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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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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칼럼] 곤궁한 사람에게 온정을 베풀어야 지면기사
'사회·경제적 어려운 사람들에게한없이 애정 베풀어야' 다산의 뜻죄수도 보살피는게 '목민관 책무'추위에 우리 주변 약자들 챙기고 온정 베푸는 일에 모두가 관심을'목민심서'는 참 좋은 책이다. 새해에 들어서 나는 또 '목민심서'를 꺼내 이곳저곳을 읽어본다. 아직 깊은 겨울철이어서 어려운 때에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올바른 목민관들의 역할인가를 알아보려는 마음에서 해보는 일이다.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약자들, 목민관은 어떻게 그들을 대해야 할 것인가를 살펴보았다. 그래서 애민(愛民)편을 뒤적여 보았다. '애민'이란 백성을 사랑하고 아껴주라는 의미여서 거듭거듭 읽어도 읽을수록 가치있는 내용을 수없이 발견하게 된다.힘없고 약하며, 가난하고 병들고, 뜻밖의 재난에 허덕이는 백성들에게 한없는 애정을 베풀어야 한다는 다산의 뜻이 눈물겹도록 자세하게 열거되어 있으니 무심코 넘어가기가 쉽지 않다. 우선 양로(養老) 조항부터 보자. 힘없고 가난한 노인들을 보살피자는 내용이니 그 일이 얼마나 값이 높은 일인가. 붙들어주고 도움을 주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노인을, 그들을 외면한다면 사람 사는 세상이겠는가. 둘째, 자유(慈幼)조항이다. 육아에 어려움을 겪는 가정에 도움도 주어야 하지만 고아들을 돌보고 교육시키는 일, 현대 사회에서 더욱 중요한 일 중 하나이다. 셋째, 진궁(振窮)조항으로 세상에서 가장 궁하게 살아가는 홀아비·과부·고아·독거노인 등 돌봐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그들, 그들을 붙잡아 일으켜 주어야만 한다.넷째, 애상(哀喪)조항으로 상을 당한 불쌍한 집안을 돌봐주는 일이다. 사람이 죽어 슬픔에 겨워 있는 집안을 돌봐주는 일이다. 다섯째, 관질(寬疾)조항으로 중병의 환자나 신체가 온전치 못한 장애인들을 돌보는 일이며, 마지막 구재(救災)는 천재지변의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구제해주는 일이다. 이 여섯 가지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바로 다산이 말하는 백성(民)이다. 이런 공식적인 약자들 이외에도 또 마음을 기울여야 할 불쌍한 약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바로 형전(刑典), 휼수(恤囚)조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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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칼럼] 학자나 어진이를 예우해야 지면기사
다산 '목민심서'에서 문안 등 제시지혜뿐아니라 독실한 행실 본보기아름다운 전통 이제는 보기 어려워옳고 바른 일은 영원히 역사로 전해오늘의 목민관들 새겨 들을 이야기옛날이나 지금이나 큰 대접을 받아야 할 사람은 학자나 어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전해지는 말이 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 임금 아래일 뿐 모든 사람의 위에 있는 사람이 바로 정승이라는 벼슬이었다. 세상에 귀하고 높으며 만인의 추앙을 받는 사람이 왕조시절의 정승이었다. 그렇게 높고 귀한 정승이지만, 학자 한 사람은 정승 셋을 감당한다면서 학자 한 사람이 있는 가문은 정승 셋을 배출한 집안보다 더 우대했다고 전해지는 말이 있다. 그렇게 학자는 우대받아야 할 높고 귀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학문에 버금가는 일은 행실이다. 독실한 행실이 있는 사람 또한 학자처럼 우대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다산은 '목민심서'의 '거현(擧賢)'에서 목민관(도지사·시장·군수·구청장 등 공무원)이 학자나 어진이를 어떻게 예우할 것인가를 제시하였다. "경전을 깊이 연구하고 행실을 돈독하게 닦는 선비가 있으면 마땅히 몸소 그를 방문하고 명절에도 문안을 살펴 예(禮)의 뜻에 맞게 해야 한다(部內有經行篤修之士 宜躬駕以訪之 時節存問 以修禮意)"라고 말하였다.다산의 뜻은 참으로 깊고 넓었다. 