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120년, 역경을 헤친 코리안 개척기

  • [이민 120년, 역경을 헤친 코리안 개척기·(下)] 격동의 역사속 다양한 이민

    [이민 120년, 역경을 헤친 코리안 개척기·(下)] 격동의 역사속 다양한 이민 지면기사

    120년 전 인천~하와이 이민은 국가가 허용한 최초의 합법 이민이었다. 이후 다양한 모습으로 떠나간 우리나라 이민자들은 많은 사연을 낳았다.하와이 이민 이전까지 조선·대한제국은 국민이 국경을 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19세기 말부터 가난한 국민들은 옛 고구려 영토인 만주 간도, 러시아 연해주 일대로 넘어가 새로운 삶을 꿈꾸며 황무지를 개척했다.19세기말부터 간도·연해주로…소련, 17만 우즈베크 등 강제이주사할린에는 일제 징용피해 동포 만주지역 한인 인구는 1930년 60만명에 달했고, 만주국이 생겨난 이후 1940년 145만명으로 급증했다. 연해주 등 러시아 거주 한인은 1900년 2만7천여 명에서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1917년께 10만명 가까이 늘었다. 당시 연해주 인구 3분의 1은 한인이었다고 한다.이들이 조선족과 고려인의 원류다. 고려인들은 1937년 소련 스탈린 정권에 의해 무려 17만1천781명이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지로 강제 이주됐다. 만주로 이주한 한인들은 중국 소수민족으로 편입돼 1952년 옌볜조선족자치주를 건설해 정착했다. 현재 한국에서 조선족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은 경기도이며, 고려인은 경기 안산과 인천 연수구 쪽에 몰려 살고 있다. 러시아 사할린의 한인 동포는 일제의 강제 징용 피해자들이다. 한때 15만명에 달한 사할린 강제 징용자들은 1945년 해방 직후 4만3천명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일본 국적이 아니거나 일본인 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송환되지 못하고 러시아(소련) 국적으로 남게 됐다. 정부는 사할린 동포들을 대상으로 영주귀국을 지원하고 있고, 경기도와 인천시에 공동주택과 복지관 등 보금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경기 안산시 고향마을 아파트(사할린 동포 아파트)에 사는 장정자(81)씨는 "사할린과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자녀들이 혼자 못 살겠으면 러시아로 돌아오라고 하지만 여기(사할린 아파트)에서 할머니들과 이야기하며 사는 게 좋다"고 말했다.한국전쟁이후 16만명 해외 입양파독 광부·간호사, 결혼 후 정착 한국전쟁 이후 해외여행이 금지

