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는 경제 주권을 담보로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급전 200억 달러를 차용해서 수습하는 한편 재발방지대책을 강구했다. 재벌들의 과도한 차입을 근절하기 위해 출자총액제한제를 부활하고 은행에 대한 금융감독을 한층 강화했다. 또한 기업 오너들의 고질적인 황제경영을 견제하기위해 사외이사제를 도입했다. 엉터리 외부감사로 일관했던 회계법인에 대해서도 철퇴를 가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한가. 금년 들어 2차에 걸친 저축은행 구조조정을 통해 확인된 것은 실망 그 자체다. 수많은 서민예금자들이 또다시 화이트칼라범죄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2천만원이 예금된 저축은행 통장을 언론에 공개했음에도 뱅크런의 불안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실대출 근절을 공언했으나 립서비스에 불과했다.
금융 감독 당국의 책임이 가장 크다. 새마을금고나 진배없는 동내 서민금고에 '은행' 명칭을 부여해서 시중자금의 대거 유입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2000년대 말부터 저축은행의 프로젝트파이낸싱(PB) 문제가 수면위로 부상했음에도 수수방관했던 것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8·8클럽' 운운하던 모 저축은행의 BIS비율이 불과 1년도 못돼 마이너스 12%로 수직낙하한 점이다. 마치 1960년대 초에 불거진 증권파동이 연상된다. 이런 감독기관이 왜 있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회계법인들의 구태(舊態)도 여전하다. 이번에 새로 퇴출된 토마토, 제일 등 7개 저축은행들에 대한 감사보고서에서 모두 '이상 없음'으로 판정한 때문이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회계법인들의 면면이다. 프라임과 제일2저축은행의 회계감사를 맡았던 삼일회계법인은 국내 최대의 회계법인으로서 지난 외환위기때도 부실감사로 여론의 지탄을 받았었다. 에이스와 파랑새저축은행의 감사를 맡은 안진회계법인는 4대 메이저 중 하나다. 스타 회계법인들의 감사결과가 이 정도이니 나머지 감사보고서는 오죽하겠나. 유명 회계법인의 대표를 역임한 모 회계사의 "회계법인이 일감을 주는 고객(기업)의 뺨을 어떻게 때릴 수 있겠는가"란 귀띔이 시사하는 바 크다. 퇴출 저축은행들을 허위감사한 회계법인들에 응분의 책임을 물어야할 것이다.
사외이사들의 한심한 작태는 점입가경이다. 상법에는 감사위원회의 3분의 2 이상을 사외이사로 구성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사외이사들의 역할이 돋보이는 이유다. 영업정지된 저축은행들의 사외이사들은 대전지방국세청장, 감사원장, 금융감독원 고위간부 출신 등 경력이 화려하다. 그런데 대영, 제일, 토마토, 프라임 등 4곳의 경우 작년 7월부터 올 3월까지 총 59차례의 이사회가 열렸으나 사외이사들이 안건처리에 제동을 건 사례는 단 한건도 없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사외이사들이 본연의 임무는 외면한 채 악질 오너경영인들의 방패막이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부실한 감시체제를 보강하기 위해 정부는 2001년 6월에 내부고발자 보호목적의 부패방지법을 제정했다. 지난달 30일부터는 공익신고자보호법이 효력을 발휘한 상황이다. 그러나 이 또한 문제가 있다. 돈이면 저승사자라도 부리는 판에 내부고발자 색출은 식은 죽 먹기인 탓이다. 조직에 대한 충성심을 우선하는 직업윤리 내지는 의리를 우선시하는 우리네 정서와도 부합하지 않는다.
제동장치 없는 기업오너들의 황제경영이 경제불안을 증폭시키고 있다. 도처에 숨겨진 부실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되지 않는 때문이다. 상궁지조(傷弓之鳥)의 기우(杞憂)이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