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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행불행의 반전 지면기사
딱한 처지에 놓인 한 남자가 있다. 그는 프랑스 작가 모파상이 쓴 소설 '승마'의 주인공 '엑토르'다. 그는 가난한 귀족으로서 해군성의 사무원으로 일한다. 결혼하여 아이 둘을 두었고 가난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어느 봄에 엑토르는 과장에게서 업무 할당을 더 많이 받게 되어 300프랑의 특근 수당을 탔다. 그는 이 돈으로 말을 빌려 가족 소풍을 가기로 했다. 예정한 날이 되어 엑토르는 말을 타고 아내와 아이들과 하녀는 마차를 타고 그들은 신나게 달렸다. 그들은 준비해 간 도시락으로 베지네 숲 풀밭 위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들이 돌아올 때 넓은 거리는 마차들로 붐볐다. 그런데 엑토르의 말이 개선문을 지나자 갑자기 제 집을 향해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아무리 속도를 늦추려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앞치마를 두른 노파가 차도를 건너고 있었다. 기관차처럼 내닫는 말 가슴에 노파가 부딪혀 치마가 허공에 펼쳐지며 굴러 떨어졌다.이 사고로 엑토르는 경찰서에 가게 되었다. 노파는 65세인 가정부로 밝혀졌다. 엑토르는 그녀의 치료비를 부담하겠다고 서약하고 치료소로 달려갔다. 의사는 노파가 팔다리는 부러진 데가 없으나 내상이 염려된다고 했다. 그는 노파를 요양원에 보냈다. 한 달이 지났다. 노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기만 해서 살이 쪘다. 다른 환자들과 즐겁게 이야기도 했다. 엑토르가 매일 요양원에 찾아갈 때마다 그녀는 움직일 수가 없다고 말했다. 노파의 병원비를 대야 했으므로 하녀의 급료마저 큰 부담이 돼 하녀를 집에서 내보냈다. 노파의 병세가 여전히 호전되지 않자 이에 낙담한 엑토르의 아내는 결국 "부인을 이리로 데려오는 게 낫겠어요. 그러면 비용이 덜 들겠지요"라고 중얼거렸다.좋은일 인해 나쁜일 생기는 때 많고행운이 되레 화 불러오는 경우 생겨살며 겪은일 돌아보면 다를때 많아 이 소설의 결말은 주목할 만하다. 특근 수당을 탄 일로 말미암아 엑토르와 그의 아내는 노파가 회복될 때까지 그녀의 생계와 병간호를 책임지게 됐고 더 가난해졌다. 반면 노파는 몸을 다친 일로 말미암아 당장은 가정부로 일하지 않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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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건대글방과 보르헤스 지면기사
오랜만에 보르헤스의 책을 꺼내 들다 책 사이에서 '건대글방'이라는 북마크가 나왔다. '뜻을 이루시기 바랍니다'라는 기원의 문장이 궁서체로 박혀 있고 '대학교재/인문 사회과학/각종고시수험서/공무원수험서/기술서적/컴퓨터 서적/교양도서'라고 다루는 도서종류를 적어놓았다. 북마크를 보는 순간 잊고 있던 기억의 회로에 불이 들어왔다. 유동인구가 많은 건대역 2번 출구 앞에 자리 잡은 '건대글방'은 십수 년 전 만남의 장소였다. 서점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서점 안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사시사철 북적거린다고 할까. 누군가를 기다리기 가장 좋은 장소는 서점일 것이다. 카페처럼 돈을 지불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고, 책 표지와 제목을 훑어보거나 첫 문장을 읽어보는 것은 갈피에 낀 시간을 보내는 최고의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건대역 2번 출구 자리… 만남의 장소서점은 바깥과는 다른 시간이 흘러차 돌진으로 진열된 책들 '교통사고'자리 옮겼으나 지금은 카페가 입점문 닫아도 책·사람들 소멸하지 않아건대역 거리는 도시의 많은 유흥지와 마찬가지로 술집과 헤어샵과 옷가게와 카페와 길거리 좌판으로 덩어리진 거대한 생물체 같은 느낌을 준다. '젊은 뜨내기' 손님을 상대로 하는 골목은 요란한 네온 간판으로 뒤덮여 있고 큰 소리로 음악이 흘러나와서 정신이 없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왜인지 '소돔과 고모라'가 떠올랐으며 값에 비해 놀랍도록 맛이 없는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망하지 않을 터인데…'라는 탄식을 괜히 흘리곤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건대 앞 상권은 기죽는 날이 없었으며 부지런히 새로운 가게가 생기고 망하고 재정비하며 모습을 바꿔나갔다. 그 가운데 서점은 그야말로 소금과 같은 존재로, 바깥과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흘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서점을 드나든 횟수에 비해 구입한 책은 너무도 적다. 더구나 건대글방에서 책을 한꺼번에 많이 산 것은 서점이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였으니 이 서점을 떠올리면 빚진 마음이 든다. 서점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놀랍게도 이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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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양말이라는 일상 지면기사
생일 선물로 세 켤레의 양말을 받았다. 양말을 정식으로 선물 받은 건 처음이다. 처음에는 시큰둥했는데 이 선물, 묘하게 재미가 쏠쏠하다. 양말 전문 브랜드가 있다는 것도 신기한데 브랜드명이 아이헤이트먼데이(나는 월요일이 싫어요)인 것도 마음에 든다. 월요일이 싫은 사람들에게 작은 즐거움을 주기 위해 지은 이름이라는데, 센스있는 작명이라 그런지 효과 만점이다.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던 양말 편집숍 홈페이지에도 처음으로 들어가 봤다. 매일 신기 좋은 양말부터 국내외 디자이너 브랜드의 시즌 컬렉션 양말까지 핫한 제품들을 선별해 소개한다는데 양말만으로 이렇게 다채로운 구성이 가능하다니, 그야말로 신세계가 열리는 느낌이다. 오프라인 양말 편집숍 매니저 '재인'의 인터뷰도 실려 있다. "양말을 고르고 사서 신는 과정, 그 자체가 좋다"는 이 매니저에 따르면 양말을 골라 신는 것이 "일상에 좋아하는 것을 하나 더 더하는 삶. 집을 나설 때 공들이는 부분이 하나 더 생기는 삶. 그것이 하루를 명랑하게 만든다"고 한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양말 선물 덕분에 예쁘고 질 좋은 양말을 골라 신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더 기분을 좋게 만든다는 걸 알게 됐다. 