학자나 어진이를 찾아보고 배려하는 일은 목민관이 어진이들에게서 훌륭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벼슬과 물욕에서 벗어나 고매한 학문을 연구하고 독실한 행실을 통해 남의 모범이 되는 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여 그들의 삶이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임을 알려주는 일이라고 했다. 아무리 오두막집의 궁한 선비라 하더라도 학행을 닦아 명성이 고을에 자자한 사람은 마땅히 몸소 방문하여 싸리로 만든 사립문이 빛나게 해야 한다면서, 그렇게 하는 일이 바로 '백성들에게 선을 권하는 일(勸善于民)'이라면서 목민관은 마땅히 그런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무리 궁벽한 마을이고, 참으로 가난하여 대문도 없는 싸리로 만든 사립문이 빛나게 해주어야 한다니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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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칼럼] "속이지 말고 대들며 간(諫)하라" 지면기사
세상이 시끄럽고 나라가 어지럽다. 일본이 핵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여 우리나라에도 그 피해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정부는 항의 한마디 못 하고 일본이 하는 대로만 지켜보고 있으니 세상이 조용할 수가 있겠는가. 독립운동의 영웅 홍범도 장군의 동상을 육사에서 옮기는 일을 공론에 부치지도 않고 한두 사람의 독단으로 결행하려고 하고 있으니 나라가 어지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북한의 공격에 대비한다는 뜻으로 '선제공격'이니 '힘의 평화' 등 전쟁 불사의 대북 외교를 끌고 가고 있으니 전쟁에 대한 불안이 가셔질 수가 있겠는가.오늘의 정치는 이렇게 시끄럽고 어지럽게만 진행되고 있으니, 이에 대한 해결책을 연구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옛 성현의 말씀에서 나라의 난맥상을 해결할 방도를 찾지 않을 수 없다. '논어'에서 공자의 말씀을 들어보자.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임금 섬기는 도리를 공자에게 물었다. 옛날로야 임금을 섬기는 사람이란 3정승, 6판서에 6승지를 비롯한 고관대작이지만 지금이야 대통령을 보좌하는 내각의 총리나 장차관 및 대통령실 비서관 등에 해당하는 사람인 것이다. 참으로 짧은 대답, 공자 왈 '물기야이범지(勿欺也而犯之)'라는 내용이다. '(임금님을) 속이지 말고 얼굴을 맞대고 간쟁한다'라는 뜻이다. 대단히 높은 지혜를 가르쳐 준 말이지만 말 자체가 짧으니 주해(註解)도 짧다. 주자는 '범(犯)은 얼굴을 맞대고 간쟁한다'라고 간단히 풀이했다. '논어고금주'에서 다산은 짧게 보충의견을 더했다. '실정을 숨기고 은폐하는 것을 기(欺)라 하고, (윗사람의) 위엄을 무릅쓰고 간쟁하는 것을 범(犯)이라 한다'라고 말하고는 '예기'를 인용하여 자신의 풀이가 옳음을 증명했다. '임금을 섬김에는 대면하여 간쟁을 해도 숨김이 없어야 한다'라는 것을 제시했다. 핵오염수·홍범도 동상 등 나라 시끌'논어' '소학'선 잘못 지적을 중요시 공자의 짧은 답변을 실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인류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임금에게 어떤 일이건 숨김없이 말할 수 있고, 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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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칼럼] 율곡과 다산의 나라 사랑 지면기사
율곡 이이와 다산 정약용, 조선을 대표하던 학자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율곡은 태어나기야 강릉이었지만 고향은 파주로, 파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생을 마쳤다. 다산은 광주 출신으로 태어나고 삶을 마친 곳도 광주였으나 오늘날에는 남양주시로 행정구역의 명칭이 바뀐 곳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살았던 율곡은 당시의 일반 성리학자들과는 다르게 백성과 나라에 대한 관심이 특별하여 온갖 병폐를 안고 있던 나라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다고 여기면서 많은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그대로 두면 반드시 '토붕와해(土崩瓦解)'의 화란이 온다고 거듭 주장했다.