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감학원 특별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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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특별기획 PART2·(2)] 형제복지원에서 선감학원으로… 국가의 '끔찍한 돌봄' 지면기사
'우울, 고독, 생활고'.하수명씨의 쉰 아홉 인생을 압축하면 온갖 부정의 단어들로 얼룩진다. 수명씨에겐 지우고 싶지만 지울 수 없고,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5년'이 있다. 11살에 부산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다 전원돼 13살에 안산 선감학원에 수용됐던 그 5년이다. 5년은 59년 삶을 우울에 시달리게 만들었고 평생 외톨이로 고독하게 했으며, 생활고를 겪게 했다.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에 수감된 기억들에서 좀 벗어나야 하는데, 그 생각들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아요. 그때 감정과 생각에 사로잡혀있으니 밝은 생각을 하기 힘들고요. 거기에서부터 내 인생 모든 게 이렇게 (잘못)됐다는 생각도 많이 듭니다."붙잡혀가 유년기 5년간 수용 생활탈출후 수십년간 고통스러운 기억 수명씨는 그저 '남에게 민폐 안 끼치고 깨끗이 죽는 것'이 남은 인생의 계획이라고 말했다. 두 곳에서 있었던 기억이 떠오르는 매 순간 그의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랜 시간 기억의 고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서 이제는 헤어나오기 힘들 수준의 우울증을 겪고 있다. 가족도 없고, 왕래하는 친구도 없이 홀로 살아온 수명씨는 '당장 먹고 살기 위해' 일감을 찾아다니는 게 인생의 전부다. "선감학원 탈출하고 3일 동안 동인천역에서 먹을 거 하나 없이 노숙했어요. 일할 곳이 없어 전전긍긍하다 한 식당에서 절 받아줬고 20년 동안 그 식당에서 일했죠. 식당에서 더 일할 수 없게 되자 기술이나 교육이 필요 없는 일거리를 찾아 서울, 성남, 충청남도 등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어요. 그렇게 막노동만 5년정도 하다 지금은 구두닦이로 20년째 하고 있습니다."최근까지 민증도 못 만들어 생활고국가·지자체 도움 없이 심신 지쳐 수명씨는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에 있으면서 제대로 배우고 성장하지 못했다. 선감학원을 탈출한 후에도 교육을 받지 못했고 국가, 지자체의 보살핌을 받지도 못했다. 수명씨는 주민등록증도 만들지 못한 채 쉰살이 넘도록 살았다. 취업을 하고 싶어 주민등록증을 만들려 행정기관을 찾아도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평생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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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특별기획 PART2·(1)] 우린 생존만이 숙제였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동창' 지면기사
우리는 확인하고 싶었다. 선감도에 소년을 가두고, 선감학원을 운영하며 소년의 인권을 유린한 주체가 누구인지. 경기도가 보유한 선감학원의 기록을 하나하나 끄집어내 우리는 그것이 경기도, 나아가 국가가 자행한 일임을 두 눈으로 명확히 확인했다.우리는 들어야 했다. 지옥도라 불린, 그 섬에 갇혀 유년을 보내야 했던 소년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온전하지 못한 삶의 원류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중년이 된 소년들에게 직접 들어야 했다.'지옥도'에서 유년 보낸 사람들중년·노년이 되어도 불안·공포 선감학원 두번째 이야기, '나는 부랑아가 아닙니다'는 그렇게 기획됐다. 소년들은 말한다. 나는 부랑아가 아니었다고. 가난했지만 함께 온기를 나누는 가족이 있었고 나이에 맞게 성장하고 교육받을 권리가 있었다. 