날씨와 그날의 일정, 내 기분까지를 생각하면서 오늘은 뭘 신어볼까 고민하는 짧은 순간의 즐거움이란! 그런 고민할 시간에 좀 더 생산적인 고민을 하라고 잔소리할 사람도 있겠지만, 원래 인생은 계산이 정확한 수학이 아니니까, 일상에서 매일 하나쯤 별 거 아닌 고민을 하는 시간도 필요하지 않을까? 양말에 꽂힌 이유 이태원 참사 때문혼란스러울수록 삶 지키는 것 중요재난속 자유로운 사람 누가 있을까 내친 김에 작가가 아주 좋아하는 한 가지 대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아무튼 시리즈' 중의 한 책인 '아무튼 양말'까지 찾아 읽었다. 지네도 아닌데 양말을 88켤레나 갖고 있는 저자의 양말 이야기다. 양말로 뭐 할 이야기가 있다고 책까지 쓰나 싶었는데, 푹 빠져 읽다가 내려야 할 지하철역을 지나칠 뻔했다. 사실 양말 선물을 받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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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율곡과 유지의 플라토닉 러브 지면기사
유지사(柳枝詞)는 율곡의 애절한 사랑노래다. 관기 유지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기약 없어 율곡은 애달프다. 그 애달픔이 많은 사람의 애간장을 녹인다.율곡의 나이 39세에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관찰사라면 최고의 지방 장관이다. 재임 기간은 5~6개월 정도였다. 첫날 관아에서 저녁을 맞았다.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 아리따운 소녀가 주안상을 내왔다. 그녀가 유지였다. 주안상을 내려놓고 뒷걸음질 쳐 물러가며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아름다운 몸매에 곱게 단장한 얼굴은 갓 피어난 백합화 같았다.율곡이 물었다. "몇 살인고?" "열두 살이옵니다." 행동거지가 얌전하고 말투 또한 교양이 있었다. 그녀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일찍이 기적에 오른 선비의 딸이었다. "시침 들려고 온 것이냐?" 어린 소녀여서 율곡은 다시 물었다. 아직 갈래머리 소녀인 동기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유지는 부끄러워 얼굴에 홍조를 띠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행수 기생의 명을 받들고 왔사옵니다." "아니다. 수종이나 들고 나가거라." 유지가 조용히 물러났다.그 후 율곡은 유지를 늘 옆에 두고 말벗으로 삼았다. 유지와 보내는 시간이 즐거웠다. 그녀를 예뻐해 주고 아껴주었으나 율곡은 갓 피어난 꽃봉오리를 보기만 할 뿐 꺾지는 않았다. 아리땁고 청순한 유지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는 율곡이었다. 나이 39세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해'선비의 딸' 열두살 관기와 첫 만남늘옆에 두고 말벗 삼아 마음에 평온 유지는 율곡의 높은 학식과 인품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율곡과 함께하는 시간은 유지에게는 커다란 산 공부고 깨우침이었다. 기녀가 지녀야 하는 몸가짐과 기예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고는 늘 몸으로 실천하게 했다.얼마 후 율곡은 임기를 마치고 한양의 집으로 돌아갔다. 유지는 율곡을 사모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립고 안타까웠으나 찾아 나서지를 못하고 있었다. 유지에게 율곡은 때론 어버이이고 때론 지체 높은 양반이고 때론 정을 주는 연인이기도 했다. 서로 만나지 못하고 세월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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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늘 하던 대로 했을 뿐인데 지면기사
여덟 살 딸아이는 학교 방과 후 수업이 끝나면 태권도장으로 간다. 태권도가 끝나면 바로 그 옆집, 피아노학원엘 가고. 워킹맘 가정의 흔한 풍경이다. 운동을 하고 음악을 배운다는 목적보다는 사실 보육 시설에 가깝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당연한 듯 하루를 보낸다.아이가 온종일 '독도는 우리 땅' 노래를 불러댔다. 내가 어릴 적 불렀던 노래와는 가사가 달랐다.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도동 1번지였는데 아이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라고 노래한다. 평균 기온 12도, 강수량은 1천300㎜이었는데 아이는 평균 기온 13도, 강수량은 1천800㎜이란다. 그래, 주소도 바뀌었고 기후도 바뀌었다.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200리는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87㎞다. 200리를 아이들은 모른다. 그래서 87㎞다. 내 아이와 내가 사는 세상이 이만큼 바뀌었다. 아이는 유튜브에서 '독도는 우리 땅' 플래시몹을 찾아달라고 했다. 영상을 켜보니 어라, 아이가 매일 집에서 춤추던 그 모습과 똑같다. 초등학생, 중학생들은 교실에서 운동장에서 모두 같은 춤을 추고 있었다. 태권도장에서 배운 거라고 들었는데 알고 보니 어지간한 대한민국 아이들은 태권도장에서 다 이걸 배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문득 나 어릴 때 배웠던 국민체조 생각이 났다. '빠라바라바, 빠라바라바' 하는 음악에 맞추어 전 국민이 똑같이 움직였던 그 체조. 우리 세대라면 모를 수 없는 그 풍경. 나는 소파에 앉아 아이에게 유튜브 영상을 보여주며 그만 울어버렸다."엄마, 왜 울어?"내 아이는 나중에 자라 '독도는 우리 땅' 플래시몹을 친구들과 이야기할 것이다. 우리 그땐 다 그 플래시몹 따라했잖아. 우리는 어린이집에서부터 핼러윈 파티를 했잖아. 핼러윈 파티 때마다 엄마가 마녀 옷을 사줬고 호박 바구니에 사탕을 담아 동네를 뛰어다녔잖아. 우리 그때 진짜 신났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며 추억에 잠길 것이다.'독도는 우리땅' 플래시몹·핼러윈축제내 아이 세대에겐 문화이자 추억이다 핼러윈의 유래가 뭔지 나는 잘 모르지만 해마다 어린이집 핼러윈 파티 공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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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오래된 미래와 수원 지역의 교가 지면기사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의미하는 향수는 과거에서 파생된 추억이다. 