  • [이민 120년, 역경을 헤친 코리안 개척기·(下)] 모국에 둥지 역할할 중앙행정기관 필요

    [이민 120년, 역경을 헤친 코리안 개척기·(下)] 모국에 둥지 역할할 중앙행정기관 필요 지면기사

    한국은 이민자 또는 그 후손인 재외동포를 법률상 '대한민국 국민으로 해외 영주권을 취득하거나 장기 체류하는 사람'과 '국적과 관계없이 한민족의 혈통을 지닌 해외 거주자'로 정의한다. 해외에 있는 한인 동포는 2021년 기준 193개국 732만5천143명으로 거의 모든 국가에 흩어져 살고 있다. 미국(263만명), 중국(235만명), 일본(81만명), 캐나다(23만명), 우즈베키스탄(17만명) 순으로 분포한다.이들은 오래전부터 모국과 가까워지길 바라왔다. 한인 동포들은 2000년대 중반부터 재외동포청을 신설해 달라고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 정부가 여러 부처로 흩어진 재외동포 관련 업무를 한데 모으는 것뿐 아니라 최근 각국 한인사회에 화두가 된 '역이민' 등 각종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길 원하고 있다. 역이민은 한국의 인구절벽을 해소할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기도 하다. 각 부처 업무 한데 모아 지원 업무정부조직개편 발표 국회 계류상태한인사회 '역이민' 인구 대안 가능성 재외동포와 모국이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재외동포청 신설이 가시화하고 있다. 지난 10월 정부는 재외동포청 신설 등을 담은 조직개편안을 발표했고, 곧바로 국민의힘 국회의원 115명 전원이 정부 개편안을 반영한 '정부조직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해 현재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계류 중이다.재외동포청은 730만명 규모 재외동포의 구심점 역할을 할 새로운 중앙행정기관이다. 재외동포청은 기존 재외동포재단이 추진한 교류·교육·조사연구분야 사업에 출입국·체류와 국적(법무부), 국내 체류 동포 지원(행정안전부), 재외동포 교육 지원(교육부), 경제 네트워크 관리(산업통상자원부), 해외 입양 한인과 의료 지원(보건복지부) 등 각 부처가 가진 관련 업무를 통합한다는 구상이다. 또 재외동포 대상 세제 혜택과 국내 거주 요건 개선, 복수국적 허용 요건 완화, 해외 입양 동포 지원 확대 등 정책을 직접 기획해 추진할 전망이다.재외동포청 유치 경쟁도 뜨겁다. 인천시, 대전시, 제주도가 재외동포청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가운데 경기도 쪽에

  • [이민 120년, 역경을 헤친 코리안 개척기·(中)] 오아후 공동묘지에 묻힌 독립운동가들

    [이민 120년, 역경을 헤친 코리안 개척기·(中)] 오아후 공동묘지에 묻힌 독립운동가들 지면기사

    "하와이 동포 중에 독립운동 자금을 대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지난 22일 오전(현지 시간)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시 오아후 공동묘지에서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장이 초창기 한인 이민자들의 묘비를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오아후 공동묘지에는 호놀룰루 초창기 한인 이민자 수백명이 묻혀 있다. 묘비에는 출생·사망 연도와 날짜, 이름과 본적, 사진 등이 새겨져 있어 누구의 무덤인지 알 수 있다. 독립운동 행적이 적힌 경우도 있다.일부 묘비에는 독립운동 행적 기록"당시 자금 대지 않은 사람 없을것""월급 17달러, 매달 1달러 이상 내" 하얀색 묘비에 영어(MIN)와 한자(閔)로 성씨를 적은 독립운동가 민찬호(1877~1954) 목사의 묘지가 눈길을 끈다. 1905년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2대 목사로 부임한 그는 하와이에서 이승만(1875~1965) 박사와 함께 동지회를 창립하고 교민단 총단장을 역임했다. 민 목사는 1909년부터 1945년까지 독립의연금, 군수금 등의 명목으로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으며, 정부는 이러한 공훈을 인정해 201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여성 독립운동가 김노디(1898~1972) 선생의 묘비에는 생전 사진이 붙어 있고, 그 옆으로 화병이 놓여 있었다. 김노디 선생은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14일부터 사흘 동안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회의에 대의원으로 참석해 서재필(1864~1951) 박사에 이어 두 번째로 독립에 관해 연설했다. '신한민보' 1919년 5월6일자 기사에서 '비감한 마음을 억제할 수 없어 눈물을 옷깃에 적시었다더라'고 보도할 정도로 명연설이었다고 한다. 김노디 선생은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공로 등을 인정받아 지난해 9월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이승만 도운 민찬호·김노디 '추서'한인기독학원 매각 '인하대' 설립도 김상열 관장은 "하와이에서 한인 남성 노동자 한 달 임금이 17달러 정도였고 필수 생활비를 빼면 3~4달러 정도만 남았는데

