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1401000769600036021
/아이클릭아트

4월3일 2천여명 시위, 3·1운동사 가장 격렬
수촌교회 집결 면사무소 불태우고 독립선언
무자비한 탄압… 제암리·고주리 학살 자행
2019021401000769600036022




횃불이 피어올랐다. 칠흙같은 어둠을 뚫고 피어오른 하나의 횃불은 곧 마을의 산등성이마다 이어졌다.

해가 뜨는 낮 동안엔 차마 드러낼 수 없었던 무언의 약속이 피어오른 것이다. 화성지역은 우리 3·1 만세운동사(史)를 통틀어 가장 격렬했던 현장이다.

마을 주민 모두가 '주동자'였고, 의지는 강렬했으며 행동은 거침없었다.

송산, 발안에서 발화한 화성 지역의 독립운동은 수촌, 우정, 장안에서 정점에 치달았고 제암, 고주리에서 처참하게 끝이 났다. 그 중에서도 가장 '영화'같았던 하루가 있다. 그 날의 만세길을 따라 걸어본다.

수촌교회
화성 우정장안지역의 만세운동의 전환점이 됐던 수촌교회. 일제가 보복삼아 불태운 것을 1922년 재건립,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 1919년 4월 3일, 가장 뜨거웠던 그 날


1919년 3월 1일 이후 당시 '수원군'이었던 수원·화성 지역 역시 자주독립의 열망이 거세졌다. 사람이 모이는 장날마다 알음알음 이야기들이 퍼져갔고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마음들이 이어졌다.

첫 신호탄은 송산, 발안지역에 장터가 열리는 날, '대한독립만세'가 울려퍼진 일이다. 총을 맞고 쓰러진 마을의 어른을 보고는, 지켜만 보던 이들조차 모두 돌멩이를 들고 시위에 나섰다.

이후 총칼을 앞세운 일제 경찰이 주민들을 무참히 짓밟았다는 소식이 다른 마을로 전해지자, 어스름한 새벽 마을 산등성이마다 횃불이 피어올랐다. 그 날의 약속이 소리 없이 이루어진 것이다.

1919년 4월 3일,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새벽녘 차회식의 집에 주곡리 주민 30~40명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곧장 이 마을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차병혁과 이들 시위대가 만났다고 전해진다.

이들 무리는 수촌리에 있는 수촌교회로 이동했다. 수촌리는 장안·우정면 만세운동에 가장 많은 수의 주민들이 참여했다. 그 날, 수촌교회에 집결한 이들은 대한독립을 위한 만세운동을 결의했다. 그리고 장안면사무소로 쳐들어갔다.

장안면장에게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요구한 뒤 면사무소를 불태웠다. 식민지배의 상징이자, 수탈의 근원인 면사무소를 불태우면서 이들은 일제를 향해 강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차병혁 생가
우정장안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차병혁의 생가. 현재 사랑채가그대로 남아 만세길 안내소로 쓰일 예정이다.

면사무소를 불태운 이들이 향한 곳은 쌍봉산이다. 높지 않은 산이지만, 장안·우정면 전경이 모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쌍봉산에 올라 불타오르는 면사무소를 바라보며 그들은 독립선언문을 읽고 독립의 의지를 다졌다.

쌍봉산에서 내려온 이들은 이번엔 우정면사무소로 돌격해 초가집이었던 면사무소를 부수고 집기와 서류를 불태웠다. 그 길로 한각리 광장에 모였는데, 이 때 모인 인원이 2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한각리 주민들은 광장으로 들어오는 시위대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리고 이들의 무리에 합세했고 대열을 정비해 화수리 주재소로 향했다.

일제 경찰이 주둔해있는 화수리 주재소는 이날 만세운동의 정점이었다. 시위대는 두 무리로 나뉘어 화수리 주재소에 접근해 주재소를 둘러싸고 일제히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놀란 가와바타 순사가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며 달아나자 성난 시위대가 순사를 맹렬하게 쫓아 처단하기에 이르렀다.

"당연한 일" 훗날 훈장 서훈 거부한 주민도
만세 100주년, 수원·화성시 기념사업 준비
무심했던 지난날 반성, 잊힌 역사 되새겨야

# 그 날의 기억 따라 만든 '화성 3·1운동 만세길'

4월 3일 장안·우정면의 만세운동은 화성시가 '화성 3·1운동 만세길'로 구성하고 있다.

