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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먹 가는 밤 지면기사
벼루와 먹을 꺼냈다. 그전에 새 붓과 화선지도 준비해두었다. 사실 주문한 상자 안에는 먹물도 들어있었다. 그러니까 굳이 벼루에 먹을 갈지 않아도 되었다는 말이다. 어느 날 문득 나는 흰 화선지에 천천히 글씨를 쓰고 싶었고 인터넷 쇼핑몰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을 주문했다. 그중에 500밀리 플라스틱 통에 든 먹물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먹물 통을 보니 내가 원한 것이 그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글씨를 쓰고 싶었다기보다는 사각사각, 하는 소리가 듣고 싶었던 것이다. 벼루에 천천히 먹 가는 소리. 뒤늦게 나는 다시 벼루와 먹을 주문했다. 나는 문예창작학과 졸업생이다.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하기 전 다른 학교 사범대학을 3년이나 다녔다. 애초 내 꿈은 소설가였으나 철들 리가 없는 스무 살에 소설을 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서 그저 무난하게 사범대학에 진학했던 것이다. 나는 충분히 철이 든 후에 소설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첫 소설을 쓰고 싶었다. 3년 동안 어울리지도 않게 교육학 책을 들고 다니며 나는 마냥 지루했다. 이왕 3년이나 다닌 것, 그냥 한 해 더 다녀서 졸업을 하고 교사 자격증이라도 딸까,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내가 기어이 사범대학을 그만두고 만 건 우습지만 먹을 갈기 싫어서였다. 먹 갈기 싫어서 사범대학 그만두고유학도 포기… 문예창작학과 졸업 당시 내가 다녔던 학교의 학과장 교수님은 명망 있는 서예가였는데 걸핏하면 학생들을 불러 연구실에서 먹을 갈게 했다. 조교가 까딱까딱 손짓을 하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면 그게 먹을 갈라는 소리인 줄 알아 모두가 어깨를 푸들푸들 떨며 진저리를 쳤다. 스무 살, 스물한 살 청춘들을 짧으면 네 시간, 어떤 날에는 일곱 시간까지도 잡아두고 먹을 갈게 하니 그걸 누가 좋아했을까. 이유를 알 도리는 없지만 내가 제일 자주 불려갔다. 사브작 사브작 교수님이 화선지 넘기는 소리를 들으며 먹을 갈았다. 그러면 사각사각 벼루 위에서 먹이 움직이는 소리가 섞였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연구실 창밖으로 노을이 졌고 잣나무가 흔들렸다. 처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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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대퇴사시대를 건너가기 위하여 지면기사
지난 연말, 아르바이트 직원이 마지막 근무 날에 팀원 모두가 소속된 단톡방에 '퇴사 레터'를 보내고 떠났다. '퇴사 뉴스레터 vol.1'이라는 제목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뉴스레터 1번이라는 건 앞으로 2번, 3번이 계속 있다는 뜻인가 싶기도 했고, 짧다면 짧은 기간의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이런 소회를 공개적으로 밝히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요즘 유튜브에 퇴사 소회를 올리는 MZ세대가 많다는 기사를 보고 다른 세상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아주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던 셈이다.퇴사 뉴스레터까지는 아니어도, 퇴사 소식과 함께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전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 던지고 제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짤을 올리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일본 애니메이션 '이누야사'의 가영이 캐릭터는 MZ세대를 중심으로 '퇴사짤'이자 '밈(Meme·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사진이나 영상)' 열풍의 중심에 서 있다. 해리포터 영화에 나오는 '도비는 자유예요' 짤 역시 여전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니까 언제부터인가 퇴사는 더 이상 '인생의 결단'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로 바뀐 느낌이다. 한 회사에서 오래 일하는 것은 더 이상 자랑거리가 아니다. 바야흐로 '이직이 경력관리가 된 대퇴사시대'라 할 만하다. "한 회사에서 최소한 1년 이상은 버텨야 한다"는 조언은 옛날옛적 '라떼' 이야기가 된 지 오래다. 심지어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라는 용어가 급속히 확산 중이다. 조용한 퇴사는 실제로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일만 하고 그 이상의 일은 거부하는 태도를 말한다.MZ세대, 자유·휴식·새로운 시작…'퇴사' 10명중 7명 긍정적으로 생각당장 '원하는 것 해보겠다' 사람 늘어 예전에는 퇴사를 하고 이직을 하는 것이 골치아픈 상사, 낮은 연봉 등 이유가 '남' 때문이었다면 요즘은 '나'를 위해서라는 대답이 다수다. 작년 6월에 한국리서치에서 최근 2년 이내에 자발적인 퇴사 경험을 한 MZ세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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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봉 원장과 이 원장 지면기사
