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배 (인하대 법대 학장·객원논설위원)
시골에서 초등학교 친구들이 버스를 대절해서 인천에 온단다. 전화를 받고 서둘렀다. 감기 기운으로 몸이 으스스 했지만 핑계가 통하지 않는 모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택시를 타고 가면서 걱정이 앞섰다. 중년의 티를 벗어날 수 없는 친구들의 뱃살과 얼굴을 보면서, 낄낄대던 그 언제부터인가. 친구들의 이름이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여자동창생들의 경우에는 얼굴도 이름도 가물가물하다. 건넛마을의 누구라고 하지만 이름 따로 얼굴 따로다. 졸업한지 38년의 세월이 만든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그래서 차라리 먼저 물어본다. "친구야. 이름은. 동네는."

섭섭해 하는 표정도 한 순간, 벌써 할아버지가 됐다는 친구는 정말 할아버지처럼 너그럽다. 시집보내야 할 딸을 둔 동창은 걱정이 앞서 있다. 대학을 보내야 할 친구는 수능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신 친구들은 병수발에 걱정이다. 그렇게 한바탕 인사와 생사확인이 끝났다.

그리고 너나할 것 없이 무대에 나와 한잔의 동동주를 안주 삼아 구성지게 노래를 부른다. 친구가 이리저리 사진을 찍는다. 그 때 갑자기, 그 흔한 앨범도 없이 계단에 모여앉아 찍었던 한 장짜리 초등학교 졸업사진이 생각난다. 궁금하다. 180여명의 친구들은 과연 무사한가.

몇몇 친구들은 소식이 끊어진지 오래다. 제 2의 IMF가 온다고 하니 더 조바심이 난다. 지난 10년간 잘 나가던 친구들 몇몇은 IMF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다. 은행이나 회사에서 잘려나간 친구들이 밖에서 할 일이란 없었다. 시도한 사업마다 실패했다. 후회를 했다. 어느 날, 농사나 지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시골에 남아 농사일을 한 친구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예나 지금이나 농사일은 힘들고, 정부정책에 속을 대로 속은 친구들이다. 밤늦게 시골로 향하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고, 또 흔들었다. 제발 꿋꿋하게 버텨내어, 내년 송년회에서 다시 만나자고.

그러나 어렵게 대학을 졸업시킨 자식들 마저 제 2의 IMF와 청년실업에 내몰리고 있다. 이미 주변은 더욱 어려워졌다. 펀드실패나 아파트 폭락은 대화거리도 아니다. 겉은 멀쩡한 공장이지만 일거리가 없어 강제로 휴가를 써야 하는 친구들이 늘어나고 있다. 성형외과의 호황은 옛말이고, 동네 병원도 어렵다고 한다. 광고시장이 메말라 몇 달째 월급을 주지 못하는 지역 언론사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사정을 들으면서 답답했다. 월급은 나오지 않는데 출근해야 하고, 밥도 먹어야 하고, 학교에도 보내야 한다. 그런데 무슨 돈으로 버틸 것인가. 거짓말 같은 이 상황은 성실하고 착한 우리 이웃들이 겪고 있는 현실이다.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제 2의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가 여부는 국민들의 자신감과 의지에 달려 있다고. 그 출발점은 정부와 정책에 대한 신뢰라고. 그런데도 정부나 국회의 대응방식을 보면 분통이 터진다. 금리나 환율도 억장을 무너지게 한다. 정부나 연구소는 성장률을 끝도 없이 낮춰 잡고 있다. 그런 사이에 국회는 어물쩍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잽싸게 SOC로 포장하여 경인운하사업과 4대강 정비사업도 끼워 넣었다. '형님, 호남, 그리고 지역구 예산'으로 명명된 내년도 예산이야말로 신뢰 상실의 대명사다.

세계적 경제위기의 상황이라면서도 내 지역구 몫을 챙기고, 그 공을 한껏 자랑하는 정치인들의 행태에 할 말을 잊는다. 실직보다 배고픔보다 국민들이 더 절망하는 이유는 신뢰상실에 있다는 것을 과연 알기나 할까. 위기의식은 커녕 힘과 협잡의 논리가 판치는 예산을 보면서 묻는다. 내 고향에 또 다리를 놓으면 농사짓는 친구들은 행복해 할까. 운하를 파면 일감이 없어 전전긍긍하는 공장의 친구들은 또 4대 강으로 가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