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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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묻은 손으로 지켜낸 '자유'… 전쟁은 아직 '진행형' 지면기사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25·끝)] 잊지 말아야 하는 '아픔의 기억' 1129일의 처절했던 사투… 남북한 300만명 사망·실종'정전 70주년' 올 1월부터 지역언론 9곳 '기억의 여정' 포화 속으로 뛰어든 수많은 젊은이들 발자취 되새겨무고한 민간인 학살, 정확한 진실 규명 아직까지 미궁비극 반복 안되려면 '기념 사업' 민간차원 동참해야선열들이 지켜낸 역사, '다음 세대로 연결' 준비해야'총력전(總力戰)'.군대를 넘어 국가가 가용 가능한 모든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하여 싸우는 전쟁을 뜻한다. 말 그대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전 국민이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양상을 일컫는다. 총력전은 군대끼리 맞붙어 누가 더 많이 살아 남는가 등의 결과로 승패를 갈랐던 역사속의 전쟁과 달리 전쟁의 참상과 고통을 군인뿐만 아닌 참여하지 않는 민간인에까지 미치게 되며, 과거를 지나 현재까지도 겪게 하기도 한다. 70여년 전 한반도에서 벌어진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은 이 같은 총력전의 참상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중단된 한국전쟁은 1천129일동안 남북한을 통틀어 약 300만명의 사망 또는 실종자를 냈다.당시 한반도의 인구가 3천만명 수준인 점을 고려하면 10명 중 1명이 전사한 것으로 사실상 모든 한국인이 이 전쟁으로 가족, 이웃, 친척을 잃는 참담한 경험을 한 셈이다.한국전쟁은 전선의 전후방을 따지지 않았다. 국군과 인민군 모두 자신의 점령지역에 있는 민간인에게 '반동분자'라는 꼬리표를 붙여 학살을 자행했다. 이로 인해 적법한 절차 없이 희생되거나 행방불명된 민간인만 약 99만명에 이르고 있다. 이는 비슷한 시기 같은 총력전을 펼쳤던 제 2차 세계대전이나 베트남전쟁 등에 비해서도 월등히 높은 수치로, 여전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차가운 땅속 산하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이 셀 수 없이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이처럼 총성이 멈춘 지 70년이 지났지만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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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수호에 한마음 '그때처럼'… 역사보존에 합심을 '다시한번' 지면기사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24)] 평화문화공간 필요한 '춘천대첩' 1978년 의암호 인근 '전적기념관' 조성… 1981년 강원도 양여"2차원 전시물 위주" 콘텐츠 부족 지적… '건립추진위' 구성지난 6월 범시민대회… "자긍심 느낄 공간 새롭게 만들어야"민간 중심 움직임 활발한데 수백억 예산탓 지자체는 소극적'북한이 대패를 인정한 유일한 전투' '병력 열세를 딛고 대한민국을 지킨 3일간의 방어전' '군인·시민·학생이 합심해 거둔 승리'6·25 전쟁 발발 초기 벌어진 춘천지구 전투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들이다. 1950년 6월 25일부터 6월 27일까지 국군 제6사단이 북한군 제2군단에 맞서 전개한 방어전투는 '춘천대첩'으로 불린다. 하지만 춘천대첩을 기념하는 공간은 춘천에 초라하게 남아있다. 의암호 인근에 1978년 조성된 '춘천지구 전적기념관'이다.기념관 입구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연도순시 시 국가안보의식, 향토방위의식 고취를 위해 설립을 지시했고 친필로 '춘천지구 전적기념관'의 명판으로 써 주심으로 동년 11월 28일 설립되었다"고 쓰여있다. 강원특별자치도(이하 강원자치도)가 1981년 교통부로부터 이 건물을 무상 양여 받았고, 한국자유총연맹이 위탁 운영 중이다. 강원자치도가 지원하는 연간 예산은 관리인 인건비, 공과금, 소규모 수리비로 1억여원 정도. 이 곳에서 열리는 춘천대첩 기념행사도 없어 '하드웨어' 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열악하다.2019년 연간 방문객은 13만3천805명이었지만, 코로나19가 유행했던 시기에 급감해 지난해에는 6만9천369명이었고 올 상반기에는 1만7천260명에 그쳤다. 춘천대첩에 학도병으로 참전했거나, 춘천대첩의 역사적 의미를 후대에 알리길 열망하는 지역 원로들은 '춘천대첩 평화문화 기념관' 건립을 주장하고 나섰다. 올해 정전 70주년을 맞아 시작된 일이다.■ '민·관·군 합심의 역사' 후대에 전해야=지난달 28일, 춘천지구 전적기념관에서 만난 진성균(90) 6·25참전유공자회 강원도지부장. 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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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23)] '대전전투'의 영웅들, 기억해야 할 희생 지면기사
이승만 대통령, 6월27일 대전역 도착… 당시 충남도청 '정부청사' 역할 '동요하지 말고 생업 충실하라' 서울에 있는것처럼 녹음 방송에 큰 피해'대전협정' 통해 북한군 진격 일주일 저지… 낙동강 방어선 구축에 도움기관사·철도원들, 수송작전·전투 등 투입… 美 딘 소장 구출에도 헌신'순직' 김재현 기관사, 철도인 최초로 국립서울현충원 안장·특별 훈장전국 최대규모 '보훈테마파크' 조성 추진… 용역 거쳐 2029년 준공 목표철도 경부선과 호남선이 지나던 대전은 교통과 물류 중심 도시로 성장했다. 6·25 전쟁 시 대전은 국토의 중심이면서 교통·물류 중심이었던 만큼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6·25 전쟁 발발 후 북한군에 속수무책으로 밀리던 이승만 정권은 수도 서울을 버리고 피란길에 올라 대전에 도착, 임시수도로 공표하기도 했다. 옛 충남도청(등록문화재18호)을 임시정부로 사용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마치 서울에 있는 것처럼 '동요하지 말고 생업에 충실하라'는 취지의 방송 녹음을 대전에서 했다는 사실은 이미 역사적으로 검증된 일이다. 이 방송을 믿고 피란을 주저한 서울시민들이 북한군의 점령 아래 희생이 컸던 역사적 아픔도 있다.