선감학원에 가지 않았다면 지극히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당신들과 같았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다.소년들의 유년을 송두리째 흔든 선감학원의 기억은 청년이 되고, 중년이 되고, 노인이 되어서도 그들을 불안과 공포에 잠식당하게 했다. 부랑아가 아니었지만, 부랑아가 되었고 지금도 부랑아로, 정착하지 못한 채 부유하듯 살아가는 그들은 '선감학원 피해자'들이다.우리가 만난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국가가 나를 부랑아로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부랑아가 됐고, 부랑아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특히 피해자들은 지옥과 같던 그 날들을 입 밖에 꺼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이들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고, 경기도가 공식적인 사과에 나서면서 그간 억눌러왔던 마음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道 사과후 억눌러왔던 감정 토로두 형제, 숨겨 온 이야기 들려줘 그렇게 진성·진동(가명) 형제를 만났다. 세간의 눈초리가 무서워 숨어 살아야 했던 형과, 다 잊고 잘 살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야 했던 동생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묻고 싶다.부랑아의 기준이 무엇이고 부랑아임을 확신했던 그 이유를. '공적' 임무를 띤 공무원들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 거리에서 돈을 벌고, 집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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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특별기획 PART2·(1)] 모진 역랑에 쫓기듯 살아온 삶… "국가폭력 분명히 알려지길" 지면기사
짧게 자른 머리에 깔끔히 정리한 눈썹과 수염, 부드러운 이미지를 더한 뿔테 안경까지. 선감학원 피해자 진동(60·가명)씨의 첫인상에서 지난날 고통의 흔적은 쉬이 찾아볼 수 없었다. 잘 정돈된 외형만큼 그의 표정과 말투에는 차분함이 느껴졌다. 지난 5일 안성 소재 자택을 방문한 취재진에게 오렌지 주스를 내어주던 그의 모습은 사뭇 여유로워 보였다. 그러나 부엌 식탁에 마주 앉은 진동씨의 호흡은 곧 가빠졌다. 여덟 살 나이에 선감도로 끌려갔던 당시 상황을 이야기해달라고 질문한 직후였다. 고요했던 그의 마음이 요동쳤다. 연신 눈물을 훔치던 진동씨의 두껍고 거친 손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모진 역랑 앞에 늘 쫓기듯이 살았을 그의 삶이 그려졌다.진동씨는 선감학원과 관련한 모든 기억을 봉인한 채 살아왔다. 그는 기억의 공간 한편에 크고 단단한 벽을 둘렀다. 선감학원에서의 참혹했던 기억은 그 안에 전부 담았다. 스스로 잊고 살면 자신이 선감학원 출신이란 사실을 아무도 모를 거라 여겼다. 국가가 찍은 부랑아란 낙인을 숨길 그만의 방법이었다.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선감학원이란 존재를 애써 잊고 살던 진동씨에게 2년 전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처는 선감학원사건 피해자 신고센터. 과거에 당한 피해를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떼 센터에 접수하라는 안내전화였다. 기억의 벽이 일순간 허물어진 순간이었다."센터 전화를 회사에서 받았는데, 하도 눈물이 나서 사무실에는 들어가지도 못했어요. 그날은 주차장 한편에 앉아 울다가 그냥 퇴근했어요. 그 이후로 운전을 하다가도, 혼자 앉아 있다가도 아무 이유 없이 계속 우는 거예요. 사람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린 그런 기분이었어요."참혹했던 기억 잊고 40년 넘는 세월 보내보호자·집 있어도 수원역서 잡혀 끌려가부실한 끼니 참고 황토 먹으며 5년 버텨 두 살 터울 형인 진성(62·가명)씨와 1970년 선감학원에 강제 입소하게 된 진동씨는 분명 부랑아가 아니었다. 삼형제는 당시 화성군 봉담면 내리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지냈다. 가정사 문제로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지만, 형제의 신원을 보장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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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특별기획 PART2·(1)] 부랑으로 떠밀린 형제… 고통의 불은 아직 환하다 지면기사
