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

  •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5)] '죽느냐, 사느냐' 낙동강전투 (上)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5)] '죽느냐, 사느냐' 낙동강전투 (上) 지면기사

    1950년 6·25전쟁 발발과 함께 북한군에 파죽지세로 밀린 국군과 유엔군은 7월 말 낙동강까지 철수했다. 이제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후퇴하려 해도 내어줄 땅이 남아있지 않았다. 낙동강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해 대구와 최후 거점인 부산은 지켜내야 했다. 유엔군 지상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고수 아니면 죽음(Stand or Die)'의 결의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곳에서 피아는 '죽느냐, 사느냐'의 각오로 부딪쳤다. 낙동강 방어선 北 게릴라 침투 막기 위해 왜관철교 폭파둘째 경간 63m 끊는 과정서 다리 건너던 피난민도 희생진군 차질 빚은 적 상대 기계일대서 총공격 1245명 사살다부동 점령 위기 순간, 미군과 협동으로 적진돌파 작전 ■ 왜관철교 폭파와 잔학한 미군 학살8월 3일 아침부터 왜관철교 주변에는 사이렌이 울리고 전단이 뿌려졌다. 오후 6시까지 지역에서 퇴거하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해 사살한다는 포고였다. 낙동강 방어선 내 적 게릴라 침투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주민과 피난민들은 우왕좌왕했다. 오후 8시30분 미군은 왜관철교를 폭파했다. 왜관쪽 둘째 경간 63m가 끊어졌다. 북한군이 강을 넘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지만 다리를 건너려던 많은 피난민도 희생됐다. 북한군이 낙동강을 건너면 대구와 부산을 점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북한군은 9일 왜관 낙산리 금무봉(268m)에 들이닥쳤다. 새벽에 개인 화기와 옷을 머리에 이고 건너편 노티 나루터에서 깊이 1.65m의 낙동강을 건넜다. 한참 후 이를 발견한 미군은 보·포병 사격을 가했으나 적들은 금무봉으로 올라갔다. 다음날 오후 케이 미 제1기병사단장은 경전차 소대와 보병을 돌격시켜 정상을 탈환하고 달아나는 적을 섬멸했다. 적은 700여명, 미군은 14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 미군이 처음 한국군 지원병을 편입, 병력을 보충했는데 이것이 카투사 탄생의 계기가 됐다.왜관읍 303고지에서는 15일 미군이 북한군에 집단 학살당했다. 이곳에서 북한군은 미군 포로 46명의 손을 묶고 계곡에 몰아넣은 뒤 기관총을 난사했다. 6명이 살아남아

  •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4)] 한·미 동맹군의 승전보 '마산방어전투'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4)] 한·미 동맹군의 승전보 '마산방어전투' 지면기사

    1950년 8월 1일 하동과 함양, 진주를 점령한 북한군 6사단은 마산 접경에 이르렀다. 방호산 6사단장은 "마산을 점령하면 적의 숨통을 조이는 것이다. 우리의 최종 목표인 부산 점령은 시간문제이다"라고 말하며 승리를 장담했다. 그러나 경북 상주에 주둔 중인 미 25보병사단이 8월 3일 마산으로 급파하면서 전투 양상이 달라졌고, 마산을 지키고 뺏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국군과 미군 1천여명, 북한군 4천여명 등 무려 5천여명이 전사한 참혹한 '마산방어전투'. 북한군에 대부분 국토를 빼앗기고 마산이 무너지면 부산마저 위태로운 상황에서 방어전투는 전쟁의 승패를 가를 수 있는 '막느냐 무너지느냐'의 중요한 전투였다. 만약 패배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중요했지만, 미군 주도 전투란 이유로 기념관 하나 없이 잊혀 가고 있다.북한군 7000여명, 함안·진동 고산지대 확보하고 마산 점령 노려워커 중장 "240㎞ 낙동강 방어선… 죽음으로 지켜라" 결의 다져5000여명 전사 참혹한 전장, 옥녀봉은 여전히 탄피·파편 등 발견부산 침투 막고 국군·UN군 재정비… 인천상륙작전 반전 기회로 ■ 죽음으로 지켜라= 1950년 8월 1일 북한군 6사단은 남침 36일 만에 진주를 점령한 데 이어 마산 현동 검문소에 집결했다. 6사단장 방호산은 중국에서 항일 활동을 하고 소련 유학까지 다녀온 북한군 내 뛰어난 전술가였다. 또 중국 국공내전에 참전해 전쟁 경험이 풍부한 조선족들로 구성된 북한군 6사단 7천여명은 함안·진동 고산지대를 먼저 확보한 후 마산 점령을 노리고 있었다.당시 이 일대를 주둔하고 있던 국군은 1천여명에 불과했다. 미 8군 사령관인 워커 중장은 급히 경북 상주에 주둔 중인 미 25보병사단을 250㎞ 넘는 마산으로 단 2일 만에 이동시켰다. 이에 맞춰 진주에서 후퇴한 미 24사단도 창녕에 낙동강 방어선 진지를 구축했다. 워커 중장은 "240㎞의 낙동강 방어선의 더 이상 철수나 후퇴는 없다. 죽음으로 지켜라"고 말하며 결의를 다졌다. 이로써 마산을 점령하려는 북한과 사