피해는 컸지만 국군과 미군이 결사항전으로 막은 '대전전투'는 북한군의 남하 진격을 일정 시간 저지, 낙동강 전선에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할 소중한 시간이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여기에 당시 미군 24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을 구출하기 위한 철도기관사들의 활약 등 대전은 6·25 전쟁의 많은 사연을 간직한 도시로 기억된다.■ 대한민국 임시수도 대전과 임시정부 충남도청=1932년 지어진 옛 충남도청. 6·25 전쟁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다.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 각료들은 27일 새벽 2시 서울 경무대를 떠나 피란길에 올랐다. 이 대통령을 태운 열차가 대전역에 도착한 시간은 이날 오후 4시 무렵, 이렇게 늦어진 데는 열차가 대구에 내려갔다가 다시 대전으로 돌아왔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이 대통령은 이영진 당시 충남도지사가 머물던 대흥동 관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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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22)] '피란수도 부산' 유네스코 등재 추진 지면기사
참혹했던 한국전쟁을 극복하고, 국제 지원의 수혜를 입던 국가에서 원조국으로 거듭난 대한민국. 그 중심에서 수십만 명의 피란민을 포용하고, 경제 성장의 기틀을 다졌던 부산이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20세기 냉전시대의 피란수도에서 21세기 평화도시로 변신을 꿈꾸는 부산이 지켜야 할 유산은 무엇일까. '2030 세계박람회(월드엑스포)' 부산 유치를 추진 중인 지금, 되새겨 봐야 할 정전 70년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 짚어본다.5월 국내 최초 '근대유산 분야' 잠정목록 올라가… 2028년 최종 목표경무대·임시중앙청·유엔 묘지·우암동 소막 주거지 등 9곳 '연속 구성'보완 연구·시민들 지속적 관심 필요… 지자체·주민 반대 등 해결 과제삼성·LG 등 대기업 성장 발판 역할… '위기 극복' 콘텐츠 후대 알려야"수십만 피란민 품어준 당시 이야기, 높은 인문학·산업적 가치 보유" ■ 세계유산 등재 어디까지 왔나='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은 지난 5월 16일 국내 최초로 근대유산 분야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공식 등재된 바 있다. 지난달 17일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공식 홈페이지의 잠정목록에 게재되기도 했다. 2015년부터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해 온 부산시는 최종 등재 목표 시기를 2028년으로 잡고 있다.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은 20세기 냉전기 최초 전쟁인 한국전쟁기의 급박한 상황 속에 1천23일 동안 임시수도 기능을 유지했던 모습을 보여주는 특출한 증거물이다. 피란수도의 정부 유지, 피란 생활, 국제협력의 기능을 하는 9개 연속 유산으로 구성된다. 먼저 서구에 △경무대(임시수도대통령관저) △임시중앙청(부산임시수도정부청사) △아미동 비석 피란주거지 3곳이 있다. 중구에도 △국립중앙관상대(옛 부산측후소) △미국대사관 겸 미국공보원(부산근현대역사관) △부산항 제1부두 3곳이 있다. 남구에 유엔묘지와 우암동 소막 피란 주거지 2곳이 있고, 부산진구에 하야리아기지(부산시민공원)가 있다.유네스코 세계유산 최종 등재를 위해서는 거쳐야 할 절차가 남아 있다. 앞으로 문화재청의 우선등재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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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21)] 낙동강 방어전투의 의미와 기념사업 지면기사
6·25전쟁 당시 가장 격전지로 꼽히는 낙동강 방어선전투는 전쟁의 전세를 뒤집고 오늘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굳건하게 지킨 전투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낙동강 방어선전투 가운데 가장 핵심은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투다. 다부동전투는 1차 세계대전 때 파리를 위기에서 구했던 베르됭(Verdun)전투에 비유된다. 경상북도와 칠곡군은 정전 70주년을 맞아 6·25전쟁 당시 마지막 보루였던 다부동전투의 승전을 기념하고, 이를 계승하기 위한 기념사업들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美8군 워커 사령관, 북한군 공격에 천연장애물 이용한 최후 방어선 구축전쟁 조기 종결하려던 北 의도에 '타격'… 한미연합작전능력 향상의 초석다부동 전적기념관 일대 '韓 호국벨트' 넘어 '세계 프리덤벨트'로 성역화전투 당시 총탄 뚫고 탄약·연료·식량 보급한 '지게 부대원' 위령비도경북도 '메모리얼 파크' 계획… 참전국 인사들 필수 방문코스 역할을백선엽 장군 동상 건립이후 관람객 지속 증가… "국가적 관심 필요"■ 낙동강 방어선전투의 의미"한 발짝이라도 더 밀리면 끝장이다.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6·25 전쟁 당시 최후의 저지선인 낙동강 방어선전투에서 북한군을 막아낸 영웅 고(故) 백선엽(1920~2020) 장군의 말이다.북한의 공세에 밀리던 당시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대한 최후의 방어선으로서 낙동강과 그 상류 동북부의 산악지대를 잇는 천연장애물을 이용한 방어선을 구축해 사수하기로 했다. 이 방어선을 '워커라인' 즉 '낙동강 방어선'이라고 부른다.낙동강 방어선전투는 전쟁을 조기에 종결해 남한 점령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의도에서 전병력을 집중했던 북한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키고 아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지원,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한 전투로 평가된다. 또한 전투 중 곳곳에서 전개된 국군과 미군의 협조적 전투수행은 한미연합작전 능력 향상의 초석이 됐다.낙동강 방어선전투는 대구방어전투·영천(永川)전투·동해안지구전투 등 많은 공방전이 전개됐지만, 이 가운데 경북 칠곡 다부동전투가 가장 핵심이다.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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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20)] 인천상륙작전을 둘러싼 상반된 시선 지면기사