미적인 공간을 함의한 좋은 기억은 소위 고향뿐만 아니라 청소년기 성장을 함께해온 모교에서도 향수의 결로 묻어있다. 오래전에 떠나 왔지만 사라지지 않는 그러한 기억의 저장고에는 추억의 노래가 되살아나기도 한다. 바로 중고교 시절 목청 높여 불렀던 교가가 그것이다. 교가는 누구에게나 강한 기억으로 각인되어서 당시의 향수를 불러오고는 한다. 그만큼 재학생 시절 다 함께 공유했던 교가의 리듬과 가사는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세월을 타고 생생한 유년의 추억을 자극하기 마련이다.이같이 학교를 표상하는 교가는 건학 정신과 함께 지역의 정서가 내재 되어 있다. 대부분의 교가는 4분의 4박자 또는 4분의 2박자를 통해 합창하기 쉽게 반드시 후렴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교내외 교육 활동을 알리는 이 노래는 입학식 또는 졸업식 등 학교 행사나 의식에서 쓰인다. 학생들은 교가를 다 함께 반복해서 부르게 되면서 외울 필요 없이 가락에 붙여진 가사를 습득하게 된다. 이렇게 학습된 교가는 자연스럽게 애교심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모교의 긍지를 가지게 한다. 또한 가사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를 익히게 됨으로써 미래의 양식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교가의 본질은 이 노래를 제창하는 재학생들을 위하여 존재한다. 재학생들의 미래가 교가에 응축되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인류애와 보편적인 세계관으로서 다음 세대를 정의롭게 펼칠 수 있다. 그것은 공동체 안에서 반복, 학습함으로써 나만의 소리가 아닌 나도 소리를 내면서 서로 어우러진 하모니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물론 졸업생들에게는 교가가 기억의 잉여물로서 지울 수 없는 향수와 같은 것으로 남아있기 마련이다. 이같이 수원 지역 사회에서도 100여 년이 훌쩍 넘은 유서 깊은 학교들의 고유한 교가가 전통을 이어주고 있다. 게다가 졸업생들은 동문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노래를 향유하면서, 선후배들이 모여 순수했던 그 시절 동질성과 결속력을 다지는 것도 그 연유다. 애교심 발동·모교 긍지 불러오지만다문화·다민족·정보 문명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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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의연한 자세 지면기사
목 디스크, 허리 디스크, 테니스 엘보 등의 병으로 고생한 적이 있다. 그래서 2년에 한 번씩 건강 검진을 받을 때면 또 다른 병이 생길까 봐 긴장하곤 한다. 몇 년 전 건강 검진의 결과지를 우편물로 받았는데 정밀 검사가 필요하니 재검사를 받으라는 게 하나 있었다. 유방암 검사였다. 유방암은 전 세계 여성이 가장 많이 걸리는 암이라 겁이 났다. 마음을 졸이며 대학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았다. 괜찮다는 진단 결과를 전해 듣고서야 안도했다. 그때 큰 병에 걸리더라도 버틸 수 있는 강한 정신력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서인지 내가 닮고 싶은 인물 유형 중 첫 번째는 병이 생기더라도 그 병을 이겨내고 의연함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마치 환자였던 적이 없는 것처럼 근심 없는 듯 밝은 얼굴로 사는 사람이다. 시련을 겪고도 겉으로 티 내지 않고 산다는 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병이 생기더라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밝게 산다는 건 얼마나 경이로운가 책을 통해서 닮고 싶은 인물을 만난 적이 있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이란 소설에 나오는 맹인을 보고 그의 정신 자세를 닮고 싶었다. 그 맹인은 상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의 집에 방문한다. 그는 아내의 오랜 친구다. 방문자가 집에 도착하자 아내는 방문자와 '나'를 인사를 시키고 '나'는 초면인 맹인과 악수를 한다. "어쩐지 전에 이미 본 사람 같구먼"하며 방문자는 '나'에게 쩌렁쩌렁하게 말한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면서 '나'를 이미 본 사람 같다고 농담을 할 줄 아는 유머인이다. 시각 장애인인 데다가 상처까지 했기에 그의 낙천성이 퍽 인상적인 대목이다. 이런 이는 어떠한 고난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고난을 극복하고 다시 의연한 자세로 돌아올 것만 같다. 불행의 나락 속에서도 의연한 자세를 갖는 이를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실제로도 존재하니까. 가수 이동우가 그렇다. 그는 1993년 SBS 2기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했고 남자 개그맨들로 결성한 가수 그룹인 틴틴파이브의 멤버로 활동하다가, 2004년 병원에서 '망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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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책상… 섬의 항해기 지면기사
10월은 연달아 쉬는 날이 많았다. 직장인은 아니지만 이렇게 빨간 날이 많으면 여러 계획을 세우게 된다. 부모로서 아홉 살 아이를 데리고 어디로 놀러가느냐는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최소한 요 정도는 써야지'하는 작업계획도 세우고, 사놓고 못 읽은 책들을 읽어치우려는 계산도 하게 된다.개천절을 낀 주말에는 겨우 책 한 권만 읽었다. 놀다보니 그리된 것이지만 왠지 억울하다. 내 노트북에 새로 쓴 글자가 몇 알이나 담겨있나, 냉장고에 들어있는 사과가 더 많을 것이 아닐까, 스멀스멀 불안이 몰려오면서 작가만의 고해성사를 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고해소에 들어가 보이지 않는 신부님께 털어놓게 되는 것이다. "이번 주에는 놀기만 했습니다. 책은 달랑 한 권, 그것도 매우 얇은 산문집 한 권 읽었습니다. 소설 파일을 아예 펴보지도 않았고 노트는 두 장 썼나? 아무튼 형편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세세히 늘어놓다보면 갑자기 또 화가 난다. 