살기 좋은 지역 사회는 좋은 차와 맑은 물의 만남과 다르지 않다. 지역 역시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과 투명한 지역이 좋은 사회를 만든다는 말이다.이처럼 사람과 공간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지역일수록 애향심이 강하고 고장을 떠나지 않는 지역민들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게다가 타 지역에서 유입되는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터전을 향유하고 전파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한다. 그만큼 지역에서 자라고 생산된 차와 물과 같이 지역민은 풍미를 가진 고유한 공간의 주체가 아닐 수 없다. 지역 사회에서 고향을 지키는 주체들은 이웃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같은 하늘 아래서 서로의 경조사를 같이 해 온 이웃은 공동체 이상으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반대로 우리는 그것을 철새 정치인과 기업인들을 통해 많이 답습해 왔다. 정치인의 경우 당선과 낙선 사이에서, 기업인의 경우 흥망성쇠의 갈림길에서 철새처럼 갑자기 등장해서 어느새 사라져 버리는 것. 이를 테면 철새민에게 지역은 공동체의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지만 지역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 이웃을 배려한다는 데 있다. 베푸는 것에서 비롯되는 덕은 고립되지 않고 반드시 비슷한 사람을 응대하게 되게 된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이 이웃이 되면서 경외의 대상이 된다. 바로 수원의 봉 원장과 이 원장과 같이. 지역 사회가 알아주지 않아도 명분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말에 앞서 행동을 하는 특징이 있다.수원서 활동하는 양의사·한의사의료 봉사와 지역위한 재능 기부개원후 30년 동안 남다른 애향심 봉 원장과 이 원장은 수원 사람으로 수원지역에서 활동하는 양의사와 한의사다. 이들의 주변에 환자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것도 여기에 있다.바로 피부과 전문의 봉하욱 원장과 이비인후과 전문인 이만희 원장이다. 수원의 모 중고등학교 선후배 동문인 이들은 지천명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수원을 떠난 적이 없다. 대학을 졸업 후 수원에서 개원한 봉 원장과 이 원장은 자신의 전공과 미덕을 교만과 인색으로 바치지 않고, 국내외 의료 봉사와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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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새해, 글쓰기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지면기사
오래전이었다. 신춘문예에 단편 소설을 응모하여 일곱 번이나 낙선한 뒤 드라마 작가로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는 다음 해에 신춘문예에 당선되기 위해 7년이나 습작 기간을 가졌으리라. 그런 긴 세월을 보냈기에 드라마 작가로 성공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은 실패할 때 배울 기회를 갖게 되는데 그 이유는 실패의 원인을 찾기 위해 애쓰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낙선할 적마다 자기의 소설 작품에서 부족한 점을 보완하려 궁리함으로써 성장과 발전의 기회를 여러 번 가졌을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그가 일곱 번 낙선한 건 좋은 경험이라 볼 수 있다. 나 역시 글을 쓰느라 노트북을 끼고 살았으나 오랜 기간 동안 성과가 없었다. 내게 '글쓰기'는 불러도 대답 없는 연인 같아 때로 맥이 풀렸고 때로 소질 없음을 탄식했다. 글쓰기를 포기할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구점에 가서 공책 한 권을 사고 나면 언짢은 기분이 풀리곤 했다. 매일 글을 써서 그 공책을 글로 가득 메우고 나면 나의 글쓰기 역량이 지금보다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 새 희망의 길을 열어 주어서다. 우연히 유튜브 동영상으로 봤던 장면을 다시 보는 것도 새 희망을 갖게 했다. 높은 곳에 오른 다이빙 선수가 공중에서 세 번 회전한 후 멋지게 입수하는 장면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구나 하고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그 다이빙 선수도 수없이 실패하면서 꾸준히 연습하여 공중회전을 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자, 나도 꾸준히 습작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뭐든 꾸준히 하면 실력향상 '값진일'운때 기다리며 노력하면 결실 거둬 이번엔 밑바닥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야겠다. 언젠가 수영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도 모르게 깊은 곳에서 수영을 하게 되었다. 수영을 그만하고 싶을 땐 내 발이 밑바닥에 닿지 않아 당황했다. 물속에서 발버둥을 쳤으나 내 몸이 올라가지 않고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 발이 수영장 밑바닥에 닿았다는 걸 알았다. 그제야 몇 번의 시도 끝에 밑바닥을 발로 차고 헤엄쳐서 몸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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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트레버와 나 지면기사
작년을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오랫동안 함께한 학생들과 '올해 읽은 책 중 최고의 책'이 무엇이었나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겹치는 책은 한 권도 없었고, 처음 듣는 작가도 있어서 메모해두기도 했다. 누군가 "윌리엄 트레버를 이제 다 읽었어요"라고 말했고 '탁자'라는 단편을 읽고 일주일 동안 멍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이 아일랜드 작가에 대한 오래된 사랑이 떠올랐다. 내가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집을 사서 하루에 딱 한 편씩만 아껴서 읽던 순간은, 내 삶이 트레버의 소설처럼 변하는 시간이었다. 특별한 의지를 갖고 선택한 것도 아닌데 인생이 밀어닥치고 있었다. 늦게 결혼하여 어린 아기가 태어났고, 결국은 책으로 출간하기를 포기하게 될 장편소설을 시작한 참이었다. 냉정히 판단해보면 그 시절은 조금씩 난파하여 가라앉는 초창기에 속했다. 그때 이 작가를 알게 됐고, 책 속에는 나보다 가진 것이 없거나 선택지가 적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나는 한 무더기의 '가장자리 인간들'에게 연민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다.연민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연민은 동정처럼 마음이 비탈진 언덕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연민은 같은 고도에서 눈을 맞추며 '나, 이 감정을 알아'라는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정확히는 '당신의 불운을 나도 알 것 같아'라고 속으로만 말하는 것이다. 