인천시와 해군이 지난달 15일 인천 앞바다에서 개최한 제73주년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는 해마다 열린 역대 행사 가운데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다. 우선 윤석열 대통령이 인천상륙작전 전승 기념식에 참석하고, 상륙작전 재연 행사를 주관했다. 1960년부터 열린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에 처음으로 대통령이 참석했다. 윤 대통령은 전승 기념식에서 "인천상륙작전은 한반도 공산화를 막은 역사적 작전이자 세계 전사(戰史)에 빛나는 위대한 승리였다"며 "굳건한 한미 연합방위태세를 기반으로 한미일 안보 협력을 더욱 강화하면서 북한의 위협에 대한 압도적 대응 역량을 확보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의 기념사는 인천상륙작전을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승전 역사로 격상시킨 것이다. 인천시는 2억원 내외였던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 예산을 올해 국비·시비 포함 27억3천만원으로 확대했다. 올해 인천시는 대대적인 인천상륙작전 재연 행사를 포함해 지역 곳곳에서 승전을 기념하는 문화 행사와 국제학술대회 등을 열었다. 인천시는 내년부터 행사를 더욱 확대해 2025년 제75주년 행사부터는 한국전쟁 참전 8개국(한국·미국·영국·캐나다·프랑스·호주·뉴질랜드·네덜란드) 정상급 인사가 참석하는 국제행사로 키운다는 구상이다. 인천시는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의 주제를 '세계평화도시'로 설정했다. 인천상륙작전이 국내외에서 더욱더 조명받을 여건이 조성됐다.73주년 기념행사 尹대통령 첫 참석… 기존 2억 내외 예산 올해 27억으로 증액市, 내년부터 참전국 정상급 인사 참여로 확대 계획… "대첩으로 격상" 의견도상륙 직전 폭격에 주민 최소 100여명 희생… 곳곳 민간인 학살 등 '공포의 기억'원주민 이주 이후 귀향 대책 전무… 2021년 월미공원에 위령비 건립·헌화 마련 인천상륙작전을 조명하는 빛의 세기가 강할수록 그 뒤로 드리우는 그림자는 더 짙어진다. 올해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가 '전승 기념 강화' '대통령 중심'으로 흐르면서 '인천 지역·민간인 피해'처럼 전쟁의 비극을 상기하는 주제들은 과거 행사보다 더 소외됐다.정전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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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19)] 기념관 건립 필요한 '마산방어전투' 지면기사
기념(記念). 뜻깊은 일이나 사건을 잊지 않고 마음에 되새김. 전쟁기념관은 '잊지 말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마산방어전투기념관을 통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들과 자유민주주의이다. 만약 이 두 가지를 잊는다면 아픈 역사는 반복될 수 있다. 마산방어전투는 지난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 45일간 마산 일대에서 한미동맹군과 인민군간 벌인 전투다. 이 기간 핵심 격전지였던 서북산은 고지의 주인이 19번이나 뒤바뀌었고 인민군 4천여명과 미군 1천여명이 희생됐을 정도로 큰 규모의 전투였다. 하지만, 미군 주도 전투라는 이유 등으로 기념관 하나 없이 잊혀 가고 있다.이러한 현실 속 기념사업회가 발족하고, 여러 선양사업이 진행되면서 점차 시민들과 지역사회에서 마산방어전투가 알려졌다. 미래세대를 위한 교육의 장이 될 기념관 설립의 필요성 또한 커지고 있어 주목을 모으고 있다.1950년 8월1일~9월14일 '대혈전''최초' 한미연합 작전 전개 주장도육사 발간 '60대 전투' 기록 전무기념사업회 창립 다양한 선양활동내달중 용역… 부지 선정 등 논의 ■ 최초 한미연합 작전=1950년 8월 1일 북한군은 남침 36일 만에 진주를 점령한 데 이어 마산 현동검문소에 집결했다. 중국 국공내전에 참전해 전쟁 경험이 풍부한 조선족들로 구성된 북한군 6사단 7천여명은 함안·진동 고산지대를 확보 후 마산 점령을 노리고 있었다. 당시 이 일대를 주둔하고 있던 국군은 1천여명에 불과했다. 미 8군 사령관인 워커 중장은 급히 경북 상주에 주둔 중인 미 25보병사단을 250㎞ 넘는 마산으로 단 2일 만에 이동시켰다. 이에 맞춰 진주에서 후퇴한 미 24사단도 창녕에 낙동강 방어선 진지를 구축했다. 마산을 점령하려는 북한과 사수하려는 국군과 미군은 8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 45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결국 마산방어전투에서 아군의 승리로 북한군의 부산 점령을 막을 수 있었고, 국군과 UN군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또한 9월 16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반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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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18)] 남북 민족분열 비극 표출의 상징 '빨치산' 지면기사
'빨치산'은 한국전쟁의 부산물이자 분단된 남북 민족분열의 비극을 표출하는 상징이다. 빨치산은 프랑스어 '파르티잔(partisan)'에서 유래했으며 노동자나 농민 등 비정규 군인들로 무장된 유격대를 뜻한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빨치산은 한국전쟁 전후로 좌익 계열과 인민군 패잔병들에 의해 전국의 산지에서 조직된 유격대를 일컫는다. 특히 호남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북한으로 되돌아가지 못한 인민군들이 지리산의 험준한 산악지형을 이용해 끝까지 저항했고 한국군은 이를 토벌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렀다. 한국전쟁 발발직후인 1951년 1월부터 4월까지 전남에서 한국군의 게릴라 대규모 토벌작전(3기)에 사살된 빨치산은 6천921명에 달하고 603명이 생포됐다. 지리산에서 빨치산을 진압하다가 목숨을 잃은 군인, 경찰, 민간인은 7천287명에 달한다.퇴각하지 못하고 지리산 입산한 북한군군·경 보급로 차단-식량 약탈 등 일삼아남한 좌익과 조직, 저항하다 6921명 사살진압과정 국군·경찰 등 7287명 목숨 잃어'부역자 혐의' 사살된 민간인 피해도 심각 ■ 한국전쟁은 끝났지만 귀순하지 못한 빨치산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호남지역에 남아있던 북한군은 퇴각하지 못한 채 지리산 인근에 입산해 빨치산이 됐다.