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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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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칼럼] 율곡선생의 독서론 지면기사
조선의 대표적인 학자는 퇴계선생과 율곡선생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유학자이자 성리학자로서는 이론의 여지없이 그 두 분을 거론하는 것이 상식이다. 율곡선생은 비록 태어나기는 강릉의 외가였지만 선대의 고향이자 생애의 활동무대는 경기도 파주의 율곡리였다. 그래서 호가 율곡이고 경기도 출신임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율곡은 조선 유학의 양대 학파인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에서 기호학파의 종장으로 추대, 학자들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학자였다.퇴계는 70세까지 사셨지만 율곡은 비록 49세라는 길지 않은 생을 사셨으면서도, 높은 덕행과 깊은 학문으로 참으로 많은 학술적 업적을 남긴 저술가였다. 그 모든 저술 중에서도 '격몽요결(擊蒙要訣)'이라는 1권으로 된 책은 조선의 학생으로서는 반드시 읽어야 했던 필수과목의 교과서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당파싸움이 그치지 않고 이어지던 시대에서, 혹 율곡의 후학들과 다른 당파에서는 반드시 교과서로 채택하지 않은 경우가 있었겠지만, 대체로 그런 경향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우리 조부님이 생존해 계실 때는 우리 사랑방이 마을의 서당이어서, 나를 포함해서 많은 학동들이 격몽요결을 열심히 배우고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까지 고향에서 자랐던 이유로 그 무렵까지 격몽요결을 배워서 외우기에 열중하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중학교부터 도회지로 나가는 바람에 할아버지의 슬하를 떠났기 때문에 계속 한문을 배우지 못했지만, 나의 한문 실력의 기초는 대부분 격몽요결을 배우면서 얻어진 결과였다. 성현들 경전 읽어야 마음·뜻 알고착한 일 악한 일 구별할 수 있기에책 안 읽고선 사람노릇 못한다는 뜻 책이 책상 위에 놓여있어 요즘도 격몽요결을 자주 읽어보는 때가 많다. 주말에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을 때에는 어김없이 그 책을 읽을 때가 많다. 며칠 전에도 10장으로 구성된 그 책의 한 장씩을 읽어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제4장이 독서장(讀書章)인데, 읽으면 읽을수록 맛이 깊어지고 의미가 새로워지는 기분을 느낄 때가 많다.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율곡의 말씀이 너무 좋다.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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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칼럼] 법의 적용은 최측근부터 시작하시오 지면기사
정조 18년은 1794년으로 다산의 나이 33세 때였다. 그해 6월 아버지 상으로 입었던 복을 벗자, 7월23일에 성균관 직장이라는 벼슬이 내렸다. 10월27일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다가 28일 홍문관 수찬으로 옮겼다. 그날 밤 임금에게 불려간 정약용은 29일에는 경기도 암행어사에 임명되고 11월15일까지 암행어사로 행했던 일을 복명하라는 엄한 명령을 받았다. 임금의 높은 신임에 능력까지 뛰어난 정약용은 공정하고 청렴한 공직자로서의 모든 지혜를 발휘할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정말로 잘 나가던 시대의 다산 이야기가 생생하게 기록으로 전하는 내용이다. 연천(漣川)·삭녕(朔寧)·마전(麻田)·적성(積城) 등 네 고을을 집중적으로 염탐하라는 임금의 뜻이었다. 다산, 임금 최측근 김양직·강명길의비행·부정비리 샅샅이 밝혀내 직보 현지에 도착해 목민관들의 비행을 살피는데, 현직 목민관들보다는 진짜 큰 부정과 비리의 공직자는 전 연천현감과 전 삭녕군수였다. 연천현감 김양직(金養直)은 궁중의 지관(地官) 출신으로 왕족들의 묫자리를 잡아주는 임금의 최측근이었고, 삭녕군수 강명길(康命吉)은 궁중의 어의(御醫)로 임금의 주치의였으니 가깝기로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사이였다. 그들의 비행이나 잘못을 말하는 누구도 없어 그들은 5년이 넘도록 오랜 재임기간에 온갖 못된 짓을 했지만 무사하게 임기를 마치고 돌아간 상태였다. 강직하여 불의를 참지 못하던 정약용은 아무도 건들지 못하던 김양직과 강명길의 부정·비리를 샅샅이 밝혀내 임금께 직보하는 용기를 잃지 않았다. '김양직은 5년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온갖 악한 짓을 했습니다. 마음씨가 밝지 못한 데다가 술타령만 일삼고, 탐학한 정치만 하면서 기생만 가까이 했습니다…'라고 시작되는 보고서에는 숨겨진 비행 모두를 시원스럽게 폭로하였다. 강명길에 대해서도 '늘그막에 탐욕이 끝이 없고, 야비하고 인색함이 매우 심한 자로서 백성의 소송과 관무(官務)에는 머리를 저으며 관여하지 않고, 식비와 봉록을 후려쳐 차지하고 멋대로 거두어들였습니다…'라는 엄혹한 내용의 비행을 샅샅이 밝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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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칼럼] 실학을 꽃피운 경기도, 이제 열매도 맺자 지면기사
