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란 시민사회에서 충돌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타협을 이끌어내는 가능의 예술이다. 법치는 공동체적 합의인 법률의 강제에 의한 지배를 의미한다. 정치적 해결과 사법적 처리는 영역을 달리 하지만 상호대립적 개념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사회에서 종종 발생되는 문제중의 하나가 정치가 갈등조정이라는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법치에 기대어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관행이다. 정치가 법치의 명분으로 명시적으로 정치이기를 포기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대의제 민주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정치와 법치가 선순환의 구조를 갖기 보다는 상호배타적으로 작동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한국사회에서 정치가 국민에게 신뢰를 얻지 못하고 갈등조정에 실패하고 있다는 지적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정치는 상이한 이해관계에 의해 움직이는 집단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신뢰를 바탕으로 합의를 도출하는 작업이다.

세월호 특별법을 둘러싼 여야, 유가족은 참사의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대책의 수립, 공동체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제도적 보완이라는 기본방향에 있어서 지향점을 같이 한다. 그러나 각론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유가족과 이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야당의 어중간한 입장, 이는 법체계의 근간을 무너뜨린다는 여당의 생각에서 접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여야의 재협상 결과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정한 유가족들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다시 꺼내들었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진상조사위에 부여하는 문제는 세월호 특별법의 쟁점이 특검 추천권을 여하히 배분하느냐의 문제로 가닥이 잡히면서 수그러들었던 문제다. 그러나 유가족이 다시 초강수를 둔 것은 여당은 물론 야당에 대해서도 신뢰할 수 없다는 인식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40일이 넘게 단식을 하고 있는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가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길 원하지만 거절당하고 있는 마당에서 유가족들이 재협상 결과를 선뜻 받아들일 명분도 마땅치 않다. 정치가 다시 가동돼야 할 대목이다.

유가족이 야당과만 꼭 협상의 파트너가 돼야 하는 것도 논리적 정합성이 떨어진다. 여당과 유가족이 대치의 모양새가 되는 것은 더욱 납득하기 어렵다. 더 이상 재재협상은 없다는 여당의 강고한 입장으로 볼 때 진전된 내용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이제는 여당이 나서야 한다. 쟁점은 비교적 하나로 모아지고 있다. 유가족이 수사권과 기소권의 진상조사위 부여를 주장하고 있으나 여당이 나선다면 특검 추천권으로 쟁점을 모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여야협상의 틀을 넘는 정치가 나서야 된다는 의미다. 유가족의 아픔에 진심으로 다가가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유가족이 이미 정치화돼 있다는 일각의 인식은 사실에 부합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세월호 특별법 협상에 관련된 전체의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는 정형화된 단견의 소산일 뿐이다.

5월19일 대통령의 담화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에 유가족의 적극적 동참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전의 5월16일, 박근혜 대통령은 유가족과의 만남에서 "진상규명에 유족 여러분의 여한이 없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현장을 지켜보신 유가족들의 의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김영오씨가 대통령 면담을 신청한 것에 대해 청와대가 "세월호 특별법은 여야가 합의해서 처리할 문제로 대통령이 나설 일은 아니다"며 거부입장을 밝혔으나 특별법이 국회 입법사안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경제관련 입법이나 민생관련 입법에 대해 국회를 비판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논리적 타당성 여부를 떠나 청와대가 일상적 정쟁적 사안을 대하는 정치적 문법에서 한 발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 정치의 부재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법치에 천착하는 모습과도 거리가 있다. 세월호 참사를 보는 관점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의 문제다. 세월호 특별법의 해법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여당의 지도부가 정치력을 발휘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 보인다. 청와대가 유가족을 적극 설득하는 모습을 보일때 신뢰를 쌓을 수 있다. 세월호 특별법의 해법의 물꼬가 트이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다. 세월호 특별법의 가장 주요한 행위인자는 유가족들임을 인식할 때 정치가 작동될 수 있다.

/최창렬 객원논설위원·용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