작지만 기적같은 순간인데 인간은 자신의 인생과 자아라는 감옥에 갇혀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감옥에서 너라는 세상으로 열리는 창문을 만드는 것. 그러므로 연민은 기적이 맞다.인생 단면 맑은 물속 비춰보듯 표현쓸쓸하고 슬픈 그의 소설 읽고나면나를 위한 작은 자리 마련된것 같아 그 속에서는 이해가 이루어진다. 불운이 얼마나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지, 행운도 불운도 거들떠보지 않는 고립 속에 인생이 낭비되어 버리는지, 이 완강한 세상을 거스를 수 없는 무력감을 지닌 채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발버둥을 치는지. 트레버는 이런 인생의 단면을 맑은 물속 들여다보듯 그려낸다. 한편으로 그 풍경만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과 품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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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민폐여도 괜찮아 지면기사
2022년 한 해를 돌아보니 여러 일들이 있었다. 평생 처음 겪는 일도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3일 이상의 장기 입원이었다. 지난 가을, 알러지 반응이 있고 몸이 안 좋아서 응급실에 갔다. 몇 가지 처치를 받고 좀 나아진 것 같아 집에 가겠다고 했는데 최소 72시간은 상태를 봐야 한다는 의사의 단호한 말에 그대로 입원할 수밖에 없었다. 약한 알러지 반응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심각한 증상이었고, 그러다 보니 나도 내 상태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겁이 나기도 했다.요즘은 간호간병 통합서비스라고 해서 간호조무사와 간병인, 간호사들이 간호와 간병을 통합해서 제공한다. 코로나19 상황까지 겹쳐서 보호자의 상주는 물론 방문도 엄격히 제한됐다. 그나마 응급실에 갈 때 함께 간 사람이 있었지만, 입원 수속을 밟으면서부터는 혼자일 수밖에 없었다. 주말 밤에 급하게 입원하는 바람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을 갖다주고, 퇴원하는 날 챙겨주고,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해주는 가족이 고맙다가도 생각지 않게 민폐를 끼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다. 올해 평생 처음 알러지로 장기입원이것저것 챙겨준 가족 미안한 마음누구도 아프지않는 사회로 변해야 누워 있다 보니 아프지 않을 때 읽었던 책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의 내용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이 책의 저자인 조한진희 작가는 잘 아플 권리, 그러니까 질병권을 주장하면서 ''이상적인 겉모습을 갖춘' 건강한 성인 남성의 몸을 표준으로 한 사회적 구조가 아픈 몸을 억압한다'고 지적한다. 어떻게 건강하고 아프지 않은 몸으로 살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보다 '회복되지 않는 아픈 몸으로도 어떻게 온전하고 행복한 삶이 가능한가'를 더 많이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개인의 투병기이면서 질병으로 인한 여러 경험을 함께 이야기하는 이 책은 질병에 걸린 후 완치된다는 예정된(?) 서사 대신 '여전히 투병 중'이고 '병을 지내는 중'으로 마무리된다. 나 역시 호전되어 퇴원하기는 했지만, 알러지 반응은 언제 어떻게 다시 나타날지 모르니 병과 화해하며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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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유희춘의 아내 송덕봉 시인 지면기사
미암 유희춘(1513~1577)은 해남에서 태어났다. 가계는 증조할아버지가 유양수고 할아버지는 유공담이며 아버지는 유계린이다. 김안국과 최산두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38년(중종 3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사가독서로 집에서 학문에 전념한 다음에는 수찬·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수찬이라는 벼슬은 조선시대 홍문관에 두었던 정육품 관직이며 정언이라는 벼슬은 국정에 관한 간쟁과 왕의 정치에 대한 비평, 관원을 탄핵하는 등의 언론을 담당했던 사간원의 관원이다. 을사사화 때 김광준과 임백령이 윤임 일파를 제거하자고 요구했으나 동의하지 않았다. 사화에는 외척이 깊이 개입했다. 명종 즉위(1545년) 직후 시작된 을사사화는 2년 뒤 정미사화까지 지속된 장기적인 정치 투쟁이었다. 유희춘은 1547년 양재역의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양재역의 벽서사건이란 1547년(명종 2) 9월 부제학 정언각과 선전관 이로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주(女主), 아래에는 간신 이기(李)가 있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된 익명의 벽서를 발견해 임금에게 바치며 발생한 사건으로 당시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 세력이 반대파 인물들을 숙청한 사건으로 정미사화라고도 불린다.유희춘은 해남에서 제주도가 가깝다하여 함경도 종성으로 위리안치 되었다. 위리안치란 유배된 죄인이 거처하는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두는 형벌이다. 유희춘은 19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고 후진을 양성했다. 국경 지방에는 학문을 하는 선비들이 없었다. 유희춘은 변방의 젊은 인재들을 위해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가 유배를 와서 글을 가르친 뒤에 많은 젊은이들이 학문을 하게 되었다.19년 유배후 선조때 복직 '미암'아내에 '여자 멀리했노라' 편지 '당신의 어머니 지성으로 장례'송덕봉 질책에 할 말이 없었다 유희춘은 선조가 즉위하자 19년 만에 해배되어 다시 벼슬을 시작했다. 선조는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유희춘에게 힘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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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행복하고 건강하고 돈 많은 할머니 지면기사