  • [이민 120년, 역경을 헤친 코리안 개척기·(中)] 하와이 한인사회를 가다

    [이민 120년, 역경을 헤친 코리안 개척기·(中)] 하와이 한인사회를 가다 지면기사

    미국 하와이 한인 동포는 1903년 1월13일 도착한 최초 이민자 86명에서 1945년 해방 당시 약 6천500명으로 75배 넘게 성장했다. 현재 하와이 한인 인구는 약 7만명으로 추산된다. 하와이 전체 인구 144만명 가운데 4.8% 수준으로, 필리핀계(13%)와 일본계(12%)보다는 수가 적다. 하지만 하와이 내 어느 이민자 집단보다 민족적 자부심이 크며 결속이 강한 게 한인 동포들이다. 나라 잃은 설움과 독립운동을 경험했기 때문이다.7만명 관광·운수·자영업 등 종사이민 1~2세대 터전 농장은 쇠퇴 상징적인 장소가 호놀룰루에 있는 자유극장 건물 터다. 국내에서 3·1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는 소식이 하와이까지 날아간 1919년 6월15일 한인 동포 1천500명이 자유극장에 모여 독립운동 지원 방안을 논의했다. 같은 해 8월17일 상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1875~1965) 박사를 축하하기 위해 한인 1천200명이 다시 자유극장에 모였다. 1920년 3월1일 아침 한인 1천여 명이 또 다시 극장으로 모여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했다. 1천600석 규모였던 자유극장 터는 차이나타운 쪽에 있는 한 건물 자리로 추정되는데, 맞은 편이라는 설도 있다. 자유극장 터 역시 한인들의 민족적 규합 장소지만, 이를 알릴 만한 표지가 없다.일제강점기 하와이 동포만 결속한 게 아니라 북미와 중남미는 물론 유럽 곳곳으로 퍼져 있는 동포까지도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장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진흙 속에 박힌 시신을 꺼내는 일을 한인들이 많이 했는데, 그들도 급여 일부를 떼어서 독립 자금에 보탰다"고 말했다.하와이 한인 동포는 관광업, 운수업, 자영업 등에 주로 종사하고 있다. 이민 1~2세대가 많이 일했던 사탕수수·파인애플 농장은 1970년대 이후 쇠퇴했다. 현재 한인들은 호놀룰루 키아모쿠 지역에서 가장 많이 살고 있다. 키아모쿠 한복판엔 2011년 명명해 한인사회가 관리하는 인하공원(인천-하와이공원)이 있어 인천과 하와이의 인연을 되새기게 한다. 호놀룰루에서 여행업에 종