율곡의 논리는 명쾌했다. 병들지 않은 곳이 없는 나라, '경장(更張)'하지 않으면 나라가 존재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국왕에게 대책을 올리고 상소(上疏)를 통해 경장의 방안을 제시하였다. 대표적으로 '경제사(經濟司)'라는 국가 기관을 설립하여 경제를 살려내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백성들이 굶주리고서야 어떻게 강한 나라가 되어 나라도 평안하고 외침도 막을 수 있겠느냐면서 경제 살리는 대책을 진언했다. 경제를 살려내 강병 육성으로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자는 예언까지 했던 점은 율곡이 얼마나 훌륭한 애국심의 소유자였는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율곡, 경제 살리고 강병육성 진언다산 '숭문의 시대' 기술개발 외쳐끝내 뜻 이루지 못하고 위기·망국 18~19세기를 살았던 다산, 온 세상이 썩은 지 이미 오래라면서 털끝 하나 병들지 않은 것이 없다면서 지금 바로 나라를 개혁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는 망하고 말리라고 예언하면서 나라와 백성을 살려내려는 온갖 방책을 강구하였다. 특히 탐관오리들의 발호로 세상이 너무나 썩어 문드러져서(腐爛) 그대로 두면 필망(必亡)이라는 극단적인 용어를 사용하였다. 율곡의 '경제사'에 해당하는 '이용감(利用監)'이라는 새로운 국가 기구를 신설해서 이용후생의 혜택으로 나라와 백성을 살려내자고 주장하였다. 숭문(崇文)에 빠져 있던 그 시대에 기술 개발과 기술 도입 없이는 절대로 국부는 이뤄지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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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칼럼] 조선의 선비 화서 이항로의 애국심 지면기사
조선은 선비의 나라였다. 선비란 유학에 고명하고 애국심이 투철하여 백성과 나라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글만 잘하는 사람이라고 모두 선비는 아니다. 다산 정약용은 그의 '속유론(俗儒論)'이라는 글에서 선비 중에는 참선비(眞儒)와 속유(俗儒)가 있으며 선비라면 참선비이어야 한다면서 참선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하였다. '참된 선비의 학문은 본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히 하고 오랑캐를 물리치고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고 문식(文識)과 무략(武略) 등을 갖추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다.'다산의 이야기에 의하면 선비란 글이나 잘 하고 온순하고 모범적인 처신을 하는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한다. 정치에도 밝아야 하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경제에도 밝아 부강한 나라를 만들 그런 역량까지 지녀야만 참선비라는 말을 듣게 된다. 500년 전통의 조선에는 참으로 많은 선비들이 있었기에, 조선은 선비의 나라라고 하는데, 특히 나라가 망하기 직전의 한말에 경기도 출신 참다운 선비 한분이 계셨으니 바로 화서 이항로(1792~1868)였다. 고종 3년, 병인양요로 '민심 흉흉'대원군 기세에 바른말 못하던 시대 정조 16년인 1792년 2월, 경기도 양평군(당시는 양근군) 서종면 노문리 벽계마을의 청화정사(靑華精舍)에서 이항로는 태어났다. 청화정사는 아버지 때부터 있던 기와집으로 화서의 서재요 강학하던 곳이지만, 한말 의병운동과 척양척왜의 기본논리인 '주리척사(主理斥邪)'의 시대정신이 싹텄던 세기의 토론장이었다. 화서는 큰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힌 적은 많지 않고 아버지 우록헌(友鹿軒) 이회장(李晦章)이 글 잘하던 진사(進仕)였는데 대부분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운 뒤 독학으로 연구를 거듭하여 대학자에 오르게 되었다. 학문이 깊어져 명성이 높아지자 경기도 일대는 물론 다른 지역의 학자들까지 학문을 물으려 청화정사에 몰려들면서 백계마을은 크게 알려져 학문을 강론하는 세기의 명소가 되었다. 한말 위정척사파의 효장들인 중암 김평묵(金平默)·성재 유중교(柳重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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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칼럼] 최익현 '일본의 쌀 한 톨, 물 한 모금 먹지 않겠다' 지면기사
