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미술관

  • 유구한 '인증의 역사' 거대 지도에 담다 [경기도&미술관·(16·끝)]

    유구한 '인증의 역사' 거대 지도에 담다 [경기도&미술관·(16·끝)] 지면기사

    정재철의 '3차 실크로드 프로젝트 루트맵 드로잉' 2009~2011년 직접 방문했던 나라 그려수집한 여러 물질도… 감상의 영역 확장한때 여행자에게 해외여행을 기억하기 가장 좋은 기념품은 여권이었다. 각 나라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찍어준 도장에 각인된 날짜와 장소는 사진만큼이나 여행의 순간을 소환하는 이정표였다. 자동출입국 제도가 생기면서 더 이상 모든 여행지의 여권 도장을 수집하는 것은 어려워졌지만,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자 할 때 모으고 보관하려는 행동을 반복하며 인생을 살아간다. 오늘 소개하려는 경기도미술관 소장품은 자신의 경험과 행위를 수집하고 나타내는 데 인생을 바친 정재철의 작품이다.정재철은 2010년 2월 성인 한 명의 평균 신장보다도 높고 큰 거대한 세계지도를 그렸다. 이 지도는 2009년부터 2011년까지 2년 동안 작가가 직접 방문한 나라들을 중심으로 그려졌다. 영토와 영해를 파란색과 녹색으로 정확하게 구분하여 그리는 일반 지도와는 달리 작가가 방문한 나라는 빨간색, 노란색, 녹색, 흰색 등으로 표현되었고, 이외 지역은 바다색의 농도를 조절하여 담아내었다. 빨간색의 굵은 선으로 나타낸 작가의 이동 경로에는 정재철이 각 나라에 머물 때 제작한 도장이 찍혀 있다.작가는 마치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양의 문화교류가 이루어졌던 것에 영향을 받아 작가로서의 예술 행위 안에서 일상과 예술, 현지인과 비현지인의 교류를 작업 주제로 삼아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보통 그는 국내에서 버려진 폐현수막을 다른 물건으로 재제작하고, 그것을 전달하거나 활용하는 행위를 기록했다. 정재철은 각 프로젝트가 끝날 때마다 루트맵 드로잉을 제작해 해당 프로젝트를 마무리했다. 이 작품은 평면 작업으로서도 충분히 매력있지만, 정재철이 프로젝트 기획 시기부터 꼼꼼히 기록해 놓은 작가 노트, 영상 등을 비롯하여 프로젝트 맥락에서 수집한 여러 물질과 함께 살펴보았을 때 감상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는 것에 큰 의미를 지닌다. /이혜현 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사정재철作 '3차 실크로드 프로젝트 루트맵 드로잉'. /경기

  • 위에 겹쳐진 차바퀴 자국과 개 한 마리 [경기도&미술관·(15)]

    위에 겹쳐진 차바퀴 자국과 개 한 마리 [경기도&미술관·(15)] 지면기사

    공성훈의 '벽제의 밤-개' '수렴과 발산' 창립·2019년 이인성 미술상동물권·실존·삶·죽음 등 다양한 맥락 연구어스름한 어느 겨울날, 근처를 지나가던 외딴 차의 헤드라이트가 쌓인 눈 위에 수없이 겹쳐진 차바퀴 자국과 개 한 마리를 비춘다. 한참 잠이 들 시간인 것 같지만 개는 매서운 겨울 날씨 때문인지, 이미 수없이 지나간 차 때문에 경계심이 심한 것인지 옆에 있는 개집 안으로는 들어갈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또다시 자신을 비추는 붉은 빛에 개는, 누굴까 얼굴을 살펴보다가 "아, 우리 동네 사람이군!"이라 말하며 기분 좋은 꼬리 올림으로 그를 맞이한다. 그 후 '드디어 동네 사람들 모두 귀가했군!'이라 생각하며 기지개 한 번 크게 켜고 잠을 청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2003년 당시 공성훈의 작업실이 위치한 경기도 고양시 벽제동에는 유난히 개가 많았다. 떠돌이 개를 비롯해 개 사육장도 많았던 곳이다. 작가는 자신의 시선에 계속 들어오던 개를 그리기 시작했다. 공성훈은 회화로 작품활동을 하기 이전, 인천 지역을 기반으로 결성된 '수렴과 발산' 창립동인으로 활동하며 제도 비판적인 다양한 결의 설치작품과 산업용 페인트를 칠해 제작된 키네틱 아트적인 실험적인 작업에 몰두했었다. 그는 1990년대 후반부터 벽제, 모텔, 밤, 가로등 또는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빛, 개를 주제로 그리기 시작하며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한국 풍경을 주로 그리던 작가는 2019년 제 19회 이인성 미술상을 수상하며 그 업적을 인정받기도 했다.특히 그 주제 중에서도 1998년부터 2008년까지 10여년 동안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된 개는 비슷한 시기부터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동물권과 더불어 '벽제' 지역이 주는 장소성이 함께 회자되며 실존의 문제, 삶과 죽음의 경계점, 도시개발로 인한 소외 등의 다양한 맥락에서 연구되고 있다. 공성훈은 단순히 개라는 대상을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술로서 승화시켜 사회의 여러 이야기를 담론화할 수 있는 작품을 그려낸 작가였다. /이혜현 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사공성훈 作 '벽