북한군이 후퇴하자 호남·영남·충청지역에 있던 인민군 및 당 요원들은 퇴로가 차단된 채 남한에 남겨진 이들이었다. 빨치산은 남한의 공산주의자와 북한군 패잔병, 유격대원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후방에서 교란작전을 펼쳤다. 패잔병들은 중앙당으로부터 '인민군이 다시 남하할 때를 대비해 후방에서 유격활동을 벌이라'는 지시를 받고 군·경의 눈을 피해 지리산 등 산악지대에서 끝까지 저항을 한 것이다. 특히 관공서를 습격하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민가를 약탈하기도 했다.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1950년 10월 이후 군경합동작전이 전개됐고 백야전 전투사령부가 창설돼 빨치산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군병력 이외에도 경찰병력도 많이 동원됐다. 1950년 12월 16일에는 지리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를 설치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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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17)] '반공 vs친공' 계속된 대립, 제주 포로수용소 지면기사
2만 중공군 포로는 제주도에 왜 왔을까?3년1개월(1천129일) 동안 벌어진 6·25전쟁에서 중공군 포로는 약 2만1천700명으로, 미군 4천439명보다 5배나 많았다. 전쟁이 한창일 당시 포로수용소는 육지와 떨어진 섬인 제주도가 후보지였다. 1950년 말 중공군의 공세로 서울을 다시 빼앗기자, 제주도의 포로수용소 설치는 유력해졌다. 다만, 리지웨이 미8군사령관은 제주도가 피난민으로 초만원이 된 점, 이 섬은 임시정부가 들어설 최후의 보루로 여기면서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결국, 육지와 비교적 거리가 가깝고 물 공급이 가능한 거제도가 포로수용소로 낙점됐다. 휴전 협상이 진행되고 전쟁이 끝날 조짐이 보이자 생포되거나 항복한 포로 송환은 쟁점이 됐다. 포로수용소는 냉전과 이념 대결의 축소판으로 또 다른 전쟁터였다.유엔군, 폭동·유혈사태 계속돼 분리 작전'반공' 모슬포·'친공' 제주비행장에 수용'중공 수립 3주년' 시위 발생… 45명 사망성당 건립 공사 투입시키며 교화 노력도정전협정 체결이후 각각 대만·중국 송환 2만명에 달했던 중공군 포로들은 반공(反共)과 친공(親共)으로 대립했고, 서로를 죽이고 학대하는 유혈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폭동과 유혈 사태가 끊이지 않자, 유엔군사령부는 1952년 2월 '분리 작전'에 돌입했다. 그해 7월까지 약 2만명에 이르는 중공군 포로를 거제도에서 제주도로 보냈다.당시 중화민국(대만)으로 가길 원했던 반공포로 1만4천여 명은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지역에, 중화인민공화국(중국)으로 송환을 원했던 친공포로 5천900여 명은 제주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 부지에 수용됐다. 친공포로들은 1952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3주년을 맞아 시위를 벌였다. 미군 2개 소대가 진입하는 과정에서 포로 45명이 사망하고, 120명은 부상을 당했다.유엔군사령부는 "폭동(시위)은 집단 탈주를 위해 시작됐으며, 포로들은 탈옥 후 한라산 빨치산과 합류할 계획을 세웠다"고 발표했다.이 사건 이후 경비를 맡은 미군과 친공포로의 갈등은 심화됐으며, 포로수용소 주변에 살았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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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16)] '피란수도' 부산, 1023일의 기록 (下) 지면기사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은 명실상부한 정치, 외교,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전국에서 모여든 예술인들은 광복동 일대 다방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전쟁의 포화 속에도 문화예술의 꽃을 피웠다.<정치>■ 격동기 정치 중심에…중공군 개입후 모든 정부기관 내려와이승만 장기집권 기틀 '부산정치파동''중석불' 불하 업자 폭리… 정치자금화건국후 최초 정경유착 사건 꼽히기도한국전쟁기 부산이 처음 임시수도가 된 시기는 1950년 8월 18일부터 10월 26일까지다. 서울 수복 후엔 부산에 있던 정부 기관도 환도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1년 1월 3일 정부는 모든 정부 기관을 부산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한다.부산 서구 부민동에 있는 경남도청사(현재 동아대 석당박물관)가 임시 중앙청이 된다. 경남도지사 관사(현재 임시수도기념관)는 대통령 관저로 활용된다. 국회는 중구 부산극장에 있다가 이후 경남도청 체육관인 상무관을 사용한다. 1940년대에 지어진 남포동 소화장아파트는 국회의원 관사가 됐다. 미국대사관은 부산 미문화원에 자리를 잡는 등 각국 외교 기관도 부산으로 옮겨온다. 체신부는 부산우체국을 사용하고, 부산시청사는 사회부와 문교부 등이 사용한다. 특이한 점은 대체로 중구에 자리를 잡은 다른 정부 부처와 달리 교통부는 부산진구 범천동에 청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아직도 부산시민들이 범곡교차로 일대를 '교통부'라 부르는 이유다.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장기 집권을 위한 첫 번째 개헌이 이뤄진 곳도 부산이었다. 부산일보사가 1980년대에 발간한 책 '비화 임시수도 천일'에 따르면, 1952년 5월 26일 오전 동래구 온천장을 출발한 국회 통근버스는 중구 광복동 동아극장 앞에서 국회의원 30명을 더 태운다. 이 버스는 모두 47명을 싣고 임시 의사당이 있는 경남도청 정문을 들어서려다 총 든 헌병의 검문을 받는다. 전날 이승만 대통령이 선포한 계엄령을 이유로 검문을 시도한 것이다. 이에 맞서 1시간을 버티던 국회 버스는 결국 군용 크레인에 의해 사람이 탄 채로 헌병대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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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15)] '피란수도' 부산, 1023일의 기록 (上) 지면기사