왜 이렇게 쩨쩨해졌나! 프랜 레보비츠의 경구를 떠올려 보라고! '난 너무 천천히 글을 써서, 내 피를 잉크로 써도 다치지 않을 정도다'. 이 정도 넉살을 떨어줘야 나무늘보 작가로서 장수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에잇, 모르겠다. 놀자! 그리고 놀았다. 한 주가 훌쩍 흘러 한글날 연휴가 끝나가자 이번에는 토니 모리슨의 경구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왜 글을 쓰는가? 쓰지 않으면 삶 속에 처박히기 때문이다'. 한창 삶에 처박히는 중이라 그런가 더는 참지 못하고(?) 글을 썼다. 물론 시작은 반성문으로, 끝에는 뭐가 나올지 모를 문장을 우선 달려본다. 휴일 잔뜩 품은 10월 첫째·둘째 주방황끝에 카페 이동 닻 내린 '책상' 쓰면서 문득 생각하니 이 곳이 얼마나 비싼 비용을 치르고 얻은 책상인가 싶다. 대체휴일이 끝나가는 월요일 오후 다섯 시가 되어서야 나는 북카페의 내가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있고, 옆 탁자에는 이숲이가 나무클립을 끼워서 만드는 뭔가에 푹 빠져있다. 이렇게 엄마를 놔주기까지 우리는 문구사에 가서 공작세트를 사오고, 쌀쌀한 날씨에 대비한 옷을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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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무거운 식탁 지면기사
소소한 취미가 하나 생겼다. 매일 어디에서 뭘 누구와 함께 먹었는지 기록하는, 취미라는 말을 붙이기에도 애매한 일상의 루틴 정도다. 막연하게 알고 있었지만 기록을 들여다보니 내 일상의 패턴이 보인다. 식생활만 놓고 보면 간단 그 자체다. 아침을 거르니까 하루 두 끼 중 80% 이상이 외식이고, 집밥은 20% 남짓이다. 집에서 밥을 먹더라도 배달이나 포장 음식을 자주 먹는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집에서 둘이 밥을 함께 먹는 일은 더 어려운 일이다. 그나마 둘이 먹을 때에는 밥상을 차려 먹는 편인데, 그마저도 직접 만들어 먹기보다는 밀키트나 가공식품을 살짝 조리하는 수준이니, 차려먹는다는 말이 무색하다. 먹는다기보다는 한 끼를 해치우는 수준인데, 매 끼니 정성을 들여 해먹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지 않을까? 가끔 친구들과 농담처럼 엄마가 해주는 집밥은 곧 멸종될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요즘은 그게 곧 현실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굳어지고 있다."엄마가 해주는 집밥은 곧 멸종"친구와 농담이 곧 현실될 것 같아 얼마 전 장민영 음식탐험가와 김태윤 셰프가 인도네시아 여행에서 보고 생각한 것들을 나누는 토크 세션 'IN TO THE WILD'에 다녀왔다. 인도네시아는 관광지로 유명한 발리 외에는 잘 모르는 나라였는데 1시간 반 남짓한 시간 동안 전혀 다른 세계로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 인도네시아의 4개 지역을 일주일씩 순회했다는데 바닷속부터 야생 열대우림, 대도시 자카르타까지 지역도 다양했다. 길거리 음식부터 최고급 레스토랑까지 섭렵하고 온 셰프가 재현해 내놓은 다양한 식감의 인도네시아 샐러드 '가도가도'와 달큰한 '떼보틀'까지 곁들여지니 한국이 아니라 인도네시아 어딘가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인도네시아 어디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다는 떼보틀은 딱 달달한 자스민차여서 음료의 맛만 놓고 보면 전혀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이국적인 향신료 향이 가득한 샐러드와 함께 먹으니 나중에는 왜 같이 먹는지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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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유희경을 사랑한 매창 지면기사
유희경(劉希慶)은 16세기 조선의 유명한 시인이다. 당대의 대시인이요 풍류객인 유희경을 흠모하는 여인이 있었다. 부안 기생 매창이었다. 매창은 유희경의 문명을 이미 오래전부터 듣고 있었다. 그의 시를 찾아 읽으며 유희경을 흠모하기 시작했으나 만날 기회가 없었다. 기회가 된다면 그와 시를 겨뤄보고 싶기도 했다. 유희경의 부친은 품계로 종칠품인 동계공랑이었다는 것만 전할 뿐, 그의 자세한 가계는 알려지지 않았다. 유희경은 예학에 밝아 국상이 나거나 사대부가에서 상을 당하면 그를 부르곤 했다. 임란 때는 의병에 참여할 만큼 나라를 걱정했다. 그는 시문학을 통해 사대부들과 친교를 맺었다. 유희경은 당시 여항시인인 백대붕과 교류하면서 '풍월향도'라는 이름의 모임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매창(李梅窓)의 본명은 이향금이다. 계유년에 태어나서 계생(癸生), 계랑(桂娘)이라고도 불렀다. 매창은 1573년에 부안현리 이탕종의 서녀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관비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녀 역시 어려서부터 기적에 올랐을 것이다.매창은 한시와 시조에 능했고 가무 및 거문고에 빼어난 기량을 보였다. 시조와 한시 59수가 작품집 '매창집(梅窓集)'에 전해지고 있다. 홍만종(1643~1725)이 '근래에 송도의 황진이와 부안의 계생은 그 사조가 문사들과 비교하여 서로 견줄 만하니 참으로 기이하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 후 매창은 황진이와 함께 조선의 여류시인으로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만나기전 서로 설레기는 마찬가지매창의 거문고에 유희경 가슴 촉촉매창의 한시 '자상(自傷)'에서 '서울 꿈 삼년/호남에서 또 한 봄이 가는구나/황금에 처음 마음이 바뀌어/한밤에 홀로 마음이 상하는구나'라고 노래한 것을 보면 서울에서도 3년 정도 기녀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서(1570~1624)의 '석촌유고(石村遺稿)'에는 매창의 시 한 편이 실려 있는데 그 시 아래에 '일찍이 내 친구의 첩이 되었다가 지금은 청루에 있다'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첩실 생활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그 후 매창은 부안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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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새벽 전화 지면기사