  • 잊혀진 남이섬 물탱크의 '생존신고' [경기도&미술관·(14)]

    잊혀진 남이섬 물탱크의 '생존신고' [경기도&미술관·(14)] 지면기사

    김준의 '숨' 파이프 진동·떨어지는 물소리소리 채집해 특정 장소 경험토록'사운드 스케이프' 설치작품사각 구조물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서는 순간 소리의 울림이 얼굴을 감싼다. 사방에서 들리는 소리는 또 다른 공간으로 감각을 이동시킨다. 물방울이 이따금 똑똑 떨어지고, 아스라한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울림이 들리면 눈을 감고 여기가 어디인지 그려본다. 어릴 적 놀던 파이프 미끄럼틀이 떠오를지도, 동굴 탐험을 떠났던 어느 날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혹은 그 소리가 세월호 참사와 같은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다. 이처럼 저마다의 감각으로, 기억으로, 소리가 들려주는 울림을 따라가면 나만의 풍경이 펼쳐진다.김준 작가의 '숨'은 2014년 장소특정적인 설치작업으로 처음 선보였다. 남이섬의 오래된 물탱크는 과거에 식수 공급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지만 섬이 개발되는 과정에서 차츰 잊힌 존재가 되었다. 작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사라져가지만, 여전히 섬에서 자리하고 있던 이 존재에 귀를 기울였다. 콘크리트 틈 사이로 떨어지는 물소리, 땅속 벙커와 파이프 사이의 진동소리를 증폭하여 물탱크 주변에 설치하였다. 이 소리는 마치 숨소리처럼 물탱크 주변을 진동하며 섬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내가 여전히 여기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지난 과거로 잊혀가는 사물이 소리를 통해 살아났다.경기도미술관의 소장품인 '숨'은 장소특정적 설치를 전시장으로 가져온 설치작품이다. 김준 작가는 특정한 장소에 발생하는 소리를 채집하고 재구성하여 새로운 소리 환경을 만들어 펼쳐 보이는 작업을 한다. 이른바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 즉 소리로 경험하는 풍경이다. 소리라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이용해 특정 장소에 대한 기억과 감각, 경험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소리는 언제든 존재한다. 우리가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작가는 작품을 통해 언제든 존재하는 이 소리로 인간의 사회와 풍경을 감각하게 한다. 존재하지만 보지 못한 물탱크나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지만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전자기적 파장을 소리로 보여주기도 한

  • 거울에 비치는 건 어떤 '나'인 걸까 [경기도&미술관·(13)]

    거울에 비치는 건 어떤 '나'인 걸까 [경기도&미술관·(13)] 지면기사

    이용백의 '새드 미러' 선배 실종으로 얻게된 생각 작품에 담아자아의 실재·이상사이 간극… 고민·여운이용백은 독일유학 시절이었던 1990년대 초반, 거울을 자주 들여다보았다고 한다.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되뇌었던 그때, 함께 유학중이던 선배가 정신분열을 일으키고 실종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용백은 그 상황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고, 몇 년 후 그가 경험했던 상황과 관련된 그의 생각을 작품으로 제작했다.<새드 미러>, <깨진 거울> 등 일련의 거울이 포함된 미디어 설치작품은 이러한 내밀한 이용백의 일상과 심리로부터 출발했다. 선배의 실종과 관련하여, 이용백은 자아 분열에 대한 생각을 되짚어 보았다고 한다. '자아가 분열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거울이 깨져서 반사된 내 모습이 일그러지는 것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라는 고민을 지속했다고 한다. 서로 모순되는 2개의 자아가 의식적으로 통합되지 않은 체 함께 존재하는 것이 자아분열이라고 한다면, 이용백의 <새드 미러> 앞에 섰을 때 우리의 모습과 우리의 생각은 과연 어떤 것일까.거울 앞에 반사된 우리의 모습은 실제의 나와, 되고 싶은 나 사이, 어디쯤에 있을까. 이용백의 <새드 미러>를 통해 우리는 자아의 실재와 이상 사이의 간극에서 우리의 위치를 고민하게 되는 순간을 경험한다. 또한 이 작품의 요소는 거울을 포함한 사운드, 거울에 투영되는 구름 모양의 영상화면까지 아우른다. 우리가 <새드 미러>앞에 서 있는 순간은 그래서 자신의 실제 자아를 반사하는 동시에 우리 귀에 들려오는 소리와 화면까지 볼 수 있는 이미지이다.<새드 미러>는 이용백이 선배의 실종을 갑작스럽게 맞이했던 일상의 재난처럼,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의 현재를 보여주려는 일종의 외침일지도 모른다. 비현실적인 일상 앞에서 우리는 때로는 할 말을 잃고 슬픔을 표현할 길 없어 망연자실한다. 동시대에 더더욱 우리가 처한 현실의 벽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자신을 발견하듯, <새드 미러>는 200

