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중소기업의 역사에서도 이렇게 뭉클하면서도 기묘한 시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1999년, 즉 벤처붐이 절정이던 시기이다. '벤처붐'이라고 말하는 시기는 1999년과 2000년 상반기까지 약 18개월 정도의 기간을 말한다. 이 시기는 인터넷 버블과 닷컴 열풍을 기반으로, 벤처업계로 엄청난 투자금액이 몰리고 코스닥시장이 급성장했던 시기이다. 이때 벤처 인프라들이 정상적인 기대보다 빠른 속도로 상승했다가 추락했기 때문에 그저 거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벤처붐 시절의 숨겨진 효과들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그 시절에 엄청난 원천기술이 잉태되었다는 사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지금 '다이얼패드'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독자 분들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현재 너무도 익숙한 '인터넷 전화'라는 분야에서 최초로 상업화를 성공시킨 기업이 바로 '다이얼패드'였다. 지난 1999년 새롬기술의 자회사로서 실리콘밸리 동북부 포천 드라이브에서 창업했던 '다이얼패드'는 잠시 성공가도를 달리다가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현재 인터넷 전화의 최강자 자리는 '스카이프(SKYPE)'가 차지하고 있지만, 그 원천기술은 우리 기업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999년이 특별한 이유는 다이얼패드 외에도 다른 몇 가지 원천기술들이 탄생했었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 생활 속으로 깊이 파고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기술도 이 시기에 탄생했다. 그 이름은 '싸이월드'이다. 이 '싸이월드'도 최초의 기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파고를 넘지 못하고 아쉽게 실패했다. 현재 '페이스북(Facebook)'의 가치와 시장지배력을 생각하면 더욱 아쉬울 따름이다.
창조적인 원천기술이 벤처붐 시기에만 나왔다는 것을 간단하게 볼 수 없다. 분명하게도 그 시기에는 창조 에너지가 엄청나게 강했다. 그것을 놓친다면 지난 역사의 중요한 의미를 놓치는 셈이며, 창조적 기업을 잉태할 수 있는 조건을 놓치는 셈이다. 조직이론가인 스틴치콤(Stinchcomb) 박사가 설파했듯이, 기업은 탄생 시점의 시대적 상황에 지대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창조 에너지가 넘치는 시대에 탄생하는 기업은 창조 역량이 높게 마련이다.
놀랍게도 벤처붐이 종료한 2001년 이후부터 우리는 원천기술을 좀처럼 얻지 못하고 있다. 구태여 꼽는다면 '카카오톡' 정도가 세계시장을 놀라게 할 수준의 기술력이 아닐까 싶다. 이렇기 때문에 오늘 벤처붐 시기를 돌아보며 '응답하라'고 요청하는 감정이 특별하다. 창조적 기업을 낳으려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벤처붐 시기에서 시사점을 얻는다.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대추 한 알도 다 그만한 세월과 조건 속에서야 나온다.
이제 '벤처붐'을 거품으로만 보던 견해는 바뀌어야 한다. 코스닥 시장에서 변동성이 활발했고 기업공개(IPO)도 풍성했다. 그에 따라 벤처 투자도 시장에 넘쳐났다. 그것을 지켜보는 젊은 창업자들은 희망을 잉태했다. 그들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열정을 불태웠으며 기업가정신으로 무장했다. 이런 모습들이 바로 오늘 우리가 원하는 창조경제의 싹일 것이다. 당시 벤처 열기를 급격히 추락시킨 '묻지마' 투자와 비도덕적인 기업사냥꾼과 같은 문제를 해결한다면 벤처붐의 효과는 결코 사소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류시화의 시구(詩句)인 '지금 아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이라는 구절이 새삼 가슴에 닿는다. 지난 벤처붐 시절 우리는 좋은 기회를 잘 다스리지 못한 것이 안타깝지만, 그 경험은 이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역사란 오래된 미래이다.
/손동원 객원논설위원·인하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