"캠핑이라니! 제정신이야?" 나는 기겁을 했다. 도대체 그 번거롭고 귀찮은 일을, 일당도 주지 않는데 왜 한다는 거야. 끝끝내 반대했지만 친구들은 텐트며 아이스박스 등을 트렁크에 가득 싣고 우리 집 앞에 나타났다. 나는 잔뜩 뿌루퉁한 얼굴로 차에 올랐다. 초겨울 날씨는 다행히도 포근했다. 그래도 이런 날엔 커튼 활짝 열고 담요 한 장 몸에 돌돌 말고서 넷플릭스나 보는 것이 딱인데. 나를 제외한 세 여자는 신이 났다. 음악 볼륨을 크게 높였다가 내비게이션 안내 음성이 안 들린다고 운전하는 친구에게 욕을 먹어도, 김치찌개를 끓일 묵은지를 안 챙겼다고 욕을 먹어도, 맛집 리스트를 찾아두지 않았다고 욕을 먹어도 다들 눈도 깜박하지 않았다. 투덜거리긴 했지만 나도 금세 마음이 풀어져서 조잘조잘 별소리를 다 하며 떠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떠난 캠핑이라 우리는 초보나 다름없었다. 산속 같은 곳은 엄두도 못 냈고 널따란 공터 같은 캠핑장에 도착했다. 겨울이라 고즈넉했다. "그냥 우리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 같은데?" "운동장이면 어때? 그냥 어딜 나왔다는 게 좋은 거지." 하긴 맞는 말이었다. 친구들은 이제 슬슬 퇴사를 준비 중이다. 좋은 직장엘 다니고는 있지만 더 늦으면 독립 시기를 놓칠 거라고 했다. 나를 빼고는 모두 비혼이다. "육십까지는 빡세게 벌어야지. 그 이후로 칠십까지 10년 동안은 아르바이트 삼아 좀 살살 벌고. 그래야 백세 인생 버틸 수 있지 않겠어?" 맞는 말이다.친구들과 10년만에 온 1박2일 캠핑예전엔 남자친구 이야기 등 했는데이젠 건강·돈 관련 대화로 달라져 누군가는 목살을 굽고 누군가는 햄을 지졌다. 나는 꽁치김치찌개를 끓이겠다고 나섰다. 김치 넣고 꽁치 캔 넣으면 양념도 딱히 할 것 없는 가장 쉬운 것이니까 말이다. 휴게소 편의점에서 대충 사온 포장김치는 하나도 익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도 뭐, 나는 별 걱정하지 않고 냄비에 김치를 쏟아붓고 꽁치캔도 부었다. 한 숟갈씩 떠먹은 친구들이 와아, 외쳤다. "끝내줘. 어떻게 이런 맛이 날 수 있지?" 내가 먹어도 놀라웠다. 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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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목사님의 빵과 스님의 떡 지면기사
빵과 떡으로 기억되는 목사님과 스님이 있다. 목사님은 빵으로, 스님은 떡으로 사람을 기쁘고도 즐겁게 한다. 갓 구워낸 빵과 막 쪄낸 떡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운 삶을 살아가는 성직자다. 바로 이수기 목사님과 형석 스님이다. 이 목사님과 스님은 부처님 오신 날에 빵과 케이크를, 성탄절에 떡과 팥죽을 수년간 보내고 있지만 서로 얼굴을 모르는 사이다. 몇 번 만남을 주선하려고 했지만 두 분 모두 닮은 꼴처럼 웃는 얼굴로 사양했다.이 두 분을 만난 지 10년이 흘렀지만 한 번도 전도나 포교를 강요받은 적이 없다. 심지어는 복무하고 계시는 교회나 사찰에서도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지 않을 정도다. 목사님과 스님이 신심이 약해서가 아니라 타 종교에 대한 존중이며 상대방에 대한 배려에서다. 나 또한 둘 중 하나의 종교를 가졌지만, 누구에게도 개인적인 신앙을 묻거나 말하지 않았다. 신앙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지는 것에 있다는 나름의 신념 때문이다.물론 언어를 매개로 창작과 교육 그리고 현장 비평을 하는 나로서도 '말'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 말·해·진·다는 것은, 자신의 선행과 악행이 타인의 입을 통해 가시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신앙인의 말은 특정한 종교를 대표하고 있다는 점에서 절대적으로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실천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신앙인의 실천이야말로 교리 외 교리를 가로지르는 데 있다.이수기 목사님·형석 스님 선한 일빵·떡으로 종교 가리지 않는 도움 이 실천은 그동안 종교가 수천 년 동안 존립할 수 있었던 이유다. 종교는 믿음을 원인으로 하는 신앙이지만 이 신앙의 실천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결과다. 그러므로 선듯 자신의 종교를 내보인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것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종교인을 인도하는 성직자들은 자신이 하는 말의 파급력을 무시하지 못하는, 반면 그 뜻에 충실하기 위한 삶을 살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 뜻은 신을 대리하는 자로서 사람들의 긍휼함을 대신하는 것이다.실제로 이수기 목사님과 형석 스님은 종파와 지역, 국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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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행불행의 반전 지면기사
딱한 처지에 놓인 한 남자가 있다. 그는 프랑스 작가 모파상이 쓴 소설 '승마'의 주인공 '엑토르'다. 그는 가난한 귀족으로서 해군성의 사무원으로 일한다. 결혼하여 아이 둘을 두었고 가난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어느 봄에 엑토르는 과장에게서 업무 할당을 더 많이 받게 되어 300프랑의 특근 수당을 탔다. 그는 이 돈으로 말을 빌려 가족 소풍을 가기로 했다. 예정한 날이 되어 엑토르는 말을 타고 아내와 아이들과 하녀는 마차를 타고 그들은 신나게 달렸다. 그들은 준비해 간 도시락으로 베지네 숲 풀밭 위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들이 돌아올 때 넓은 거리는 마차들로 붐볐다. 그런데 엑토르의 말이 개선문을 지나자 갑자기 제 집을 향해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아무리 속도를 늦추려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앞치마를 두른 노파가 차도를 건너고 있었다. 기관차처럼 내닫는 말 가슴에 노파가 부딪혀 치마가 허공에 펼쳐지며 굴러 떨어졌다.이 사고로 엑토르는 경찰서에 가게 되었다. 노파는 65세인 가정부로 밝혀졌다. 엑토르는 그녀의 치료비를 부담하겠다고 서약하고 치료소로 달려갔다. 의사는 노파가 팔다리는 부러진 데가 없으나 내상이 염려된다고 했다. 그는 노파를 요양원에 보냈다. 한 달이 지났다. 노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기만 해서 살이 쪘다. 다른 환자들과 즐겁게 이야기도 했다. 엑토르가 매일 요양원에 찾아갈 때마다 그녀는 움직일 수가 없다고 말했다. 노파의 병원비를 대야 했으므로 하녀의 급료마저 큰 부담이 돼 하녀를 집에서 내보냈다. 노파의 병세가 여전히 호전되지 않자 이에 낙담한 엑토르의 아내는 결국 "부인을 이리로 데려오는 게 낫겠어요. 그러면 비용이 덜 들겠지요"라고 중얼거렸다.좋은일 인해 나쁜일 생기는 때 많고행운이 되레 화 불러오는 경우 생겨살며 겪은일 돌아보면 다를때 많아 이 소설의 결말은 주목할 만하다. 특근 수당을 탄 일로 말미암아 엑토르와 그의 아내는 노파가 회복될 때까지 그녀의 생계와 병간호를 책임지게 됐고 더 가난해졌다. 반면 노파는 몸을 다친 일로 말미암아 당장은 가정부로 일하지 않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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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건대글방과 보르헤스 지면기사