  • 아버지 기억 벗삼아 그린 '22장의 격동기' [경기도&미술관·(12)]

    아버지 기억 벗삼아 그린 '22장의 격동기' [경기도&미술관·(12)] 지면기사

    조동환·조해준의 '미군과 아버지' 조동환이 겪은 11~22살 특별한 경험 다뤄아들 조해준 '구술 드로잉' 조형물로 설치누구나 한번은 부모님 삶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순간이 있다. 글쓴이도 여든을 곧 맞이하는 어머니의 어린 시절이 궁금하다. 어머니는 옛 기억을 소환하여 자주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시곤 한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 삶의 기록을 특별한 형태로 남기고픈 마음이 스쳐가지만 막상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련한 기억의 한자락을 요즘 더 들려주시려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가슴이 시려온다.조해준의 아버지를 향한 마음이 글쓴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군과 아버지'를 처음 만났을 때와 지금 이 작품을 보면서 차오르는 울림이 다른 것은 글쓴이의 어머니 때문일 것이다. 과거와 다른 감각이 열리면서 새로운 감동을 받는 까닭이고 할 터이고.조해준의 아버지가 화가 지망생이었기에 예술가 아들과의 공명이 그들 사이에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욱 가슴을 울리는 것은 그의 아버지가 겪어야만 했던 시대를 22장의 다큐멘터리 드로잉으로 제작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시대를 이야기하고 반영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동시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미군과 아버지'는 조해준의 아버지이자 이 작품의 작가이기도 한 조동환이 11살부터 22살까지 겪었던 특별한 경험을 다룬다. 조동환이 처음 미군을 만난 장소는 일본 홋카이도였으나, 미군부대에서 카투사로 복무하던 시기에 미군을 다시 보고 들으면서 경험했던 그의 이야기가 '미군과 아버지'의 탄생 배경이 되었다.이 작품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분단, 한국전쟁, 반공이데올로기로 혼란스러웠던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기를 청년 시절로 보냈던 조동환의 개인사이자 동시에 시대사다. 조해준의 구술 드로잉은 아버지의 기억을 소환하여 젊은 시절에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도록 만들었다. 그야말로 '꿈의 프로젝트'가 되었다. 입체조형물로 설치한 '미군과 아버지'를 통해 관람객은 책장을 넘기듯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시대를 공

  • 오리인듯… 물인듯… 바람인듯… 휘몰아치는 붓질에 해석은 저멀리 [경기도&미술관·(11)]

