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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28]에필로그-철쭉꽃이 피면 파시가 서고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파시가 끝난 바다는 매립되고세종실록 지리지에 파시라는 이름이 등장할 정도로 파시(波市)의 역사는 길다."토산은 … 조기인데 군의 서쪽 파시평(波市坪)에서 난다. 봄, 여름 사이에 여러 곳의 어선이 모두 이곳에 모여 그물로 잡는데 관청에서 그 세금을 받아서 국용에 이바지한다."(세종실록지리지 나주목 영광군 편)나그네는 '파시' 연재를 마무리하며 이 땅에서 파시가 처음으로 시작됐던 영광 법성포를 찾았다. 파시가 사라진 지 오래지만 연평도와는 달리 법성포는 아직도 조기의 음덕으로 살아가는 땅이다. 법성포 앞바다는 매립 공사의 기계음으로 소란스럽다. 조기잡이 배들이 들어와 정박하던 호수같이 아늑한 바다는 간 곳이 없다. 원형을 잃은 바다, 몇 척의 소형 어선만 묶여 있는 포구는 쓸쓸하고 적막하다. 바다를 매립해 만든 땅에는 대규모 굴비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다. 옛날 연평도로 올라오던 조기떼는 칠산 어장을 지났다. 이 무렵 부안의 위도와 함께 법성포에도 파시가 섰다. 들고나는 조기 배들과 운반선들, 조기를 사고파는 사람들로 포구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밤새 장작불을 피워 말리던 덕장굴비의 탄생지이기도 한 법성포. 법성포 파시는 해마다 3월 초부터 4월 말까지 이어졌다. 법성포 파시는 철쭉꽃이 필 때 절정을 이루었다. 그때 칠산어장의 조기들은 대부분 법성포로 실려와 굴비로 만들어졌다. 생조기는 며칠간 소금에 절여진 뒤 덕장에서 말라갔다. 긴 소나무들을 엮어서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건조대를 만들어 세운 것이 덕장이다. 덕장 한가운데에 구덩이를 파고 숯불을 피웠다. 인부들은 조기를 도둑맞지 않기 위해 밤새 덕장을 지켰다. 낮에는 햇빛과 해풍에 마르고 밤에는 숯불의 열기에 말라갔다. 짧게는 1주일, 길게는 2~3개월이 걸리는 지난한 작업. 햇빛과 바람과 밤이슬까지 맞으며 조기는 굴비로 거듭 났고 조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맛을 가지게 됐다.지금 법성포에 적을 두고 드나드는 조기잡이 유자망 어선은 4~5척에 불과하다. 40여 년 전 연평도 앞바다에서 조기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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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27]소래포구 대동굿은 사라지고 교회에서 출어예배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축제마당의 호객꾼이 된 슬픈 토착 신들소래포구에도 오랫동안 풍어굿이 있었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달은 소래포구에서 풍어굿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과학기술의 위력 앞에서는 어업의 신인 임경업 장군이나 용왕도 기를 펼 수 없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이들을 찾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다시 토착신들이 화려하게 귀환했다. 신들을 부른 것은 풍랑의 위협이 아니었다. 관광산업. 섬이나 어촌으로 관광객들이 몰려오면서 토착 신들도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 소래포구 축제에 풍어굿이 포함되면서 소래의 신들도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풍어굿의 제물을 받아먹는 신이지만 이제 더 이상 어업의 신이 아니다. 관광의 신이다. 풍랑을 잠재우거나 풍어의 능력을 상실한 신들. 축제 마당의 배우가 된 신들. 포구의 신들은 축제 때만 잠깐 관광객을 부르는 호객꾼으로 전락했다. # 안음전 만신, 선주 집 며느리에서 무교의 사제로오랜 세월 소래포구 풍어굿을 주관했던 사람은 안음전(81) 만신이다. 만신은 황해도 연백에서 시집살이를 하던 중 22살에 첫 신 내림을 경험했다. 한국전쟁 때 피란 내려와 소래에 정착한 새댁은 노량진의 우주옥 선생을 신어미로 모시고 내림굿을 한 뒤 만신이 됐다. 만신은 신당에 연평바다 임경업 장군을 주신으로 삼고 일월성신, 단군님, 옥황상제님, 만성수, 아미타부처님, 관음보살님 등의 신을 함께 모셨다.만신 집안에서 배를 부리면서 만신은 정초가 되면 뱃고사를 올렸다. 그것을 보고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뱃고사를 부탁해 왔다. 그 후로 마을 대동굿도 모시게 됐다. 나중에는 선착장 한 가운데서 굿을 했다. 만신 집안의 배에서 굿을 할 때는 앉은굿을 했지만 대동굿을 하면서는 선굿을 했다. 일어나서 하는 큰 굿판을 벌이게 된 것이다. 작두도 타고 공수도 내렸다. 소래의 산만이 아니라 천하명산의 신령님네를 다 불러서 축원을 드렸다. 징, 상장구, 북, 피리 등 5명의 재비와 신딸들을 데리고 굿을 했다. 황해도 굿은 본디 24 거리 굿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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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26]월동대비 살오른 가을 꽃게도 일품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새우나 주꾸미와 함께 소래를 포구답게 하는 대표어족은 꽃게다. 인천을 비롯 수도권 사람들은 싱싱하고 값싼 꽃게를 사러 소래포구를 찾는다. 꽃게는 알배기 봄 꽃게를 일미로 치지만 산란을 끝내고 월동에 대비해 살을 찌우기 시작한 가을 꽃게도 일품이다. 덕적도 인근 어장에서 조업을 마친 꽃게 배가 들어오는 시간이면 소래포구는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인다.# 또 하나의 소래 명물 꽃게수심 20~40m의 바다 속에 사는 꽃게는 야행성이다. 밤이 되면 활동을 시작해 조개나 가재, 새우 등을 잡아먹고 산다. 15℃ 이상 되는 바다 속에서 산란한다. 10℃ 이하로 떨어지면 동면에 든다. 