오랜만에 보르헤스의 책을 꺼내 들다 책 사이에서 '건대글방'이라는 북마크가 나왔다. '뜻을 이루시기 바랍니다'라는 기원의 문장이 궁서체로 박혀 있고 '대학교재/인문 사회과학/각종고시수험서/공무원수험서/기술서적/컴퓨터 서적/교양도서'라고 다루는 도서종류를 적어놓았다. 북마크를 보는 순간 잊고 있던 기억의 회로에 불이 들어왔다. 유동인구가 많은 건대역 2번 출구 앞에 자리 잡은 '건대글방'은 십수 년 전 만남의 장소였다. 서점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서점 안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사시사철 북적거린다고 할까. 누군가를 기다리기 가장 좋은 장소는 서점일 것이다. 카페처럼 돈을 지불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고, 책 표지와 제목을 훑어보거나 첫 문장을 읽어보는 것은 갈피에 낀 시간을 보내는 최고의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건대역 2번 출구 자리… 만남의 장소서점은 바깥과는 다른 시간이 흘러차 돌진으로 진열된 책들 '교통사고'자리 옮겼으나 지금은 카페가 입점문 닫아도 책·사람들 소멸하지 않아건대역 거리는 도시의 많은 유흥지와 마찬가지로 술집과 헤어샵과 옷가게와 카페와 길거리 좌판으로 덩어리진 거대한 생물체 같은 느낌을 준다. '젊은 뜨내기' 손님을 상대로 하는 골목은 요란한 네온 간판으로 뒤덮여 있고 큰 소리로 음악이 흘러나와서 정신이 없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왜인지 '소돔과 고모라'가 떠올랐으며 값에 비해 놀랍도록 맛이 없는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망하지 않을 터인데…'라는 탄식을 괜히 흘리곤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건대 앞 상권은 기죽는 날이 없었으며 부지런히 새로운 가게가 생기고 망하고 재정비하며 모습을 바꿔나갔다. 그 가운데 서점은 그야말로 소금과 같은 존재로, 바깥과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흘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서점을 드나든 횟수에 비해 구입한 책은 너무도 적다. 더구나 건대글방에서 책을 한꺼번에 많이 산 것은 서점이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였으니 이 서점을 떠올리면 빚진 마음이 든다. 서점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놀랍게도 이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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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양말이라는 일상 지면기사
생일 선물로 세 켤레의 양말을 받았다. 양말을 정식으로 선물 받은 건 처음이다. 처음에는 시큰둥했는데 이 선물, 묘하게 재미가 쏠쏠하다. 양말 전문 브랜드가 있다는 것도 신기한데 브랜드명이 아이헤이트먼데이(나는 월요일이 싫어요)인 것도 마음에 든다. 월요일이 싫은 사람들에게 작은 즐거움을 주기 위해 지은 이름이라는데, 센스있는 작명이라 그런지 효과 만점이다.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던 양말 편집숍 홈페이지에도 처음으로 들어가 봤다. 매일 신기 좋은 양말부터 국내외 디자이너 브랜드의 시즌 컬렉션 양말까지 핫한 제품들을 선별해 소개한다는데 양말만으로 이렇게 다채로운 구성이 가능하다니, 그야말로 신세계가 열리는 느낌이다. 오프라인 양말 편집숍 매니저 '재인'의 인터뷰도 실려 있다. "양말을 고르고 사서 신는 과정, 그 자체가 좋다"는 이 매니저에 따르면 양말을 골라 신는 것이 "일상에 좋아하는 것을 하나 더 더하는 삶. 집을 나설 때 공들이는 부분이 하나 더 생기는 삶. 그것이 하루를 명랑하게 만든다"고 한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양말 선물 덕분에 예쁘고 질 좋은 양말을 골라 신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더 기분을 좋게 만든다는 걸 알게 됐다. 날씨와 그날의 일정, 내 기분까지를 생각하면서 오늘은 뭘 신어볼까 고민하는 짧은 순간의 즐거움이란! 그런 고민할 시간에 좀 더 생산적인 고민을 하라고 잔소리할 사람도 있겠지만, 원래 인생은 계산이 정확한 수학이 아니니까, 일상에서 매일 하나쯤 별 거 아닌 고민을 하는 시간도 필요하지 않을까? 양말에 꽂힌 이유 이태원 참사 때문혼란스러울수록 삶 지키는 것 중요재난속 자유로운 사람 누가 있을까 내친 김에 작가가 아주 좋아하는 한 가지 대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아무튼 시리즈' 중의 한 책인 '아무튼 양말'까지 찾아 읽었다. 지네도 아닌데 양말을 88켤레나 갖고 있는 저자의 양말 이야기다. 양말로 뭐 할 이야기가 있다고 책까지 쓰나 싶었는데, 푹 빠져 읽다가 내려야 할 지하철역을 지나칠 뻔했다. 사실 양말 선물을 받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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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율곡과 유지의 플라토닉 러브 지면기사
