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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언어는 쉬워야 한다! 지면기사
[경인일보=]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소득 수준에 따라 부동산대출액을 제한하는 DTI, 즉 총부채상환비율 규제가 은행권에서 제2금융권으로 확대 시행된다고 한다. 잘 들어보니 소득을 기준으로 부동산을 구입할 때 대출받을 수 있는 금액을 제한한다는 얘기인 것 같다. 문제는 '총부채상환비율'이라고 하면 되는데 DTI라는 말을 꼭 앞에 갖다 붙인다는 점이다. LTV는 만기 10년 이하 또는 만기 10년 초과ㆍ담보가액 6억원 초과 아파트에 대해 현행 60%이내인 LTV를 50%이내로 강화한단다. 역시 문제는 LTV이다. LTV란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해줄 때 담보물의 가격에 대비하여 인정해주는 금액의 비율을 말한다. 즉 '주택담보대출인정비율'이다. 이것을 50%로 강화한다는 것은 앞으로는 돈을 덜 빌려주겠다는 얘기이다. 글쓴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총부채상환비율 규제 확대나 주택담보대출인정비율을 강화하는 것이 옳다든가 그르다든가 하는 얘기가 아니다. 그런 문제에는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주장할 것도 없다. 문제는 뉴스를 전하는 기자의 보도 태도이다. DTI라고 먼저 말하고 나서 즉 총부채상환비율 규제가 확대된다고 말하는 방식은 옳지 않다. DTI로 운을 뗄 필요 없이 그냥 총부채상환비율 규제가 확대된다고 하면 되고, LTV를 언급할 것 없이 주택담보대출인정비율이라고 하면 된다. 총부채상환비율과 주택담보대출인정비율이라는 말을 줄여 쓰고 싶은 심리가 작동했을 수도 있다. 그런 것이라면 '총상비'라든가 '대출인비' 하는 식으로 약어를 만들어 써야 한다. 그런데 이 두 말은 약어를 만들기 어려울 것 같다. '총상비', '대출인비'라고 했을 때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DTI와 LTV를 쓰는 것일까? 하지만 DTI와 LTV는 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DTI'라고 하고 다시 '즉 총부채상환비율'이라고 말하는 식의 보도 태도는 말하는 시간을 절약하는 것도 아니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불필요한 외래어 남발은 우리말의 순수성을 해칠 뿐만 아니라 우리말을 점점 어렵게 만든다. 다소 복잡하고 장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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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곳에 관한 단상 지면기사
[경인일보=]내가 도심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초등학교 운동장이다. 저녁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쯤 되면 나는 종종 그곳에 있는 나무의자에 앉아보곤 한다. 꽃밭도 나무도 교실도 다 운동장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다. 그 위로 운동장만한 밤하늘이 넓게 펼쳐져 있다. 이 텅 빈 공간이 울긋불긋한 꽃밭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공터가 사라진 지 오래다. 도시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원도 너무 많은 것들로 채워져 있다. 꽃밭과 분수, 놀이기구, 별로 감동스럽지 않은 조각상들. 공공의 장소엔 언제나 볼거리를 늘어놓아야 한다는 발상일 것이다. 지난 봄 구청에서 동네에 있는 조그마한 놀이터를 새로 정비한 적이 있다. 이것저것 기구들을 들여놓고 나무도 다시 심어 놓았는데 좁은 공간에 너무 많은 것을 설치하다보니 정작 아이들이 뛰어다닐 공간은 더 작아져버렸다. 뛰어다니던 아이들이 지금은 미끄럼틀 아래 모여 쪼그리고 앉아 논다.없는 것이 없는 서울. 채우고 교체하고 다시 설치하고 꾸미기를 반복하면서 대부분의 공간은 늘 무언가로 가득하다. 조용한 카페조차 음악을 틀어놓지 않은 곳이 없다. 나는 음악을 좋아하지만 더러는 음악을 틀어놓지 않은 카페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한다. 빈 공간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 도시의 생리이기도 하지만 뭐든 가득 채운다고 해서 반드시 풍요로운 것은 아니다.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갖는 미덕이 있다. 우리의 감각을 유혹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비로소 마음은 마음을 향하게 된다. '사색'하는 인간의 시간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사색의 시간은 적막과 고요를 요구한다. 경지에 이른 자가 아니라면 소란 속에서 제대로 생각에 몰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나는 무리를 해서라도 일주일에 하루 혼자 평일 산행을 감행하곤 하는데 그것은 빈 길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말(言語)을 버리고 싶은 욕구에서이다. 나는 등정주의자도 아니고 무심을 즐기는 산책주의자도 아니다. 내가 하루 종일 산길을 천천히 오르내리며 하는 것은 무수한 잡생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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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힘이 연금술이다 지면기사
