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한구 (수원대 경상대학장·객원논설위원)
중국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경공(景公)이 어느 날 문무백관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주흥이 도도해진 제경공은 즉석에서 활시위를 당겼으나 그가 쏜 화살은 모두 과녁을 빗나갔다. 그럼에도 좌중의 신하들은 약속이나 한 듯 손뼉을 치고는 "최고의 활솜씨"라며 칭송해 댔다. 신하들의 도를 넘는 아부에 내심 불쾌해 하던 그에게 현장(弦章)이란 신하가 찾아와서 아첨하는 신하들을 경계할 것을 당부했다. 순간 제경공은 "현장아, 안영이 죽은 뒤 다시는 나의 과오를 지적하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며 현장에게 생선 50수레를 포상했다. 그러나 현장은 "제가 이 선물을 받으면 안영의 교훈을 그르침은 물론 저 자신 또한 아첨하는 신하들과 진배없게 될 것입니다"라며 선물을 사절했다. '상행하효(上行下效)', 즉 윗사람이 행하면 아래 사람이 본받는다는 메시지다.

우리나라가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최근 들어 주식시장이 빠르게 되살아나고 있는 점도 주목거리이려니와 지난 시절 단기간에 외환위기를 극복한 이유 때문이었다. 심지어 세계금융자본주의 심장부인 미국 연방준비위원회(FRB)의 고위책임자가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외환위기 극복경험을 전수받고 돌아갔다는 소문도 들린다. 오죽이나 답답했으면 자존심까지 접고 금융후진국에서 구걸(?)하듯 한 수 배워 갔을까.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어깨가 절로 으쓱거리나 10년 전의 환란만 떠올리면 마음이 편치 못한데 그 중 하나가 부실기업인들의 과도할 정도의 모럴 해저드였다. 당시 다수의 부실 기업인들이 법의 심판을 받았다. 못 잡는 건지 안 잡는 건지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은 아직도 해외도피 중이며 절대다수의 부도덕한 부실 기업인들은 재산을 고의로 빼돌리고 알거지 행세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한마디로 '배째라' 식이었다. 덕분에 환란극복비용 200조원은 고스란히 국민들의 부담으로 전가되었다. 지구촌시대에 편승하기 위한 대가 치고는 너무나 엄청나고 혹독했다.

작금 정부의 경제난 극복 해법도 10년 전의 외환위기 해법과 흡사하다. 은행을 제외하면 구제대상이 종래 재벌에서 중소기업과 서민가계로 바뀐 것뿐이다. 정부는 세금과 빚을 내 조달한 막대한 규모의 자금을 전방위적으로 퍼붓는 한편, 개인채무자 구제를 위한 각종 각양의 제도적 방법들을 양산했다. 기존의 개인파산제도 및 개인워크아웃제, 법관의 재량으로 빚을 줄여주는 재량면책 등에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사채 등 비제도권 금융이용자들에게 제도권 대출로 갈아타게 해주는 5, 6개의 금융소외자 신용회복지원프로그램을 새로 만들었다. 이뿐 아니다. 결혼 및 장례식장에서 빚을 독촉할 때는 1천400만원의 과태료를 물리기로 했으며, 일전에는 일시적 유동성위기에 몰린 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프리워크아웃제까지 도입했다.

그 와중에서 어이없는 일들도 벌어지고 있다. 채무자들이 고의로 재산을 타인명의로 이전해 놓고는 개인회생제도를 이용해서 채권자들을 농락하는 일들이 속출하는 것이다. 졸지에 돈을 떼인 채권자들은 분통이 터진다. 신용회복프로그램 탓에 채권자들이 파산하는 기막힌 일들도 벌어지는 판이다. 마치 지난 외환위기 때 부도덕한 부실 기업인들의 행태를 보는 듯하다. 최근 들어 부채탕감 업무를 대리하는 법률사무소 수도 급증하고 있다. 항간에는 조만간 또 다른 신용회복 방안이 발표될 것이란 소문이 파다해 일단 관망부터 하고 보자는 채무자들이 늘고 있다. 이런 실정이니 어느 채무자가 자발적으로 빚을 상환하겠는가. 연체율이 높아지는 것은 자명하고 국가재정이 또다시 불량채무자들의 봉 신세로 전락할 판이다.

아직은 고약한 서민채무자들이 극소수이나 상황에 따라서는 그 숫자가 급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편법적인 '배째라' 관행이 부실 기업인들만의 전유물이냐며 반문하면 할 말도 없어 보인다. 그 동안 정부가 부도덕한 기업인에게만 상대적으로 혜택(?)을 주는 등 이중 잣대를 적용했으니 말이다.

신용질서를 간과한 경제회생은 더 큰 위기를 부르는 법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속설(俗說)을 다시 확인하는 것 같아 걱정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