유지사(柳枝詞)는 율곡의 애절한 사랑노래다. 관기 유지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기약 없어 율곡은 애달프다. 그 애달픔이 많은 사람의 애간장을 녹인다.율곡의 나이 39세에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관찰사라면 최고의 지방 장관이다. 재임 기간은 5~6개월 정도였다. 첫날 관아에서 저녁을 맞았다.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 아리따운 소녀가 주안상을 내왔다. 그녀가 유지였다. 주안상을 내려놓고 뒷걸음질 쳐 물러가며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아름다운 몸매에 곱게 단장한 얼굴은 갓 피어난 백합화 같았다.율곡이 물었다. "몇 살인고?" "열두 살이옵니다." 행동거지가 얌전하고 말투 또한 교양이 있었다. 그녀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일찍이 기적에 오른 선비의 딸이었다. "시침 들려고 온 것이냐?" 어린 소녀여서 율곡은 다시 물었다. 아직 갈래머리 소녀인 동기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유지는 부끄러워 얼굴에 홍조를 띠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행수 기생의 명을 받들고 왔사옵니다." "아니다. 수종이나 들고 나가거라." 유지가 조용히 물러났다.그 후 율곡은 유지를 늘 옆에 두고 말벗으로 삼았다. 유지와 보내는 시간이 즐거웠다. 그녀를 예뻐해 주고 아껴주었으나 율곡은 갓 피어난 꽃봉오리를 보기만 할 뿐 꺾지는 않았다. 아리땁고 청순한 유지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는 율곡이었다. 나이 39세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해'선비의 딸' 열두살 관기와 첫 만남늘옆에 두고 말벗 삼아 마음에 평온 유지는 율곡의 높은 학식과 인품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율곡과 함께하는 시간은 유지에게는 커다란 산 공부고 깨우침이었다. 기녀가 지녀야 하는 몸가짐과 기예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고는 늘 몸으로 실천하게 했다.얼마 후 율곡은 임기를 마치고 한양의 집으로 돌아갔다. 유지는 율곡을 사모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립고 안타까웠으나 찾아 나서지를 못하고 있었다. 유지에게 율곡은 때론 어버이이고 때론 지체 높은 양반이고 때론 정을 주는 연인이기도 했다. 서로 만나지 못하고 세월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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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늘 하던 대로 했을 뿐인데 지면기사
여덟 살 딸아이는 학교 방과 후 수업이 끝나면 태권도장으로 간다. 태권도가 끝나면 바로 그 옆집, 피아노학원엘 가고. 워킹맘 가정의 흔한 풍경이다. 운동을 하고 음악을 배운다는 목적보다는 사실 보육 시설에 가깝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당연한 듯 하루를 보낸다.아이가 온종일 '독도는 우리 땅' 노래를 불러댔다. 내가 어릴 적 불렀던 노래와는 가사가 달랐다.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도동 1번지였는데 아이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라고 노래한다. 평균 기온 12도, 강수량은 1천300㎜이었는데 아이는 평균 기온 13도, 강수량은 1천800㎜이란다. 그래, 주소도 바뀌었고 기후도 바뀌었다.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200리는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87㎞다. 200리를 아이들은 모른다. 그래서 87㎞다. 내 아이와 내가 사는 세상이 이만큼 바뀌었다. 아이는 유튜브에서 '독도는 우리 땅' 플래시몹을 찾아달라고 했다. 영상을 켜보니 어라, 아이가 매일 집에서 춤추던 그 모습과 똑같다. 초등학생, 중학생들은 교실에서 운동장에서 모두 같은 춤을 추고 있었다. 태권도장에서 배운 거라고 들었는데 알고 보니 어지간한 대한민국 아이들은 태권도장에서 다 이걸 배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문득 나 어릴 때 배웠던 국민체조 생각이 났다. '빠라바라바, 빠라바라바' 하는 음악에 맞추어 전 국민이 똑같이 움직였던 그 체조. 우리 세대라면 모를 수 없는 그 풍경. 나는 소파에 앉아 아이에게 유튜브 영상을 보여주며 그만 울어버렸다."엄마, 왜 울어?"내 아이는 나중에 자라 '독도는 우리 땅' 플래시몹을 친구들과 이야기할 것이다. 우리 그땐 다 그 플래시몹 따라했잖아. 우리는 어린이집에서부터 핼러윈 파티를 했잖아. 핼러윈 파티 때마다 엄마가 마녀 옷을 사줬고 호박 바구니에 사탕을 담아 동네를 뛰어다녔잖아. 우리 그때 진짜 신났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며 추억에 잠길 것이다.'독도는 우리땅' 플래시몹·핼러윈축제내 아이 세대에겐 문화이자 추억이다 핼러윈의 유래가 뭔지 나는 잘 모르지만 해마다 어린이집 핼러윈 파티 공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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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오래된 미래와 수원 지역의 교가 지면기사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의미하는 향수는 과거에서 파생된 추억이다. 미적인 공간을 함의한 좋은 기억은 소위 고향뿐만 아니라 청소년기 성장을 함께해온 모교에서도 향수의 결로 묻어있다. 오래전에 떠나 왔지만 사라지지 않는 그러한 기억의 저장고에는 추억의 노래가 되살아나기도 한다. 바로 중고교 시절 목청 높여 불렀던 교가가 그것이다. 교가는 누구에게나 강한 기억으로 각인되어서 당시의 향수를 불러오고는 한다. 그만큼 재학생 시절 다 함께 공유했던 교가의 리듬과 가사는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세월을 타고 생생한 유년의 추억을 자극하기 마련이다.이같이 학교를 표상하는 교가는 건학 정신과 함께 지역의 정서가 내재 되어 있다. 대부분의 교가는 4분의 4박자 또는 4분의 2박자를 통해 합창하기 쉽게 반드시 후렴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교내외 교육 활동을 알리는 이 노래는 입학식 또는 졸업식 등 학교 행사나 의식에서 쓰인다. 학생들은 교가를 다 함께 반복해서 부르게 되면서 외울 필요 없이 가락에 붙여진 가사를 습득하게 된다. 이렇게 학습된 교가는 자연스럽게 애교심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모교의 긍지를 가지게 한다. 또한 가사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를 익히게 됨으로써 미래의 양식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교가의 본질은 이 노래를 제창하는 재학생들을 위하여 존재한다. 재학생들의 미래가 교가에 응축되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인류애와 보편적인 세계관으로서 다음 세대를 정의롭게 펼칠 수 있다. 그것은 공동체 안에서 반복, 학습함으로써 나만의 소리가 아닌 나도 소리를 내면서 서로 어우러진 하모니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물론 졸업생들에게는 교가가 기억의 잉여물로서 지울 수 없는 향수와 같은 것으로 남아있기 마련이다. 이같이 수원 지역 사회에서도 100여 년이 훌쩍 넘은 유서 깊은 학교들의 고유한 교가가 전통을 이어주고 있다. 게다가 졸업생들은 동문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노래를 향유하면서, 선후배들이 모여 순수했던 그 시절 동질성과 결속력을 다지는 것도 그 연유다. 애교심 발동·모교 긍지 불러오지만다문화·다민족·정보 문명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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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의연한 자세 지면기사
