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식물인간 상태에 있는 한 70대 환자의 가족들이 환자가 존엄사할 수 있게 해달라며 국내 최초로 병원과 의사를 상대로 낸 가처분신청을 법원이 기각했다.

환자의 가족들은 "식물인간 상태로 있는 환자에 대한 인공호흡기 사용이나 약물 투여 등 연명 치료나 응급심폐소생술을 시행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법원은 "가족이라도 타인의 생명권을 침해할 수 없다"며 기각한 것이다.

법원의 이번 기각 판정을 두고 존엄사와 안락사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의료계에서는 의사협회의 의사윤리지침과는 방향이 다르다고 법원의 기각 판정을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으며, 인터넷 포털사이트에는 존엄사에 관련된 찬·반 양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그렇다면 왜 국내에서는 존엄사와 안락사를 인정하지 않는지, 국내·외 사례를 통해 알아봤다.

■ 존엄사와 안락사의 의미

존엄사(尊嚴死·death with dignity)는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면서 죽을 수 있게 하는 행위, 또는 그런 견해로 생명 연장의 조치를 중단하는 것으로 '소극적 안락사'라고도 한다.

이에 반해 안락사(安樂死·mercy killing)는 극심한 고통을 받고있는 불치의 환자에 대하여, 본인 또는 가족의 요구에 따라 고통이 적은 방법으로 생명을 단축하는 행위로 '적극적 안락사'라고도 한다.

언뜻 비슷한 뜻으로 비쳐질 수 있으나 존엄사는 치료를 중단하는 것이고, 안락사는 빨리 죽이기 위해 치료를 적극적으로 행하는 점에서 엄연히 그 의미가 다르다. 예를 들어 존엄사는 인공호흡기를 떼는 것이고 안락사는 청산가리를 주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의료계 "임종임박 연명치료 중단을", 법원 "타인 생명권 침해할 수 없다"

■ 의료계는 YES! 법원은 NO!


대법원은 지난 1998년 최초 안락사 논란을 빚었던 '보라매병원 사건'에 대해 가족의 요구로 환자를 퇴원시켜 사망에 이르게 한 의사들에게 살인방조죄를 적용, 유죄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의사들이 보호자가 환자에 대한 보호 의무를 저버려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미필적 인식을 알면서도 환자를 퇴원시키고, 그로 인해 보호자가 환자의 호흡 보조장치를 제거하는 등 살인행위를 도운 점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또 지난 2004년에도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생명을 유지하던 환자를 가족의 요구로 퇴원시켜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된 의사에 대해 실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동안 법원의 안락사에 대한 판결은 있었지만, 존엄사에 대한 것은 처음이다. 그러나 이번 존엄사 신청을 기각한 법원은 그동안 입장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환자가 회복될 가능성이 없다거나 치료 자체가 의학적으로 의미가 없다는 주장을 인정할 수 없고 본인의 의사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가족의 결정만으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법원의 판결에 대해 의료계에서는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의사협회의 의사윤리지침과 방향이 법원의 판단과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의협이 지난 2001년에 제정, 공포한 의사윤리지침 30조 2항에는 의학적으로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나 가족 등의 대리인이 생명유지 치료를 비롯한 진료의 중단이나 퇴원을 문서로 요구하는 경우 의사가 이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은 허용된다고 적혀 있다. 또 대한의학회는 지난 2002년에 만든 '임종 환자의 연명 치료 중단에 대한 의료윤리지침'을 통해 현대의학 기술을 적용한 적극적인 치료에도 반응하지 않고 사망이 임박한 것으로 판단되는 임종 환자에 대해 의사가 치료를 거절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도 했다.

