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건영 (논설실장)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것 하고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이 제일 보기 좋더라." 불과 몇 십년 전 가난을 숙명처럼 감수하던 시절, 어른들이 곧잘 하시던 말씀이다. 그 시절 우리는 "풀뿌리 나무껍질로 연명한다"는 말이 예사로울 만큼 대부분 민초들은 굶기를 밥먹듯 했다. "사흘 굶어 도둑질 안 하는 사람 없다"고 했듯이 이웃집 텃밭에서 감자 옥수수 등을 훔치다 들켜 망신을 당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지금의 '생계형 범죄'라는 게 바로 그런 것들이었으리라.

그러던 우리도 1960년대 중·후반부터 본격 시작된 경제개발로 차츰 생활의 여유를 찾게 된다. 해마다 닥치던 그 무서운 보릿고개도 1970년대 초반부터 통일벼를 재배하면서 서서히 사라져갔다. 거듭된 경제성장으로 불과 100달러에도 못 미치던 개인소득이 무려 200배 넘게 늘어 2만달러 시대가 됐다. 그리고 세계 10~11위의 경제대국을 자랑하게도 됐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던 옛말이 말 그대로 옛말에 불과했음을 입증해 보였다 하겠다.

그러나 개인소득 2만달러 시대가 무색하게, 아직도 사회 구석 구석에선 먹고 살기 위한 생계형 범죄가 끊이질 않고 있다. 끊이긴커녕 근년들어 되레 늘어나는 추세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대형 할인점에서 생선과 김치 고무장갑 등을 훔친 70대 할머니, 임신 중인 아내와 세살배기 아들에게 먹이고 싶어 두부를 훔치다 들킨 20대 가장, 아기 분유값을 마련하기 위해 빈집을 턴 20대 부부 등등….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생계형 범죄가 2002년 4만852건, 2003년 4만2천100건이었으나 2004년엔 5만4천856건, 2005년엔 4만9천708건으로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또 한 통계에 따르면 2006년엔 전년 대비 50%나 늘었다고도 한다. 이런 추세라면 아직 통계를 보진 못했지만, 지난 한 해도 분명 늘지 않았을까 싶다.

더구나 벌금 낼 돈이 없어 노역형으로 벌금을 대신하는 소위 환형유치(煥刑留置)도 크게 늘고 있다. 환형유치 건수는 2003년 2만1천104건이던 것이 2004년 2만8천193건, 2005년 3만2천643건, 2006년엔 3만4천19건으로 계속 늘어났다.

비록 생활고 때문이라지만 남의 것을 훔치는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범죄다. 아무리 어려워도 정직하게 사는 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그렇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 같은 생계형 범죄가 상당부분 극심한 양극화에 따른 빈곤층 확대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지금 우리나라엔 최저생계비를 밑도는 극빈층이 135만명이고, 갖가지 이유로 생활보장을 못 받는 준극빈층은 자그마치 320만명이라고 한다. 한편 지난 해 소득 하위 10%와 상위 10%의 평균 실질소득 격차는 무려 8.28배나 된다. 외환위기가 몰려왔던 1997년엔 6.98배였다. 10년 동안 빈곤층 소득이 4% 줄어든 반면 부유층은 14% 늘어 이처럼 격차가 더 벌어졌다 한다. 경제는 조금씩이나마 성장하는데 가난한 이들의 소득은 되레 줄고 있다.

마침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선거기간 중 경제대통령을 다짐하며, 침체된 경제를 다시 일으켜 풍요롭고 행복한 미래를 보장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경제가 크게 좋아진다 해도 양극화 및 극빈층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선 안정된 풍요와 행복을 누릴 수 없다. 그 대신 갈등과 분열 심화로 극심한 사회불안을 불러오게 된다. 자칫 이 사회를 지탱하던 윤리적 가치와 규범이 일시에 무너져내릴 수도 있다.

그래서 당부한다. 제발 새로 들어설 정부에선 극빈자문제 해결에 심혈을 기울여 달라고. 지난 날들처럼 말뿐이 아닌, 보다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정책시행으로 말이다. 극빈자 구제를 위한 사회보장 확충은 물론, 무엇보다 그들의 안정적 일자리 창출이 절실하다. 그래서 스스로의 힘으로 가난을 벗어날 수 있도록 적극 도와줘야 할 것이다. 고대 중국의 가장 뛰어난 재상으로 평가받는 관중(기원 전 725~645)은 "정치의 으뜸은 모든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일이다"라고 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