목 디스크, 허리 디스크, 테니스 엘보 등의 병으로 고생한 적이 있다. 그래서 2년에 한 번씩 건강 검진을 받을 때면 또 다른 병이 생길까 봐 긴장하곤 한다. 몇 년 전 건강 검진의 결과지를 우편물로 받았는데 정밀 검사가 필요하니 재검사를 받으라는 게 하나 있었다. 유방암 검사였다. 유방암은 전 세계 여성이 가장 많이 걸리는 암이라 겁이 났다. 마음을 졸이며 대학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았다. 괜찮다는 진단 결과를 전해 듣고서야 안도했다. 그때 큰 병에 걸리더라도 버틸 수 있는 강한 정신력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서인지 내가 닮고 싶은 인물 유형 중 첫 번째는 병이 생기더라도 그 병을 이겨내고 의연함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마치 환자였던 적이 없는 것처럼 근심 없는 듯 밝은 얼굴로 사는 사람이다. 시련을 겪고도 겉으로 티 내지 않고 산다는 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병이 생기더라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밝게 산다는 건 얼마나 경이로운가 책을 통해서 닮고 싶은 인물을 만난 적이 있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이란 소설에 나오는 맹인을 보고 그의 정신 자세를 닮고 싶었다. 그 맹인은 상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의 집에 방문한다. 그는 아내의 오랜 친구다. 방문자가 집에 도착하자 아내는 방문자와 '나'를 인사를 시키고 '나'는 초면인 맹인과 악수를 한다. "어쩐지 전에 이미 본 사람 같구먼"하며 방문자는 '나'에게 쩌렁쩌렁하게 말한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면서 '나'를 이미 본 사람 같다고 농담을 할 줄 아는 유머인이다. 시각 장애인인 데다가 상처까지 했기에 그의 낙천성이 퍽 인상적인 대목이다. 이런 이는 어떠한 고난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고난을 극복하고 다시 의연한 자세로 돌아올 것만 같다. 불행의 나락 속에서도 의연한 자세를 갖는 이를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실제로도 존재하니까. 가수 이동우가 그렇다. 그는 1993년 SBS 2기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했고 남자 개그맨들로 결성한 가수 그룹인 틴틴파이브의 멤버로 활동하다가, 2004년 병원에서 '망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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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책상… 섬의 항해기 지면기사
10월은 연달아 쉬는 날이 많았다. 직장인은 아니지만 이렇게 빨간 날이 많으면 여러 계획을 세우게 된다. 부모로서 아홉 살 아이를 데리고 어디로 놀러가느냐는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최소한 요 정도는 써야지'하는 작업계획도 세우고, 사놓고 못 읽은 책들을 읽어치우려는 계산도 하게 된다.개천절을 낀 주말에는 겨우 책 한 권만 읽었다. 놀다보니 그리된 것이지만 왠지 억울하다. 내 노트북에 새로 쓴 글자가 몇 알이나 담겨있나, 냉장고에 들어있는 사과가 더 많을 것이 아닐까, 스멀스멀 불안이 몰려오면서 작가만의 고해성사를 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고해소에 들어가 보이지 않는 신부님께 털어놓게 되는 것이다. "이번 주에는 놀기만 했습니다. 책은 달랑 한 권, 그것도 매우 얇은 산문집 한 권 읽었습니다. 소설 파일을 아예 펴보지도 않았고 노트는 두 장 썼나? 아무튼 형편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세세히 늘어놓다보면 갑자기 또 화가 난다. 왜 이렇게 쩨쩨해졌나! 프랜 레보비츠의 경구를 떠올려 보라고! '난 너무 천천히 글을 써서, 내 피를 잉크로 써도 다치지 않을 정도다'. 이 정도 넉살을 떨어줘야 나무늘보 작가로서 장수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에잇, 모르겠다. 놀자! 그리고 놀았다. 한 주가 훌쩍 흘러 한글날 연휴가 끝나가자 이번에는 토니 모리슨의 경구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왜 글을 쓰는가? 쓰지 않으면 삶 속에 처박히기 때문이다'. 한창 삶에 처박히는 중이라 그런가 더는 참지 못하고(?) 글을 썼다. 물론 시작은 반성문으로, 끝에는 뭐가 나올지 모를 문장을 우선 달려본다. 휴일 잔뜩 품은 10월 첫째·둘째 주방황끝에 카페 이동 닻 내린 '책상' 쓰면서 문득 생각하니 이 곳이 얼마나 비싼 비용을 치르고 얻은 책상인가 싶다. 대체휴일이 끝나가는 월요일 오후 다섯 시가 되어서야 나는 북카페의 내가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있고, 옆 탁자에는 이숲이가 나무클립을 끼워서 만드는 뭔가에 푹 빠져있다. 이렇게 엄마를 놔주기까지 우리는 문구사에 가서 공작세트를 사오고, 쌀쌀한 날씨에 대비한 옷을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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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무거운 식탁 지면기사