창고에서 일주일 동안 갇혀 있었어요.지금도 불을 켜지 않으면 불안해서 잘 수가 없어요.진성(62·가명)씨는 살면서 잠을 제대로 이룬 날이 없다. 적어도 그가 기억하는 날 중에는 편안히 잠을 자 본적이 없다."견디다 못해 도망을 갔다가 붙잡혀서 창문도 없는 창고에서 일주일 동안 갇혀 있었어요. 지금도 불을 켜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고 깜빡 잠이 들어도 자꾸 깨고 (괴롭힘을 당하는) 꿈을 꾸고.. "그는 온 방을 환하게 불을 켜야만 하고, 누가 등 뒤에 있으면 불안해서 잠을 자지 못한다. "결혼을 하고서도 집사람이 제 등 뒤에서 잠을 못 자요. 불도 환하게 켜 놔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예 거실에 나와서 불을 켜놓고 잡니다. 그래도 늘 자다가 소리를 지르고 울기도 해서.. 가족들이 너무 힘들죠."그래서 그는 약의 기운을 빌려야만 한다. 아주 오랫동안 신경안정제, 수면제 등을 처방받아 복용하고 있다. "저녁마다 약을 먹어요. 그래야 그나마 토막잠이라도 자니까.. 약 기운이 떨어지면 힘이 드니까 몸을 계속 괴롭혀요. 너무 피곤해서 쓰러질 때까지 뭐라도 계속 해요. 그래서 피곤하면 그때 약을 먹고 잡니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 견딜 수가 없어요.."잠을 이루지 못하는 지금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흰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남자는 눈물을 쏟았다. 그 눈물이 몹시 서럽다. 흡사 50년 전 그 날의 어린아이 같았다. 하루도 그 날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그는 말했다."직장생활이 무척 힘들었어요. 사람들이 나를 두고 수군대는 것 같고.. 그런 기분이 계속 들어 견디질 못했어요. 제일 길게 직장생활을 한 게 6~7개월 정도. 도저히 직장은 못다닐 것 같아 조경을 배워 조경사로 일했는데 나이가 들고 힘이 들어 그만둔 후로는 대부분 운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주로 화물트럭이나 심야버스 같이 밤에 운전하는 일이요. 어차피 밤에 잠을 잘 못 자니까 그게 차라리 나았어요. 혼자서 조용히 일할 수 있고.. 그나마도 지금은 코로나로 일거리가 끊겼지만.."사람들이 수군대는 것 같아직장생활 길게 한게 6~7개월어차피 못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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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특별기획·(下)] 단속만 집중 '거주지 파악' 부실… 장례·애도 없이 시신 암매장 지면기사
절차도, 책임도 없는 주먹구구식 암매장 선감학원 사망 아동들은 강제 노역과 폭력에 노출돼 병에 걸려 죽거나 탈출을 감행했다 실패해 '익사'했다. 경인일보가 확보한 '선감학원 퇴원사유' 자료에 따르면 '사망'이라 기재된 아이들은 총 24명이었지만, 피해자와 근무자 진술을 통해 이보다 훨씬 많은 최소 수백명의 아동들이 선감도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파악됐다. 사망 24명 적혔지만 수백명은 될듯질병·탈출 생 마감땐 친구 손에 묻혀 현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150구 이상 묻혀있다 판단해 유해발굴을 추진 중인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공동묘역 부지는 당시 원생 사이에서 '공동묘지'라 불렸던 언덕이다. 죽은 아이들은 어떠한 장례 절차나 죽음을 애도하는 의식도 없이 이곳에 묻혔다."도망간 지 열흘만에 시신으로 떠밀려온 동기가 있었어요. 공동묘지에 그 친구가 묻혔는데, 장마가 오거나 바람만 엄청 세게 불어도 묘지 흙이 다 쓸려 내려 시체들이 다 밖으로 나와 버렸어요."