1873년은 고종이 12세로 왕위에 오른 지 10년째로 고종의 나이 22세, 아버지 대원군의 섭정을 받지 않아도 임금 노릇이 가능한 때였다. 그때 비록 낮은 벼슬에 있던 41세의 당당한 직신(直臣) 면암 최익현(1833~1906)은 어느 누구 입도 뻥긋 못하고 대원군 위세에 눌려 숨죽이고 살아가던 시절, 대원군의 모든 독단과 국정 농단에 대한 실정을 나열하며 대원군 탄핵 상소를 올렸다. 세상이 발칵 뒤집히는 큰 사건이 터졌다. 그러나 고종과 민비는 그런 때를 학수고대하며 자신들의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던 때, 최익현에게 정3품 당상관인 승지에 임명하고 곧이어 호조참판으로 특진시켰다.그런 강력한 탄핵 상소에 대원군은 마침내 권력을 놓고 양주로 퇴거해버린다. 그러나 대원군의 세력들은 온갖 음모를 꾸며, 최익현이 임금의 아버지와 아들을 이간시킨 인륜의 죄를 지었다고 감옥에 가두고 제주도에 위리안치하는 무서운 형벌을 내렸다. 그러나 3년만에 최익현은 풀려서 귀향했다. 역사는 이때부터 망국의 징조가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한다. 1886년 병자년, 이른바 병자수호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이, 일본의 통상을 허용해주는 수교가 이룩된다. 친일파들의 꾐에 빠진 민비의 실책으로 망국에 입문하는 조치였음을 가장 명확히 파악한 최익현은 곧바로 광화문 앞에 도끼를 붙들고 상소를 올려 조약파기를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무도한 민비 세력은 최익현을 흑산도로 귀양보내 4년이나 고통을 당하게 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국권이 완전히 일본에 넘어가고 충신·열사들은 비통함을 참지 못해 자결로 순국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최익현은 죽기야 쉽지만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망한 나라를 찾지 못하고 죽을 수는 없다고 의병대장이 되어 민중 직접투쟁의 길에 들어섰다. 일본은 오직 조선을 삼킬 생각만으로 모든 조약의 약속도 지키지 않고 파기만 하면서 침략의 마수만 뻗치고 있었다.병자수호조약·을사늑약 '망국징조'국권 회복 위해 직접 투쟁의 길로 74세의 노충신 최익현은 '기신배의(棄信背義)' 16죄를 열거하여 일본의 악행에 강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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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칼럼] 대동법의 명재상 잠곡 김육 지면기사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은 뒤의 조선 후기는 나라도 가난했지만 백성들은 참으로 배가 고팠다. 가난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배고픈 백성들을 배부르게 하는 일이 정치의 최대 책무였건만 주자학에 매몰되어 이(理)다 기(氣)다만 따지며 싸우던 유학자들은 나라와 백성을 구제하는 일에는 매우 등한시했다. 나라의 형편이 그러하던 시절, 1580년 16세기 후반에 태어나 17세기 중반인 1658년에 79세로 타계한 잠곡(潛谷) 김육(金堉)은 탁월한 경세가로서 대동법의 전국적인 시행으로 나라와 백성을 구제하자고 끈질기게 주장하여 그 일을 성공시킨 위인이었다.대동법은 조선 후기에 시행되었던 가장 합리적인 세법(稅法)이었다. 이 법은 토지 1결당 백미 12말을 납부하게 하는 세법으로 그간 공물 진상, 관수(官需), 쇄마(刷馬) 등 각종 명목으로 잡다하게 걷어들여 균등치 못한 조세를 형평하게 만든 제도였다. 이 제도는 김육이 착안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미 광해군 원년인 1608년 이원익·한백겸 등의 주장으로 경기도에서 시행을 시작했으나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타지역으로 확대하지 못하고 있었다. 