그래서 과거에는 꽃게를 동면시켜 일본으로 수출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덕적도 인근은 최대의 꽃게 어장이었다. 지금도 소래의 어선들은 덕적도 근해로 꽃게잡이를 나간다. 1980년대 덕적도 도우(濤 ) 포구 앞바다는 꽃게잡이 선단의 전진기지였다. 어선들이 꽃게를 잡아오면 모선에서는 꽃게를 포장했다. 최상품 꽃게는 모두 일본으로 수출됐다. 산 꽃게를 수출하기 위해서는 꽃게를 '마취'시켜야 했다. 얼음물 탱크에 산 꽃게를 넣고 15~20분 정도 지나면 꽃게들의 몸이 마비되어 발을 웅크리고 몸이 굳어졌다. 톱밥을 깐 상자에 동면에 든 꽃게를 쌓고 다시 톱밥을 뿌리고 꽃게를 쌓았다. 상자는 테이프로 봉인했다. 비행기를 통해 일본으로 운송된 꽃게는 포장을 뜯으면 다시 살아났다. 이동 중에 온도가 올라가 동면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산 꽃게보다 냉장 꽃게가 더 맛있어요"옛날 양반가 중,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등의 가문에서는 꽃게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정도를 가지 않고 옆으로 걷는 걸음걸이나 속 창자가 없는 게의 생리를 금기시한 때문이었다.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오늘날 그런 이유로 꽃게를 먹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없어서 못 먹는다. 만만치 않은 가격 때문에 서민들은 쉽게 먹기 어려운 귀물. 하지만 꽃게 철, 소래포구에서는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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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25]포구 삼키는 신도시…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아파트 단지 건축으로 소래포구 정취 사라져갈 위기광성횟집 이원섭(70) 사장은 황해도 장연군 해안면 순계리 출신이다. 장산곶이나 몽금포가 지척이었다. 그도 1·4후퇴 때 남으로 내려와 전국 각지를 전전하다 인천 송월동에 정착했다. 그 무렵 아버지는 황해도 고향사람을 연줄로 소래에 들어가 살고 있었다. 그는 직장을 다니며 사업도 벌여 보았으나 여의치 않자 1970년 무렵 아버지를 찾아 소래로 옮겨왔다. 아버지로부터 광성호라는 작은 발동선을 물려받았다. 그가 이주해 왔을 때는 소래포구에 30가구 남짓 살고 있었다. 석탄을 때는 협궤열차가 연기를 뿜으며 마을 앞으로 지나다녔다. 포구는 황해도, 평안도 사람 등 피란 나온 이북 사람들의 새로운 터전이 돼 주었다. 이 사장은 새 광성호로 11년간 조업을 했다. 그러다 배를 팔고 다시 인천으로 나가 백석동에서 양돈업에 손을 댔지만 실패하고 결국 소래로 돌아왔다. 그때가 1980년이었다. 지금 자리에서 횟집을 시작했다. 그 사이 건물도 새로 짓고 3번 정도 개축을 해서 오늘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가 운영하는 광성횟집도 곧 헐리게 된다. 소래포구 해안가에 대형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그의 집터에 도로가 날 예정이다. 보상이야 받았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크다. 어시장 옆으로 큰 도로가 나게 되면 소래포구가 어촌의 정취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촌의 모습이 살아있고 어선들이 드나드니 사람들이 소래로 찾아오지 그런 것들이 사라진다면 굳이 누가 소래까지 올지 우려스럽단다. 그는 개발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래 앞바다에 물고기가 버글버글 했었어"포구로 들어가는 입구 도로변에 천막을 치고 바지락이랑 굴을 까는 사람들이 있다. 노부부와 딸은 상점에서 주문을 받아 작업한다. 어패류는 소래 갯벌에서 나는 것이 없다. 굴은 남쪽에서 올라오고 바지락은 영흥도 쪽 섬들에서 온다. 조부영(83) 노인의 가족도 피란민이었다. 전쟁 전 노인은 황해도 옹진의 '무도'란 섬에 살았다. 열여덟 살 때부터 고깃배를 탔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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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24]목숨 걸고 새우를 잡던 시절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배 새로 짓고 일주 만에 비용 다 뽑아옛 소래역에서 포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건어물 상점이 몇 곳 있다. 그 중 한 집인 결성건어물 장영수 사장은 소래포구의 산증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황해도 옹진에서 온 피란민이다.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1969년부터 소래에서 배를 탔다. 장 사장은 아버지의 작은 목선을 물려받았다. 지금은 육지가 된 오이도 앞 바다에 나가 새우와 꽃게, 농어, 숭어, 망둥이, 주꾸미 등을 잡았다. 장 사장은 소래포구에서 최초로 기계배를 직접 건조한 세 명 중 한 사람이다. 그때가 1970년대 초였다. 장순호, 임사열씨가 함께 배를 건조했다. 그때도 동력선이 몇 척 있었지만 외부에서 들여온 배들이었다.목재는 일본에서 수입된 삼나무를 세 사람이 공동으로 사왔고 한 척 당 배 목수 2명씩이 붙어서 한 달 만에 배를 지었다. 엔진도 국산을 썼다. 장 사장의 배는 3.19t, 다른 두 사람의 배는 5t짜리였다. 장 사장은 결성 장씨인 자신의 본을 따 결성호라 이름 붙였다. 장 사장이 새로 건조한 배로 다시 시작한 조업의 결과는 대박이었다. 쌀 한 가마니에 6천원하던 시절, 배를 새로 짓는데 146만원이 들었다. 그런데 그 비용을 1주일 만에 다 뽑았다. 송도 앞바다에 숭어 그물을 쳤는데 거기서 1주일 동안 매일같이 만선이었다. 하루에 보통 열 서너 박스씩 건져 올렸다. 날이 추워지면 숭어들은 월동을 위해 갯벌을 떠나 더 깊은 바다로 이동을 시작한다. 그때는 바다에 막 살얼음이 끼기 시작한 12월 24일, 25일 무렵이었다."갯고랑에 살얼음질 때 숭어는 반쯤 동면 상태로 떠내려가요. 거기에 그물을 뒤집어 씌웠으니. 그저 쓸어 담은 셈이었지요."그 무렵부터 소래포구의 어선들도 규모가 커지고 노를 젓던 전마선들도 동력선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오이도 앞바다 정도까지만 가던 배들이 차츰 팔미도, 초치도, 덕적도, 문갑도, 선갑도, 굴업도, 연평도까지 어장을 넓혀 나갔다. 당시 45마력의 배로 덕적도까지 5시간이 걸렸다. 850마력 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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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23]"총각은 새우를 먹지 마라" 지면기사