    오리인듯… 물인듯… 바람인듯… 휘몰아치는 붓질에 해석은 저멀리 [경기도&미술관·(11)] 지면기사

    이강소의 '섬으로부터' '오리형상' 리드미컬한 필획 잘 표현돼"의도할 까닭 없어" 물아일체 사상 체화'그 누가 새 붓을 잡고서(何人把新筆) 강물 위에 새 을(乙)자를 그려놓았나(乙字寫江波)'물 위를 기운차게 유영하는 오리를 보며 길들여지지 않은 '새 붓'으로 '새 을'자를 그려놓았다는 기막힌 표현을 남긴 이는 고려시대의 문인 정지상(鄭知常)이다. 그가 다섯 살 혹은 일곱 살 때, 심지어는 두 살 때 지었다는 확인하기 어려운 전설까지 이 시에 따라붙는 걸 보면 고려 문학을 폄하하던 조선 문인들이 문학천재 정지상의 시만큼은 후대에까지 찾아 읽었다는 사실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이 시를 마주할 때마다 자연스레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작가 이강소의 그림이다. 그는 '오리화가'라고 불린다. 꽤 많은 작품 속에 마치 작가의 분신처럼 오리 형상의 붓질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그 까닭을 궁금해 하지만 정작 작가는 '오리가 그리기 쉬워서'라 말할 뿐이다. 어느 해 겨울 대공원에 갔는데 호수 위 얼음 덩어리 사이로 오리가 움직이는 '생동(生動)'의 장면을 그려보려 했던 것이 우연히 오리를 그림에 담게 된 이유였다. 오리로부터 시작한 이미지이긴 하나 안개와 물, 구름이 될 수도 있고, 그 어떤 것들보다 필획의 리드미컬한 손의 감각을 잘 드러낼 수 있는 형상이기도 하다.경기도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강소의 작품, '섬으로부터'에도 역시 오리가 등장한다. 거칠고 속도감 있는 붓질을 보면 그림 속에는 분명 바람이 불고 있다. 사나워지는 날씨에 오리들은 화폭 바깥까지 달아날 기세로 서둘러 돌아가야 할 곳을 찾거나, 아예 물속으로 자맥질을 해서 몸을 숨겨본다. 바삐 몸을 움직여내지 않는다면 저 바람에, 혹은 바람이 일으키는 물보라에 기억도 형상도 없이 갇혀버리거나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꼭 그렇게 피해야 할 일인가. 그 바람에, 물결에 나를 내맡기고 한 몸이 되는 일은 도저히 아니 될 일인가.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면, 처음 바람을 피해 줄달음을 치던 오리가 거센 바람과

  • 세월호 참사 이후… 반짝이는 바다가 씁쓸해진 까닭 [경기도&미술관·(10)]

    세월호 참사 이후… 반짝이는 바다가 씁쓸해진 까닭 [경기도&미술관·(10)] 지면기사

    이우성의 '세상은 내가 꿈꾸지 않게 한다' 두 폭의 천으로 이루어진 이우성 작가의 '세상은 내가 꿈꾸지 않게 한다'는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그려졌다. 이 사실을 알고 보면 바다의 모습은 더욱 쓸쓸하다. 파도를 가르는 배 위에서 청년이 바라보는 바다는 분명 빛으로 반짝이고 있는데도 말이다.작가는 주로 일상에서 겪은 일이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포착하여 그려낸다. 세월호 참사는 당시 청년작가인 그에게도 일상으로 파고든 사건이었다. 청춘에게 아름답게만 보이던 바다가 더 이상 있는 그대로의 반짝이는 아름다움으로만 느껴지지 않던 그 시기의 감상이 담겨 있다.회화가 시공간을 반영하는 시대의 목소리라고 여기는 작가의 생각처럼, 작가의 이야기는 지극히 주관적인 소재를 화폭으로 옮기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세대들에게 보편성을 느끼게 한다. 개인의 삶의 이야기가 모여 전체 사회로 확장되듯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그려내며 시대의 목소리를 담는다. 10년 전 수많은 청년들이 사회적 참사 속에 떠올렸을 법한 '세상은 내가 꿈꾸지 않게 한다'라는 문장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것처럼.작가는 이 시기부터 캔버스 대신 천을 회화의 지지체로 자주 사용하기 시작했다. 보관과 이동이 편리할 뿐 아니라 크기의 제한도 없다. 전시를 할 때는 천장에 걸거나 벽에 고정할 수도 있고, 바닥에 끌리게 할 수도 있다. 2015년 진행한 프로젝트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며'에서는 서울 구석구석을 거닐며 빈 벽에 그림을 걸었다. 2023년에는 강릉 동부시장 곳곳에 걸개 그림이 걸렸다. 안료도 유화보다 더 평면적이고 가벼운 느낌의 아크릴 구아슈를 주로 사용한다. 이러한 재료의 선택은 작가가 회화의 소재를 일상에서 찾듯, 회화 자체도 일상에 더 쉽게 스며들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10년전 쓸쓸히 바다를 바라보던 청년은 어느새 40대에 접어들었다. 작가가 그려온 현재의 모습들은 이제 과거가 되었지만, 여전히 작가는 '지금'을 그린다. 지금은 다시 과거가 되겠지만, 이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또 다른 나의 이야기, 사회의 이야

  • 현실에 판타지 한 스푼 '혼돈의 한국사회' [경기도&미술관·(9)]