휴대전화 진동음에 눈을 떴다. 아직 어두웠다. 새벽의 전화가 일상적인 용무일 리는 없다. 엄마였다. "왜? 무슨 일이야?" "거긴 비 많이 안 와? 여기 비가 와서 난리도 아냐." 나는 발칵 화를 내고 말았다. "아니, 비 온다고 이 시간에 전화를 한 거야?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놀랐어?" 엄마가 하하하, 크게 웃는다. 이봐요, 엄마. 웃을 일이 아니라고. 이 새벽에 비 온다고 전화를 하다니. 나이 든 부모를 둔 딸 마음을 좀 헤아려 달라고. 행여 나쁜 소식일까봐 그 짧은 시간 동안 오그라붙은 내 마음을 좀 알아달라고.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심통이 머리끝까지 오르고 말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비 소식은 심각했다. 엄마가 카톡으로 보내온 사진을 보고 나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현관문을 살살 열고 사진을 찍었는데 마당은 이미 잠겨 있었다. 그나마 단을 높인 현관이라 현관문 바로 앞까지 물이 찰랑댔다. 비는 그쳤지만 마당에는 주전자와 빗자루와 작은 화분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이게 다 뭐야?" 내 말에 엄마가 불퉁거렸다. "넌 뉴스도 안 봐? 포항에 비 많이 와서 다 이 모양 됐어." 부랴부랴 뉴스를 켜보니 온통 포항 비 소식이었다. 비소식 전한 엄마 연락 심통났지만수해 심각한 고향집 사진보며 놀라아버지가 아끼던 차도 절반쯤 잠겨 내가 태어나 19년을 자란 포항은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서 고요한 곳이었다. 게다가 나는 사택단지에서 자랐다. 사택단지에서 자란다는 건 포항 토박이 출신이 아니라는 것이고,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어도 포항 사투리를 쓸 줄 모른다는 것이다. 강원도에서 충청도에서 경기도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사택단지에 모여 살며 똑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가장을 두었다. 처음에는 자전거를 타고 형산강 다리를 건너 포스코로 출퇴근하던 아버지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오토바이를 샀고 아침이며 저녁, 형산강 다리는 거대한 오토바이 물결로 뒤덮였다. 오토바이들은 훗날, 그 아버지들이 포니2나 엑셀 등 작은 승용차를 사며 서서히 사라졌지만."멀쩡해" 기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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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이고 선생의 정신과 수원의 얼굴 지면기사
얼굴은 '얼과 꼴'의 합성어다. 인간 내부에 있는 '얼'은 정신이며 외부에 있는 '꼴'은 모양이다. 얼은 보이지 않지만 꼴은 보이는 것으로, 누구나 이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외면의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늙고 병들고 죽지만 내면의 얼굴은 시간을 초월하며 죽어도 죽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인간 정신이 지향하는 것은, 자신의 안위가 아니라 타자와 세계라는 다자의 이익과 평안을 모색하는 데 있다. 이 같은 시대를 넘나들면서 역사의 선각자를 통해 우리는 인간 정신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기록에서 재현되며 공동체 문화 속에서 살아있다. '팔달산 주인' 별칭… 충·효로 거듭착한 삶 권하며 실천 '권선동' 유래 수원의 경우 역사적으로 이고(李皐, 1341~1420년)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고려 말과 조선 초기 충효의 대표 인물인 이고 선생은 공민왕(1374년) 시절에 문과에 급제해 한림원 학사를 지냈다. 그는 '팔달산 주인'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수원을 충과 효로 거듭나게 한 수원 정신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이고 선생의 생전에 명명된 팔달산의 어원으로 두 가지 유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고려말 대사성 집현전 직제학으로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광교 남 탑산'(光敎南塔山)에서 기거했다. 당시 공민왕의 신화를 통해 안부를 묻는 공민왕에게 이곳 산천의 풍광을 극찬하면서 사통팔달(四通八達)로 막힌 데가 없다는 말이 전해진다.그 후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이고 선생에게 여러 번 관직에 나설 것을 권유했으나 사양했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때 잠시 관직에 오르기는 했으나 고려의 충절을 끝내 지킨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태조는 이고가 거처한 곳을 화공에게 그리게 해 이것을 보고 나서 '팔달산(八達山)'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의 행적은 지금 수원의 권선동에서도 발견된다. 권선(勸善)이라는 지명은 이고가 이 지역에 머물면서 백성들에게 착하게 살기를 권하면서 선을 몸소 실천했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의 높은 인간 정신을 이어받은 주민들은 이고 정신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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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모든 추측을 경계하라 지면기사