  • [이민 120년, 역경을 헤친 코리안 개척기·(上)] 땅 밟자마자 소·말처럼 원시림 개간… '사진 신부' 700여명 중매결혼

    [이민 120년, 역경을 헤친 코리안 개척기·(上)] 땅 밟자마자 소·말처럼 원시림 개간… '사진 신부' 700여명 중매결혼 지면기사

    우리나라 최초 공식 이민은 1902년 12월부터 1905년 7월까지 이어진 미국 하와이 노동 이민이다. 지금 하와이는 세계 최대 휴양지로 불리고 있지만, 근대 한국의 '집단 노동 이민'과 '재외 한인사회 형성 과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역사 현장이기도 하다.1902~1905년 하와이로 이주한 한국인 7천215명 중 출신지를 기록한 3천366명의 출신 지역을 보면 인천·경기 주민이 906명(27%)으로 가장 많았고 평안도 696명(21%), 경상도 677명(20%), 전라도 335명(10%), 황해도 253명(7%), 함경도 196명(6%) 순으로 나타났다. 서울, 인천, 수원 등 도시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또 성인 남성 비율이 87%로 압도적으로 높았다.1902~1905년 이주자 도시출신 많아전기·상수도 없는 집단거주지 생활 초창기 하와이 이민자들의 생활은 어땠을까. 하와이 이민 2세인 신성려 미주리대 교수가 1세대 이민자들의 구술을 모아 1988년 출간한 '하와이 이민약사'를 보면, 1902~1905년 이민 1세대들은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하자마자 시내를 구경할 사이 없이 곧바로 사탕수수 농장으로 파견됐다. 새벽부터 농장에 나가 칼이나 도끼를 들고 원시림을 잘라 사탕수수를 심었다. 1년에 한 번 사탕수수를 수확했는데, 수확량은 1에이커(4천46㎡)당 819t이었다. 계약상 하루 노동 시간은 10시간이었으나, 보통 12~14시간씩 일했다고 한다. 한 달 월급은 당시 16달러 정도로, 하루 세끼 먹을 수조차 없는 수준이었다. 신성려 교수는 이민 노동자들이 "소나 말 같이 채찍질 당했다"고 이민 1세대 구술을 통해 전했다.남성 이민자들은 이른바 '사진 신부'들과 가정을 꾸렸다. 한국에서 중매쟁이를 통해 남편 될 사람의 사진만 보고 하와이로 온 한인 여성들은 700여 명에 달했다. 1904년 황해도 해주에서 하와이로 건너온 16세 여성 유성기씨는 75세 남성과 결혼했는데, 애초 남편 나이를 40세로 알고 왔다고 한다. 유씨는 22세에 남편을 여의고 이국땅에서 홀로 3남매를 키웠다.하와

  • [이민 120년, 역경을 헤친 코리안 개척기·(上)] 표지석 하나 없는 부두… '120년 한인사' 시작은 미미했다

    [이민 120년, 역경을 헤친 코리안 개척기·(上)] 표지석 하나 없는 부두… '120년 한인사' 시작은 미미했다 지면기사

    지난 21일 오후(현지 시간)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항 7번 선착장은 주정부 청사(Hawaii State Capital)가 멀지 않은 시내 한복판임에도 찾는 이 없이 고요했다.이곳은 120년 전 인천 제물포항을 떠난 우리나라 최초의 합법 이민자들이 첫발을 내디딘 한국 이민사의 시작점이다. 인근에 있는 호놀룰루항의 명소 알로하 타워(Aloha Tower)에는 사람이 꽤 몰리지만, 7번 선착장은 하와이에서 흔한 부둣가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듯 존재감이 없다.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 관장은 "현재 7번 선착장은 1903년 당시와 비슷한 모습으로 보인다"고 했다. 하와이 주요 사회 구성원인 한인들의 이민 시작점을 알리는 표지 하나 없는 게 아쉬웠다.하와이 호놀룰루항 7번 선착장1903년 최초 이민자 86명 첫발섬 북단 농장서 고된 노동 투입 1902년 12월22일 제물포항에서 출발한 한국인 노동 이민자는 121명이다. 이 가운데 제물포 67명, 부평 10명, 강화·교동 9명, 그 외 경기 지역 3명 등 73.5%가 현재 인천·경기 주민이었다. 일본에서 신체검사에 합격한 102명이 1903년 1월13일 미국령 하와이 호놀룰루항 7번 선착장에 도착했다. 이 중 질병에 걸린 사람을 제외한 86명이 최종적으로 하와이에 남게 됐다.최초 이민자 86명은 선착장에서 걷거나 전차를 타고 오아후역으로 가서 협궤열차를 타고 섬 북단 와이알루아 농장 캠프(주거지)에 도착했다. 농장에 도착하자마자 하루 69~70센트씩 받으며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이후 1905년까지 64차례에 걸쳐 총 7천215명이 하와이로 이주해 대부분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낯선 이국땅의 삶을 일궈냈다. 노동 계약을 마친 일부 노동자는 미국 본토로도 진출했다.이날 찾은 호놀룰루 차이나타운 내 하와이 한인합성협회 회관 건물터는 현재 카페로 바뀌어 그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1905년까지 64회·7215명 이주2년뒤 통합 한인대표단체 설립시련 속에서도 조국 독립 후원1907년 9월2일 하와이에 있던 24개 한인 단체 대표들은 발기인 대회를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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