    현실에 판타지 한 스푼 '혼돈의 한국사회' [경기도&미술관·(9)] 지면기사

    이흥덕의 '바나나 카페' 1993년作… 1990년대 관통한 '카페' 연작폐쇄성·양면성 표현… 그 시절 풍경 녹여이흥덕의 '카페' 연작은 1987년 <카페>에서 시작해서 1990년대를 내내 관통하다가 1999년에 <빈 카페Ⅰ·Ⅱ>로 이어졌고, <사비나 카페>(2003)로 막을 내렸다. 1987년부터 1993년까지 17점을 그렸는데, 가장 많이 그린 시기다. 그 중 <바나나 카페>는 1993년 작품이다.그에게 '카페' 연작은 단순히 커피와 술을 마시는 공간이 아니라, '카페' 밖의 세상을 적나라하게 투영시키는 마술의 '유리구슬'이다. 이 유리구슬에 비친 '카페'는 사람들이 이루지 못한 꿈과 비루한 현실, 날것의 현실에서 벗어난 '비현실', 현실을 월경해 버린 '초현실'이다. 끝없는 욕망의 판타지다. 그는 이 뒤범벅의 현실을 고스란히 화면에 심었다.'카페' 연작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는 '만남'을 매개하는 카페 공간의 폐쇄성이고, 둘째는 낮과 밤에 따라 이율배반의 양태를 보이는 양면성이다. 셋째는 현실과 혼합된 신화와 판타지를 통해 혼돈의 한국 사회에 대한 미래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카페'는 화면 내부에서조차 벽으로 둘러쳐져 있고, 당시 카페들이 대부분 지하 공간을 활용했던 것을 상기시키듯 오직 조명에 의해서만 그 육감적 신체를 드러내고 있다. 한국의 1980년대 도시 카페란 유럽의 로드(Road) 카페들처럼 커피향과 예술적 향취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카페의 양면성은 그 공간이 지닌 특이성 때문일 수 있다. 카페는 점심시간을 전후해 문을 열어 밤늦게까지 영업했다. 낮에는 주로 비즈니스맨들의 미팅 타임이 많았고, 가볍게 마실 수 있는 커피와 음료를 소비했다. 이들은 말쑥한 검은 양복과 넥타이, 007가방을 들었거나 간편한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그러나 퇴근시간을 넘기면 맥주와 고급 양주가 메뉴로 올라오고, 여종업원들도 성의 뮤즈로 둔갑했다.시인 황지우가 1980년대를 "죽음과 절망으로 가득

  • 한데 모인 '한 뼘짜리 동심'… 꿈 나르는 초대형 풍경화로 [경기도&미술관·(8)]

    한데 모인 '한 뼘짜리 동심'… 꿈 나르는 초대형 풍경화로 [경기도&미술관·(8)] 지면기사

    강익중의 '5만의 창, 미래의 벽' 2008년부터 최남단·최북단 어린이 참여 '꿈 모으기' 타일벽화 프로젝트 경기도미술관 전시장 앞에 서면 회랑을 가득 채운 알록달록한 타일들이 눈에 띈다. 멀리서 보면 모자이크 풍경화처럼 보인다. 자세히 보면 산과 바다를 그린 배경에 작은 나뭇조각 타일들이 붙어 있다. 작품은 강익중의 '5만의 창, 미래의 벽'으로, 작가의 '어린이들의 꿈 모으기 활동'으로 만들어진 대규모 벽화 작품이다.개별의 타일은 어린이들이 연필이나 색연필, 크레파스 등으로 그려본 꿈과 희망이다. 아이들의 꿈과 희망에는 행복한 가족의 모습, 우주비행사, 과학자, 운동선수, 요리사, 가수가 된 자기 모습, 남북통일, 슈퍼 히어로, 행복한 지구의 모습들이 담겨 있다.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이 산과 바다와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그 풍경 위에 네온사인으로 비눗방울을 불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다. 두 아이가 만든 비눗방울은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색으로 변하며 아이들의 꿈 위로 날아가고 있다.2008년에 진행된 이 벽화 프로젝트는 대한민국 최남단 가파초등학교와 최북단 대성초등학교까지 전 지역에서 참여한 5만 명의 어린이들과 자원봉사자 삼백삼십 명의 마음이 모여 완성된 것이다. 2018년에는 당시 참여자들을 다시 만나보는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미술관의 오랜 기억을 간직한 작품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강익중은 이 작품을 "모두에게 바치는, 모두를 위한 그림"이며, "아이들의 그림은 세상을 바라보는 작은 창이며, 모든 사람이 아이들의 그림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작가인 자신이 할 일"이고, "전 세계 아이들의 그림으로 임진강에 다리를 놓고, 전 세계인들은 우리가 하나 됨을 보고, 증거하고, 남북은 축제를 열고, 임진강에 다리가 놓이는 날까지 계속 그림을 모으고 싶다"고 말한다.간혹 어린 시절 자신이 그렸던 꿈을 찾으러 미술관을 방문한 참여자들을 만나기도 한다. "혼자 꾸는 꿈은 그저 꿈이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영국 비틀스