뜻밖의 결말을 보여 주는 이야기가 있다. 오 헨리가 쓴 '마녀의 빵'이라는 소설이다. 마사 양은 미혼 여성이고 마흔 살이다. 작은 빵집을 운영하는 그녀는 중년 남자인 단골손님에게 관심을 갖는다. 그 손님은 낡은 옷을 입었지만 말쑥해 보였고 예절이 깍듯했다. 그는 늘 저렴하게 파는, 오래 묵어 딱딱한 빵 두 덩어리를 샀다. 언젠가 마사 양은 그의 손가락에 적갈색 얼룩이 묻은 걸 보고 그가 무척 가난한 화가라고 믿었다. 그녀는 그를 시험하기 위해 빵집에 일부러 그림을 갖다 놓았는데, 그 그림을 본 그가 데생이 잘된 편이 아니라고 말하는 걸 보고 그가 화가인 게 확실하다고 느꼈다.어느 날 그 손님이 평소처럼 묵은 빵을 달라고 했다. 마사 양의 머리에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딱딱하게 굳은 빵 두 덩어리 안에 손님 몰래 버터를 듬뿍 넣어 손님에게 주었다. 그에 대한 호감의 표시였다. 그날 그 손님과 낯선 남자가 빵집에 왔다. 그 손님은 그녀를 향해 고래고래 악을 쓰기도 하고 "당신이 날 망쳐 놨어" 하고 소리도 질렀다. 마사 양은 낯선 남자에게서 그 손님이 성난 이유를 듣게 되었다. 그는 화가가 아니라 제도사이고 공모전 수상이 걸려 있는, 새 시청 설계 도면을 그리느라 석 달 동안 열심히 작업했다고 한다. 제도사들은 연필로 도면을 그리고 잉크 작업을 끝내고 나면 굳은 빵 부스러기를 문질러서 연필 선을 지워 버린단다. 그런데 그녀가 빵에 살짝 넣은 버터 때문에 그의 설계 도면이 쓸모없어졌다고 한다. 마사 양의 부정확한 추측이 결과적으로 그를 그토록 화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상대 본모습 어떤지 개의치 않고주관적으로 해석 판단하면 안돼 우리도 소설 속 마사 양처럼 제멋대로 추측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예를 들어 보겠다. 친구가 약속 시간에 늦게 오면 자기를 소홀히 여기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알고 보니 늦을 만한 이유가 있어서 늦었던 것. 연인이 하품을 하면 자기와 함께 있는 시간이 지루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알고 보니 전날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하품을 했던 것. 무섭게 생긴 괴물이 그려진 영화 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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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시침과 분침 지면기사
내가 최초로 배운 지식은 '시계 보는 법'이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살았던 우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방 두 칸을 연결하는 마루가 있고, 마루 끝에는 간유리가 끼워진 유리문이 있는 집. 나는 나무마루에 앉아 반사되는 햇빛을 받으며 엄마로부터 시계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방마다 보름달 만한 시계가 걸려 있고 마루에는 추까지 달린 괘종시계가 있었지만 그 사물의 기능에 대해서 전에는 의식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계 보는 법을 배우던 오후에 그 사물에는 새로운 생명력, 모종의 신성한 임무라고 할 것이 부여되었다. 엄마는 종이에 동그라미를 그린 후 12시와 3시, 6시, 9시를 나타내는 표시를 하고 길고 짧은 막대기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이건 여섯시고, 이건 아홉시고…" 이해가 가지 않았음에도 시침과 분침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각도는 신비로운 도형이나 기호처럼 매혹적이었다. 나중에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읽으면서, 집시 멜키아데스가 들고 온 나침반에 열광하는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에게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 순진하고 열광적인 태도는 내가 시계 보는 법을 배우던 모습과 유사했다. 시간이 훌쩍 흘러, 초등학교 2학년인 내 딸은 이제야 시계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우리 엄마와 달리 나는 딸에게 시계 보는 법을 미리 가르쳐주지 않았다. 시계가 알려주는 메시지란 대체로 독촉이 아닌가? 자기 리듬으로 살아가는 게 더 편한 아홉 살 인생은 내버려 두자고. 이렇게 중얼거리다 문득 깨닫고 보니, 우리 집 벽시계들은 전부 숫자가 없고 눈금뿐이다. 엄마가 그려가며 알려준 '시계보는법'시간흘러 자명종 못읽는 딸 가르치며특정 시기의 '무지' 신비롭게 느껴져자라는 모습보며 생기는 '기억의 눈금'다가올 '앎' 기다리는 마음 경이롭다 당연히 딸은 숫자가 박히지 않는 시계는 읽지 못한다. 그래서 숫자판이 있는 자명종을 들고 온다. 이때부터 '지금이 몇 시인지'라는 퍼즐풀이가 시작된다. 딸의 추리 과정은 이럴 것이다. 1)엄마가 묻는다. "이숲아, 지금이 몇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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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추모와 애도에도 '공간'이 필요하다 지면기사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더니 요 며칠은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는 시 구절이 떠오르는 파란 하늘의 연속이다. 꼭 푸르른 날이 아니어도 그리운 사람이 생각날 때가 있다. 떠나간 사람을 떠올리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길 때면 사진을 찾아보기도 하고, 차 한 잔을 마셔보기도 하지만 뭔가 허전하다. 만약 납골당이나 묘지 외에 다른 곳에서도 함께 그 사람을 추억하고 그리워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어떨까? 꼭 누군가를 추모하거나 애도하지 않아도 편안하게 추억에 잠길 수 있는 그런 곳 말이다.납골당·묘지외 추억 잠길 곳 있으면英 '메모리얼 파크' 평범한 동네 공원세상 떠난 아이들 기리지만 친근해 몇 년 전, 영국에 갔을 때 인상 깊었던 장소가 있다. 아이들이 손을 뻗으면 손쉽게 만질 수 있을 만한 키 낮은 가로등에 색색의 풍선이 매달려 있었다. 영국에 공원이 워낙 많긴 하지만 이런 가로등이 있는 공원은 흔치 않다. 공원을 걷다보면 한쪽에 작은 수로가 조성되어 있다. 맑은 물속에 누군가의 이름을 새긴 돌들이 가득하다. 모두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이름이다. 수로 주변에는 오늘 아침에 꽂아두고 간 것처럼 싱싱한 꽃다발들이 이곳저곳에 놓여 있고 '내 정원에 온 걸 환영해요(Welcome to my garden)'라고 적힌 돌 옆에 활짝 웃는 아기의 사진이 함께 자리한다. 떠난 이를 그리워하며 적은 편지도 꽃다발 옆에 꽂혀 있다.이 공원은 영국 미들랜드 지역 버밍엄에 위치한 '메모리얼 파크'로, 일찍 세상을 떠난 발달 장애 아이들을 기억하고 추억하기 위한 공간이다. 발달 장애로 가족을 잃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편하게 공원에 올 수 있지만, 공원 곳곳은 먼저 떠난 아이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엄숙하거나 경직되어 있지 않고 관리와 통제를 받는 공간이 아닌, 평범한 동네 공원으로 사랑받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구석구석에 있는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번 더 들여다보고, 친근하게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아 있고 사람들이 편하게 드나드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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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전함의 노예 백대붕 시인 지면기사
