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나 부모의 죽음을 '망극지통(罔極之痛)' 또는 '천붕지통(天崩之痛)'이라고 한다. '끝이 없는 고통'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라는 뜻이다. 형제자매의 죽음은 또 '할반지통(割半之痛)'이다. 몸의 반쪽이 떨어져나가는 아픔이다. 그럼 자식의 죽음은 뭐라고 할까. 흔히 이르는 '애끊는 슬픔'―창자가 끊어지는 정도의 슬픔보다도 더한 슬픔이라는 뜻으로 '참척(慘慽)'이라고 한다. '슬플 참'자, '슬플 척'자다. 모든 슬픔 중에서 가장 크고 심한 슬픔이 바로 자식이 죽은 슬픔인 참척이고 그렇게 '참상(慘喪)'을 당한 슬픔이 참척이다. 가슴을 저며 내는 듯한 자식의 죽음을 또 '애물'이라고 한다. 그런데 대를 이을 아들의 죽음만은 '참척'이라고 하지 않고 '상명(喪明)'이라 일컬었다. 눈앞의 광명이 캄캄하게 꺼져버린 상태, 칠흑처럼 블랙 아웃된 상태고 다시 말해 빛을 잃고 희망을 앗긴 그런 상태다. 하지만 요즘에야 맨 외동아들 아닌가.

생년월일 순서대로 세상에 오듯이 하늘나라로 떠나는 '사년월일(死年月日)'도 생년월일 순서대로 순번이 정해진다면 얼마나 공평할까. 하지만 뒤죽박죽 순서의 정도가 너무나 심하다. 어린 생명들이 왜 부모와 조부모를 앞질러 승천해야 하는 것인가. 그리스도는 승천해 하나님 오른편에 고이 앉으셨다지만(벧엘 3:22), 저주스럽기 그지없고 어처구니없기로 비할 데가 없는 저 침몰 '세월'호로부터 승천한 어린 생명들은 하나님 곁 어느 쪽에 모여 앉을 거란 말인가. 덴마크의 종교사상가이자 철학자인 케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인간의 삶을 가리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죽음을 향한 초침은 돌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죽음, 예고 없는 죽음, 그마저도 어린 나이의 죽음은 너무나 안타깝다.

겉보기엔 멀쩡한 고목이 오랜 세월 썩어 훤하게 내리 구멍이 뚫리면서 속이 텅 빈 상태를 '구새 먹었다'고 한다. 승천한 단원고 학생들을 비롯한 젊은 주검들, 그 부모의 가슴이야말로 '참척'의 슬픔으로 인해 모두들 뻥 뚫렸을 것이다. 그런 가슴들이 어서어서 주변의 따듯한 위로와 사랑, 용기와 극기(克己) 정신으로 가득 메워지기를 기원한다.

/오동환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