1023일. 부산이 한국전쟁 중 피란수도로서 역할을 한 기간이다. 첫 번째는 1950년 8월 18일~10월 27일, 두 번째는 1951년 1월 3일~1953년 8월 15일이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던 부산은 피란민 수십만 명을 품는 포용력을 보여줬다.전투 벌어지지 않았던 곳 수십만 명 밀려와남는 방 빌려주며 도움 베풀었지만 역부족창고·교회예배당·공장… 빈공간 전부 개방 마구간·소막사 같은 축사까지 주거지 활용사람들이 꺼리는 묘지도 삶의 터전 탈바꿈화재·위생문제·식수난… 생존 경쟁 내몰려 ■ 80만 피란민 품은 부산부산일보사가 1980년대에 발간한 책 <비화 임시수도 천일>에 따르면, 한국전쟁 직전 부산 인구는 47만여 명이었다. 1945년 8·15 광복 직후만 해도 28만 명 수준이던 부산 인구는 일본과 중국 만주 등지에서 돌아온 동포 19만 명까지 더해 급증한다. 이어 전쟁이 발발하자 전국 각지에서 피란민이 몰려들어 100만 명을 넘는 사람이 치열한 생존 경쟁에 맞닥뜨리게 된다. 1·4후퇴 이후 부산의 최대 인구는 120만~130만 명 수준으로 추산된다.당장 살 곳을 마련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일부 시민이 남는 방을 빌려주며 도움을 베풀었지만, 피란민 수십만 명을 수용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정부가 마련한 천막이나 수용소도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창고와 교회 예배당, 공장, 극장 등 빈 공간이 있는 곳은 모두 피란민에게 개방됐다. '동아일보' 1950년 12월 28일 자 기사에 따르면, '부산시 당국에서는 시내에 들어온 피란민 6만여 명을 각 가정에 분산 수용키로 결정했다. 요정, 여관 등을 일체 개방해 피란민을 수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부산연구원 오재환 부원장은 "부산은 한국전쟁 시기에 직접적인 전투가 없었던 평화 도시, 밀려오는 피란민을 품은 포용의 도시였다"며 "유엔 등으로부터 국제적 지원을 받던 곳에서 이제는 이를 되돌려주는 도시로 성장해 월드엑스포 유치에까지 나서게 됐다"고 설명했다.2020년 3월 25일 <부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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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14)] 이승만 정부 '국민보도연맹 경남 민간인' 학살 지면기사
"왜 조사도 안 하고 억울하게 잡아가서 민간인을 학살합니까? 시체를 바다에 빠뜨리니 찾지도 못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게 너무너무 억울하지요. 74살 들어 살면서 아버지 한번 불러보고 싶어도 못 불렀습니다." (김점선씨·통영시 거주)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창원유족회 증언집 발췌-"6살 때 아버지가 마산 괭이바다에서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돌아가신 뒤 정말 힘들게 살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주변에서 '빨갱이 자식' 소리 들으며 컸죠. 그때 상처와 서러움은 말도 못 할 정도입니다." (권택근씨·부산 거주)전쟁에서 목숨을 잃는 건 군인들만이 아니다. 수많은 민간인이 본인이 무슨 죄가 있는지도 모른 채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진실화해위 조사가 시작되고, 유족회가 생겨 정부를 상대로 소송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70여년이 흘러도 유족들은 '빨갱이 자식'이라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국가 폭력에 희생된 이들의 억울함이 자식들에게도 향해지고 있어 정부 관심이 필요한 상황이다.6·25전쟁이 발발하기 전 이승만 정부는 1949년 6월 5일 좌익 계열 전향자들을 대상으로 반공단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실제 취지는 공산주의 정당 남로당을 약화하고 좌익 성향 사람들을 전향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각 경찰서별로 할당된 수를 채우기 위해 공무원들과 경찰은 아무 관계 없는 민간인까지 무분별하게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이후 전쟁이 터지자, 내무부 치안국은 각 도 경찰국에 '요시찰인 전원을 경찰에 구금하고 형무소 경비를 강화하라'는 내용의 비상 통첩을 보냈다. 이후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이들은 예비검속돼 경찰서나 형무소 등에 구금됐다. 이 중 본인이 왜 구금됐는지도 모르는 민간인이 다수였다.북한군 점령지역에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이들이 부역 행위에 협조하거나 의용군으로 입대했다는 보고가 정부에 들어갔다. 그러자 정부는 보도연맹을 잡아 처형하도록 명령했고, 6월 하순부터 비극적인 학살은 시작된다.전향자 '반공단체' 할당 채우려 무분별 가입전쟁 터지자 이유도 모른채 예비검속 구금북한 점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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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13)] 끝나지 않은 4·3… 제주 예비검속 학살 지면기사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제주에 또다시 비극이 찾아왔다.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돼 학살당했다. 당시 정부는 '좌익분자'를 색출한다는 미명하에 예비검속을 실시했다. 또 전국 형무소에 수감된 4·3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됐다. 예비검속은 범죄 방지 명목으로 범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사람을 사전에 구금하는 것으로 일제의 악습이었다.한국전쟁 발발하자 또다시 찾아온 비극'범죄를 저지를 것 같다' '비협조적이다'정부 '좌익분자' 색출 명목 무차별 연행전국 형무소 수감 4·3 관련자 즉결처분제주공항·섯알오름 등에 수백구 암매장6년 후 수습할 땐 뒤엉켜 신원확인 불가'빨갱이' 낙인… 유족들, 몰래 제사 지내 ■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불어닥친 '예비검속' 광풍경찰 문서에 따르면 1950년 8월 도내 4개 경찰서(제주·모슬포·성산포·서귀포)에서 예비검속된 도민은 1천120명이다. 