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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의 수원과 화성은 한 지역이었다.

'수원군'으로 통칭했고 동향의 정을 나누는 한동네 주민이다.

100년 전 가장 뜨거웠던 그 봄, 수원과 화성의 주민은 한마음, 한뜻이었다. 오직 대한의 독립을 열망했고 양반, 농민, 남성, 여성 할 것 없이 주민 전체가 만세운동에 뛰어들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특히 화성지역의 만세운동은 열기가 더 뜨거웠다. 주민 모두가 '주동자'라 할 만큼 자주적인 독립운동의 양상을 띤다. 우정과 장안면 등 2개 면에 불과한 일부 지역에서만 2천여 명의 주민들이 만세운동에 동참했다.

이들의 성과도 눈부시다. 일제 수탈의 본거지였던 면사무소 2개와 일본 순사가 상주하는 주재소 1개를 파괴하고, 총을 쏘는 일본 순사에게 달려들어 처단했다. 나라 잃은 민족의 굳건한 독립의지를 여실히 드러낸 역사의 명장면이다.

이 때문에 3·1만세운동 뿐 아니라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수원·화성의 만세운동이 갖는 역사적 가치는 재평가돼야 한다. 민중이 중심이 된, 가장 자주적이면서 공격적인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알려지며 확산세를 보였고, 겁을 먹은 일제가 제암리 학살사건을 자행했다.

이후 일제는 문화통치로 지배방식을 바꾸기도 했다. 이뿐인가. 향토 학계에서는 이 지역의 만세운동은 임시정부 설립은 물론 무장독립투쟁의 단초가 됐다는 점을 다시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