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2013년, 계사년(癸巳年)의 새해가 시작되었다. 올해로 지명을 얻은 지 600년인 지방이 여럿 있다. 인천시를 비롯하여 경기도의 고양시와 양주시, 용인시, 충북 제천시, 전남 함평군 등 전국의 지자체가 지명 600돌을 맞이하여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개최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600년 '묵은' 지명은 대부분 조선 태종 13년에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고려시대의 군현체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명명된 것으로 당시 이웃 군현과 통폐합되거나 지위가 격하된 경우도 있으나 이후 600년 동안 같은 땅이름으로 '장기지속(Longue Duree!)'해온 것만도 장엄하지 않은가. 사람으로 따지면 회갑을 10번째 맞이하는 10주갑(周甲)에 해당하며, 30년을 한세대로 치면 무려 20세대가 바뀌어 갔으니 참으로 장구한 역사이다.
이 가운데 인천의 변화는 극적이다. 1413년 당시 기초 단위였던 군(群)에서 도호부로, 직할시로, 광역시로 바뀌면서 지금은 한국 제3의 도시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고려시대의 인천의 위상은 인주 이씨가 고려왕실과 7차례나 중첩된 혼인관계를 맺을 만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고려시대의 인천 지명이었던 경원(慶源)이니 인주(仁州)니 하는 지명은 고려 왕실의 왕비들이 태어난 고향이라는 말이며 '고려 왕실 경사의 근원'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대체로 도호부격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올해는 제물포 개항 13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1883년 개항이 이뤄지면서 수도 한양의 방어 진지였던 제물포는 국제항구도시로 탈바꿈했다. 그런데 제물포개항은 조선정부의 능동적 의지가 아니라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요구를 수용하여 이뤄졌다는 점이다.
개항과 동시에 조선은 세계열강의 이권 쟁탈장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의 식민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제물포 개항이 자랑스러운 역사는 아니지만, 한국 근대사의 가장 중요한 분수령에 해당하므로 그 과정을 찬찬히 되새겨 봐야할 것이다. 1883년 제물포 개항은 인천이라는 도시의 역사에서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에 파급된 문화 변동의 결과는 오늘의 한국, 오늘의 한국인에게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계사년에 기억해야 할 문화적 '사건' 하나가 더 있다. 600년 전인 1413년(조선 태종 13년) 계사년에는 조선왕조실록의 첫 작업인 태조실록 편찬이 시작됐다는 점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에서 철종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왕별로 기록한 편년체 사서로,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기본 사료이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및 국보 제151호로 지정돼 있다.
조선왕조가 국력을 기울여 사료편찬사업을 지속했던 것은 단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보는 '거울'이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이었다.
600년 '묵은' 땅이름을 돌아보면서 인천을 비롯한 여러 도시들이 해야 할 일은 그동안 변화한 것이 무엇인지를 찬찬히 살펴보는 일이다. 경계해야 할 일은 행사치레에 급급하여 애초의 동기나 목적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변화의 현상만 주목하게 되면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게 된다. 변화 속에서도 변화하지 않는 것, 구조적 요인이 무엇인지도 찾아야 한다. 인천이라는 도시는 예나 지금이나 '바다'에 의존하며 변화 발전해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이 도시의 미래도 결국 '바다'에 달려 있다는 점일 터이다. '미추홀'이라는 가장 오래된 인천의 지명이 '해상도시'를 의미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