  •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3)] 北 최정예 부대에 맞선 처절한 11일 '호남전투'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3)] 北 최정예 부대에 맞선 처절한 11일 '호남전투' 지면기사

    6·25 한국전쟁 당시 '호남전투'는 북한군이 진출하기 시작한지 11일 만에 호남지역을 빼앗겼다는 이유로 지난 70여년간 조명받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일각에서는 호남에 대한 애국심을 왜곡하며 '무혈입성'이라는 지적과 함께 '치욕의 전투'라고 까지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던 '불독' 월튼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북한군 최정예 6사단이 호남에서 수일간의 시간을 보낸 덕에 부산을 방어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무기도, 훈련도 없이 뛰어든 '영웅들' 있었지만11일만에 함락돼 '치욕의 전투' 역사왜곡 수모美 워커 사령관 "시간 벌어줘 부산 방어" 회고'막강 전투력' 北 6사단 진군 지연 결실 재평가 ■ 파죽 지세 북한군 6사단= 방호산 사단장이 이끈 북한군 6사단(이하 6사단)은 개성 북쪽에서 1950년 6월 25일 새벽 5시 10분부터 30분간에 걸친 포병 공격준비 사격을 실시한 후 공격으로 전환했다.6사단은 북한군 중에서도 막강한 전투력을 가진 정예부대였다. 그들의 뿌리가 중국 내전에 참전한 제166사단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전투경험을 가진 병력들과 최신형 장비를 보유한 6사단의 전투력은 막강했다.6사단 예하 부대들은 공격 첫날인 6월 27일 한강을 건너 하루 만에 김포공항을 점령하고, 영등포 방향으로 진출했다. 7월 3일에는 서울에 진출한 북한군 타 사단들과 함께 수원에 진출해 7월 6일 평택, 7월 8일 천안을 거쳐 서해안을 따라 기동했다. 6사단은 천안~공주 방향으로 향하던 북한군 4사단과 천안~대전 방향으로 진출하는 북한군 3사단을 뒤따라 서해안 축선인 천안~예산 방향으로 진출함에 따라 전투력의 손실 없이 서해안을 타고 내려왔다.■ 호남지역의 상황은= 한국전쟁 발발 직전 육군은 보병 8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호남지역에는 제 5사단이 주둔(예하 2개 연대 중에서 제 15연대는 전주, 제 20연대는 광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부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수도방위에 나서 호남지역에는 국군 병력이 전무했다. 당시 육군본부는 부

  •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2)] 전략적 승리로 재평가되는 '대전전투'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2)] 전략적 승리로 재평가되는 '대전전투' 지면기사

