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귀자가 만삭의 아내와 어린 딸, 노모와 함께 서울을 떠나 부천시 원미동(遠美洞)에 정착하는 은혜네 가족의 고단한 삶을 다룬 빼어난 단편소설 '멀고 아름다운 동네'를 한국문학에 발표한 건 1986년 3월이었다. 그녀는 그후 10편의 원미동 연작시리즈를 더 발표하고 87년 '원미동사람들'이라는 한국문학사에 영원히 남을 소설집을 내놓았다. 소시민들의 비루한 일상을 '양귀자식 리얼리즘'으로 묘사한 이 소설은 희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어둡고 비관적이기 이를데 없는 부천 원미동을 사실적으로 냉정하고 치밀하게 그려냈다. 부천은 그런 곳이었다.
이듬해 88년 4월 고단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부천에 교향악단이 생겼다. 부천시립교향악단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힘든 이 척박한 땅에 교향악단이라니…. 사람들은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 운운하며 비웃었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피울 수 있겠냐는 비아냥도 들렸다. 창단 다음해 임헌정이라는 서른여섯의 젊은 지휘자를 맞이할 때까지도 이 교향악단이 먼 훗날 한국 음악계에 거대한 족적을 남길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부천필이 이 좋은 봄날 창립 25주년을 맞았다. 큰 경사다. 예프게니 므라빈스키의 이름 뒤에 자연스럽게 레닌그라드 필 하모니 오케스트라가 따라 오듯 부천필하모니오케스트라 앞에 24년 동고동락을 함께 했던 임헌정이라는 이름 석자는 이제 너무 자연스럽다. '카라얀의 베를린 필'과 '번스타인의 뉴욕필'처럼 '임헌정의 부천필'인 것이다.
한때 슬프디 슬픈 공장의 불빛으로 가득했던 부천을 이제 아름다운 문화의 도시라고 확언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단연코 부천필 때문이다. 임헌정의 부천필이 그동안 보여준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행보는 "부천필 마니아"를 양산했고 부천필은 대한민국 최고의 교향악단이 됐다. 그들이 처음 시도했던 말러교향곡 전곡연주 덕분에 말러 역시 베토벤, 브람스와 함께 우리들에게 아주 친숙한 레퍼토리가 됐다. 부천필 덕분이다. 버밍엄 시립교향악단이 세계적 교향악단으로 발돋움한 배경에 18년간 이곳에서 몸담았던 사이먼 래틀의 헌신이 있었듯, 부천필 뒤에는 임헌정이 있었다. 지금 부천필은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 연주에 도전중이다. 부천필이 있는 부천시민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이영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