[경인일보=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혼자서 여행하는 사람은 새우를 먹지 말라'한국에서 젓새우가 가장 많이 나는 곳은 임자도와 낙월도 등 신안의 바다다. 이 지역에서 전국 젓새우의 60% 이상이 산출된다. 중국산이 아닌 국산의 경우 소래나 광천 토굴젓 등 이름난 새우젓들도 대부분 여기서 난 젓새우를 사용한다. 대부분의 젓새우는 배에서 잡는 즉시 소금에 절여진다. 새우 양의 15~40%에 해당하는 소금을 넣고 절인 새우는 대개 유명한 새우젓 산지로 가서 숙성 과정을 거친 뒤 시장에 나온다. 더운 한여름에 잡히는 육젓은 김장철까지 오래 보관해야 하기 때문에 소금을 많이 넣지만 가을에 잡히는 추젓은 소금의 비율을 낮게 잡는다. 보통 굴이나 창고 등의 서늘한 곳에서 2~3개월 정도 발효시키면 새우젓이 탄생한다.임자도 전장포, 소래 포구, 강경, 광천, 마포 등이 예부터 새우젓 시장으로 유명했다. 젓새우는 잡히는 시기에 따라 이름도 다양하다. 음력 3~4월의 새우는 춘젓, 5월에 잡히는 것은 오젓 혹은 오사리젓이라고도 한다. 산란기인 6월에 잡히는 육젓이 최상품이다. 다른 새우보다 살이 통통해 값은 비싸지만 김장용으로 선호된다. 7~8월은 자젓, 9~10월은 추젓, 추젓은 주로 요리에 사용된다. 1~2월 한겨울의 새우는 동백하젓, 2~3월 깊은 바다에서 잡히는 가장 작은 새우로는 곤쟁이젓을 담는다. 그 밖에도 자하젓, 차젓, 풋젓, 동젓, 닷대기 젓 등 새우젓의 수는 많기도 하다. 민물새우로 만든 것은 토하젓이다. 새우 극상의 맛은 옛날 궁중 진상품으로 올리던 새우 알젓이다. 새우는 흔히 강장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혼자서 여행하는 사람은 새우를 먹지 말라'거나 '총각은 새우를 먹지 말라'는 등의 식담이 생겨났다. 새우의 영양분은 머리에 가장 많다. 가재 등 다른 갑각류와 달리 새우만이 머리에 알을 싣고, 뇌와 정소, 간장 등에는 단백질이 풍부하다. 그래서 '머리가 붙어 있지 않은 새우는 먹지 말라'는 식담도 생겼을 것이다. 음식은 성질이나 영양이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평성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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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22]피란민들이 소래포구 어업 발달 이끌어 지면기사
# 소래 포구의 산증인, 어촌계[경인일보=]1935년 일제는 화약의 원료가 되는 천일염 반출을 위해 수인선 철도를 건설했다. 철도와 함께 소래포구의 역사도 시작됐다. 철도 건설 초기에는 건설 노동자들과 염전의 염부들을 실어 나르는 나룻배가 포구를 드나들었고 차츰 포구에 정착한 몇몇 주민들도 전마선(노를 젓는 작은 배)으로 어업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일제하에서 소래포구는 크게 번성하지 못했다. 소래포구 도약의 계기는 한국전쟁 피란민들의 정착이다. 어로 경험이 있는 피란민들이 소래의 어업을 주도했다. 1963년 2월, 어촌계원 23명이 모여 임민선씨를 초대 어촌계장으로 추대하고 소래 어촌계를 탄생시켰다. 1970년대 초에는 어선들의 어획물을 육상에 하역할 수 있는 공간인 '물양장'이 조성됐고, 소래포구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1970년대 중반에는 어선 수도 150여척으로 급증했다. 1980년대들어 소래포구는 더 크게 번성했다. 1982년 인천항에 소형 어선의 출입이 금지되면서 인천의 어선들이 소래포구로 대거 몰려 온 것도 계기가 됐다. 그 해 어촌계원은 200명으로 늘어났다.포구의 번성과 함께 횟집들도 증가했다. 1983년 정부는 오랫동안 무허가로 운영되던 횟집들을 양성화시켰다. 이때 지역 주민 32명이 허가를 얻었다. 1983~86년 사이 소래포구는 최전성기를 누렸다. 1984년 11월 한 달 동안 소래포구를 다녀간 사람은 18만명이 넘었다. 그때는 관광버스가 하루 평균 100대씩 밀려들었다. 김장철이면 새우젓 산지로 신문, 잡지, 방송 등에 소개되고 드라마와 영화의 배경으로 빈번히 등장하면서 소래포구는 전국적 유명세를 탔다. 처음에는 새우젓과 생새우를 사려는 사람들이 주로 찾아왔지만 점차 소래에 가면 갓 잡아온 활어 회를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수도권 인근에는 소래포구처럼 옛 정취를 간직한 포구가 남아있지 않은 것도 사람들을 몰리게 만든 이유였다. 소래 어촌계도 홍보에 적극적이었다. 1981년부터 새우를 사러 오는 사람들에게 소래 어촌계 전화번호가 새겨진 봉투를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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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플루 감염 태국인 도시축전 관람 지면기사
[경인일보=목동훈·김명래기자]'인천세계도시축전' 관람객들이 신종플루 감염 위험에 노출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종플루 보균자가 도시축전을 관람한 것으로 뒤늦게 밝혀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10일 인천시와 질병관리본부 등에 따르면 인천에서 열린 '제12회 걸스카우트 국제야영대회'에 참석한 태국인 2명이 신종플루에 감염된 것으로 지난 8~9일 확인됐다. 이들은 지난 7일 도시축전을 관람한 것으로 드러나 2차 감염의 우려가 있다.태국인 K대원은 지난 8일 오후 2시께 발열증세를 보였다. 