화성 내 다른 지역에 비해 당시의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가 많기도 하지만,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고, 가장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만세운동이었다는 것을 후대에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다.

4월 3일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차병혁의 집은 다행히 사랑채가 그대로 남아있고 후손들도 마을에 거주 중이다. 그의 후손들은 화성 만세운동의 상징인 할아버지의 집을 '만세길의 안내소'로 활용할 수 있도록 기꺼이 내주었다.

취재 중 만난 차병혁의 증손자 차재천씨는 "6, 7살쯤 할아버지 손을 잡고 서울에 올라가 할아버지가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는 것을 보았다"며 "돌아가실 때까지 고문 후유증에 고통받았지만 단 한번도 만세운동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고 할아버지의 기억을 꺼냈다.

다행히 차병혁은 1962년 독립운동의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지만, 지역의 주민들 중에는 서훈을 받지 못한 이가 부지기수다.

차씨는 "당연한 일을 했다고 여기며 서훈을 받는 것도 거부했던 마을 주민들도 있었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태생이 양심적이라 나쁘게 살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도 힘들게 살고 있다"고 전했다.

화수초등학교 앞 기념비 측면2
화수초등학교 앞 삼일운동 기념비.

가장 많은 수의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이유로 수촌리는 마을 전체가 불타고 수촌교회도 불탔다. 지금 남아있는 초가집 형태의 수촌교회는 1922년 선교사 아펜젤러가 다시 건립한 것으로 화성시가 향토유적으로 보존하고 있다.

주민들이 처음 면사무소를 파괴한 후 다함께 올랐던 쌍봉산 정상에 서면 우정·장안의 풍광이 전부 내려다보인다. 화성시는 정상 위 동그란 전망대에 만세길 유적지를 표기할 계획이다.

만세길을 전부 걷지 못하더라도 전망대에 올라 만세길 위 역사를 공부할 수 있도록 구성한다.

일제 경찰을 처단한 화수리 주재소는 현재 화수초등학교로 바뀌었다. 정문 앞에는 그 날 시위대의 행적을 알리고 기리는 기념비와 함께 안내판이 설치돼있다.

김승섭 화성시 문화유산과 주무관은 화수초등학교 운동장 축구골대가 있는 위치 정도에 주재소가 있었다고 추정한다.

안내판에도 그 날의 기록이 상세하게 기록돼있을 만큼 화수리주재소는 이 지역 만세운동의 가장 상징적인 장소로 만세운동의 종착점이자, 독립운동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만세길을 알리는 방문자센터를 이 곳에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는 4월에 개장하는 장안·우정의 만세길을 미리 걸어보니, 공교롭게도 '31㎞'다. 단 하루 동안 차회식 집터에서 시작해 화수초등학교까지 이어진 31㎞의 길 위에서 그 날의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제암리 기념관
우정장안 만세운동 후 일제의 보복으로 제암리와 고주리 주민들이 학살당했다.이를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화성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그 날 이후 수촌리, 한각리, 석포리 등 우정·장안면 대부분의 마을이 일제의 보복에 불탔고, 4월 13일에는 제암리에서 주민들을 마을 교회에 몰아넣고 학살을 자행했다.

고주리에서도 일가족 6명이 몰살당하는 잔혹한 보복이 일어났다. 학살의 현장을 목격한 생존자들은 "민가마다 불을 지르고 보이는 대로 찔려 죽였다. 제암리는 그 이튿날까지 온 마을에 탄내가 진동했다"고 당시 상황을 말했다.

일제가 가장 자주적이었던 우리 지역 선조들의 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에 극심한 공포를 느꼈고, 제암리교회 학살사건을 무리하게 감행하면서까지 이를 저지하고 싶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지금껏 수원·화성 지역의 만세운동은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우리가 밟고 선 땅 위에는 독립을 위해 피땀을 바친 선조들이 묻혔다.

그럼에도 그 역사를 까마득하게 몰랐던 것도, 유관순 열사와 같은 후대의 열렬한 관심을 받는 독립투사를 발굴하지 못한 것도, 모두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다행히 무관심했던 지난 날을 반성하고 수원시와 화성시가 힘을 합쳐 '3·1 운동 100주년'을 빛내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준비 중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100년 전,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총칼의 위협을 무릅쓰고 시민 스스로 일어난 것처럼 100년의 전환점을 도는 지금, 잊혀진 역사를 되새기고 정신을 이어가는 일은 결국 우리 시민들의 몫이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