광해군 시절 벼슬하지 않고 경기도 가평에 은거하면서 10년 동안 농사를 짓던 김육이 인조반정 이후 나라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들어왔고, 1624년 45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으로 벼슬을 시작하면서 대동법 확대 시행을 간곡하게 주장하고 나섰다. 44세에 인조반정으로 벼슬길 올라탁월한 경세가로 백성 구제하자고'대동법 전국 시행' 성공시킨 위인 김육은 어떤 사람인가. 1580년 한양에서 청풍김씨의 대표적 인물인 기묘명현 동천 김식(金湜)의 현손(玄孫: 고손자)으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가 타계하자 참으로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이곳저곳으로 옮겨 살면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율곡 이이·우계 성혼의 학문 전통을 이어받아 김상용·김상헌 등과 가까이 지내면서 과거시험에 열중했다. 13세에 임진왜란을 겪고 1604년 25세로 소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연구했으나 그때는 광해군 시절이어서 벼슬할 뜻을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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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칼럼] 공정·공평이 수사와 재판의 원칙이다 지면기사
오늘 또 '목민심서'를 읽는다.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학자가 다산 정약용이고 다산의 대표적인 저서가 '목민심서'이니 목민심서야말로 조선 실학의 상징적인 저서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다산이 책의 저작 이유에서 '목민관'들이 읽고 백성들을 제대로 보호해주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했으니, 목민관들의 행정 지침서가 다름 아닌 목민심서였다. 당시 조선시대에야 목민관은 지방의 수령들을 말하는데, 오늘로 보면 목민관은 바로 행정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에서 3부의 요인은 말할 것 없이 국가 전체의 모든 공직자들이다.목민심서의 핵심 키워드는 '공렴(公廉)'이다. 다산은 28세 문과에 급제하고 집에 돌아와 급제를 했으니 공직생활을 시작하게 되는데 어떤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공직을 수행할 것인가에 대한 자신의 각오를 시를 통해 표현하였다. '공렴원효성(公廉願效誠)'이라는 다섯 글자의 시인데, 공정과 청렴으로 정성 바치기를 원하노라는 의미였다. 인간이라면 모든 일을 공정하고 청렴하게 처리해야 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나, 특히 백성을 돌보고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공직자들이라면 더욱 공렴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다산의 뜻이었다. 모든 공직자들 중에서도 유독 수사와 재판에 관여하는 공직자들이라면 더욱 공렴하게 업무를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에서 목민심서의 '형전(刑典)'은 그 점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한결같이 공정하게 해야만 한다(一出於公正 : 斷獄)'라는 표현에서 보이듯, 옥사(獄事)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공정' 아니고는 다른 길이 없음을 강조하였다.'인정머리 없는 각박한 수사 안되고정상 참작없는 판결 안된다' 다산 뜻수사하는 과정도 공정해야 하지만 재판의 결과도 반드시 공정하다는 평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인정머리 없는 각박한 수사도 안 되고 정상 참작의 여지 없이 혹독하게 내리는 재판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수사관이나 재판관이 꼬치꼬치 밝게 따짐으로써 명성을 얻으려고 머리털을 헤치고 흉터를 찾아내듯 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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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칼럼] 춥지 않게 겨울을 보내려면 지면기사