한국걸스카우트연맹은 K대원과 텐트를 함께 사용한 대원 3명 등 총 4명에 대한 역학조사를 보건당국에 의뢰했다.K대원은 이날 오후 9시30분께 신종플루 확진환자로 밝혀졌다. K대원과 역학조사를 함께 의뢰했던 대원 3명 중 1명은 다음날(9일) 신종플루 확진환자로 판명됐다.K대원 등 걸스카우트 대원들은 지난 7일 도시축전을 관람했다. 7일에는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 국내외 인사 등 5만여명이 도시축전 주행사장을 찾았다. K대원 등 태국인 2명은 신종플루 잠복기 상태에서 도시축전을 관람한 것으로 추측된다.질병관리본부 관계자는 "신종플루 전염기는 증상 발생 하루 전 날부터 소멸 때까지다"며 "이때 다른 사람에게 (신종플루를) 옮길 수 있다"고 했다. 7일 도시축전 행사장에서 이들 태국인과 접촉한 관람객들은 신종플루에 감염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도시축전 주행사장에는 '신종플루 상황실'이 마련돼 있다. 그러나 10일 오후 4시 확인한 결과, 상황실 직원들은 신종플루 확진환자 발생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시 보건정책과 관계자는 "걸스카우트 신종플루 확진환자 문제는 아동청소년과에서 담당하고 있다. 우리는 노코멘트다"고 했다. 보건정책과는 인천지역 신종플루 확진환자 수도 공개하지 않았다. 이 관계자는 "암암리에 16개 시·도가 환자 수를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됐다"며 "지역경제와 행사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비공개를) 이해해 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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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21]소래포구, 저무는 부둣가에 파시가 서면… 지면기사
#어시장 풍경들[경인일보=]포구 시장 골목, 간장 게장을 파는 여자는 같은 자리에서 30년 동안이나 노점을 했다. 꽃게 철에는 주로 간장 게장을 담가 팔면서 낙지젓과 생굴 무침도 함께 판다. 꽃게가 나지 않는 철에는 말린 생선 장사로 생업을 이어간다. "이 시장에서는 한 가지만 고집해서는 장사가 안 된다." 지금도 시장은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는데 여자는 옛날에 오히려 장사가 더 잘 됐다고 회상한다. "그때는 많이 사다가 냉동 해놓고 먹으니까 장사가 잘 됐어요. 지금은 다들 외식을 많이 하니까 장사가 잘 안돼요. 반찬거리도 잘 안사가고. 지금이야 김장철이라 새우 사러온 사람이 많지만 이 때 뿐이에요. 횟집도 옛날 보다 안돼요. 구경만 하고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요."여자는 게장은 그날 담근 것을 판다. 그래야 집에 가면 맞춤하게 익은 게장을 먹을 수 있다. 여기서 익은 것 사가면 "쩔어서 물이 안 좋다." 간장 게장 암 꽃게는 5~6마리 한통에 2만원. 시내의 게장 정식 집에서는 저런 꽃게 한 마리 올려놓고 2만원도 받고 3만원도 받는다. 충북 양념집 앞에서부터 물양장 좌판 골목이 시작된다. 과거에는 젓갈전, 생선전, 조개전, 활어전들의 구분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구분이 무의미해졌다. 마른 생선 좌판 옆에 조개좌판이 있고, 그 옆에 활어집도 있다. 좌판의 주인들이 바뀌면서 자꾸 더 잘 되는 품목으로 바꾸다보니 그렇게 됐다. 그래도 여전한 것은 중간의 젓갈 좌판과 바닷가 쪽으로 난 활어난전 정도다. 그쪽이 그래도 손님도 안정적이고 꾸준한 까닭이다. 시장 들머리에 대하를 파는 왕새우 좌판이 있다. 대하는 두 종류다. 태국산은 1kg에 1만5천원. 사우디산은 1kg에 1만8천원이다. 상인은 사우디아라비아산이 더 맛있다고 권한다. 보기에도 때깔이 좋아 보인다. 사막의 나라에서 웬 해산물인가 싶지만 시장에는 의외로 사우디 산 수산물들이 많다. 대하는 대부분이 냉동이다. 수입산 냉동새우를 해동해 판다. 왕새우 좌판 주인여자는 "소래는 전부 외국산 대하"라고 단언한다. 국산은 가격도 비싸고 물량도 많지 않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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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20]도시의 섬, 추억을 파는 소래 포구 지면기사
# 꼬마기차"색소폰 소리보다 더 깊은 폐부에서 울려오는 듯한 경적 소리, 잘가락 잘가락 밟히는 바퀴 소리, 그리고 갓 출가하여 여대생 티가 가시지 않은 채 팔뚝에 연비자국이 아직 아물지 않은 수해 스님을 태워 보내기 위해 어느 날 새벽 별을 보며 배웅 나갔던 여섯시 반의 이른 새벽 열차…."윤후명의 소설 '협궤열차' 속에서 그려지는 열차의 모습은 애잔하다. 1970년대 말쯤이었다. 송도역에서 협궤열차를 타고 소래에 처음 가 본 것이. 열차는 장난감 열차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작은 열차를 '꼬마기차'라 불렀다. 그때는 송도에서 수원까지 46.9㎞의 노선만 살아 있었다. 송도에서 출발한 기차는 남동, 소래, 달월, 군자, 원곡, 고잔, 일리, 사리, 야목, 어천을 거쳐 종착역인 수원역에 도착했다. 협궤 열차가 사라지기 전, 인천에 살았던 사람 중 꼬마 기차에 대한 추억 하나쯤 없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수인선 철도는 일반 철길 폭의 절반 밖에 안 되는 폭 72.6㎝의 협궤 철로였다. 마주 앉은 승객의 무릎이 맞닿을 정도로 객차 안은 좁았다. 협궤열차는 문학과 방송, 영화 등의 무대로 활용되면서 유명세를 탔고 덩달아 소래포구의 명성을 높이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바람이 제법 거세다. 이제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소래철교에는 난간이 설치되었고 사람들은 자유롭게 건너다닌다. 철로가 있던 자리에는 포장마차와 식당과 난전이 들어섰다. 거기서 사람들은 한 잔에 천 원짜리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고, 전어 구이를 먹고, 호떡과 국화빵, 마른 새우와 멸치를 사간다. 생굴무침과 바지락을 팔러 나온 행상들, 텃밭에서 기른 호박과 시금치, 고추, 알타리무를 들고 나온 할머니들도 있다. 