백대붕의 출생년도는 불분명하지만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이나 '학산초담(鶴山樵談)'의 기록에 의하면 허봉이나 심희수 등과 더불어 터놓고 사귀었다고 되어 있다. 그 기록을 참조한다면 아마도 1550년 전후에 태어났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시에서 군함의 노를 젓는 전함사의 노예라고 밝히고 있다. '술에 취해 수유꽃 꽂고/혼자 즐기다가,/산에 가득 밝은 달빛 물드니/빈 술병 베고서 누웠다네./길 가던 사람들아, 무엇하는 놈인가/묻지를 마소./티끌세상에서 세어진 머리 전함사의 종놈이라오.'라고 노래한 것을 보면 전함사의 노예인 것이 분명하다. 때는 음력 9월9일, 상서로운 날인 중양절(重陽節)이었을 것이다.자신의 시에서 천민 신분 밝혀같은 처지 시인들과 모임 주도 이날에는 붉은 산수유 열매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차거나 산수유 가지를 머리에 꽂고 산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 백대붕은 붉은 산수유 열매가 달린 가지를 꺾어 머리에 꽂고 국화주를 마셨을 것이다. 어느덧 술을 다 마시고 빈 병만 남았을 것이다. 그 병을 베고 누우니 어느새 아흐레 둥글게 차오르는 달이 떠올라 온 산에 달빛이 가득했을 것이다. 세상을 향해 고함을 질렀을 것이다. 분노와 절망의 고함이었을 것이다. '지체 높은 놈들아, 내가 누군 줄 아느냐? 전함사의 종놈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 시의 제목은 '동유주(東遺珠)', '대동시선(大東詩選)', '소대풍요(昭代風謠)' 등에는 '9일(九日)'로, '기아(箕雅)'에는 '취음(醉吟)'으로 되어 있다. '9일(九日)'이라는 제목은 중양절의 날짜를 드러낸 것이고, '취음(醉吟)'은 국화주를 마시는 중양절의 풍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취음(醉吟)'이라는 시제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백대붕은 같은 천민인 유희경과 서로 시를 주고받았는데 책 한 질이 될 만큼 많았다. 백대붕과 유희경은 같은 처지의 위항 시인들을 모아 '풍월향도'라는 모임을 이끌어나갔다. 17세기 중엽은 사대부들의 폐쇄적인 시단에 하층계급 출신의 위항 시인들이 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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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이상하고 아름다운 그랜마호텔 지면기사
연남동 작은 카페에는 선생님 두 분이 먼저 와 있었다. 시인 한 분, 소설가 한 분.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이 나왔고 나는 포크보다 생맥주잔을 먼저 들었다. 더워도 너무 더운 날이었다. 땀을 식힌 다음에야 나는 가방에서 책 두 권을 꺼냈다. 두 분께 드릴 선물이었다. "요즘 출판사들은 진짜 책 너무 예쁘게 만드는 것 같아. 정말 공들였네." 책을 쓰다듬으며 소설가 선생님이 한 말에 시인 선생님이 투정처럼 말했다. "몰라. 미안해. 난 안 보여. 눈이 너무 나빠졌어." 이젠 책보다 노안 이야기가 더 재밌다. 다초점 안경은 어디가 잘하는지 묻고, 큰 글씨 책은 자존심 상해 못 사겠다는 이야기도, 그래서 생전 안 보던 전자책을 읽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나도 이제는 태블릿으로 전자책을 본다. 종이 넘기는 재미 없이 무슨 책을 읽느냐 생각했던 나인데도 글씨를 마음껏 키워볼 수 있는 전자책이 요즘은 종이책보다 편하다. 그래서 전자책을 처음 읽던 시기, 나는 걸핏하면 손가락에 침을 묻혀 태블릿을 넘기곤 했다. 소설가 선생님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비닐봉지엔 오이와 고추, 감자가 들어있었다. "강릉에서 보내온 거야. 가져가서 먹어." 나는 고맙다고 냉큼 받았다. 만날 때마다 선생님은 뭐든 한아름씩 안겨준다. "선생님! 우리 10년쯤 더 나이 들면 매일매일 친구들 불러다 밥도 먹고 술도 먹고 차도 마시면서 그렇게 설렁설렁 같이 늙어요. 소설이랑 시 얘기나 하면서 그렇게요." 내 말에 선생님이 대답했다. "어? 나 벌써 그렇게 사는데? 만두 백개씩 빚고 김장 80킬로씩 해. 친구들 먹이는 재미로 살거든. 서령도 우리 집 놀러와!"친구·선후배들 하루 멀다하고 초대제라늄·금잔화 핀 마당서 소맥 말고3층짜리 건물 사 식당에선 낭독회… 나는 예쁜 할머니가 되고 싶다. 잘 웃고 잘 노는 수다쟁이 할머니가 되고 싶다. 친구들과 선배들, 글 쓰는 후배들을 하루가 멀다고 집에 초대해 제라늄과 금잔화 잔뜩 핀 마당에 상 펴고 앉아 소맥을 마는, 웃기고 이상한 할머니가 되고 싶다. 집에 손님들이 하도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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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건축가 정약용과 김동훈 지면기사
정약용과 김동훈은 시대를 달리하는 건축가다. 정약용(1762~1836)은 조선 후기 실학자이고, 김동훈(1955~)은 현재 대학교수 출신으로, 이 둘은 200여년이라는 역사와 시대를 넘나드는 인물이다. 수원에서 획기적인 건축물을 계획하고 설계하고 실행한 건축가로서 정약용과 김동훈은 공통점이 있다. 정약용의 수원화성 축성과 김동훈의 수원시 연화장이 그것이다. 조선시대의 성곽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화성은 방어기지로서 백성들의 안보와 치안을 위한 국가적 차원의 근대적 건축물이다. 반면 혐오시설에서 향수적인 공간으로 자리 잡은 수원시 연화장은 무연, 무취시설로서 망인과 유가족을 위한 삶과 죽음의 한가운데 있는 전위시설의 현대적 건축물이다.이러한 건축물의 배후에는 정치·문화적으로 발현하고 주관한 현자를 찾을 수 있는데 수원화성의 정조대왕과 수원시 연화장의 고 심재덕 시장이다. 수원화성은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이장하면서 왕권 강화와 함께 안전하고도 새로운 정치적 무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신도시의 축성을 설계하고 감리할 수 있는 정약용이 발탁되었고, 정약용은 10년 예상되는 공사를 2년 반 만에 완공하고 공사비용도 4만냥을 절약하는 성과를 냈다. 