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를 설계할때는 거주자들이 단지의 구석구석을 쉽게 살펴볼 수 있도록 시설과 조경을 배치하고, 단지 내외부간 경계를 확실하게 설정해 외부인들이 들어오기 부담스럽게 해야 합니다. 또 지하주차장이나 단지 구석의 조명은 드문드문 밝은 조명을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일정한 밝기를 유지해야 범죄를 줄일 수 있습니다."

지난달 24일 대한주택공사 경기지역본부 2층 대강당에서는 이색적인 강연회가 개최됐다. 심헌규 화성동부경찰서 생활안전과장이 강사로 초청돼 주공 경기본부 전 직원을 대상으로 '범죄예방을 위한 환경설계 기법'이라는 주제의 강연이 진행된 것. 경찰관의 강연이라는 말에 처음에는 '시큰둥' 했던 직원들이 평소 별 생각없이 지나쳤던 아파트 단지의 작은 시설물 하나하나가 범죄 예방에 엄청난 효과를 가진다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열심히 메모를 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 관찰이 쉽게 개방된 놀이터.

■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 'CPTED'

우리에게는 아직 생소한 단어인 '셉테드(CPTED)'가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CPTED란 '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al Design'의 약자로, 우리말로 번역하면 '범죄예방환경설계'다. 즉, 주택과 도시를 설계할 때 범죄를 유발하는 요소를 줄이고 범죄를 억제하는 요소를 늘림으로써, 범죄발생률을 크게 떨어뜨릴 수 있다는 개념을 체계화한 것이다.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지만 최근 대규모 택지개발이나 아파트단지 조성, 뉴타운지구 및 재개발·재건축지구 등에는 CPTED 개념 적용이 부쩍 늘었다. 광역단체와 지자체들도 CPTED 관련 지침 만들기에 나서고 있고, 건축전문가들과 경찰, 범죄관련 학계 및 업계에서는 최근 CPTED 관련 연구와 강연 등이 부쩍 늘고 있다.

실제로 경찰청의 경우 이미 지난 2004년부터 CPTED 개념을 도입하기 시작, 2005년 9월에는 CPTED 지침을 마련하고 이를 도시계획 등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음해인 2006년 2월에는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청이 경찰청과 공조해 국내 최초로 도시설계 전과정에 CPTED 개념을 적용해 도시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서울시도 지난 3월, 국내 최초로 개발한 '범죄예방 환경설계 지침'을 재개발·재건축 지역에 적용한다고 발표했다. 이 지침에 따라 뉴타운을 포함한 재정비촉진지구내 240여개 촉진구역과 정비구역에 대해 사업시행계획 수립 단계에서 CPTED 개념이 반영된다.

경기도내에서는 지난 2005~2007년까지 부천시 고강동·심곡동·소사본동지역이 CPTED 시범지역으로 선정돼 우범지역 환경정비, 가로등 주변 가로수 정비, 보안등 위치 및 조도 조정, CCTV 설치, 개인주택 조경정비 및 방범창 설치 등 다양한 노력이 진행됐다. 판교신도시의 경우 신도시내 건물구조와 주거단지 조성, 도로배치, 조명, 조경, 담장설치 등 세부적인 설계에 CPTED 개념이 도입됐다. 또 주민들의 동의하에 방범CCTV가 설치되고 가로등 높이가 낮춰졌으며, 범죄자가 도주시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하는 '쿨데삭(Cul De Sac)' 설계도 도입됐다.

▲ 차량출입 차단시설.

■ 가까운 곳에 있는 CPTED

CPTED는 멀리있지 않다. 도시와 단지 설계에 적용하는 개념인 만큼 우리 주위에서도 CPTED 개념이 적용된 설계와 시설물을 쉽게 찾을 수 있다.

CPTED의 개념은 크게 나눠 자연적 감시, 자연적 접근통제, 영역성 강화, 활동의 활성화, 유지관리 등 다섯 가지 기본원칙으로 나눠진다.