철로에서 마시는 막걸리 맛은 각별하지만 나는 여전히 협궤열차가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쉽다. 소래포구는 협궤열차 때문에 생긴 포구였다. 소래포구가 생기기 전에는 대부분의 배들이 시흥시 포동의 새우개포구로 드나들었다. 1907년 일제는 주안에 시험용 염전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바닷물을 끓여서 만드는 전통 자염(煮鹽) 생산지였던 주안, 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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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19]해일보다 무서웠던 파시의 종말… 지면기사
# 1923년 굴업도 해일로 200여척의 어선 조난'어기 중 굴업도 전면 선박 파괴 200여척'. 동아일보 1923년 8월 16일자 기사의 제목이다. 기사는 해일과 폭풍으로 130호의 가옥이 파괴되고 굴업도 항에 대피했던 100척과 항 밖에 있던 100척 등 모두 200여척의 민어잡이 어선이 조난당했다고 보도한다. 바다는 잠잠했고 해일의 조짐은 어디에도 없었다. 8월 12일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전조라면 전조였을까. 하루 밤낮을 꼬박 비가 쏟아지더니 8월 13일 아침, 바다는 갑자기 폭풍에 휩싸였다. 100여척의 어선들은 거센 바람과 파도를 피해 굴업도 내항으로 피난했고 나머지 어선들은 항 밖에 닻을 내리고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거센 바람은 그치지 않았고 곧이어 무서운 해일이 밀어닥쳤다. 아비귀환. 내항 외항 할 것 없이 굴업도는 아수라 지옥으로 변했다. 당시 민어잡이 어선 한 척에는 보통 5~6명씩 승선했으니 해일은 200여척의 배에 승선한 1천200여 선원들을 삼켜버렸다. 파시촌을 형성했던 조선 가옥 120호와 일본사람 상점 6호, 중국사람 상점 2호도 '바람에 날려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취재를 위해 굴업도를 방문했던 동아일보 기자는 "인가는 바람에 날리고 어선은 파도에 잠겼고 사람은 용왕의 밥이 되었다"고 당시의 참상을 기록했다. 후일 일제의 피해 상황 집계에 따르면 굴업도에서만 사망 실종자가 120명이다. 그러나 실제 피해는 그보다 더 컸을 것이다. 사고 후 굴업도 이재민들에게는 사망자 가족 10원, 기타 3원씩의 보상금이 지급됐다.1923년 8월의 해일 사고를 지금 굴업도 주민들은 '기미년(1919년) 윤칠월' 태풍으로 기억하고 있다. 주민들은 모두가 기미년 태풍 때 '장수리 파시촌'이 큰 피해를 입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이는 1923년이라는 다수의 당시 신문 보도 기록들과는 어긋난다. 아마도 잘못 전해진 집단 기억이 아닐까 싶다. 해일 이후 일제는 굴업도의 어업 근거지를 덕적도 북리로 옮기게 했다. 그러나 해일 사고 뒤에도 한동안 굴업도에서는 민어 파시가 계속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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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18]<br>"굴업도 앞바다가 인천항구 같았어" 지면기사
# 개머리, 폭풍의 언덕굴업도 개머리 해안, 드넓은 초지는 오래 전 섬의 목장이었다. 소떼를 방목하던 목초지가 지금은 방목 염소와 사슴들의 터전이다. 초원의 길을 따라 개머리 끝 절벽으로 간다. 인기척에 놀랐는지 풀숲 속에 숨어 있던 사슴의 무리 쏜살같이 달아난다. 굴업도 이장 집에서 키우던 사슴 한 쌍이 울타리를 탈출한 뒤 스스로 번식해서 지금은 대가족을 이루었다. 마른 억새가 무성한 목초지 가운데 아기 염소 한 마리 처참하게 죽어 있다. 맹금류의 먹잇감이 된 아기염소. 황조롱이 한 마리 상공을 선회하다 사라진다. 필시 저 황조롱이의 짓이다. 섬은 매와 황조롱이, 검독수리, 말똥가리 등 멸종위기종 맹금류의 서식처다.사나운 날짐승의 한 끼 식량으로 바쳐진 어린 들짐승. 생(生)은 저토록 처참하고 잔혹하다. 생은 누구의 편도 아니다. 여리고 어린 생명이라 해서 봐주는 법이 없다. 한 목숨 죽어야 한 목숨 이어지는 생애의 벌판. 우리는 모두 남의 목숨으로 연명하는 생의 도축자들. 목숨이 주식인 생이여. 나는 육을 먹으나 내 몸을 이루는 것은 고기가 아니다. 내 몸은 영혼들의 집합소. 내 몸에 쌓인 영과 혼들. 헤아릴 수 없는 목숨들이 쌓여 한 목숨 이루었다. 굴업도 개머리 해안, 폭풍의 언덕에서 나는 내가 아니다. 어디에도 나는 없다. 나 아닌 것들이 모여 내가 되는 생이여. 목숨이여!# 인천 앞바다 대표적 민어어장, 굴업도굴업도(掘業島)는 응회암으로 형성된 섬이다. 화산 폭발 후 그 재가 날아와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졌다. 1983년 국립중앙박물관 조사단의 패총 발견으로 굴업도에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삼국시대, 고려시대에도 굴업도에는 사람이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굴업도 역시 여말 선초의 공도정책으로 섬은 수백년 동안 비어 있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굴업도에 사람이 정착해 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부터다. 당시 굴업도에 처음 들어간 이들은 덕적도의 벗개(서포리) 사람들이었다. 오래 전부터 벗개 사람들은 어기에는 굴업도에 들어가 농막을 치고 어로활동을 하다 어기가 끝나면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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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17]1936년 8월 '민어의 어기로 덕적도 대혼잡' 지면기사
# "인천 근해의 어장 중 '넘버원' 덕적도"덕적군도는 일제 초부터 굴업도 민어어장과 울도 새우어장의 발견으로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굴업도가 덕적군도의 어업 전진기지였다. 하지만 1923년 대해일로 굴업도에 피항 중이던 100여 척의 어선이 파선되고 많은 인명피해가 나자 일제는 어업전진기지를 덕적도 북리로 옮기게 했다. 1925년경부터 북리항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중선(中船) 배들로 북적거렸다. 