(1966년 10월 수원 일대 경찰의 부랑아 단속에 걸려 선감학원에 입소된 이모씨)암매장은 책임지는 이 없이 아이들 손에 맡겨졌다. 지옥 같은 선감도 안에서 같은 날 잡혀들어와 '동기'라는 연대를 쌓고, 같은 방을 쓰며 동고동락한 '친구'가 시신이 돼 돌아와도 슬퍼하거나 거부도 하지 못한 채 경기도 공무원의 지시에 따라 삽을 들고 나서야 했다.죽은 친구의 시신을 아무렇게나 땅에 파묻도록 방치한 국가가 원망스럽고, 이 시신을 묘지까지 들고 날라 땅에 파묻는 자신이 마치 공범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두려움과 친구의 죽음을 슬퍼할 틈도 없이 새로운 아이가 죽어 돌아왔다. 그나마 해줄 수 있는 건 산에 핀 꽃 한송이 꺾어 놓아주는 일 뿐이다."선생님(직원)이 불러 따라갔더니, 탈출한 지 2주 만에 죽은 원아 시신을 저한테 묻으라 했어요. 묻을 때 경찰이나 의사는 없었어요. 그냥 나를 부르면 '또 묻으러 가는구나' 하고, 그냥 열심히 묻었어요."(1956년 9살의 나이로 구두닦이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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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특별기획·(下)] '목숨 건 탈출' 비료 포대 쓰고 갯벌로 지면기사
어둑한 밤, 비료 포대를 뒤집어쓴 아이들이 하수구 통로에 쪼그려 앉아있다. 눈앞엔 바닷물이 빠진 갯벌이 펼쳐진다. 숨죽여 통로를 빠져나온 아이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펄로 내달린다. 목적지는 선감도에서 1㎞ 가량 떨어진 어섬.갯벌에 다다르자 아이들이 일제히 엎드린다. 아이들 배에 비료포대와 차가운 펄이 맞닿는다. 손으로 질퍽한 땅을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간다. 이대로 800m만 가면 된다. 달음질로는 하루에도 몇 번을 오갈 수 있는 거리. 아이들의 팔이 노를 젓는 것처럼 바삐 움직인다.그러나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는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니 체력도 금세 동난다. 어느새 물이 다시 밀려든다.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서서히 물에 잠긴다. 훈육 선생님의 호출이다. 방문 너머 들리는 목소리로 보아 단단히 화가 난 듯하다. 불호령이 떨어지자마자 기숙사에 사는 원생 100여명이 복도 양쪽으로 도열한다. 옷소매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애들 몇 명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복도 끝에 서 있다. 때리란다. 선감도 밖으로 탈출을 시도했던 놈들이니 흠씬 두들겨 맞아야 한단다.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 대가는 지독한 구타다. 국가가 묵인하고 경기도가 만든 '부랑아들'의 꿈은 지옥 '선감도'를 탈출하는 것이다. 죽음과 폭력의 두려움도 이들의 탈출 시도를 막지 못했다. 퇴원 사유 17.8%·834명 '탈출'확인 가능 익사자만 7명 달해대부도나 어섬방면으로 시도실패후 돌아오면 지독한 구타 진실화해위원회가 선감학원 원아대장 4천689건에 기재된 퇴원 사유를 분석한 결과, 이 중 17.8%(834명)가 섬을 탈출해 빠져나갔다. 탈출하는 아이들은 목숨을 걸어야 했다. 원아대장으로 확인 가능한 선감학원 사망자는 모두 24명인데, 이 중 7명(29.1%)이 몰래 섬을 탈출하다 물에 빠져 숨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아이들은 주로 대부도나 어섬 방면으로 탈출을 시도했다고 한다. 선감도와 가장 가까웠던 대부도는 익사할 위험은 적었으나 주민들의 신고로 다시 붙잡혀 돌아갈 가능성이 높았다. 어섬은 경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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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특별기획·(中)] 무임금 착취에 일 못하면 뭇매… 고용위탁 도망치면 '수배령' 지면기사