[경인일보=]안양 평촌에서 서울 태릉까지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시간만 1시간이 걸렸고, 걷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편도 1시간30분이나 걸리면서 출근 또는 퇴근을 하였다.처음에는 태릉에 있는 직장으로 발령낸 사람들을 원망하기도 하였지만 곧 왕복 2시간이라는 독서 시간을 확보한 것이라고 마음먹고 2년6개월 동안 수많은 책을 읽었고, 그 때 읽었던 책들이 지금의 내 생각을 형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 책들 중에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는 처음 읽을 때에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스페인의 평범한 양치기 청년 산티아고가 어떤 노인의 제안에 따라 이집트 피라미드에 묻혀 있는 보물을 찾으러 갔다가 결국 보물은 고향무화과 나무 밑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온다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이 '연금술사'라는 제목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언뜻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게만 내 머리 속에 담아져 있던 중 '연금술사'라는 제목을 단 이유를 깨닫는 계기가 있었다. 사법연수원에 근무할 때 사법연수생들과 함께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그 일정 중에 한라산 백록담을 등반하게 되었다. 평소 책과 연습기록 속에만 파묻혀 있었는지 여자 연수생들 중 몇몇이 백록담 정상을 3㎞ 정도 앞두고 주저앉아 버렸다.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겠다고 좌절하는 여자 연수생들을 설득하는 말을 찾던 중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여기서 좌절하면 다시는 백록담을 구경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다음에 또 오더라도 이쯤에서 또 주저앉아 버리지 않겠느냐. 정말 더 이상의 방법이 없다고 생각할 때 한번 더 힘을 내어서 앞으로 나가려는 노력이 자신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연금술이다."그러면서 여자연수생들을 뒤에서 재촉하여 결국 모두 백록담에 올라갔고 그때 여자연수생들은 역시 올라오길 잘했다고 하면서 감사의 인사를 건네었다. 산티아고가 이집트 피라미드에 가서 사막 한가운데 땅을 파고 한참을 내려갔으나 보물이 나오지 않아 포기하려고 할 때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지금 네가 쓰러져 있는 바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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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면기사
[경인일보=]칭찬이라면 뭐든 좋지만 칭찬 중에도 은근히 맘에 남는 칭찬이 있게 마련이다. 나의 경우에는 개인 웹페이지에 친한 친구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아무개만 같아라' 하고 적어놓은 구절인데, 친구는 칭찬이라기보다 희망사항으로 그 같은 구절을 적어놓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더도 덜도 말고 딱 한가위같은, 추석같은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이 그 구절을 볼 때마다 새로워 마음에 남는다고 보는 편이 옳겠다.따져 보면 더도 덜도 필요없다는 것은 완벽을 의미한다. 선인들은 한가위를 더도 덜도 필요없는 날이라 일컬었다. 추석을 가리키는 옛말이 '가배'이고 가배는 가운데라는 의미였으며 '한'은 크거나 중심인 것을 의미하는 말이니 한가위란 일년 중에 가장 중심이 되는 날, 가장 완벽한 날이라 할 수 있을까? 한가위가 완벽한 날이라면 한가위를 쇠는 사람들의 심정도 그랬으면 좋으련만 날이 완벽하다고 사람까지 완벽한 기분이길 바라는 것은 과한 욕심일까? 오히려 그렇게 풍성하고 완벽한 명절이기에 부족한 것이 더 도드라지고 더 서러운 것은 아닐까? 명절이야 음식이 주장이고 음식은 여성의 몫이었기로 최근 들어서는 명절 증후군같은 우울한 증세마저 없지 않지만 여전히 더도 덜도 필요없는 추석을 결코 완벽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이 좋은 시절에 가족과 이웃과 마음껏 지낼 수 없는 현실이 있기 때문 아닐까?1920년대 가난한 기층 민중의 삶을 섬세한 여성적 시선으로 형상화하며 진지한 작품 세계를 구축한 것이 박화성이다. 박화성은 등단작 '추석 전야'에서 '추석'이라는 풍요로운 시간과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마저도 사라진 척박한 사회를 대비하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영신은 남편도 없는 홀어미의 몸으로 두 자식과 시어머니를 부양하며 산재를 입은 몸으로 치료는커녕 낮에는 방직회사의 여공으로 폭력과 성적 희롱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가혹한 노동을 감당하고 밤에는 모자라는 생활비를 위해 밤새 삯바느질을 한다. 집집마다 떡내음, 기름내음, 칼도마 소리가 나는 풍성한 추석 전날밤이지만 영신의 집은 밀린 집세를 내고 나니 달랑 50전짜리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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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글 사회복지를 생각하자 지면기사
