주인공 김삼수(1901~?). 그는 경기도 인천부에 있는 시장에서 잡화를 팔던 18세 청년이었다. 학교도 다니지 않던 청년이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1918년 미국 상원 의회에서 발표한 ‘민족자결주의’를 근거로 들며 일제 사법부의 판결을 따를 수 없다는 상고이유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김삼수는 미국이 필리핀을,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는 방식과 일제의 통치 방식을 비교하며 일제가 조선인을 속박하고 자유를 억압한다고 일갈했다.

1919년 3월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지던 이른 봄, 전국의 상인들은 일제에 저항한다는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점포 문을 닫는 ‘철시(撤市) 투쟁’을 시작했다. 잡화상 김삼수는 문을 닫지 않은 점포 주인들에게 투쟁에 동참하라는 문서를 보내며 인천의 철시 투쟁을 이끌었다. 철시 투쟁 나흘째인 3월 30일, 상점 170곳이 문을 닫았다. 조선인이 운영하는 점포 대부분이 철시에 참여했다.2

1919년 ‘철시투쟁’ 이끈 잡화상 김삼수

‘동맹휴교’ 주도 인천공보 학생 김명진

무죄 주장 상고이유서에 ‘동일한 발언’

두 청년의 연대, 두 독립운동 연결고리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1919년 4월1일자 신문에 실은 ‘쓸쓸한 인천항, 다시 철시하였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당시 상황을 전했다. 호객행위를 하던 상인들도, 물건을 사기 위해 기웃거리는 손님도 없었다. 바닷바람만 쓸쓸하게 빈 거리를 채웠다.3

대부분 상점이 문을 닫자, 마쓰모토 쓰루오(松元鶴雄) 인천경찰서장은 조선인 상인을 전부 불러 모았다. ‘철시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승낙서에 도장을 찍지 않은 자는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이 자리엔 김삼수와 함께 여관조합에서 심부름을 하던 15세 청년 임갑득(1904~?)도 있었다.

강압적인 조치에 분노한 김삼수와 임갑득은 철시 투쟁에 동참하라는 경고문을 점포들의 문틈에 집어넣으려다 체포됐다. 협박,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된 김삼수는 1·2심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도 다시 재판 결과에 불복하며 상고심 법정에 서서 이렇게 항변했다.

“신체의 자유는 구속됐으나 (일제가) 영특한 우리의 정신까지 움켜쥐고 밟을 수 있겠느냐. 정의와 인도를 위반하는 일제 사법권의 제한을 받을 필요가 없다!” 이시카와 판사는 상고를 기각했다.4

일제가 만든 김명진 지사 감시카드. 출처/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가 만든 김명진 지사 감시카드. 출처/국사편찬위원회

김명진은 1919년 3월6일 인천공립보통학교와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교) 학생들의 동맹 시위와 휴교를 주도했다. 이들이 시위를 시작한 인천공립보통학교는 당시 인천 지역 3·1운동의 진원지로 꼽힌다. 김명진은 인천공립보통학교 교직원이 매일 전화로 경찰에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학생들의 동향을 보고하자 동급생 박철준, 이만용과 함께 전화선을 잘라 통신망을 차단했다.5

비슷한 시기 일어난 인천 학생들의 만세 시위와 상인들의 철시 투쟁은 이제껏 따로 떨어진 독립운동으로 여겨졌다. 그 각각의 운동을 주도한 두 청년의 상고이유서에는 어떻게 같은 문장이 담겨 있었을까.

경인일보 특별취재팀은 당시 신문과 판결문 등 각종 자료를 조사한 결과, 1920년 6월5일 발행된 ‘독립신문’에서 두 청년의 연결 고리를 새로 찾았다.

1920년 6월5일자 독립신문 ‘남한의 독립만세’에 김명진과 김삼수 등 15명이 인천에서 벌인 독립운동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출처/대한민국역사박물관
1920년 6월5일자 독립신문 ‘남한의 독립만세’에 김명진과 김삼수 등 15명이 인천에서 벌인 독립운동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출처/대한민국역사박물관

1919년 3월25일 서리태와 강낭콩 등을 파는 시장 앞에 앳된 얼굴을 한 청년 15명이 모였다. “대한 독립 만세!” 터져 나오는 함성을 들은 경찰은 곧바로 청년들을 체포했다. 김삼수와 임갑득, 김명진과 박철준, 이만용 등이 인천경찰서로 끌려갔다.6

한 살 터울의 김삼수와 김명진은 함께 소규모 독립운동을 도모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두 청년이 법원에 상고이유서를 제출한 때에는 이미 체포 후 서대문 감옥에 감금돼 있던 시기였다. 이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청년들이 외부에서 도움을 줬을 가능성이 크다. 인천부 내리(현 인천 중구 인현동 일대)에 살면서 매일 아침 학교로, 시장으로 향하며 얼굴을 맞댔을 두 청년의 최후 진술은 현 인천 동구 창영초교 3·1운동 기념비 뒷면에 새겨져 있다.

美 대통령 윌슨의 ‘평화원칙’ 발표 반향

일제 통제에도 조선인들 입에서 입으로

식민지 이권 밀려 파리강화회의서 삭제

“착취·압박으로 조선인의 미래 짓밟아”

반쪽사상이었으나 민족의식 근간 역할

“만세운동 불법 아냐” 민중들의 법정 투쟁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조선 민족이 독립을 선언하면 독립이 되는 것이오!”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열린 3·1 운동에 참여해 만세를 부르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혐의로 체포된 선린상업고등학교 2학년 김철환(1900~?)은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통역사가 이를 일본말로 옮기자, 조선총독부 호리 나오키(堀直樹) 예심 판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렇게 물었다.