도유재산 관리기관에 수용돼 국가의 강제노역 시달린 아동들 선감학원에 마구잡이로 수용된 아동들은 당초 부랑아 갱생·교육이라는 목적과 달리, 각종 노역에 동원되며 '노동 착취'에 시달렸다. 경인일보가 확보한 당시 선감학원 근무자와 피해자 진술, 공문서 등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학교에 다녔던 아동은 학교가 끝난 후부터, 학교에 다니지 않았던 아동은 종일 일을 한 것인데, 임금을 받지 못한 것은 물론 일을 못 하면 폭력이 가해졌다."…그 많은 농사를 짓고 작물을 키우고 했는데, 우리한테 이만큼도 준 거 없고 노임(임금)을 준 것도 없고 나온 물건을 우리에게 먹여준 적도 없고 그걸 다 어떻게 했느냐 말이지요.…내 품(일)을 못하면 저녁에 기합받고 얻어맞고 해야 돼요…무릎 같은데 상처 많은 사람은 다 조인트 맞은 거야"(1966년 선감학원에 수용된 피해자 녹취록)부랑아 갱생 목적과 달리 노역 동원당시 근무자·피해자 진술·공문 확인생산품 팔아 인건비 아닌 운영비로 경기도로 관할기관이 넘어온 이후 1957년 제정된 '경기도 선감학원 조례'는 선감학원의 임무를 이렇게 규정했다. 부랑아 수용보호, 자립 생활에 필요한 1인 1기의 교육지도, 농지 및 염전관리, 기타 학원 운영상 필요한 사항. 1963년 해당 조례가 전부 개정되면서 선감학원 업무는 부랑아의 수용구호, 부랑아의 지도 및 직업보도 등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당시 선감학원에서 근무했던 이들의 진술을 보면 아동들은 조례에 규정된 것과는 다르게 제대로 된 직업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1980년 경기도 부녀아동과의 선감학원 위탁 운영 계획을 보면 선감학원을 '도유재산 관리기관'으로 규정했다. 겨울에는 주로 원생복 수선을 했습니다그러다 보니 취지와는 다르게직업으로 연결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어요직업으로 연결되려면 실습이 있어야 하는데다양한 실습 거리가 없었어요(1965년~1967년 선감학원 재봉반 담당교사) 이렇게 종일 아동들이 일해서 생산된 물품을 판 돈은 아동들의 인건비가 아닌, 선감학원 운영비로 쓰였다. 당시 선감학원 예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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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특별기획·(中)] "개밥도 이렇게는…" 배곯은 아이들, 짐승처럼 강제노역 지면기사
국가가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국민 보호'다. 모든 역사를 통틀어 자국민을 보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 국가는 가장 큰 위기에 봉착했다.선감학원의 비극은 여기서 비롯된다.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선감학원이 대한민국에서도 이어져 온 단 하나의 연결고리는 '부랑아'. 자국민을 보호할 국가 자체가 부재했던 일제시기와 자국민 보호의 의무를 저버린 대한민국은 '부랑아처럼 보인다'는 한가지 이유로 아동의 인권을 유린했다.이 삐뚤어진 인식은 경기도가 선감학원을 운영하는 기저에 깊숙이 뿌리내려졌다. 먹을 것, 입을 것, 잘 것 어느 것 하나 성한 것이 없었고 고된 노역과 폭행이 만연했으며 제대로 된 교육도 없어 미래를 꿈꿀 수도 없었다. 쓰다 버리고, 없어져도 상관없다고 여겼다.운영의 주체가 경기도지만 당시 대통령이 임명한 경기도지사가 관할한 경기도는 국가기관이었다. 결국 대한민국이 자국민인 선감학원 아동에게 그랬다. 위의 사진은 당시 선감학원 아동들이 제공받은 급식을 재현한 모습이다. 선감학원 피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최대한 비슷하게 재구성했다. 주식은 강냉이밥이거나 꽁보리밥이었다. 낡아빠진 양은그릇에 약 3분의1 담은 강냉이밥이나 꽁보리밥에, 건더기가 거의 없는 소금만 뿌린 국을 반찬으로 주었다. 그나마 경기도지사가 시찰을 오거나 선감학원 창립기념일 등 특별한 날에 고깃국이 나왔는데 그마저도 비계만 넣고 끓여 먹고 탈이 나는 일도 있었다고 했다. 먹을 것 없어 쥐·뱀·개구리 등 취식"급식표 현실과 달라" 근무자 증언 "강냉이랑 통밀을 제대로 갈지 않아 먹기도 힘들었어요. 국은 보통 굉장히 묽고 아무 맛도 안났는데, 모래가 섞여 있어 잘 흔들어 윗 부분만 마시는 꼴이었습니다. 개밥도 이렇게는 안 줬을 거예요.(1954년 14살 입소해 1959년 19살에 퇴소한 최석규씨)""밥과 반찬 양이 원체 적어서 중학생쯤 되는 큰 애들이 초등학생 정도 애들 것을 빼앗아 먹기도 했어요. 힘이 없으면 그냥 당하는 겁니다. 넉넉했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인데, 초등학생 애들도 서네번 떠먹으면 식사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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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특별기획·(上)] 공문서 확인결과 '허술함' 드러나 지면기사