    1950년 7월 19~20일 치러진 대전지구전투는 단 이틀 간의 전투였음에도 1천150여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는 투입된 병력 중 3분의1 수준으로, 당시 전투가 얼마나 처절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대전전투는 6·25 전쟁 발발 후 대전지역에서 치른 최초의 방어전투였던 데다, 전쟁 초기 거의 모든 전투가 그랬듯이 '패배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그럼에도 6·25 전쟁에서 3.5인치 로켓포로 북한군 T-34 전차를 파괴한 최초의 전투라는 점, 대전을 지나 남진을 계획했던 북한군을 며칠 동안 대전에 묶어두며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는 시간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 등에서 높은 의의를 갖고 있다.이 같은 역사적 의미를 널리 알리고자 대전시는 2015년까지 지역 군부대 주관으로 열리던 지역행사를 넘어, 2016년부터 시 주관 행사로서 대전전투 전승 기념식을 열기 시작했다. 해당 연도에는 대전전투 참전 용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대전지구전투 호국영웅비도 건립됐다.6·25 전쟁 발발 후 대전지역에서 치른 최초의 방어 전투단 이틀간 1150여명 인명피해… 투입 병력 3분의 1 수준분전하던 미군 딘 소장, 북한군에 잡혀 포로생활 비운도적군 진격 지연시켜 한국군 방어선 구축 시간 확보 의의市, 2016년 호국영웅비 세우고 해마다 전승 기념식 개최 ■ 전쟁의 서막, 19일 새벽1950년 7월 3일 한강을 넘은 북한군은 5일 경기도 오산에서 미군과 처음 전투를 치렀다. 미 24사단은 평택-천안, 전의-조치원, 금강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키면서 대전에 집결했다. 미 24사단에 내려진 임무는 18일 포항으로 상륙할 예정인 제1기병사단이 영동 부근에서 반격준비를 마치는 20일까지 대전을 사수하라는 것이었다.이에 미 24사단 윌리엄 에프 딘 소장은 주력 34연대를 유성에서 갑천을 건너 대전시내를 이르는 길목인 월평산성 쪽에 배치하고, 영동에 있던 19연대 2대대와 금산의 수색중대를 대전으로 이동해 지원하도록 하는 등 전투력을 증강시켰다. 북한군의 본격적인 대전 공격은 19일 오전부터 시작됐다. 북한군은 야크

  •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1)] 개전 초반 국군 전열 재정비 시간 벌어준 '춘천대첩'

    [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1)] 개전 초반 국군 전열 재정비 시간 벌어준 '춘천대첩' 지면기사

    '치열하게 대전차포를 쏘는 군인들, 그 뒤에서 손으로 포탄을 들어 올리는 학도병, 지게에 포탄을 실어 나르는 시민…'.춘천시 근화동 소양2교 부근 '춘천대첩 기념 평화공원'에 있는 한 조형물의 모습이다. 이는 낙동강 전투,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6·25 전쟁의 3대 대첩으로 꼽히는 '춘천대첩'의 의미를 한 눈에 보여준다.춘천지구 전투는 1950년 6월 25일부터 6월 27일까지 국군 제6사단 제7연대, 제19연대가 북한군 제2군단 소속의 제2사단에 맞서 전개한 방어 전투였다.국군뿐만 아니라 경찰, 학생, 제사(製絲)공장의 여공을 비롯한 수 많은 시민들이 북한의 기습 공격에 함께 나선 전투였다. 이로써 병력 열세를 딛고 '24시간 내로 춘천을 점령해 수원 방면으로 기동, 국군을 포위한다'는 북한의 목표를 좌절 시킨 전투였다.낙동강 전투·인천상륙작전과 함께 6·25 전쟁 '3대 대첩' 꼽혀내평지서장 노종해 경위 등 1시간 이상 항전하다 장렬히 전사'옥산포전투' 시민 도움으로 실탄 확보… 남침 첫날 방어 성공끝내 함락됐지만 24시간내 수원방면 기동하려는 北 계획 무산 ■ 전쟁의 징후, 새벽 기습 공격1950년 6월 19일 오후 3시. 춘천 방면을 방어하는 제7연대에 투항한 북한군 1명이 북한의 공격 개시 정보를 털어놓았다. 제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6월 23일 야간 작전회의를 소집하고 비상경계 태세에 돌입하며,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에게 외출·외박 통제를 건의했다. 김 대령은 이를 허가했다.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포병 공격 준비사격이 시작됐다. 화천에서 춘천에 이르는 관문인 '모진교' 남쪽에 배치된 국군 9중대가 큰 피해를 입었다. 중대장, 소대장이 전사하며 지휘 체계가 무너졌고, 북한군은 모진교를 점령했다. 당시 북한의 전투력은 국군보다 병력면에서 4배, 화력면에서 10배 우세했다.양구에서 춘천으로 가기 위해 거쳐야 했던 북산면의 '내평리'도 위기였다. 제7중대가 철수하고 있을 때 춘천경찰서 내평지서는 국군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북한군에 포위됐다.내평지서장 노종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