경찰은 검속된 자들을 A·B·C·D 네 등급으로 분류했는데, C·D급은 예비검속자 등급별 조사 과정에서 군 송치 대상자로 분류돼 계엄군에 넘겨져서 총살됐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적행위를 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학살한 것이다. 이 중 제주북부(제주읍·조천면·애월면) 예비검속자는 500여명에 달했다. 극적으로 목숨을 부지한 생존자와 목격자들은 1950년 8월 19~20일 이틀간 제주국제공항(당시 정뜨르비행장)에 끌려간 예비검속자들이 집단 학살된 후 암매장됐다고 증언했다.4·3 당시 최대 학살터였던 제주공항 활주로 밑에는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4·3영혼이 잠들어 있다. 활주로에서는 매일 많은 수의 비행기가 쉼 없이 오르내린다. 당시 제주공항은 넓고 비어있는 곳으로 외부의 눈에 띄지 않아 총살을 집행하기 최적의 장소였다는 증언이 있다.제주4·3평화재단은 제주공항에서 2007~2009년 3년간 유해발굴을 실시했다. 2018년에도 유해발굴 작업이 진행됐다. 4·3 당시 암매장된 388구의 유해를 발굴했고 유전자 감식으로 90구의 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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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12)] 적군 '기습남하' 제동 건 천안·금강 지연전투 지면기사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한반도에 가장 먼저 투입된 미군이 24사단이다. 전쟁 발발 직후 UN은 '한국 군사원조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트루먼 미 대통령은 극동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를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고, 맥아더는 곧바로 일본에 주둔한 미 8군 제24사단을 한국에 투입했다.윌리엄 딘 24사단장은 제21연대 1대대, 일명 스미스 부대를 한반도로 급파했다. 부산에서 대전을 거쳐 경기도 오산에 투입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1950년 7월 5일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최초 전투를 벌였으나 T-34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제4사단과 제105전차사단에 참패했다. 스미스 부대는 60명이 전사하고, 82명이 포로로 잡혔다.곧이어 벌어진 전투가 천안전투이다. 앞서 딘 사단장은 스미스 부대 후방으로 제34연대를 보내 안성과 평택에서 북한군을 막도록 했다. 그런데 러브리스 연대장은 전투도 벌이지 않고 남쪽으로 철수하여 천안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북한군과 접촉하면서 시간을 끌라는 사단장의 뜻을 어긴 것이다. 북한군은 7월 6일 평택을 점령한 뒤 계속 남하했다.한반도에 급파한 스미스 부대'T-34 전차' 앞세운 北에 참패적군 1만2천명에 맞선 시가전일방적으로 밀리며 진격 허용마틴 연대장, 전차포격에 전사딘 사단장, 대전전투서 포로로전력 오판… 대부분 패했지만15일 끌어줘 전열 확보 재평가천안의 34연대는 사단장의 지시에 따라 7월 7일 1개 중대를 경부국도로 북상시켜 북한군의 움직임을 탐지하고 접촉을 유지했다. 이 부대는 북쪽으로 전진하다가 부대리(현재 천안시 부대동)인근에서 북한군의 기습을 받고 철수하였다.이날 34연대는 연대장이 바뀌었다. 딘 사단장이 안성, 평택의 무단 후퇴 책임을 물어 러브리스 연대장을 해임하고, 로버트 마틴 대령에게 지휘권을 넘긴 것이다. 마틴은 지략과 용맹함을 갖춘 장교로 2차 세계대전 때 딘 사단장과 함께 싸웠으며, 딘 사단장이 극동사령부에 전입을 요청, 하루 전날 일본에서 대전에 도착했다.7월 8일 미 24사단 34연대와 북한 3사단, 105전차사단이 천안시내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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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11)] 전주·군산 형무소 재소자 집단 사살 사건 지면기사
전쟁 발발 전후를 즈음해 한강이남 형무소들에서는 대규모 수용자 학살사건이 벌어졌다.비교적 후방으로 평가받는 호남지역에서도 그 아픔은 존재했다. 그리고 정전 70년을 맞이했지만 상흔들은 여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이념 충돌의 희생양은 바로 민간인들이었다. 전북지역에서는 당시 형무소에 수용중인 민간인들의 학살이 군경에 의해 자행됐는데, 대표적인 곳이 바로 전주형무소와 군산형무소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10년 조사보고서에서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7월경 전주형무소 재소자들이 7사단 3연대 군인들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밝혔다.전주형무소서 '반동분자'로 규정된 우익인사 1천여명 희생돼황방산 발굴 조사 결과 유해 매장지 3열 등고선 나란히 조성발견된 44개체, 탄피에 인골편 흡착… 잔인하게 처형된 증거당시 군인·경찰 무기체계와 일치… 정부에 의한 계획적 학살군산비행장서도 자행됐지만 미군 사용중이라 발굴조차 못해 "6·25때 내가 16~17살이었는데, 밤에 금상동 마을 주민들을 동원해서 구덩이를 팠어. 구덩이를 판 자리가 구세군교회(소리개재, 전주 동부지역) 뒤편이야. 밤에 횃불을 붙이고 했지.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죽였는데, 죽인 후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어. …(이하 생략)" (백모씨·88·전주시 덕진구 산정동)박모(88·전주시 완산구 효자동)씨는 한국전쟁 당시 작은아버지가 전주경찰서에 수감돼 있었지만 전쟁 발발후 어딘가 끌려가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신을 찾기 위해 아버지와 누이가 효자동 황방산 일대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 이후 황방산 일대로 소풍을 오면 고구마 두둑 형태를 이루는 것이 많았는데, 그것이 유해를 매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증언했다. '전주지역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 보고서 발췌(2021, 전주시, 전주대학교박물관)'희생규모를 추정할 수는 없지만 70여명의 희생자 신원을 확인했다. 이들이 끌려가 학살 당한 장소가 당시 진북동에 있던 전주형무소(현재 평화동으로 이전)에서 약 6㎞ 떨어진 황방산이다. 전주형무소 재소자 중에는 여순사건 관련자들도 많았다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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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10)] 한반도 중앙 최고 요충지 수성 '백마고지 전투' 지면기사