연평도 조기잡이가 끝나는 6월말부터 8월 초순까지 북리 어장과 굴업도, 각흘도 어장 등에서 민어잡이가 이어졌고 북리에는 민어파시가 섰다. 1935년 8월11일자 '조선중앙일보'는 '성어기에 덕적도로 데뷔하는 수호진'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경찰과 우편, 무전, 의료진 등이 8월 10일 일제히 덕적도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들이 덕적도에 진입한 것은 인천 근해의 어장중 '넘버원'인 덕적도 수천 종업원의 편리를 도모코자 였다. 북리 민어파시에 몰려든 수천 명의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경찰이 들어가고 임시 우체국이 서고 의료진이 파견되었던 것이다. 1936년 8월 8일 '조선중앙일보'도 '민어의 어기로 덕적도 대혼잡'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내 북리 민어파시 소식을 전하고 있다. "각처로부터 덕적도를 바라고 몰려드는 어상, 선원, 색주가 등이 수천 명에 달하므로 인천서에서는 임시주재소를 설치했다." 북리 민어파시는 1930년대 말까지 계속됐다.해방 후에도 한동안 덕적도의 어업은 번창했으나 한국전쟁과 함께 일시 쇠퇴했다. 하지만 휴전 후 배를 가지고 나온 피란민들이 덕적도에 눌러 살면서 덕적도 어업의 성장을 주도했다. 파시 때만은 못했으나 휴전과 함께 연평, 덕적 어장의 조업이 재개되자 북리 항에도 수백 척의 외지 어선들이 다시 찾아 들었다. 1968년 연평도에 어로제한선이 설치되고 연평도에 있던 서해 어로지도본부가 덕적도 북리로 이전해 왔다. 조업 허가와 안전조업에 대한 지도를 받아야 했던 어선들은 북리로 몰렸다. 이 때 잠깐 북리는 파시같은 성황을 누렸다. 선창가에는 옹진수협에서 '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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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16]민어떼가 몰려오면 덕적 바다가 온통 뻘겠다 지면기사
# 덕적도 어업의 중심 북리덕적도에는 배가 드나드는 포구가 여러 곳이다. 도우, 서포리, 진리, 북리 등. 이들 포구 중에서도 황해가 황금어장이었을 때 덕적도 어업의 중심은 단연 북리였다. 북리 포구는 작은 쑥개에 있다. 북리 마을의 서북쪽에 덕적도 주산인 국수봉이 있다. 국수봉 아래 작은 쑥개와 큰 쑥개 사이 바다는 U자형의 만을 이루고 있어 배들이 피항하기 좋다. 수심이 깊지 않고 조수간만의 차가 크다는 단점이 있지만 만조시에는 수백 척의 어선이 정박할 수 있다.작은 쑥개, 폐가가 된 옛 선주 집 마당으로 들어선다. 문짝은 떨어져 나가고 쓰다 버린 가구들이 나뒹구는 빈집은 쓸쓸하다. ㄷ자 한옥은 선주 가족이 살던 본채였을 것이다. 북리 선주 집을 상징하는 2층집은 문간채 옆에 서 있다. 2층집은 덕적도 북리에만 있는 부의 상징이었다. 2층은 전체가 하나의 넓은 방이다. 사방에 유리창을 달았고 각 방향마다 두 개씩의 창문을 넣어 어느 방향이나 전망이 탁 트였다. 선주는 이곳 마루에 앉아 북리 항으로 들어오는 자신의 배를 기다렸다. 만선의 북소리가 울리면 마질주(맞이술)를 준비하도록 지시하고 잔치를 서둘렀다. 먼지에 찌든 마루 한 쪽에는 엉킨 그물이 겹겹이 쌓여 있다. 면사(綿絲) 그물. 연평도에서도 보지 못한 면사 그물이 덕적도에 남아 있다. 손으로 한 땀 한 땀 짜서 만든 그물, 저 그물은 이미 문화재다. 경기만 연안의 섬들 어디에도 없고 오직 덕적도 북리에만 있는 이런 형태의 2층 선주 집 역시 어업문화재로서 가치가 크다. 이 집의 주인은 북리 선주 소창모씨였다. 한창 때는 4~5척의 어선을 소유한 큰 선주였다. 그는 어업 활동으로 번 자본을 투자해 인천에서 극장까지 운영했었다.북리 마을 구석구석에는 과거 영화롭던 시절의 흔적이 남았다. 작은 섬 마을에 다닥다닥 붙여 지은 집과 골목길이 남아 있다는 것은 과거의 번영을 나타낸다. 작은 포구에 하나의 해상 도시가 세워졌다가 사라져 버렸다. 폐허는 상처가 아니라 영화롭던 시대의 기록이다. 파시 때 외지에서 온 선원들을 먹이고 재우던 여관들도 모두 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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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15]'쟁기주며' 바다밭을 갈던 덕적도 어민들 지면기사
# 일제의 식민지되면서 덕적도 어선도 나가세기 배로일제시대 초기 덕적도에서도 전래의 어선인 봉선(蓬船)이 사라지고 일본식 어선인 나가세기 배가 등장했다. 일본 나가사키(長崎) 어민들이 만들어 사용하던 안강망 어선을 덕적도에서는 일중선(日中船), 혹은 나가세기 배, 안강망 배라 했다. 덕적도에서 처음으로 나가세기 배를 도입한 사람은 북리의 문태순이었다. 덕적도 사람들도 초기에는 나가사키에 직접 가서 배를 지어 오기도 했지만 차츰 일본인 도목수 밑에 들어가 목수 일을 배워 온 조선 목수들에 의해 나가세기 배가 보급됐다. 1930년대에는 대부분의 덕적도 어선들이 나가세기 배로 바뀌었다. 풍선(風船)이었던 덕적도의 나가세기 배들은 한국전쟁 이후 차츰 기계배로 바뀌어 갔다. 김춘광, 송재순, 장경업, 최봉도 등이 덕적도의 기계화 1세대 선주들이었다.나가세기 배의 선체에는 여러 칸의 선실이 있었다. 코칸은 배의 맨 앞머리에 있는 창고다. 선미에는 뒷마칸이 있었다. 그물 등속의 어구를 넣는 창고다. 뒷마칸 앞쪽에는 방장이 있었다. 선원들이 숙소로 쓰는 방이었는데 서드리칸이라고도 했다. 어획한 조기는 중간의 사이다칸에 적재했다. 사이다칸이란 이름은 처음 나가사키에서 들어온 일본 어선들이 이 칸에 사이다를 넣고 온 데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다. 연평도처럼 덕적도에서도 그물을 바다에 설치하는 것을 '쟁기준다' 했고, 조업에 필요한 선구를 총칭해 '트쟁기'라 했다. 어업 또한 먹거리를 마련한다는 의미에서 농사일의 연장으로 본 것이다. 농민들이 논밭을 갈 때 어민들은 바다를 쟁기질하며 삶을 이어갔다.오랜 세월 북리에서 배 목수와 선주를 지냈던 강명선(68)씨를 만났다. 예부터 '집 목수는 배를 못 짓지만 배 목수는 집을 짓는다'는 말이 있다. 배 목수의 기술이 그만큼 고급이라는 뜻이다. 강씨는 20대 후반부터 선주가 되어 한때는 안강망 어선 4척으로 조기와 민어, 갈치 등을 잡았지만 하나씩 팔아먹다가 망했다. 