  • 미술 생산·제작 노동… 두 업(業) 사이를 비춘 포털 [경기도&미술관·(6)]

    미술 생산·제작 노동… 두 업(業) 사이를 비춘 포털 [경기도&미술관·(6)] 지면기사

    권용주의 '만능벽' 창작과 일상 연결한 영상 작품… 전시장 공사하는 작가 통해서 예술·예술가 위치 질문"미술 생산자이자 동시에 전시의 보조 인력이 되면서 가끔씩 묘한 감정에 휩싸이기도 한다." 영상 작품 '만능벽'에서 전시장 조성 공사에 참여한 한 예술가의 대사이다. 이 작품은 전시와 전시의 뒷면 사이에서 예술 생태계를 살아가는 예술가의 행보를 비춘다.작가 권용주는 예술과 일상, 사회의 경계 안팎을 연결하는 작품을 '포털(portal)'의 개념을 빌어 선보인다. 최근 작업에서 '안료 조각'은 화합물이자 예술 재료인 안료를 유기체 형태의 조각으로, '캐스팅 연작'은 산업 부산물을 석고로 본뜬 조각으로 제시했다. 이처럼 작가는 도시에 부유하는 폐품들이나 일상과 노동, 생존에 관한 것들을 작업의 소재로 포함시켰다. 예술과 일상의 요소들을 병치하거나 접합시킴으로써 통념상의 미적 경계를 넘어 사회와 경제 구조의 실마리를 작품 안에 녹여냈다.'만능벽'은 한 예술가가 부업으로 전시 공간 디자인과 제작 노동을 하는 장면을 다룬 영상이다. 작가는 예술과 노동에 관한 문제 역시 위의 작품들에서처럼 순환하는 구조로 다루었다.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한 이 작품에서 작가는 부업 노동의 현장이자 전시장 연출 공사의 현장에서 예술가로서의 솔직한 이야기를 담담한 어조로 풀어낸다. 본래 예술가, 즉 미술작품의 창작자이지만 생계와 예술 활동의 지속을 위해서 부업으로 전시장 조성 일을 하는 작가의 이야기이다. 그는 상충하는 두 정체성의 간극에서, 그리고 무언가를 창작한다는 점에서 공통되기도 한 두 업(業)의 사이에서 느끼는 복합적인 감정을 전한다.영상에서 작가는 근근이 이어가기에도 벅찬 예술 작업이 전시 기술자로서 작가의 부업보다도 더 부업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고 하며 동료 작가와의 농담을 떠올린다. "우리는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도대체 미술이란 무엇인가?" 그는 예술과 생활이 혼재된 지점에서 예술가와 예술의 위치를 질문한다.한 예술가가 작업을 이어가는 방편으로 미술계 내에서 특정한 경제적,

  • 느리고 삐걱이는 노인처럼, 쇠퇴를 마주하다 [경기도&미술관·(5)]

    느리고 삐걱이는 노인처럼, 쇠퇴를 마주하다 [경기도&미술관·(5)] 지면기사

    양정욱의 '노인이 많은 병원 302호 : 기억하는 사람' 힘겹게 식사·치매 오래된 목재로 형상화 노화의 과정 은유적으로 녹여 '공감' 의미누구나 노년을 맞는다. 초고령사회를 목전에 둔 우리에게 더더욱 노년의 삶은 먼 이야기가 아니다. 예술가의 시선에서 노인의 시간은 과연 어떤 형상으로 담길 수 있을까? '노인이 많은 병원 302호 : 기억하는 사람'은 느린 움직임으로 늙은 환자의 시간에 우리를 이끈다.작가 양정욱의 전작들은 화려하지 않지만 일상의 면면을 채우는 삶의 모습들을 형상화한다. 작가는 일상의 부분들을 면밀히 관찰함으로써 삶의 다양하고 구체적인 면모를 사유하고 형태와 움직임으로 구사한다. 이러한 작업은 이야기를 수집하고 구상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작가는 일상에서 쉽게 지나쳐 버리기 쉬운 순간이나 부분, 혹은 종업원이나 안내원, 경비원과 같이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주목받지 않는 이들의 직업에 대한 관찰로부터 이야기를 구상하고 소소한 깨달음을 공유한다. 이 이야기들은 작가가 수작업한 목재의 추상적 구조와 전동장치의 기계적 움직임, 역학적 리듬 등을 통해 작품으로 재현된다.작가의 작품에서 목재는 대개 자연스러운 무늬와 휘어짐을 가진 오래된 나무이며, 목재의 움직임은 거창하고 매끄러운 움직임이라기보다는 정밀하고 반복적인 운동과 이따금씩 삐거덕거리는 움직임으로 묘사된다. 작품들은 '서서 일하는 사람', '그는 선이 긴 유선전화기로 한참을 설명했다', '너와 나의 마음은 누군가의 생각', '날벌레가 알려준 균형 전문가의 길' 등과 같이 시적인 제목으로 서사적 깊이를 더한다. 평범했던 일상의 순간들이 작가의 섬세한 감수성을 통해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와 인간적인 감정으로 전해진다.'기억하는 사람'은 작가가 늙은 환자들의 모습에서 힘겹게 먹거나, 침침한 눈으로 보거나,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하는 등의 특징을 표현한 '노인이 많은 병원 302호' 연작 중 하나이다. 기력이 쇠한 노인의 신체와 움직임은 작품에서 느리게 돌아가는 구동력, 삐걱거리는 소리와 동작, 깜빡이는 기억과