1951년 5월16일부터 22일까지 인제군 현리에서 6·25전쟁기 중 국군의 가장 큰 패배로 일컬어지는 '현리전투'가 벌어졌다. 9사단을 포함한 우리 국군과 중공군 사이에 벌어진 현리 전투에서 국군은 별다른 교전도 벌이지 못하고 와해되고 동부전선은 위기를 맞는다. 다음해인 1952년 10월초, 현리전투에서 중공군에 패했던 우리 국군은 철원 서쪽의 이름없는 395고지(백마고지)에서 또다시 중공군과 맞선다. 이 때 395고지를 지키고 있던 국군은 9사단. 하지만 395 고지의 9사단은 1년 전 중공군의 공격에 물러선 부대가 아니었다. 중공군 3개 사단과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시종일관 유리하게 전황을 이끌었고 결국 395고지에서 중공군을 완전히 몰아낸다. 백마고지 전투 승리로 국군과 유엔군은 군사 요충지를 확보하고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었다. 또 백마고지 전투 승리는 드넓은 평야를 품은 철원지역 일대를 우리 땅으로 만드는 결정적 순간이었다.별다른 교전도 벌이지 못하고 동부전선 위기 초래한 '현리전투'1년 만에 395고지서 다시 만난 중공군에 시종일관 유리한 전황12차례 쟁탈전… 낙타능선상 전초진지 탈환 끝 전투 신화 창조유엔군 막강한 화력 지원-9사단 지휘관 탁월한 운영 승리 요인 ■ 시작된 휴전회담 그리고 예고된 혈전=유엔군과 공산군은 6·25전쟁이 시작된 후 1년여 만인 1951년 7월부터 전쟁 휴전과 포로교환 등을 위한 회담을 시작한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시간은 지나가고 공산군은 휴전회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마련한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중공군이 주도하는 고지 쟁탈전이었다. 당시 고지 쟁탈전은 중공군이 국군과 유엔군이 장악한 고지를 먼저 공격해 차지하고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이를 다시 되찾는 형태의 전투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1952년 가을께 포로문제에 대해 유엔군과 공산군의 협상이 난항을 겪었고 한반도 중앙의 최고 요충지 '철의 삼각지대'로 관심이 집중됐다. 국군 9사단이 주둔 중인 395고지, 철원평야와 평강고원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한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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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9)] 50만 장병 육성한 제주 지면기사
6·25전쟁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을 빼앗긴 정부는 '1·4후퇴'를 통해 부산으로 피난했다.이후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정부는 전선에 안정적으로 병력을 투입할 수 있도록 장병들을 훈련할 공간이 필요하다고 판단, 1951년 3월 21일 대구의 제25연대를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로 옮겨 육군 제1훈련소를 설치했다. 이후 육군 제1훈련소는 1956년 문을 닫을 때까지 5년간 50만 장병을 육성, 서울 재탈환을 비롯한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중공군 개입으로 '1·4 후퇴'… 부산 피난후 '일진일퇴'25연대 서귀포시 모슬포로 옮겨 육군 제1훈련소 설치1956년 해체될 때까지 후방 핵심 전략기지 역할 '톡톡'비바람에 병력 수송 차질… 물 부족한 악조건서 단련병사·피난민들 '전쟁의 두려움'… 강병대교회 찾기도 ■ 후방 핵심 전략기지가 된 육군 제1훈련소최초 모슬포에 설치된 육군 제1훈련소는 전쟁으로 인해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을 짓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천막으로 막사를 대신하면서 거대한 천막도시와 같은 모습이었다. 훈련소의 면적은 198만㎡(약 60만평) 규모로 모슬포 남쪽에 본부가 있었고 보성리와 인성리 방면에는 연대들이 자리잡았다. 그 사이에 공병대와 헌병대, 정훈부, 통신대, 하사관학교, 병참대가 들어섰다.모슬포에 육군 제1훈련소가 들어선 것은 이 지역이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가 중국 본토 침공을 위한 중간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1931년부터 군사기지가 설치됐기 때문이다.해방 직후 미군에 의해 일제들의 무기는 해체됐지만 각종 시설들은 그대로 사용되면서 1946년에는 조선경비대의 주둔지가 됐고, 이후 육군 제1훈련소로 사용됐다. 치열해지는 전쟁으로 인해 사상자가 늘어나면서 부족해진 병력을 빠르게 보충하기 위해 당시 제1훈련소의 훈련기간은 12주에서 3주로 단축됐다. 훈련기간이 크게 짧아진 대신 훈련은 더욱 엄하고 혹독하게 진행됐다.다만 모슬포는 땅은 넓었지만 훈련소로 운영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화산섬인 제주의 특성상 빗물이 고이지 않고 모두 지하로 흡수되면서 물이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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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8)] 인천상륙작전의 빛과 그림자 (下) 지면기사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 초반 전세를 순식간에 뒤집었으나, 인천지역은 피해가 막심했다. 유엔군과 한국군이 전세를 뒤집기 위해 육·해·공의 병력과 화력을 총동원하면서 상륙지 월미도는 쑥대밭이 됐고, 인천시내가 파괴됐다.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꼽히는 군사 작전의 이면은 지역 차원에서만 간간이 다뤄질 뿐이다.전갑생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Archive Ⅱ)에서 발굴한 <사진 1>을 살펴보자. 인천상륙작전 당일인 1950년 9월15일 인천 월미도 동쪽 마을의 한 민가가 폭격을 맞아 불타고 있고, 소총을 든 유엔군 병사들은 수색 활동을 하는 듯한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사진 1>의 행간을 조금 더 읽어보자. 