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원의 활동에 대한 관심과 환호는 세월에 묻혀 지금은 몇몇 회고담을 제외하면 잊혀진 전설이다. 그의 화려한 발명 신화가 상업적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이 한 원인이겠다. 또 그가 발명한 특허품에 관한 단편적 기사 외에 그의 생애에 관한 자료가 전무한 탓도 클 것이다. 그런데 이성원이 6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는 고일의 회고('仁川昔今')나 그가 아홉 살이 되던 해인 을미년(1895)에 인천으로 이주해 왔다는 이성원 자신의 회상기를 참고하면 그 생애는 성글게나마 복원할 수 있다.
경기도 수원 태생인 이성원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아홉 살이 되던 해인 1895년 개항장 인천으로 이주하였다한다. 인천에 와서 관립일어학교에 합격하였으나 집안사정으로 입학을 포기하고 만다. 한문서당 공부도 가난 때문에 그만두고 어린 나이에 포목점과 운송회사 등에서 점원생활을 하였다. 이성원은 7년간 점원생활로 모은 돈으로 처음에는 고급가구인 목칠기(木漆器) 공장을 운영하였으나 사업이 여의치 않자 개화 문물 중의 하나인 양화점을 열기로 결심한다. 이성원이 약관의 나이에 개점한 이 양화점이 바로 한국의 근대 신발인 '경제화'를 탄생시킨 삼성태이다.
이성원이 1911년에 고안한 경제화는 1913년에 특허등록이 이뤄졌다. 헝겊과 가죽을 이용한 이 발명품은 가벼우면서도 질길 뿐 아니라 값도 싸서 곧바로 전국에서 날개 돋친듯 팔려 나갔다. 짚신과 나막신으로 살았던 당시 한국인들에게 큰 인기 상품이었다. 이성원은 경제화로 상당한 돈을 벌었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개량화'와 '삼성화'라는 신발을 개발하는데 투자했으며 제화에 필요한 재료의 개발에 나섰다. 그가 발명한 만능호(萬能糊)는 헝겊과 고무를 강하게 결합시키는 접착제의 일종이다. 이 접착제는 종래 실과 바늘로 신창을 붙이는 제화방식을 접착제로 붙이는 방식으로 바꾸어 놓았다. 제작비는 줄고 가격은 더욱 저렴해졌다. 그 외에도 튼튼한 신발바닥(만력저), 연결 쇠못(ㄷ자못), 신발 앞뒤에 넣는 고무(고무만주) 등을 발명하였다.
그의 계속된 발명으로 동경박람회에서 수상을 하고, 일본군 병참부대에서는 공장과 제품을 조사하고 군수품으로 납품을 타진할 정도로 유명했다. 그런데 이성원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성공의 기쁨은 잠시였고 발명 자금은 늘 부족했다. 때로는 특허등록이 취소되는 커다란 좌절을 맛보기도 했지만 한번도 특허권을 팔지 않았다. 고락을 같이한 동업자들과 공장 직원을 위해서였다. 재능과 끈기를 믿고 큰 자금을 지원한 재력가들도 있어 사세를 확장한 적도 있었지만, 재료의 개발비용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거액을 호가하던 특허권도, 공장도 모두 남의 손에 넘어가고 다시 빈손이 되었다. 평생을 가난한 이웃들의 신발을 개량하는 데 바친 그는 안타깝게도 61세 되던 해인 1947년에 쓰러지고 만다. 이 백절불굴의 삶은 어떤 성공신화보다 감동적인 기업가의 표상인 동시에 궁핍한 민족을 위해 고뇌했던 참된 지식인의 표상이다. 이번 주말에는 이성원의 삼성태가 있었던 애관극장 부근을 다시 둘러봐야겠다.
/김창수 객원논설위원, 인천도시인문학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