  • 무감했던 1980년대, 폭력의 시대를 고발하다 [경기도&미술관·(4)]

    무감했던 1980년대, 폭력의 시대를 고발하다 [경기도&미술관·(4)] 지면기사

    '안창홍의 위험한 놀이' 자전적 이야기·시대정신으로 미술계 주목 아이들 전쟁놀이 빗대 '참혹한 현실' 표현 제각각 개성있는 가면 등 인간 군상 축소안창홍이 그리는 현실 세계는 적나라하기에 때로는 더욱 애달프다. 그는 자전적인 이야기와 감정을 화폭에 가감 없이 쏟아내면서도 시대정신을 외면하지 않은 작품으로 동시대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더불어 '가족사진', '위험한 놀이', '49인의 명상'과 같은 독보적인 개성을 갖춘 연작을 발표하며 한국 미술계에 걸출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소위 말하는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 후 그림에 매진하며 'POINT현대미술회', '현실과 발언'과 같은 그룹에서 활동하였다. 1989년에는 경기도 양평에 터를 잡고 지금까지 왕성히 작업을 지속해 오고 있다.경기도미술관 소장품인 '위험한 놀이'는 안창홍의 초기 연작에 속한 작품이다. '위험한 놀이' 연작은 아이들이 행하는 전쟁놀이에 빗대어 인간의 본능적인 폭력성과 참혹한 현실을 표현하고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아래 넓게 펼쳐진 벌판에서 아이들의 '위험한 놀이'가 한창이다. 아이들은 저마다 창과 칼을 손에 쥐고 쓰러진 인형 더미를 딛고 서 있다. 들판 위 늘어선 기하학적인 구조물과 얼굴과 표정을 가면으로 가린 채 익명성을 띤 아이들의 모습은 언뜻 비디오 게임의 한 장면처럼 초현실적으로 느껴진다.하지만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미 생명력을 잃고 쓰러진 천 인형과는 달리 아이들이 쓴 가면은 어느 것 하나 같지 않고 제각각의 개성을 뽐내고 있다. 또한, 크고 용맹해 보이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이 놀이가 버거운 듯 다른 이에게 안긴 작은 아이도 있다. 아마도 이는 작가가 구현한 인간 군상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특히 화면 오른쪽 뒤편의 투구벌레 가면을 쓴 아이는 눈앞의 비참한 광경을 그저 관망하듯 서있다. 그러나 뾰족한 가면 사이로 삐져나온 말간 살갗에서 비로소 이들 모두가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임을, 이 모든 광경이 상상이 아닌 현실임을 깨닫게

  • 용(龍) 지난 굴곡따라 붓질… 넘실대는 정기 [경기도&미술관·(2)]