지난 2006년에는 한나라당 안명옥 의원이 불합리한 연명 치료의 중단을 허용하는 내용의 의료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의협 관계자는 "그동안 의료계에서 인정하려는 존엄사와 안락사에 대해 사회적인 여건이 충분히 갖춰졌음에도 법원은 똑같은 입장만 고수하고 있다"며 "법원이 존엄사와 안락사를 인정하는 문제를 검토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美·영국, 소극적 의미 안락사 지지… 日의사회 1992년부터 존엄사 인정

■ 해외는 어떤가

미국은 주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소극적 안락사인 존엄사는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환자의 죽음을 앞당기는 안락사는 현재 오리건주만이 허용할 뿐, 다른 주에서는 대부분 금지돼 있다. 그러나 미국의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미국인 중 73%가 안락사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나 사회적으로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지만, 실제 판례는 제각각이다.

지난 2001년 로스앤젤레스 고등법원은 안락사를 명분으로 고령 환자를 살해한 혐의로 전직 호흡기 치료사 에프렌 살디바(32)에게 가석방 없는 6회 연속 종신형 및 살인미수죄로 1회 종신형을 선고했지만, 2006년 미 연방대법원은 환자의 결정에 따라 안락사를 도와준 의사를 지지하는 판결을 내렸으며 같은 해 미국 매사추세츠 대법원은 계부로부터 야구 방망이 등으로 심하게 폭행을 당한 11살 소녀에 대해 존엄사를 허가하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영국은 안락사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소극적 의미의 안락사인 존엄사는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다. 안락사에 대한 여론 또한 지지가 80%에 이른다는 각종 여론조사가 나오고 있다.

영국 지방법원은 지난 2004년 희귀 유전질병을 앓고 있어 출생 이후 9개월째 병원에서 산소호흡기를 달고 살아가는 남아에게 안락사를 허용했으며, 영국법원 또한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호흡기와 심장장애를 안고 태어난 생후 11개월된 여아에게 안락사를 허용했다.

이웃 나라 일본의 경우 안락사와 존엄사에 대한 법률을 제정하는 단계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지난 1995년 요코하마 법원의 판례에 따라 ▲환자의 참기 힘든 고통 ▲죽음의 임박성 ▲본인의 의사 ▲고통제거 수단의 유무 등의 기준에 따라 융통성을 발휘하고 있다. 또 의료계에서도 지난 1976년 '일본안락사협회'를 발족, 1983년 '일본존엄사협회'로 개칭된 이후 1992년부터 일본 의사회에서 정식으로 존엄사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불치병환자 마지막까지 고통 강요", "명백한 살인행위" 네티즌 찬반팽팽

■ '인간답게 살 권리' VS '생명 존중'

존엄사에 대해 법원의 기각이 알려지자 인터넷 포털상에서 네티즌들의 댓글과 찬·반 입장이 명확하게 엇갈리고 있다.

존엄사를 찬성하는 네티즌들은 '인간답게 살 권리'에 대응해 '인간답게 죽을 권리'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kstough' ID를 사용하는 네티즌은 "존엄사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불치병자에게 '고통스럽게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살아라'는 강요"라며 "이것 역시 존엄성을 침해할 수 있다"고 찬성의 입장을 밝혔다. 인터넷 ID 'jade33'도 "죽음을 조장하는 안락사가 아닌 존엄사는 환자와 그 가족에게 더이상의 고통을 주지 않는 최소한의 선택"이라며 "적어도 불치병 환자의 경우 개인의 죽음에 대해 국가가 관여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에 반해 존엄사를 반대하는 네티즌들은 '생명 존중'과 '남용'의 소지가 있다는 우려섞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존엄사에 대한 법원 기각 기사가 인터넷에 게재된 지난 11일 다음 아고라에 '존엄사 반대'라는 토론방을 개설한 ID 'sg25' 사용자는 "사람은 불치병 환자건 아니건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환자의 명시적인 의사가 없는 상태에서 인위적으로 생명을 끊으면 안된다"며 "아무리 가족이라 하더라도 명백한 살인행위"라고 주장했다.

토론방에 댓글을 남긴 'euni1004' 네티즌도 "식물인간의 경우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데, 고통을 덜어주겠다며 산소호흡기를 제거한다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며 "존엄사와 안락사를 허용한다면 이를 악용하는 사례가 불보듯 뻔하게 넘쳐날 것"이라고 반대의 입장을 표명했다.

그래픽/박성현기자·pssh0911@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