“일본 정부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김철환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일본 정부가 인정하지 않아도, 우리가 독립을 선언하면 세계 각국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할 것이오.”

다시 호리가 물었다. “민족자결주의가 조선에 적용되지 않는다면?” 김철환은 당당히 답했다. “자기 것을 자기가 되찾는 것이 조선의 독립운동이므로 끝까지 할 것이오.”

팽팽한 긴장감 속 공방이 끝나고 예심 판사가 자리를 떠나자, 청년 김철환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예심 판사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을 반성하고 있으며, 그저 주변 친구들이 하자는 대로 행동했다고 진술하면 중형을 피할 수 있었다. 운이 좋으면 정식 재판에도 넘겨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김철환에겐 독립 만세 운동이 불법이 아니라는 근거가 충분했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라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의 일은 민족이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일제의 법령이 세계 질서를 앞지를 순 없다고 굳게 믿었다.7

3·1운동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탄압한 일제 사법부에 대해 조선인들은 법정에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으로 맞섰다. 1918년 1월8일 윌슨은 ‘식민지 주권 등의 문제를 결정할 때는 해당 식민지 주민의 이해가 고려돼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평화원칙 14개 조항을 미국 상원의회에서 발표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승전국과 패전국의 영토, 배상금 등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이 내용이 소개되자, 식민지 국가들은 민족 해방이 가능하리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일제는 ‘미 대통령의 요구조건’이라는 1918년 1월11일자 ‘매일신보’ 기사로 윌슨 대통령의 14개 조항을 소개하면서도 ‘민족자결주의’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다.8

조선인들의 독립을 향한 열망에 불이 붙을까 우려한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보도 통제에도 불구하고 민족자결주의는 신문과 잡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비폭력 평화 시위인 3·1운동이 전국 각지로 확산하는 사상적 기반이 됐다. 3·1운동 이후 경찰서로, 법정으로 끌려온 조선인들이 입을 모아 민족자결주의를 외치자 일제는 이를 부정하고 비판하기에 이른다.9

인천 동구 창영초등학교에 설치된 ‘3.1독립만세운동 인천지역발상지기념비’. 출처/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
인천 동구 창영초등학교에 설치된 ‘3.1독립만세운동 인천지역발상지기념비’. 출처/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

서울에서 전주 천도교구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이를 배포하다 붙잡힌 인종익(1871~?)에게 청주경찰서의 일제 경찰은 심문 과정에서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조선을 독립시키려면 필리핀, 하와이, 인도를 모두 독립시켜야 하는데 미국, 영국, 프랑스가 멸망을 자초할 이유가 있겠느냐”고 비아냥댔다. 인종익은 반박했다. “윌슨은 식민지 자치를 허용하고 각자 독립 생존해 정의와 인도주의를 관철하려 한 것이오. 조선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속령도 자치를 허용할 것이라 믿소.”10

실제로 전 세계에 식민지를 두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패전국 외의 식민지는 논의에서 제외하자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반기를 들었다. 결국 1919년 1월 파리 강화 회의에서 체결된 수정조약에는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내용이 삭제됐다. 결과적으로 민족자결주의는 조선에 적용되지 않은 반쪽짜리 사상이었지만, 3·1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을 지속하게 하는 민족의식의 근간으로 녹아든다.

법정에 선 독립운동가들은 왜 조선이 독립해야 하느냐는 사법부의 질문에 이같이 말했다.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도, 참정권도 없이 인간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오.” “일제의 착취와 압박으로 우리는 경제적으로 비참한 삶을 살고 있어서요.” “조선인에겐 제대로 된 교육을 실시하지 않아 조선인의 미래를 짓밟고 있기 때문이오.” 이들은 입 모아 말했다. “이 모든 건 조선이 독립한다면 모두 해결될 일이오.”11

물건을 팔고, 농사를 짓고, 공부를 하던 민중은 조선인을 탄압하기 위해 혈안인 일제 사법부의 ‘법 기술자들’과 맞섰다. 척박한 삶 속에서도 독립을 위해 민족자결주의와 국제 정세를 간절히 익히며 법정에서 최후의 싸움을 벌였다. 경인일보 특별취재팀이 새로 밝혀낸 인천의 두 청년 ‘김삼수와 김명진 연결고리’처럼, 아직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민중의 이야기가 이들의 법정 투쟁 기록 속에서 숨 쉬고 있다.

[출처]

1) ‘김명진 판결문 각색’, 국가기록원, 1919년 10월9일

2) ‘내부비밀보충문건 448호 독립운동에 관한 건’,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 1919년 4월2일

3) ‘쓸쓸한 인천항, 다시 철시하였다’, 매일신보, 1919년 4월1일

4) ‘김삼수 판결문’ 각색, 국가기록원, 1919년 9월27일

5) ‘김명진 판결문’ 각색

6) ‘남한의 독립만세’, 독립신문, 1920년 6월5일

7) ‘김철환 심문조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919년 5월6일

8) ‘미대통령의 요구조건’, 매일신보, 1918년 1월11일

9) 국사편찬위원회, ‘제1차대전을 전후한 시기의 국제정세’, ‘한민족독립운동사’

10) ‘인종익 심문조서’ 각색,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919년 3월10일

11) 김탁원·신기철·박규원 등 ‘심문조서’ 각색,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919년

/정선아기자 sun@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