경기도의 무분별한 부랑아 단속경인일보는 경기도의 부랑아 단속이 얼마만큼 허술하게 이뤄졌는지 보여줄 수 있는 당시 공문서를 확보했다. 해당 문서에는 도가 부랑아라는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잘 드러난다. 도는 1976년 7월6일부터 8일까지 사흘간 시군 전 지역을 대상으로 부랑아 단속에 나섰다. 이에 앞서 도는 각 시군에 '부랑아 단속'이란 제목의 공문을 보냈다. 부랑아 단속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도시 환경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실시하고 있는 부랑아 및 비행소년 선도 사업을 추진하여 많은 성과를 거양한 바 있으나 아직도 거리를 배회하거나 걸식하는 아동이 근절되지 않고 있어 다음과 같이 지시하니 자체 계획을 보강하여 단속 및 선도에 철저를 기하도록 할 것."당시 도가 부랑아를 대대적으로 붙잡아 들인 이유는 다름 아닌 도시 미관을 위해서였다. 집이 없는 아이를 보호하거나, 가출한 소년을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도의 시각에서 부랑아는 그저 도시를 더럽히는 존재였을 뿐이다.도시 미관 이유로 대대적 '청소''껌팔이·구두닦이' 잣대 자의적 도는 부랑아 단속을 1년 내내 실시했을뿐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는 '특별 단속'까지 벌이며 길거리 청소에 열을 올렸다. 실제로 도는 1976년 5월4일부터 19일간 '유원지 및 관광지 일원'에서 부랑아 특별 단속을 진행했다. 이 때 각 지역에서 붙잡힌 부랑아들은 월 2회 도로 인계돼 '선감학원'으로 이송됐다.단속 대상은 '부랑아 껌팔이 구두닦이 및 거리요보호아동'이었다. 부랑아를 단속하는 공무원들은 그러나 부랑아를 판단하는 기준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단속을 지시하는 공문에 적혀 있지 않았고, 무엇보다 아동복리법이나 동법 시행령 또는 시행규칙도 부랑아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명시하지 않았다. 이는 부랑아를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경기도 선감학원 조례' 역시 마찬가지였다.게다가 도는 껌팔이나 구두닦이 등 가정의 생계를 위해 길거리에서 돈을 벌던 아이들 또한 부랑아로 싸잡아 단속했다. 부랑아에 대한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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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특별기획·(上)] 영문도 모른채 끌려간 아이들 지면기사
위에 여러 아이의 사진이 있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와 선감도에 수용됐던 원생의 얼굴이 섞여 있다. 누가 부랑아인가. 외형만 보고선 누구도 섣불리 구분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그럼에도 경기도는 길가에서 쓰레기를 줍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길거리 아이들을 무작위로 수집했다. 근거는 허무할 정도로 빈약했다. 그저 부랑아처럼 보여서.선감학원 피해자들은 누명을 썼다. 돌아갈 집이 있고, 보호받을 부모가 있는 데도 '부랑아'로 낙인찍히며 선감도란 이름의 섬에 영문도 모른 채 갇혔다. 하물며 소나 돼지의 등급을 나눌 때도 특정한 기준을 적용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부랑아를 판단하는 기준만큼은 어디에도 없었다. 법률에도, 조례에도 부랑아란 용어를 따로 정의하고 있지 않았다. 