    용(龍) 지난 굴곡따라 붓질… 넘실대는 정기 [경기도&미술관·(2)] 지면기사

    민정기의 '와룡추' 힘찬 물줄기·기암괴석 멋… 아름다운 경치 '가평 용추구곡 제1곡' 산수화 벚꽃에 한눈파는 사이 초록이 번지는 속도가 심상찮다. 늦기 전에 어디로든 나서야 짧은 봄의 한 자락이라도 맞이할 터. 경기도미술관의 소장품인 민정기 작가의 작품 '와룡추'를 들뜬 마음 앞에 내밀어본다.'와룡추'는 가평군에 있는 용추구곡의 제1곡 '와룡추'를 그린 그림이다. '용추'는 용이 승천한 곳, 혹은 그런 용의 모양새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겠고, '구곡'은 그 장소를 아홉 구간으로 나누어 따로 이름을 붙여 부른다는 뜻.이런 구곡의 풍경을 그린 '구곡도'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나라를 열었던 조선의 문인들이 많이 그리고 감상했던 산수화다. 당시 문인들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중국 남송시대의 학자 주희를 숭앙했는데, 그가 제자들과 함께 머물며 학문을 논했던 중국 무이산의 아홉 골짜기를 그린 '무이구곡도'를 감상하면서 대학자의 높은 정신과 학문적 성취를 흠모했던 것이다. 그러니 '구곡도'는 눈앞의 산수를 바라보며 풍경을 넘어 삶의 이치를 그려보게 해주었던 그림인 셈이다.'무이구곡도'가 유행한 이래 조선의 학자들은 스승이 머물던 곳, 또는 그 자신의 주변 산수에 있는 계곡을 찾아 이와 같은 맥락의 그림 그리기를 즐겼다. 퇴계 이황 선생이 머물던 도산을 그린 '도산도', 율곡 이이가 머물던 고산을 담은 '고산구곡도'와 같은 그림들이 많이 그려진 이유다. 우리 땅 여기저기에 '구곡'이라 불리는 곳은 학계에 보고된 것만 60여 개소에 이르고 서울과 경기, 강원에 걸쳐 있는 구곡은 8개로 알려져 있다.민정기 작가가 살고 있는 경기도 양평에도 '벽계구곡'이 있는데, 이곳은 조선시대 학자 이항로가 거처하며 경영한 곳이다. 작가 본인의 삶의 터전이 '구곡'으로 이름 짓고 옛 학자의 정신을 따랐던 조선 문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벽계구곡을 몇 번이나 답사한 후에 민정기 작가는 작품 '벽계구곡'을 세상에 내놓은 바 있다. '와룡추' 역시 그저

  • 죽은 나무에 평화 살아숨쉬듯… 한땀한땀 새긴 생명의 발자국 [경기도&미술관·(1)]

    죽은 나무에 평화 살아숨쉬듯… 한땀한땀 새긴 생명의 발자국 [경기도&미술관·(1)] 지면기사

    류연복의 'DMZ'국토의 속살 '들풀·들꽃' 작품으로 평온함 담겨 한편의 시같은 '목판화'역사 증명하는 1980년대 대표 장르 경기도에는 수많은 예술인들이 살고 있다. 경기도는 그들이 살아간 터전이자, 작품이 탄생한 작업실이기도 하며, 영감을 주는 소중한 기억이기도 하다. 예술가들이 바라보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작품에 담겨 흔적으로 남고, 우리는 그 흔적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본다.경인일보와 경기도미술관은 미술관의 소장품과 경기도 작가들을 중심으로 미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줄 기획을 마련했다. 경기도와 미술을 새롭게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라며. → 편집자 주 목판화의 미학은 칼맛에 있다. 칼은 '살림'과 '죽임'의 두 면을 하나로 가진 도구다. 목판화는 죽은 나무로 '살림'을 얻는, 그러니까 죽은 것과 산 것의 의미로 합집합을 이루려는 아름다운 수행이다. 그것은 목판이 가지는 여러 의미들 가운데 하나이겠지만, 오랜 역사를 살피면 그 사실은 명확해진다.어두운 근대를 거쳐 '온숨(義氣)'으로 돌아온 이 칼의 맛은, 우리가 근대를 넘어 현대사의 질곡을 헤엄칠 때 역사를 증거하고 어울림의 연대를 만들었던 회화의 한 분수령이 되었다. 1980년대 민중 목판화의 시대는 새로운 회화적 사건이었다. 그 삶의 숨결은 지금, 이곳에서 여전히 유효하다.목여(木如)는 류연복의 호(號)다. 그 말뜻은 '나무와 같다', '나는 나무다', '나무를 따른다'로 해석될 수 있다. 그가 목판화를 하면서 '나무'에 대해 갖는 사유의 면목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그의 호를 그렇게 지은 데에는 자신이 곧 '나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그의 작품들은 크게 세 개의 지류를 형성하며 흐른다. 본류는 의심할 바 없이 이 땅, 즉 모국어(母國語)로서의 국토다. 그러나 그는 거대한 국토를 형상화하기보다는 모국어의 속살이랄 수 있는 이름 없는 들풀과 들꽃들의 대지를 새긴다. 더불어 그 대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와 흐르는 강과 우뚝 속은 산과 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