활활 타오르는 민가는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며칠 전 월미도 일대 공습에서 대대적으로 퍼부은 화염 무기 '네이팜(Napalm)탄'의 위력을 보여준다. 집에 난 불을 꺼야 할 집주인이 사진 속에서 보이지 않는 건 폭격으로 인한 희생 또는 피난으로 섬에 살던 주민들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문이 남는다. 정말로 전쟁 상황에서 피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을까.상륙직전 3천℃ 불바다 만드는 '네이팜탄' 투하전세 순식간에 뒤집었지만 수많은 민간인 희생인천 피해 막심했는데… 미군 부대 막사는 멀쩡전갑생 연구원 "부수적 희생", 헤이그협약 위반 ■ 단테가 그린 지옥, 월미도인천상륙작전 당시 인천지역 피해에 대해선 정부의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8년 '진실'로 규명한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 보고서와 미국, 프랑스 기자들이 쓴 한국전쟁 논픽션들을 종합했다. 상륙작전 닷새 전인 1950년 9월10일 항공모함에서 이륙한 미 해병대항공단 항공기들이 월미도 동쪽 지역에 세 차례에 걸쳐 95개(tank)의 네이팜탄을 투하하고, 육지를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유엔군은 9월13~14일 월미도와 인천항 등 시내 일대 함포사격과 공습을 감행하며 다음날 상륙을 개시한다.월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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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7)] 인천상륙작전의 빛과 그림자 (上) 지면기사
인천상륙작전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 버린 한국전쟁 초반 전세를 순식간에 뒤집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판도를 바꾼 노르망디 상륙작전(1944년 6월6일)에 비견될 만큼 성공적이었다는 평가가 많다.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질퍽대는 갯벌로 둘러싸인 악조건의 인천으로 대규모 병력이 상륙, 낙동강 전선에 집중한 북한군의 허를 찌른다는 작전 구상은 대담함을 넘어 무모해 보였다. 그 난관을 돌파한 상륙작전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총반격하는 발판이 됐고, 이후 한국전쟁을 상징하는 전투이자 신화로서 지위를 굳건히 다졌다.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도 전쟁은 3년 가까이 이어진 후에야 정전에 이르렀다. 인천상륙작전 직후 펼쳐진 전황이 한국전쟁을 교착 국면에 빠지게 하면서 상륙작전의 성공을 퇴색시키기도 했다. 상륙작전 전후 민가와 시가지를 향한 대대적 공습으로 월미도와 인천 도심은 만신창이가 됐다. 인천지역의 피해에 대해선 다음 하(下)편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기로 한다.조수간만의 차 크고 질퍽대는 갯벌 악조건맥아더 총사령관, 참모들 반대속 인천 고집함대 261척·미군 등 7만5천명 대규모 투입낙동강 전선에 집중한 적군 허찌른 담대함한국·유엔군 북진 - 북한군 퇴로 차단 성과예상보다 더딘 서울 수복으로 빛바랜 성공 ■ 압도적 상륙작전1950년 9월15일 새벽 감행된 인천상륙작전은 함대 261척, 미 해병대 1개 사단과 육군 7개 사단을 비롯한 총 7만5천명의 병력이 투입된 육·해·공 입체 작전이었다. 미 해군은 20㎞에 걸친 반원형 대형을 펼쳐 200여척이 넘는 함선을 서서히 전진시켰고, 상륙정(LST)들이 탱크와 해병대를 싣고 일렬로 월미도로 향했다. 프랑스 종군기자 4명의 기록을 묶어 낸 '한국전쟁통신'(2012·눈빛)에 실린 르포기사의 한 장면을 보자."6시 30분, 큰 상륙정들이 섬의 갯벌에 앞문을 들이대고, 적군의 전방에서 아무런 저항도 없는 것에 다소 당황한 해병대를 토해 냈다.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아홉 대의 불도저 탱크들이 포로의 파인 구덩이 속에서 거대한 벌레처럼 비틀대며 숲으로 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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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6)] '죽느냐, 사느냐' 낙동강전투 (下) 지면기사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북한군 9월 공세의 목표는 Y선(왜관-다부동-영천-기계-포항)이었다. 이를 위해 8월 31일 X선(왜관-남지-마산)의 마산 정면을 먼저 때렸다. 국군과 유엔군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리자 북한군 제2군단은 9월 2일 왜관·다부동, 신령·영천, 안강·포항에서 맹렬한 공격을 감행했다.낙동강 방어선의 붕괴 위기가 또 다시 닥쳤다. 유엔군의 예상을 뛰어넘는 규모였고 격렬했다. 이때 북한군 작전방침은 "낙동강 일대에 압축된 국군과 유엔군을 두 개의 강력한 타격집단으로 대구 및 영천 일대에서 포위·소멸하여 최종목표인 부산을 점령한다"였다. 김일성도 8월 22일에 전선사령부를 방문해 '공세준비에 총력을 경주할 것'을 독전했다. 북한군은 9월 중순까지 공세를 계속했지만, 국군과 유엔군은 끝내 방어선을 지켜내 인천상륙작전과 북진의 발판을 마련했다.북한군, 대구 점령 '총공세'… 미군 하루 새 1245명 손실최악의 상황 속 유엔군 반격 힘입어 낙동강 방어선 사수영천 돌파한 인민군, 후방 깊숙이 침투하다 오히려 포위집요한 공격 막고 마침내 인천상륙작전·반격 발판 마련 ■ 하루 동안 미군 1천245명 손실 악몽의 날왜관·다부동은 미 제1기병사단이 국군 제1사단으로부터 방어지역을 인수받아 대구방어를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북한군 제1·3·13사단 등 3개 사단 역시 대구 점령을 위해 총공세를 감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아 모두가 운명의 전투를 피할 수 없었다.특히 수암산 일대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됐다. 8월 공세 때와 비슷했다. 8월에는 국군 제1사단이 17일 동안의 혈전으로 방어진지를 지켜냈지만, 화력과 기동장비에 의존하는 미군은 단 3일 만에 진지를 북한군에게 내어 주고 4㎞ 후방으로 철수했다. 이제 대구까지 거리는 불과 10㎞였다.미 제8군에게 9월 5일은 악몽의 날이었다. 이날 하루 미군은 전사 및 행방불명 724명, 전상 521명 등 1천245명의 인원 손실이 발생했다. 제8군사령부는 낙동강 방어선을 포기하고 '데이비드슨 선'으로 철수할 것을 검토했다. 그러나 낙동강 방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