그리고 수 세기가 흐르는 동안 수원화성은 문화적 기능과 예술적 가치까지 추가되어 한국을 넘어서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서 미래의 인류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수원서 건축물 설계 실행한 공통점정약용은 수원화성·김동훈은 연화장백성·나라… 지역 중요시했던 철학 장사문화인 매장과 다르게 화장에 관한 인식은 2001년 수원시 연화장 개장 전후로 바뀐다. 수원시 연화장이 있기 전에 화장은 무연고자 또는 가난하고 불행하게 생을 마감한 망인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었다. 이 같은 화장 풍토를 첨단시설을 통해 장사문화의 패러다임을 있게 한 인물이 심재덕 시장이고, 김동훈은 연화장의 선진적 설계를 한 장본인이다. 다만 이것은 정치적 발탁이 아니라 공모전을 통해 민주적 채택 방식에서 이루어졌다. 그 결과 38.5% 화장률에 지나지 않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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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무탈함의 행복 지면기사
인간의 행복과 재산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행복하기 위해 돈 걱정이 없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재산 축적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듯 행운이 있으면 액운이 따르게 마련일까. 복권 당첨자가 이전보다 불행해진 사례가 여러 언론 매체를 통해 심심치 않게 소개된다. 돈이 화를 부른 경우다. '로또 복권 1등 당첨되어도 불행해지지 않는 법'이란 제목의 유튜브 동영상이 있을 정도이니, 거액이 생기면 오히려 불행에 빠지지 않게 조심해야 할 것 같다.유산이 불행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어머니로부터 들었는데 동네 사람 중에 부모의 유산이 생기는 바람에 등지게 된 형제들이 있다고 한다. 삼형제가 의좋게 지내다가 7천만원쯤 되는 유산분배문제로 멀어졌단다. 장남은 장남이라서 본인 몫이 더 많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머지 두 형제는 그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단다. 4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들 형제는 유산을 나누지 못한 채 명절에도 서로 연락하지 않는다고 하니 답답한 노릇이다. 여러가지 조건 두루 갖추기 힘드니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어려운 모양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이 편안해야 하므로 다음과 같은 전제 조건이 필요하리라. 돈 걱정이 없어야 하고, 형제간이나 친구 간에 인간관계가 원만해야 하고, 몸이 건강해야 하고, 직업 만족도가 낮지 않아야 하고, 결혼을 한다면 믿음이 가는 배우자를 만나야 하고, 속을 썩이는 자식이 없어야 하고, 지루한 시간을 보낼 취미가 있어야 하는 등등. 이런 여러 가지 조건을 두루 갖추기 힘드니 행복하게 사는 게 어려운 모양이다. 반면 우리가 불행해지기는 얼마나 쉬운가. 최근 내가 집에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은 일이 있다. 어느 날 몇 분 간격으로 쿵 하고 큰 소리가 반복적으로 나서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추측해 보건대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라 이웃집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 같았다. 아마도 창문을 열어 놓고 모두 외출하여 아무도 없는 집에서 바람 때문에 방문이 닫혔다 열리고 다시 닫히기를 계속 되풀이되는 듯했다. 우리집이 12층 아파트인데 문제는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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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여름의 맛 지면기사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다. 딸은 물속에 들어가 있고, 나는 글 속에 들어가 있으나 둘 다 절반 정도 몸을 밖으로 내놓고 머리만 익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깊이가 일 미터 남짓한 간이 수영장에서 사방으로 물을 튕기며 즐겁게 첨벙거리는 딸을 보고 있으려니 내 글쓰기도 저렇게 즐거우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나 역시 10매 가량의 글을 붙들고 있으면서 온 사방에 단어란 단어는 죄다 흩뿌려놓은 채 허우적거리다가, 멍하니 임윤찬의 라흐마니노프 연주 동영상을 재생하는 것이다. 17세 소년의 무서운 몰두를 보면서 오래가지 않는 반성의 채찍질을 한번 휘두르며, 억지로 종이 속에 뛰어든다. 아아, 수박이나 먹고 싶다….시고모님이 펴낸 요리 산문집 도착시어머니·둘째 고모의 엄청난 손맛 문득 한 권의 책이 도착한다. 시고모님이 내신 요리 산문집이다. 시를 쓰는 둘째 고모는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오고 목소리는 성악가같은 분으로 결혼 전에 시부모님보다도 먼저 만나 뵙던 분이다.속초가 고향인 남편을 만나면서 서울토박이인 내게는 바닷길이 열린 셈이 됐는데, 그 길에 가장 먼저 떠내려온 것은 다름 아닌 음식이었다. 우선 홍게가 있다. 시아버지가 현역 선장님이던 시절, 나는 이 비싸고 귀한 홍게를 물릴 때까지 실컷 먹을 수 있었다. 백골뱅이와 소라는 덤이다. 그 외에 도치 알탕이며 도루묵조림, 총알 오징어와 가자미 식혜를 비롯해 난생 처음 먹어보는 물고기들, 온갖 나물과 해초무침, 이 모든 것을 제압하는 여왕같은 김치를 맛볼 수 있었다. 산과 바다에서 나는 싱싱하고 다채로운 식재료를 엄청난 손맛으로 요리하는 시어머니와 둘째 고모의 음식솜씨 때문에 제사 때마다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고 가야겠다는 다짐 아닌 다짐을 하게 된다. 남편에게 반한 것도 사실은 남편이 해준 요리 탓이 크다. 그런데 책을 넘기니 그 요리의 근원이라고 할까, 맛있는 음식이 뚝딱 만들어지는 손들이 어떻게 이어졌는지 길이 보이고, 그 끝에 돌아가신 시할머니의 모습이 나온다.'작가가 나온 집은 망한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작가가 자기 집안사를 낱낱이 글에 써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