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진 영
[경인일보=]중·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항상 배웠던 것은 4대 열강으로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였다. 국제정치의 변화에 의해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되었고, 임란이후 우리는 이를 극복하고자 여러 시도를 하였다. 특히 한일합방 100주년이 되는 올해는 우리의 내정과 국제정치의 관계에 대해 더욱 생각하게 한다. 가까이는 현재의 분단 상태를 만든 60년 전 한국전쟁부터,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는 을사늑약과 한일합방, 그리고 일본의 한반도 진출이 사실상 용인된 청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 1876년 강화도에서의 개항과 새로운 국제체제의 편입, 아니 저 멀리 1592년 임진왜란까지, 동아시아 국제정치의 중요한 변화는 거의 모두 한반도의 내정에서 촉발되었다.

열강의 이해관계가 있었다지만, 동학혁명이 계기가 되어 조정의 요청으로 청-일 양국군은 한반도에 진입했고, 서해바다, 아산과 평양은 물론, 중국 랴오닝성에서 청-일 양국군이 전투를 치렀던 것이 청일전쟁이었다. 1882년 구식군대의 반란이 계기가 되어 발생한 임오군란도 예외가 아니었다. 내정에서 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와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의 대립이라지만, 우리 내부의 난을 계기로 대외적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권한을 확대시켜 주는 국제문제로 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교과서에서 항상 배웠듯이, 당시 우리의 세계에 대한 인식은 매우 열악했던 것 같다. 비록 일부가 어느 정도 인식하였을지라도 내부적인 대립에 골몰하느라 바깥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근세 동아시아 역사상 중요한 고비마다 우리의 내부 문제가 국제화되고, 그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이 우리인데도, 정작 우리가 국제정세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은 비극이다. 물론 분단이라는 상황은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우리의 일을 국제정치와 연관하여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또다른 비극을 불러올 수 있는 사안인 것이다.

이번 천안함 침몰사건을 바라보면서 또다시 이런 생각이 든 것은 대학에서 국제정치를 가르치는 직업병 때문일까? 천안함 침몰 후 일본이 보인 예의주시 반응이나, 서해 바로 대안의 산둥반도와 랴오닝 반도에 정찰기지를 가진 중국의 상대적인 침묵, 한-미 합동 군사훈련 속에서의 안보적 측면에 대한 보도 등, 국제적인 반응은 일어난 사실 위주로 많이 생산되고 보도되었어야 했다. 명예와 사기로 사는 군의 대응 태세를 비난하는 일은 사후에도 가능하다. 침몰사건 후, 국가안보적 측면에서 수행 매뉴얼과 고도의 판단에 의해 대응하느라 바쁜 사람들에게, 절차상의 많은 문제를 알권리라는 이름하에 속속들이 파헤치는 것이 그렇게 시급한 일인가?

1883년 1월 4일, 18세 윤치호는 일본 도쿄에서 아침 10시 기차로 요코하마에 갔다가 2시에 도쿄 시나가와로 돌아온다. 반나절 생활권이다. 3일전, 그는 박영효 일행이 수신사로 고베에서 출발했다는 전보를 받고, 시모노세키의 민영익으로부터 출발 전보도 받았다. 30년전 일이 아니라 130년 전의 일이다. 서구식 근대화를 받아들인 일본의 교통통신 체계는 윤치호에게 다른 시각을 가지게 했을 것이다. 당시 윤치호가 바라보는 한국과 세계는 윤치호의 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중요한 점은 우리의 내부 문제를 외부에서 바라보면 더 명확하게 바라볼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외부의 시각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더군다나 우리의 내정이 원인이 되어 사건이 국제화되고, 결국 우리가 피해자가 된다면 더욱 그렇다.

한국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 개통식은 이로 부터 15년 지난 1899년 9월 18일 열렸다. 현재의 서울 노량진역에서 인천역 인근까지 약 33.2㎞구간으로, 걸린 시간은 약 1시간 40분이었다. 15년이 지난 후에 변화하는 것은 글로벌한 지금 너무 늦다. 국제적 상호 의존이 커진 지금, 우리 일과 국제정세의 관계를 차분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