강씨는 11살까지 황해도 옹진군 봉구면 평양리 육도에서 살았다. 1·4후퇴 때 부모님을 따라 충청도 원산도까지 피란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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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14]섣달 그믐날 국수봉 산신령께 제사 지면기사
# 덕적군도 최초의 어장 울도, 새우파시와 '울도어화'로 유명덕적군도(德積群島)에서 근대적 의미의 어업이 시작된 것은 1900년, 소야도의 조덕기씨 등이 울도 근해에서 새우어장을 발견하면서부터다. 1930년 12월5일에는 덕적면 어업조합이 설립됐고 덕적도의 어선들은 평북 의주 앞바다에서 영광이나 제주도까지 조업을 나갔다. 1939~1940년, 덕적도의 어선은 중선 140척, 소선 200척, 발동선 30여척 등 총 370여척이나 됐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에는 중선이 68척, 소선 100척, 발동선 10여척 등 180여척이었다. 덕적군도의 어업이 번창하게 된 것도 중국의 칭다오, 다롄, 톈진, 상하이 등지로 울도 어장의 건하(마른새우)를 수출하면서부터다. 중국 상인들은 덕적도에 상주하며 건하를 수매해 중국에 되팔기도 했다. 음력 3월 중순, 어선들이 몰려들면 울도에는 새우파시가 섰다. 파시는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말까지 가장 크게 번성했다. 울도의 '작은 마을은 온통 술집 천지'였다. 야간 조업을 하는 새우잡이 어선들의 불빛이 장관이었다. 그래서 '울도어화'는 덕적 팔경의 하나로 꼽혔다. 하지만 1949년 중국이 공산화 되고 수출길이 막히자 울도 새우파시도 막을 내렸다. 그후 울도, 문갑도 등 덕적 근해에서 잡힌 새우는 젓새우로 팔려 나갔다. 중선배들이 울도 어장으로 새우잡이를 오면 덕적면 어업조합에서는 싣고 온 소금가마 숫자에 따라 어업세를 매겼다. 젓새우는 배에서 바로 소금에 절였기 때문에 소금의 양이 어획량의 척도였다. 새우는 경매를 하지 않고 대부분 상회를 통해서 거래됐다. 젓새우는 대부분 부평의 새우젓 토굴로 보내졌고 토굴 속에서 숙성된 뒤 김장용으로 팔려 나갔다.향토사학자 김광현은 '덕적도사'에서 과거 덕적군도의 주요 어장으로 덕적도, 선협도(선갑도), 수심도, 굴업도 등을 꼽고 있다. 주요 어족은 조기(석수어), 민어, 수조기, 도미, 가자미, 홍어, 새우(白蝦), 갈치(刀魚), 농어 등이었다. 조기는 수심도 이북에서 많이 났고 수조기는 영흥도 근해서 주로 잡혔다. 민어는 굴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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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13]神仙의 섬, 민어의 고장 덕적도 지면기사
덕적도 서포1리 마을 민박집. 주인 노인이 만든 솔방울 베개를 베고 잔 때문이었을까. 밤새 솔바람 소리를 들었다.바람이 불고, 눈보라치고, 햇볕 따뜻한 봄이 오고, 비가 내리고, 밤과 낮이 수시로 교차했다.소나무에 새순이 돋고, 송화 가루가 날리는가 싶더니 해변은 사람들 소리로 떠들썩했다.물놀이 하는 사람들, 솔숲 그늘에 누워 낮잠을 자는 사람들, 고기 굽는 냄새, 조개 잡는 아이들, 찬바람이 불고 다시 해변은 텅 비어버렸다. 그렇게 세월이 갔다. 꿈이었다. 꿈을 꾼 것은 나그네였을까. 베개 속 솔방울들이었을까.나그네는 섬에 오면 어디보다 먼저 산으로 간다. 모든 섬은 산이다. 어제 산길을 따라 서포리까지 왔다.산에 올라서야 비로소 섬의 본 모습을 볼 수 있다. 섬에서 산으로 가면 덤으로 얻을 수 있는 즐거움 중 하나가 흙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나그네는 뭍에서 온 누구보다 먼저 섬의 속살에 안겨 볼 수 있다. 흙과 나무와 바람의 향기, 숲에서 한 번 걸러진 바다 내음도 한결 청량하다.대체로 섬들의 산은 높지 않아 가볍게 오를 수 있다. 산길을 오르며 푹신한 흙을 밟는다.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진다.공중의 구름을 걷는 느낌이 이러할까. 사람이 관절이 상하고 자주 무릎이 아픈 것은 걷지 않아서가 아니다.흙길을 걷지 않기 때문이다. 더 이상 사람이 걸을 수 있는 흙길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당나라 침략군의 전진기지덕적도에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의 영토였으나 덕적도 또한 한강유역의 다른 땅처럼 신라와 고구려에 번갈아 점령당했던 경계의 땅이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는 왜구들 때문에 섬은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공도(空島)가 되었다. 다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부터다. 조선시대 내내 남양부와 인천 도호부에 속했던 덕적도는 일제 때에 부천군에 소속되었다가 1973년에는 경기도 옹진군이 되었고, 199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옹진군이 인천시로 편입되면서 100여년 만에 다시 인천의 강역이 됐다.덕적도는 고대 황해 횡단 항로의 길목이기도 했다. 당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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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12]연평도 조기시대의 종말 지면기사