[경인일보=]사회복지사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강의를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사회복지사들 앞에서 과연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사회복지에 관해 문외한인 사람이 감히 그런 곳에 가도 될까? 그동안 참여했던 봉사활동에 대한 얘기라도 해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보건복지가족부에서 노숙인과 부랑인을 대신할 법정 용어로 하필이면 '홈리스'를 쓰려고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잘 곳이 없어 한데서 잠을 자는 이들을 우리는 노숙인이라 부른다. 전에는 노숙자라고 불렀었는데 '자'가 어감이 좋지 않았는지 아니면 그 이상으로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어느 틈엔가 노숙인이 되어 있었다. 노숙인이 잘 곳이 없어 단지 한데 잠을 자는 사람이라면 부랑인은 거처도 직업도 없이 떠도는 사람을 뜻한다. 부랑인도 과거에는 부랑자였다.그러고 보면 '자'를 '인'으로 바꾸어 사용하는 말이 꽤 있는 것 같다. 장애인도 과거에는 장애자였다. 그런데 요즘에는 장애인도 적절치 않았는지 '장애우'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선거에서 당선되었을 때 며칠 동안은 당선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어느 날부터인가 '당선인'으로 말이 바뀌었다. 실제로 '자'가 그렇게 부적절한 말인지 모르겠으나 '자' 붙은 말을 기피하는 것이 요즘 경향인 듯하다. 그런데 '응시자', '합격자', '탈락자', '우승자'는 왜 '응시인', '합격인', '탈락인', '우승인'이라고 하지 않을까? '기자'는 왜 '기인'이라고 하지 않을까?괜한 시비를 건다고 나무랄지 모르지만 과연 '자'를 '인'으로 바꾼 것이 적절한 처사였는지 의문이 들어 그렇다. 물론 '자'가 태생적으로 질이 나빠서 그냥 두면 우리 언어생활이 험악해지고 특히 청소년들의 정서에 나쁜 영향을 주는 말이라면 모르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건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드는 때문이다. '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당사자들을 존중해서 그 '자'를 '인'으로 고친 정상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왠지 필요 이상의 일을 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아니 시작함만 못한 결과가 돼버렸는지도 모른다.그렇다면 부랑인과 노숙인을 대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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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거짓 왕자와 공주 지면기사
[경인일보=]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아이를 위해 열심히 동화책을 읽어준다. 아이에게 꿈과 환상을 열어주는 동화의 세계! 아이들이 책을 통해 처음 대면하는 진리가 이 세계에는 없는 혹은 이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환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환상은 유익한 것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환상은 초자연적이고 초인과론적인 법칙을 지닌다는 점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이다. 인간에게 환상이 필요한 까닭은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을 지탱하는 모든 질서와 규칙, 나아가서는 도덕적 원리가 늘 심리적 안정감만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개인을 거대한 사회에 종속시키고 때로 자유를 억압하는 결박의 끈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사회의 구조적 압력이 강해질수록 환상에 대한 동경은 강화된다. 환상이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난 미묘한 즐거움과 억압된 감정을 이완시켜 주기 때문이다. 현실의 결핍을 위안해주고 보상해주는, 혹은 초월하게 하는 모든 환상은 우리의 의식을 사로잡으며, 그 사로잡힘에 적극적으로 반응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삶의 의미 체계를 형성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환상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억압으로부터의 일탈을 촉진시키고 존재 전환의 힘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강력한 작용력을 갖는다. 