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진오 인천본사 정치부장
日제국주의 추종자들 연회장 사용 가슴 아파
만국공원·차이나타운·청일·러일전쟁…
국제도시 되기위해 모든 기억들 드러낼 필요


인천은 생각할수록 묘한 곳이다. 국제적인 사건과의 연관성이 유난히 많다. 며칠 전 문을 연 중국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국제적인 이야깃거리로 떠오르는 것을 보면서 문득 인천에 생각이 미쳤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은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이다. 그 시각 인천에는 이토 히로부미에 이어 2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한 소네 아라스케와 매국노 이완용이 놀러 와 있었다. 인천항에 정박 중인 광제호(光濟號) 함장이 개최한 연회에 참석한 뒤 밤을 지낸 터였다. 소네 통감은 문란한 생활로 인해 일본 내 일부 급진파로부터 공격을 받을 정도로 소문난 방탕아였다. 광제호 연회가 어땠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인천항을 근거지로 한 대한제국의 군함 광제호가 을사조약 체결 뒤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과 그 추종자들을 위한 연회장으로 쓰였다는 것은 무척이나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광제호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당한 다음날 이완용 일행을 싣고 인천항을 출발, 중국 다롄항까지 가야 했다. 이토의 시신이 다롄항에서 일본 도쿄로 옮겨질 예정이어서 이완용 일행은 다롄으로 길을 잡은 것인데, 이들이 다롄에 도착한 것은 28일 오전이었다. 이완용 일행은 그러나 배에서 내리지 못했다. 다롄에 살던 일본인들의 격앙된 분위기가 보통을 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완용은 조문하는 데 성공했다. 이토의 시신을 실은 군함 아키츠시마(秋津洲)호가 다롄항을 출항하면서 광제호가 머물던 부근 해상에 잠시 정박했고, 이완용은 이때 아키츠시마에 승선해 조문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국제적 이슈가 된 것은 지난 연말 아베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관련이 깊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개관에 대해 한국과 중국이 공조하는 양상을 보이고, 여기에 일본이 반발하는 모양새다. 중국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으로 인해 새로운 관심사로 부상한 한국과 일본, 중국과 일본 사이의 긴장 관계는 인천의 수많은 근대 유적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인천 중구청 일대는 1883년 개항 이후 국제도시로 개발됐다. 특히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중국인 마을과 일본인 마을이 형성됐다. 양쪽의 신경전은 말이 아닐 정도로 날카로웠다. 그 옆에는 다국적 개발부지도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라는 만국공원(또는 각국공원)도 만들어졌다. 아직도 이쪽에는 일제가 남긴 근대건축물이 많다. 또한 차이나타운도 그 옛날 청관(淸館)거리를 중심으로 여전하다. 만국공원은 또 어떤가. 한국전쟁의 영웅 맥아더 장군이 동상이 되어 정상을 지키고 있다. 동상이 세워지면서 공원의 이름도 바뀌어 자유공원이 되었다. 광제호가 물살을 가르던 인천항은 청일전쟁의 군수항이었으며, 러일전쟁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여기에서만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의 기억이 한꺼번에 녹아 있다.

한반도의 가장 번화한 국제도시 인천이 일본의 수중에 떨어진 것은 러일전쟁 직후다. 러시아도 한반도에서의 이익을 최대한 많이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지만 결국 일본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상징 군함은 일제의 노리개로 전락하고 말았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을 꺾었다면, 광제호는 친러파의 연회장이 되었을 수도 있다.

인천과 국제성을 연결짓다보면 광제호 수난과 같은 잊어버리고 싶은 나쁜 기억도 많다. 하지만 그것을 모두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천은 몇 년 전부터 국제도시라는 닉네임으로 불린다. 실제로 수많은 국제기구가 인천에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인천이 명실상부한 국제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잊고 싶은 기억, 담아 두고 싶은 기억을 모두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 인천은 광제호 수난의 현장이었지만,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백범 김구가 항일의식을 키운 곳이기도 하다. 그 백범은 안중근 집안과의 특별한 인연도 갖고 있다. 안중근 의사 한 명이 이렇듯 많은 인천의 옛것을 떠올릴 수 있게 한다. 인천은 참 묘한 땅이다.

/정진오 인천본사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