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인수 / 서울본부장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후보가 결국 아버지 무덤에 침을 뱉었다. 9월 24일 기자회견. 박 후보는 "5·16과 유신, 인혁당 등은 헌법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아버지 박정희 시대의 대한민국의 시작과 끝이 헌정파괴의 역사였음을 인정한 것이다. "정치에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음은 과거에도 앞으로도 그래야 할 민주주의 가치"라고도 했다. 경제기적이라는 목적을 위해 독재라는 수단을 선택한 아버지의 잘못을 시인한 것이다.

박근혜후보 독재 선택한 아버지 잘못 시인
기자회견후 대선지형 변화 따지는 정치인 분주
편향된 인식으로 역사적 사실 보는일 경계해야


지금 박 후보의 심정은 어떨까. 아버지의 역사를 옹호해야 하는 딸의 처지와 아버지의 역사를 비판하는 여당 대통령후보의 입장이 상충하는 충격으로 몸은 고단하고 마음엔 거친 파도가 일렁일 것이다.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는 "아주 힘든 일이었을텐데 아주 참 잘했다. 국민통합으로 가는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무소속의 안철수 후보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정말 필요한 일을 했다. 진정성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역대 대선정국에서 상대후보에 대한 이같은 헌사는 없었다. 대권을 놓고 사즉생의 경쟁을 벌이는 판국이라도 아버지를 부정할 수 없는 딸이자 부정해야만 하는 대통령후보 박근혜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차린 것이니 아름답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박 후보의 기자회견을 두고 정치공학적 셈법으로 분주하다. 박 후보에게 딸로서가 아니라 대선후보로서 박정희 시대의 과오를 인정하라고 강제했던 세력들이 그렇다. 박 후보의 기자회견이 갖는 역사성, 진정성에 대한 평가는 뒷전이고 기자회견 이후의 대선지형 변화를 탐지하느라 정신이 없다.

박 후보를 기자회견장에 밀어세운 새누리당 내부세력이나 야당의 대선캠프들은 지지율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회견만으로는 안된다. 반성과 사과의 진정성을 실천으로 보여달라"며 공세의 차원을 상향조정하고 나섰다. 역사공방을 벌이는 여야 정치인들의 역사인식이 이처럼 천박하다.

며칠 후면 추석이다. 많은 후손들이 차례상에 선조의 넋을 모실테고 생전의 모습을 기억하며 상념에 빠질 것이다. 우리의 상념 속에서 그들은 어떤 존재일까. 좋았던 추억과 아팠던 기억이 수없이 교차하지만 그저 그리운 내 아버지나 어머니로 기억될 것이 틀림없다. 애정도 바래고 증오도 퇴색해 그냥 그리운 아버지 어머니 말이다.

역사를 소환하는 것도 이와 같지 않을까. 무수한 개인, 다양한 세력, 대립하는 이념, 충돌하는 가치들이 그 시기를 관통했던 시대정신 속에서 종횡으로 소용돌이치다 퇴적된 것이 역사이다. 어느 한 개인, 한 세력, 하나의 이념, 하나의 가치만을 지목해 이것이 정의였고 나머지는 모두 틀렸다고 단언할 수 있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

역사를 자의적으로 함부로 소환하면 안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역사를 소환하려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현재의 역사공동체에게 소환의 목적과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 안목과 양식이 있어야 한다.

박 후보가 정치입문 초기에 아버지의 공과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표현하고 시대의 피해자와 동석했다면 지금 겪고 있는 고단함을 진작 면했을 것이다. 딸로서 아버지의 입장에서만 역사를 소환하고 해석한 결과로 인한 고초이니 안타까운 일이다.

반대로 박 후보에게 5·16을 연좌시키고 유신의 굴레를 씌우려는 야권은 박정희 시대의 어둠만을 소환하고 있지만 이 또한 반쪽짜리 역사인식이기는 마찬가지다. 그 결과 박정희 시대의 밝음을 기억하는 세력에 짓눌려 대선 때마다 단일화에 목매는 처지가 된 지 오래됐다.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모두 역사의 물레를 앞에 두고 새로운 역사의 씨줄과 날줄을 뽑아내고 있다.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지 말고 역사인식의 편향을 경계해야 하거니와 함부로 역사를 소환하려는 무모한 시도는 더더욱 말아야 할 것이다. 그들 스스로 역사가 될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