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우와 잡어를 분류중인 어민들.
[경인일보=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 아파트 단지 건축으로 소래포구 정취 사라져갈 위기

광성횟집 이원섭(70) 사장은 황해도 장연군 해안면 순계리 출신이다. 장산곶이나 몽금포가 지척이었다. 그도 1·4후퇴 때 남으로 내려와 전국 각지를 전전하다 인천 송월동에 정착했다. 그 무렵 아버지는 황해도 고향사람을 연줄로 소래에 들어가 살고 있었다. 그는 직장을 다니며 사업도 벌여 보았으나 여의치 않자 1970년 무렵 아버지를 찾아 소래로 옮겨왔다. 아버지로부터 광성호라는 작은 발동선을 물려받았다. 그가 이주해 왔을 때는 소래포구에 30가구 남짓 살고 있었다. 석탄을 때는 협궤열차가 연기를 뿜으며 마을 앞으로 지나다녔다. 포구는 황해도, 평안도 사람 등 피란 나온 이북 사람들의 새로운 터전이 돼 주었다. 이 사장은 새 광성호로 11년간 조업을 했다. 그러다 배를 팔고 다시 인천으로 나가 백석동에서 양돈업에 손을 댔지만 실패하고 결국 소래로 돌아왔다. 그때가 1980년이었다. 지금 자리에서 횟집을 시작했다. 그 사이 건물도 새로 짓고 3번 정도 개축을 해서 오늘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가 운영하는 광성횟집도 곧 헐리게 된다. 소래포구 해안가에 대형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그의 집터에 도로가 날 예정이다. 보상이야 받았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크다. 어시장 옆으로 큰 도로가 나게 되면 소래포구가 어촌의 정취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촌의 모습이 살아있고 어선들이 드나드니 사람들이 소래로 찾아오지 그런 것들이 사라진다면 굳이 누가 소래까지 올지 우려스럽단다. 그는 개발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 서해안 갯가 노래 기능보유자 조부영 선생 내외.

# "소래 앞바다에 물고기가 버글버글 했었어"

포구로 들어가는 입구 도로변에 천막을 치고 바지락이랑 굴을 까는 사람들이 있다. 노부부와 딸은 상점에서 주문을 받아 작업한다. 어패류는 소래 갯벌에서 나는 것이 없다. 굴은 남쪽에서 올라오고 바지락은 영흥도 쪽 섬들에서 온다. 조부영(83) 노인의 가족도 피란민이었다. 전쟁 전 노인은 황해도 옹진의 '무도'란 섬에 살았다. 열여덟 살 때부터 고깃배를 탔다. 그의 고향이 연평도 바로 근처였으니 조기잡이에도 이력이 났다. 노인은 25세에 가족을 이끌고 피란을 나와 처음에는 덕적도에서 남의 배를 타며 18년을 살았다. 노인 가족도 통일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갈 꿈을 꾸며 고향 가까운 덕적도에 자리 잡았던 것이다. 하지만 통일은 점점 멀어 보였다. 그래서 1960년대 말 소래로 이주했다. 소래에서만 25년 남짓 배를 부리고 살았다.

"피란민들이 여기 와서 오두막을 짓고 살았어. 이 동네가 다 '뻘바탕'이라 길바닥이 모두 뻘거덕 뻘거덕 했지."

장명식씨가 어촌계장을 맡고 결성 건어물 장영수 사장이 서기를 할 때 비로소 포구에서 소래역 사거리까지 신작로가 났다. 신작로가 깔리자 포구까지 '구루마'도 다니기 편해졌다. 잡아온 생선은 대부분 곡식과 바꿔 먹었다. "바다에 쫓아다니며 그냥 그냥 사느라고 세월이 어찌 가는 줄도 몰랐다." 포구에는 처음 피란민들이 정착했고 후에는 "전라도서 객지 나와 돌아댕기던 애들이 여와 살아보니 밥은 먹을 것 같거든, 그래 연줄 연줄로 해서 올라오고." 그렇게 포구에 정착민들이 늘어났다.

"그때는 팔아먹는 것도 몰랐어. 이고 다니면서 곡식하고 바꾸고. 가을 김장 때는 인천에서들 새우젓 사러 오고. 피란 와서 해먹을 건 없고 고기 잡아서 곡식하고 바꿔 유지하고 살았어. 말도 못하게 고생했어. 죽지 않으니 사는 거여. 그때 산 사람들은 불쌍했어. 우리네들이 와서 오륙년 있으니 사람들이 오기 시작하고, 팔기도 하고."

당시에는 소래포구 바로 앞바다에만 가도 물고기들이 버글버글 했었다.

"이 앞에만 나가도 고기가 많았어. 민애, 농애, 광애, 아주 좋은 반찬 잡아 와도 시세가 없었어. 시방은 민애같은 것 볼래도 볼 수가 없어."


# 바지락 까는 '서해안 갯가 노래' 기능 보유자

사람들은 젊어서 소래로 와 다들 소래에서 늙었다. 그 사이 낡은 건물들은 철거되고 주변에 신도시가 생겼다. 노인도 새우와 꽃게를 주로 잡았었다. 그 시절에는 봉디 새우와 대하도 많이 잡혔다. 그물 한 틀에서 봉디 새우를 40박스까지 잡은 적도 있었다.

'서해안 갯가 노래' 기능 보유자이기도 한 노인은 60살에 뱃일을 그만 둔 뒤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공연을 하고 살았다. 연평바다에서 고기잡이하며 배웠던 노래가 세월이 흐르면서 문화재가 된 것이다. '노 젓는 소리' '쟁기 소리' '고기 퍼 싣는 소리' 등의 노동요. 힘든 노동을 이기고 기운을 북돋기 위한 노래들이었다. 노인은 "시방은 심이 들어서 못하고 제자들이 다하고 제자들이나 가르치고" 산다. 노인이 배를 부릴 때는 아내도 같이 배를 탔다. 노인이 뱃노래 공연을 다닐 때 아내는 어시장에서 바지락 장사를 했다. "그때는 여기 뻘에도 같이 올라 배에도 대녔고, 할마이 고생 많이 했어요. 늙어서 잘해 줘야 할텐디 잘 할 힘도 없고."

노인은 팔순의 아내가 여전히 바지락을 까고 굴을 깨는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자신이 공연하고 돌아다니느라 한참 포구가 클 때 장사에 집중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럽기도 하다. 그때 돈을 벌어 놓지 못해 늙어서까지 아내를 고생 시키는 것이 미안한지 말씀을 하시던 노인의 눈가가 먹먹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