# 연예인들이 공연을 하고 개도 돈다발을 물고 일제 때 연평도에는 상주하는 경찰이 없었지만 조기 파시 때면 해주에서 경찰들이 임시로 파견 나왔다. 일본인 소장이 순사 3~4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순사들만으로 인원이 부족해 파시기간 동안 임시직원을 썼다. 그들을 '대리 순사'라 했다. 순찰은 대체로 완장과 목검을 찬 대리 순사들의 몫이었다. 하루도 사고가 없는 날이 없었다. 섬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큰 사고가 나면 해주로 무전을 쳤다. 경찰선이 바로 달려와 범인들을 싣고 갔다. 파시가 끝나면 순사들은 철수하고 다시 연평도는 구장(區長)을 비롯한 섬의 원로들과 주민들이 동규(洞規)에 의해 자치적으로 질서를 유지해 나갔다. 그것을 '동네방'이라 했다.파시 때면 카바레도 생기고 가설 신파극장이나 곡마단도 들어왔다. 더러 연예인들이 위문공연을 오기도 했다. 1960년대에는 파출소 앞 공터에 가설극장이 생기고 백남봉, 양훈, 양석천 같은 코미디언이나 장소팔, 고춘자 같은 만담가들이 공연을 했다. 배뱅이굿으로 유명한 이은관도 와서 공연을 했다.공연이 끝난 다음날 가설극장 터에 나가면 돈다발을 줍는 일도 흔했다. 선주나 선원들이 술에 취해 구경을 나왔다가 떨어뜨리고 간 것이었다. 파시 때는 개도 돈다발을 물고 다녔다는 말이 헛소리가 아니었다. 파시에 사람과 돈이 몰리니 간혹 폭력배들이 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연평도에서 쫓겨났다. 일제시대 어느 해던가 해주 시멘트회사의 오야붕이라는 폭력배가 부하들을 이끌고 연평도를 '접수'하러 왔다. 해주 깡패가 왔다기에 선원들과 마을 사람들이 구경을 갔다. 오야붕이란 자는 머리에 기름을 잔뜩 바르고 긴 앞 머리카락을 왼쪽으로 돌려서 붙였는데 무엇으로 붙였는지 바람이 불어도 머리카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야붕은 지팡이 손잡이에 쇳덩이를 덧댄 '등산마찌'를 무기 삼아 들고 왔다. 하지만 연평도에 모인 선원들이 모두가 힘깨나 쓴다는 거친 뱃사람들이었다. 선원들이 깡패들을 에워싸고 "야야, 너 해주에서나 깡패 노릇하지 연평 와서 깡패 노릇 하려고 하냐"고 엄포를 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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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11]하인천 어시장 지면기사
# 경인지역 최대 어시장 하인천 포구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연평도에서 개성, 평양, 해주 등 이북 지방으로의 교역은 차단됐다. 동시에 서울의 마포나루를 출발해 한강의 물길을 따라 연평도로 이어지던 뱃길도 끊기고 말았다. 그때부터 인천은 연평어장의 조기들이 뭍으로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통로가 됐다. 당시 인천의 포구는 화수, 만석, 화평 부두 등 여러 곳이었지만 그중에서 중심은 하인천 포구였다. 인천 어시장이 경인지역 수산물의 최대 공급처가 된 것이다.조기철이면 하인천 부두는 조기잡이 어선과 상고선 등이 드나들며 북새통을 이루었다. 안강망 배들은 사리 때 조업을 하고 조기가 들지 않는 조금 때는 직접 조기를 싣고 하인천으로 들어왔다. 부두로 들어오는 모든 어패류는 '강제 상장제'에 따라 수협 위판장의 경매를 거쳐야 거래가 가능했다. 수협 위판장은 지금의 하인천역 철길 건너편에 있었다. 하인천 위판장은 경기도 지부 수협이 관리했고 화수동 위판장은 인천시 수협이 관리했다. 하인천 부두 주변에는 어시장의 좌판들과 수 십 개의 대형 상회들이 성시를 이루었다. 경인상회, 부흥상회, 용유상회, 미자상회, 종호상회, 대남상회, 오씨상회 등은 조기를 비롯한 어류와 굴, 조개 등의 패류를 취급했다. 상회의 주요 고객은 서울과 인천, 경기 지방의 상인들이었다. 서울의 노량진 시장이나 인천의 여러 시장 상인들도 하인천에서 수산물을 사다가 팔았다. 하인천은 오랜 세월 인천의 중심 어시장이었다.# 1890년 인천 최초의 어물객주 생겨하인천 어시장의 역사는 1900년대 초부터 시작됐다. 개항 전 인천은 한적한 포구에 불과했다. 일본인들의 거주가 늘어나면서 인천에 최초로 어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1887년 남양에서 강화까지 인천 근해의 어로권을 획득했다. 15척의 어선으로 조업을 시작한 일본인들은 인천에서의 수산물 판매권도 얻었다. 1895년부터는 조업하는 일본 어선수가 30여척으로 늘어났다. 그 무렵 조선의 어선들도 인천항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인천 최초의 어물 객주는 1890년, 한양의 청파동에 살다 인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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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연평도 어업조합 지면기사
1. 소연평 꼭대기 실안개 돌고 우리 집 문턱엔 정든님 들고2. 돈 실러가세 돈 실러가세 연평 바다로 돈 실러가세3. 뱀자네 아주마이 인심이 좋아서 막뚱딸 길러서 화장이 줬다네4. 백년을 살자고 백년초를 심었더니 백년초가 아니라 이별초드라5. 바람아 강풍아 불지를 말아라 고기잡이 간 님 고생하네(후렴)니나 니나 깨노라라 아니 놀고 무엇할 소냐 /연평도 '니나나 타령'# 바람아 강풍아 불지를 말아라연평도 여자들은 뱃일 나간 남자들의 무사귀환과 풍어를 기다리며 물동이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노래를 부르는 풍습이 있었다. 바가지 장단을 치며 즉석에서 매김 소리를 넣고 부르던 그 노래가 '니나나 타령'이다. 니나나 타령은 연평도의 아리랑이었다. 뱃사람의 아낙들은 언제 남편을 잃을지 모르는 불안을 노래를 통해 잊으려 했다. 정월 대보름이면 아이들은 달마중을 나갔다. 말린 풀을 자기 나이 수만큼 작은 단으로 묶어 들고 뒷동산에 올랐다. 1960년대까지 연평도의 집들은 대부분이 초가집이었다. 기와집은 드물었다. 살림살이가 다들 고만고만했다. 배를 부리는 연평도 사람 중에는 한 4~5년 조기잡이를 해서 돈을 벌면 뭍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로 충청도 지방으로 나가 논을 사서 농사를 지었지만 더러 인천 등지에 상점을 여는 사람도 있었다. 연평도에는 조기만이 아니라 굴과 조개, 새우(白蝦)도 많이 났다. 1936년 8월에는 연평도에 몰려든 새우잡이 어선이 600여척에 달하기도 했다. 연평도 사람들은 굴을 깨거나 새우젓을 담가두었다가 연백에 나가 쌀이나 조 등의 곡식과 바꿔왔다. 한 번 굴 장사 갔다 오면 벼나 조가 몇 가마씩 쌓였다. 그것으로 일 년치 양식을 했다. 굴은 쩍이 하나도 없이 깨끗하게 씻은 뒤 볏짚으로 엮은 '굴 오재비'에 담아 가서 팔았다. 방수가 되는 굴 오재비에는 바닷물을 채워 굴의 신선도를 유지했다.# 물동이 이고 물장사하던 연평도 여자들조기잡이 배들이 들어오면 연평도의 여자들도 바빠졌다. 연평도에 정박한 배들은 물과 식량, 장작 등을 보급받았다. 여자들은 이때를 틈타 물을 팔기 위해 물동이를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