'자연적 감시'는 일반인들의 시야를 최대한 확보하도록 건물이나 시설물을 배치해 범죄를 예방하는 것이다. 시야가 차단된 폐쇄형 담장 대신 안팎으로 자연스럽게 감시를 할 수 있는 투시형 난간이나 울타리를 설치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 놀이터나 공원에 울창한 수목이 시야를 가로막지 않도록 하고, 지하주차장이나 구석진 곳에 적절한 조명을 사용하는 것도 자연적 감시의 개념이다.

'자연적 접근 통제'는 도로와 보행로, 출입문 등을 적절히 설계해 사람들이 일정한 공간으로 진·출입 및 이동하도록 유도하고, 허가받지 않은 사람들의 진·출입을 차단하는 것이다. 즉 범죄자들이 목표물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파트 단지와 상가를 별도로 구획해 상가 이용자들이 함부로 아파트 단지에 출입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라든가, 단지 출입구의 개수를 최소화하고 경비원이 배치되지 않은 부출입구는 통행시간을 제한하거나 CCTV 등을 설치하는 것, 가스배관을 통한 침입을 막기 위해 배관을 건물내에 설치하는 것 등이 해당된다.

▲ 침입방지 배관.

'영역성 강화'는 내부인과 외부인의 영역을 확실하게 구분함으로써, 범죄 가능성이 있는 외부인의 진입을 어렵게 하는 것을 말한다. 기본적으로 아파트단지나 개인주택 주변에 울타리를 설치하고, 단지 진입로에 '대문' 개념의 상징물 및 차량 출입차단기를 설치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또 아파트 각 동의 출입구는 외부인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구조(필로티 등)로 제작하고, 보안 출입문과 감시카메라 등을 설치해 외부인에 부담을 주는 것도 범죄예방 효과가 크다.

앞에서 설명한 CPTED의 개념들이 비교적 전통적인 범죄예방 개념으로 이미 부분적으로 사용되어 왔다면, '활동의 활성화'는 최근들어 주목받으며 도시설계에서 많이 적용되는 개념이다. 활동의 활성화는 공공장소에 대한 일반인들이나 거주자들의 사용을 유도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감시를 강화하는 것이다. 예를들면 아파트 단지 중심에 대형 광장과 공원을 조성하고 각 건물로부터 이어지는 동선을 배치하는 것, 놀이터를 감시가 수월한 지점에 설치하고 주변에 벤치를 배치해 주민들의 시선을 유도하는 방법, 단지내 곳곳에 운동시설이나 휴식공간을 설치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마지막 개념인 '유지관리'는 시설물이나 공공장소를 지속적으로 관리함으로써 무질서와 불법이 쉽게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낡고 고장난 시설이나 깨진 유리창, 벽면의 낙서, 정리되지 않은 광고물, 오래된 쓰레기 등이 주변에 없도록 파손된 환경을 즉시 보수하고 청결을 유지하는 것으로도 범죄가 일어날 가능성을 낮출 수 있다.

▲ (좌)폐쇄형 담장. (우)높이가 낮고 오픈된 담장.

이같은 CPTED의 개념은 미국, 영국, 네덜란드, 뉴질랜드, 일본 등에서 이미 성공적으로 적용되고 체계화되고 있다. 영국과 네덜란드 등에서는 구체적이고 세세한 기준을 모두 통과한 건축물에 CPTED 인증을 주는 제도도 시행하고 있어, 우리나라도 이같은 제도들이 속속 도입될 것으로 기대된다.

주공 경기본부 관계자는 "이미 셉테드 개념은 전 사업지구에 대해 설계단계부터 현장시공, 입주 후 관리단계까지 적용되고 있다"며 "최근 정부와 지자체 등에서 셉테드 관련 지침을 제정하거나 도시계획 및 건축허가 과정에서 다양한 요구를 하고 있어, 우리나라도 조만간 셉테드에 대한 인식이 크게 확산되고 제도가 정착될 전망"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