소소한 취미가 하나 생겼다. 매일 어디에서 뭘 누구와 함께 먹었는지 기록하는, 취미라는 말을 붙이기에도 애매한 일상의 루틴 정도다. 막연하게 알고 있었지만 기록을 들여다보니 내 일상의 패턴이 보인다. 식생활만 놓고 보면 간단 그 자체다. 아침을 거르니까 하루 두 끼 중 80% 이상이 외식이고, 집밥은 20% 남짓이다. 집에서 밥을 먹더라도 배달이나 포장 음식을 자주 먹는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집에서 둘이 밥을 함께 먹는 일은 더 어려운 일이다. 그나마 둘이 먹을 때에는 밥상을 차려 먹는 편인데, 그마저도 직접 만들어 먹기보다는 밀키트나 가공식품을 살짝 조리하는 수준이니, 차려먹는다는 말이 무색하다. 먹는다기보다는 한 끼를 해치우는 수준인데, 매 끼니 정성을 들여 해먹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지 않을까? 가끔 친구들과 농담처럼 엄마가 해주는 집밥은 곧 멸종될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요즘은 그게 곧 현실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굳어지고 있다."엄마가 해주는 집밥은 곧 멸종"친구와 농담이 곧 현실될 것 같아 얼마 전 장민영 음식탐험가와 김태윤 셰프가 인도네시아 여행에서 보고 생각한 것들을 나누는 토크 세션 'IN TO THE WILD'에 다녀왔다. 인도네시아는 관광지로 유명한 발리 외에는 잘 모르는 나라였는데 1시간 반 남짓한 시간 동안 전혀 다른 세계로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 인도네시아의 4개 지역을 일주일씩 순회했다는데 바닷속부터 야생 열대우림, 대도시 자카르타까지 지역도 다양했다. 길거리 음식부터 최고급 레스토랑까지 섭렵하고 온 셰프가 재현해 내놓은 다양한 식감의 인도네시아 샐러드 '가도가도'와 달큰한 '떼보틀'까지 곁들여지니 한국이 아니라 인도네시아 어딘가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인도네시아 어디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다는 떼보틀은 딱 달달한 자스민차여서 음료의 맛만 놓고 보면 전혀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이국적인 향신료 향이 가득한 샐러드와 함께 먹으니 나중에는 왜 같이 먹는지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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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유희경을 사랑한 매창 지면기사
유희경(劉希慶)은 16세기 조선의 유명한 시인이다. 당대의 대시인이요 풍류객인 유희경을 흠모하는 여인이 있었다. 부안 기생 매창이었다. 매창은 유희경의 문명을 이미 오래전부터 듣고 있었다. 그의 시를 찾아 읽으며 유희경을 흠모하기 시작했으나 만날 기회가 없었다. 기회가 된다면 그와 시를 겨뤄보고 싶기도 했다. 유희경의 부친은 품계로 종칠품인 동계공랑이었다는 것만 전할 뿐, 그의 자세한 가계는 알려지지 않았다. 유희경은 예학에 밝아 국상이 나거나 사대부가에서 상을 당하면 그를 부르곤 했다. 임란 때는 의병에 참여할 만큼 나라를 걱정했다. 그는 시문학을 통해 사대부들과 친교를 맺었다. 유희경은 당시 여항시인인 백대붕과 교류하면서 '풍월향도'라는 이름의 모임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매창(李梅窓)의 본명은 이향금이다. 계유년에 태어나서 계생(癸生), 계랑(桂娘)이라고도 불렀다. 매창은 1573년에 부안현리 이탕종의 서녀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관비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녀 역시 어려서부터 기적에 올랐을 것이다.매창은 한시와 시조에 능했고 가무 및 거문고에 빼어난 기량을 보였다. 시조와 한시 59수가 작품집 '매창집(梅窓集)'에 전해지고 있다. 홍만종(1643~1725)이 '근래에 송도의 황진이와 부안의 계생은 그 사조가 문사들과 비교하여 서로 견줄 만하니 참으로 기이하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 후 매창은 황진이와 함께 조선의 여류시인으로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만나기전 서로 설레기는 마찬가지매창의 거문고에 유희경 가슴 촉촉매창의 한시 '자상(自傷)'에서 '서울 꿈 삼년/호남에서 또 한 봄이 가는구나/황금에 처음 마음이 바뀌어/한밤에 홀로 마음이 상하는구나'라고 노래한 것을 보면 서울에서도 3년 정도 기녀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서(1570~1624)의 '석촌유고(石村遺稿)'에는 매창의 시 한 편이 실려 있는데 그 시 아래에 '일찍이 내 친구의 첩이 되었다가 지금은 청루에 있다'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첩실 생활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그 후 매창은 부안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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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새벽 전화 지면기사
휴대전화 진동음에 눈을 떴다. 아직 어두웠다. 새벽의 전화가 일상적인 용무일 리는 없다. 엄마였다. "왜? 무슨 일이야?" "거긴 비 많이 안 와? 여기 비가 와서 난리도 아냐." 나는 발칵 화를 내고 말았다. "아니, 비 온다고 이 시간에 전화를 한 거야?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놀랐어?" 엄마가 하하하, 크게 웃는다. 이봐요, 엄마. 웃을 일이 아니라고. 이 새벽에 비 온다고 전화를 하다니. 나이 든 부모를 둔 딸 마음을 좀 헤아려 달라고. 행여 나쁜 소식일까봐 그 짧은 시간 동안 오그라붙은 내 마음을 좀 알아달라고.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심통이 머리끝까지 오르고 말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비 소식은 심각했다. 엄마가 카톡으로 보내온 사진을 보고 나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현관문을 살살 열고 사진을 찍었는데 마당은 이미 잠겨 있었다. 그나마 단을 높인 현관이라 현관문 바로 앞까지 물이 찰랑댔다. 비는 그쳤지만 마당에는 주전자와 빗자루와 작은 화분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이게 다 뭐야?" 내 말에 엄마가 불퉁거렸다. "넌 뉴스도 안 봐? 포항에 비 많이 와서 다 이 모양 됐어." 부랴부랴 뉴스를 켜보니 온통 포항 비 소식이었다. 비소식 전한 엄마 연락 심통났지만수해 심각한 고향집 사진보며 놀라아버지가 아끼던 차도 절반쯤 잠겨 내가 태어나 19년을 자란 포항은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서 고요한 곳이었다. 게다가 나는 사택단지에서 자랐다. 사택단지에서 자란다는 건 포항 토박이 출신이 아니라는 것이고,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어도 포항 사투리를 쓸 줄 모른다는 것이다. 강원도에서 충청도에서 경기도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사택단지에 모여 살며 똑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가장을 두었다. 처음에는 자전거를 타고 형산강 다리를 건너 포스코로 출퇴근하던 아버지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오토바이를 샀고 아침이며 저녁, 형산강 다리는 거대한 오토바이 물결로 뒤덮였다. 오토바이들은 훗날, 그 아버지들이 포니2나 엑셀 등 작은 승용차를 사며 서서히 사라졌지만."멀쩡해" 기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