근세의 대학자 위당 정인보는 조선의 실학자로 세 분을 꼽았다. "조선 후기의 학술사를 종계(綜系)하여 보면, 반계가 일조(一祖)요, 성호가 이조(二祖)요, 다산이 삼조(三祖)인데, 그 중에서도 정박명절(精博明切: 정밀하고 박학하고 밝고 절실함)함은 마땅히 다산에로 미룰 것이다"(다산선생의 생애와 업적)라고 말하여 실학을 개창한 반계 유형원, 반계를 이어 실학을 중흥시킨 성호 이익, 반계와 성호의 학문과 사상을 이어받아 실학사상을 집대성(集大成)한 다산 정약용이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라고 정리하였다.실학의 학파로 북학파라고 말하는 연암 박지원, 담원 홍대용, 초정 박제가 등 큰 학자들이 있지만 그들의 학문과 사상을 다산은 모두 수용하여 크게 이루어냈기 때문에 세 분의 학자가 바로 대표적인 학자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참으로 특별한 일은 세 분이 모두 경기도와 매우 깊은 인연이 있다는 것이다. 반계는 태생지야 서울이지만 경기도 땅을 밟으며 온 나라를 두루 여행하였고, 한때는 경기도 여주에서 살아가면서 경기도 사람이 되기도 했다. 비록 은거했던 전북 부안군 반계서당에서 '반계수록'의 대저를 저술했지만 죽은 뒤에는 선산이 있는 경기도의 죽산에 묻혀서 지금까지 경기도와 인연을 맺고 있다. 더구나 그 후손들이 경기도 과천에서 살고 있다는 점으로 보면 경기도 학자임을 부인할 수 없다. '경세유표'로 개혁 호소했던 '다산'공직자 공정·청렴 행정 '목민심서'공정한 수사·재판 주문 '흠흠신서' 성호와 다산은 경기도 태생이자 경기도에서 살았고 세상을 떠났지만 묘소는 경기도에 그대로 남아 자신들의 학문과 사상이 경기도에서도 제대로 계승되어 나라다운 나라가 되기를 그렇게도 염원하면서 눈을 감고 계실 것이다. 반계의 꿈과 희망은 토지의 공개념이 실현되고 인재 선발이 공거제도(公擧制度)를 통해 이룩되어야 한다는 데 목표가 있었다. 토지의 공유(共有)를 통해 제도를 바르게 하고 과거제도의 폐단에서 벗어나 공정한 추천을 통한 인재 선발만 이룩되면 나라에는 반드시 바른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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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칼럼] 난세의 명재상 오리대감 이원익 지면기사
'나라가 어지러우면 어진 재상이 생각나고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가 생각난다'라는 옛날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책임총리로 한 나라의 흥망성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내는 조선시대의 영의정이야말로 국난을 극복하는 위대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역사적으로 위대한 재상들이 많기도 했지만, 그 중에서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이 가장 칭찬했던 대표적인 위기 극복의 명재상은 바로 '오리정승', '오리대감'이라 호칭되던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이었다. 요즘 정권교체기를 맞아 온갖 어려움에 처해 있는 나라의 형편을 지켜보면서, 400여년 전에 세상을 떠난 위대한 명재상을 다시 떠올리는 이유는 위기를 극복할 명재상이 오늘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리정승은 왕족으로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선산이 있는 오늘의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일대를 고향으로 여기고 자주 찾아 은거하기도 했지만, 생의 마지막을 또 그곳에서 마쳐 묘소도 그곳에 있고 기념시설 또한 그곳에 있어 경기도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 경기도야말로 조선시대 인물의 보고인 지역이었다. 학자 정치인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등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들이 살았던 곳이요, 조선 후기 성호 이익, 순암 안정복, 다산 정약용 등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나왔지만, 정치가 한 사람을 꼽자면 당연히 이원익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어수선한 민심 수습 정치적 역량겸손함·자신 낮추는 위대한 능력 이원익은 1564년 18세에 생원과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면서 원로 재상 동고 이준경의 사랑을 받는 청년이었고, 1569년 23세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자 명재상 서애 유성룡의 신임을 얻어 벼슬살이가 승승장구로 열리기만 했다. 황해도 도사(都事) 벼슬에 부임하자 그곳 황해도 관찰사로 있던 율곡 이이의 눈에 들어 다시 중앙관서로 자리를 옮기면서 촉망받는 미래가 열리고 있었다. 당시 큰 정치가들인 이준경·유성룡·이이 등은 각자가 진영이 조금은 달라 서로 화합하지는 못하던 때인데, 이원익은 그들 모두에게 진영의 논리와는 관계없이 전폭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