경기도는 1982년까지 40년 동안 8~18세의 부랑아 4천689명을 지옥도라 불리는 선감학원으로 보냈다.1982년까지 40년 동안 8~18세4689명 '지옥도' 보낸 경기도'그저 그렇게 보여서'…특별한 이유·근거 없이 무작위 수집 이곳에 수용된 원생들은 자신의 처지를 납득할 수 없었다. 집과 부모가 그리웠을 테고, 폭력과 강제노역으로 얼룩진 선감학원 시설에 쉬이 적응하지 못했다. 원생 일부는 목숨을 걸고 바다를 헤엄쳐 섬 밖으로 빠져나가기 위한 탈출을 감행했고,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원생들이 속출했다. 대개는 제대로 된 묏자리도 없이 아무렇게나 묻혔고, 수십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러서야 망자들의 흔적을 찾기 위한 발굴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선감학원은 누구의 책임인가.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지만 가슴 깊이에 묻어왔다. 시대 탓을 했고 먹고 사는 일을 핑계댔다. 그렇게 40년이 흘렀다. 이제 명료하게 다시 묻는다. 선감학원은 누구의 잘못인가. → 관련기사 3면([선감학원 특별기획·(上)] 공문서 확인결과 '허술함' 드러나) /특별취재팀※선감학원 특별취재팀정치부 공지영 차장, 신현정·고건 기자, 사회교육부 배재흥·김동한 기자 ▶디지털 스페셜 바로가기 (사진을 클릭하세요!)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와 선감도에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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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진실을 묻다] 단속이라는 사형선고 '경기도가 만든 지옥'
위에 여러 아이의 사진이 있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와 선감도에 수용됐던 원생의 얼굴이 섞여 있다. 누가 부랑아인가. 외형만 보고선 누구도 섣불리 구분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경기도는 길가에서 쓰레기를 줍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길거리 아이들을 무작위로 수집했다. 근거는 허무할정도로 빈약했다. 그저 부랑아처럼 보여서.선감학원 피해자들은 누명을 썼다. 돌아갈 집이 있고, 보호받을 부모가 있는 데도 '부랑아'로 낙인찍히며 선감도란 이름의 섬에 영문도 모른 채 갇혔다. 하물며 소나 돼지의 등급을 나눌 때도 특정한 기준을 적용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부랑아를 판단하는 기준만큼은 어디에도 없었다. 법률에도, 조례에도 부랑아란 용어를 따로 정의하고 있지 않았다. 경기도는 1982년까지 40년 동안 8~18세 나이의 부랑아 4천689명을 지옥도라 불리는 선감학원으로 보냈다.이곳에 수용된 원생들은 자신의 처지를 납득할 수 없었다. 집과 부모가 그리웠을 테고, 폭력과 강제노역으로 얼룩진 선감학원 시설에 쉬이 적응하지 못했다. 원생 일부는 목숨을 걸고 바다를 헤엄쳐 섬 밖으로 빠져나가기 위한 탈출을 감행했고,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원생들이 속출했다. 대개는 제대로 된 묏자리 없이 아무렇게나 묻혔고, 수십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러서야 망자들의 흔적을 찾기 위한 발굴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선감학원은 누구의 책임인가.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지만 가슴 깊이에 묻어왔다. 시대 탓을 했고 먹고 사는 일을 핑계댔다. 그렇게 40년이 흘렀다. 이제 명료하게 다시 묻는다. 선감학원은 누구의 잘못인가.#1 경기도의 무분별한 부랑아 단속 경기도, 1976년부터 사흘간 시군 전지역 단속특별취재팀, 당시 공문서 확보해 분석한 결과부랑아라는 존재 인식… 단속의 허술함 드러나대대적으로 붙잡아 들인 이유 '도시 미관' 위해 경인일보는 경기도의 부랑아 단속이 얼마만큼 허술하게 이뤄졌는지 보여줄 수 있는 당시 공문서를 확보했다. 해당 문서에는 도가 부랑아라는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잘 드러난다.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