이제 1월도 중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겨울 추위는 아직도 한창이다. 봄이 선다는 입춘에도 장독이 깨질 추위가 있고 대동강 얼음이 녹는다는 우수도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그동안 모두들 잘 견뎌왔는데 남은 추위도 이겨내려면 여러 가지 지혜를 동원해야만 한다. 그래서 남은 추위를 춥지 않게 보내기 위해 위대한 실학자이자 대사상가였던 다산 정약용의 지혜를 빌려보자. 다산이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인생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에 대한 높은 지혜를 고향의 아들들에게 편지로 전해 주었다.고향에 있는 아들들 말고도 흑산도에서 귀양 살던 정약전 형님, 많은 제자들에게 보낸 글까지 합하여 한문으로 된 글을 한글로 번역하여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라는 제목으로 편역하였다. 어느 편지인들 의미 깊고 훌륭한 지혜로 가득차 있지만, 특별히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는 폐족에 처한 아들들이 낙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희망과 용기를 지니고 학문에 힘쓰라는 간절한 부정(父情)이 넘쳐흘러 우리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날씨가 추운 겨울에는 반드시 이웃들의 생활에 관심을 기울여 모두가 따뜻하게 살아가도록 이웃을 도와주라는 이야기는 추운 겨울을 이기는 훈훈한 인정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남 도와줄땐 절대 대가 바라지 말고어려운 사람은 그냥 도와줘야 한다 '여러 날 밥을 끓이지 못하는 일가들이 있을 텐데, 너희는 쌀되라도 퍼다가 굶주림을 면하게 해주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눈이 쌓여 추위에 쓰러져 있는 집에는 장작개비라도 나눠주며 따뜻하게 해주고, 병들어 약을 먹어야 할 사람들에게 한 푼이라도 쪼개서 약을 지어줘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가난하고 외로운 노인이 있는 집에는 때때로 찾아가 무릎을 꿇고 모시어 따뜻하고 공손한 마음으로 공경히 대해야 하고, 우환(憂患)이 있는 집에 가서는 근심스러운 얼굴빛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 고통을 나누고 잘 처리할 방법을 함께 의논해야 할 것인데, 너희들은 잘들 하고 있는지 궁금하구나'.(答兩兒) 좋은 일, 착한 일을 넌지시 권하는 아버지의 뜻이 너무나 간절하고 다정스럽다.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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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칼럼] 광주(廣州)와 순암 안정복 지면기사
"경기도는 실학의 도이다." 오래 전에 필자가 했던 말이다. "광주(廣州)는 실학의 본고장이다." 요즘 필자가 하는 말이다. 조선 후기 '실학'이라는 학문을 집대성한 학자가 다산 정약용이고 다산은 경기도 사람이어서 경기도는 실학의 도라고 했다. 경기도 중에서도 가장 크고 가장 넓어 으뜸 고을이라 칭송받던 광주에서는 실학의 대종(大宗) 성호 이익이 태어나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지금의 안산(安山)은 성호가 살던 시대에는 광주 고을에 속했던 곳이다. 그래서 모든 기록에 성호는 광주의 안산 출신이라고 되어 있다.그때도 광주이고 오늘도 광주인 곳에서 일생을 보낸 순암 안정복(1712~1791)은 토박이 광주 사람이었다. 성호의 직계 제자로 실학자 중에서도 역사학에 가장 큰 업적을 이룩한 순암은 대표적인 광주의 인물이다. 지금이야 남양주시로 편입된 조안면 능내리 다산의 고향은 다산 생존 당시에는 광주군이었으니, 조선 실학의 거장들이 살아갔던 곳이 바로 광주였으니, '광주는 실학의 본고장이다'가 옳은 말임에 분명하다. 성호·순암·다산이 광주 사람들이었으니, 광주라는 지역의 훌륭함을 말로 감히 표현할 길이 있겠는가. 문화와 학문의 고장임을 자랑스럽게 여겨도 탓할 방법이 없는 곳이다. 성호 역사학 이어받아 조선역사를과학·실증적으로 연구한 최초 학자 성호도 훌륭하고 다산도 훌륭하지만 순암 안정복 또한 두 분 못지않게 훌륭한 실학자였다. 순암의 문집이나 관계되는 글을 읽으면서 이런 큰 학자가 살았던 광주에 대한 부러움이 커서 순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순암은 숙종 38년(1712)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다. 물론 선대의 고향은 광주였다. 어린 시절 조부를 따라 서울, 전라도, 울산 등지에서 살았지만 20대 초부터 광주 경안면(慶安面) 덕곡리(德谷里)의 선영 아래에 집을 짓고 영주하였다. '텃골'이 본래의 명칭인데 비슷한 '덕골'이라는 뜻으로 '덕곡'의 한자 표시를 했다고 전해진다. 정조 15년이던 1791년 80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순암은 덕곡에 '이택재(麗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