일상의 규범과 질서를 흔들어 놓는 것이 환상의 매력이라면 이러한 매력은 현실을 비웃고 부정하며, 때로 그것을 초월하고자하는 힘을 내포한다. 환상의 가치는 삶의 고착된 한계를 벗어나게 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환상문학 이론가 로즈마리 잭슨은 환상을 전복의 매개물로, CS루이스는 매혹적 인식의 자극제로, '반지의 제왕'의 저자 JRR 톨킨은 즐거움의 제공처로 그 효과와 가치를 설명한다.그러나 환상이 언제나 이 같은 가치를 지니는 것만은 아니다. 거짓 환상은 망상을 낳는다. 이 세계는 동화책에서 읽었던 풍요로운 환상과 신비한 모험의 세계가 내면의 긍정적 에너지로 바뀌기도 전에 동화의 순수한 세계를 다른 환상으로 대체해버린다. 현란하게 포장된 물질적 환상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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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트라, 신비한 주문 지면기사
[경인일보=]류시화 시인을 유달리 좋아하는 필자는 류시화 시인의 시와 수필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고는 하였는데 부장검사를 마지막으로 명예퇴임식을 할 때에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라는 시를 인용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다른 사람들에게 즐겨 이야기한 내용은 류시화 시인이 인도 등지를 여행하면서 체험한 내용을 쓴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이라는 책에 들어 있는 '세 가지 만트라(신비한 주문)'에 대한 것이다. 이 책은 삶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자주 갖게 해주었는데, 어떤 요가수행자로부터 전수받았다는 세 가지 만트라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을 울리고 있다. 류시화 시인이 인생의 완벽한 스승을 찾기 위해 설산 히말라야를 헤매던 중 만났다는 요기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이 세 가지 만트라를 기억한다면 그대는 다른 누구도 스승으로 섬길 필요가 없다. 그대의 가장 완벽한 스승은 그대 자신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첫째 만트라는 이것이다. 너 자신에게 정직하라. 세상 모든 사람과 타협할지라도 너 자신과 타협하지는 말라. 그러면 누구도 그대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다. 둘째 만트라는 이것이다.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 찾아오면 그것들 또한 머지않아 사라질 것임을 명심하라.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음을 기억하라.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넌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을 것이다. 셋째 만트라는 이것이다. 누가 너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거든 신이 도와줄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마치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네가 나서서 도우라.그런데, 마음 깊이 울리는 세 가지 만트라를 음미하던 중 살며시 나타나는 의문은 첫째와 둘째 만트라를 따르면 어떻게 된다는 부연 설명이 있는 반면 셋째 만트라를 따르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것이었다. 결론을 완전히 맺지 않고 열어둠으로써 더 많은 생각을 키워내려고 하는 것이 류시화 시인의 의도라고 혼자 생각하고는 여러 날을 되씹어 보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셋째 만트라에 따르면 결국 '이 땅에 신이 의도하는 세상이 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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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장을 맞드는 지혜 지면기사
[경인일보=]'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종이를 맞들다니 잘못하면 찢어지지 않을까. 어려서 본 어떤 코미디에서는 백지장을 맞들다가 찢어먹고는 '백지장은 맞들면 찢어진다!'로 패러디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백지장을 맞들어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옛 속담은 일상 생활에서 비롯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므로 분명히 백지장을 맞들어야 할 일이 있었기에 그런 속담이 생겨났던 것이다.필자가 자란 집은 유리창도 몇 있었지만 방문과 샛문과 곁창문 등은 창호지를 바른 문이었다. 여름 지나 찬바람이 나기 시작할 무렵이면 볕 좋은 휴일에 문들을 모두 떼어 창호지를 새로 바르곤 했다. 문창호 새로 하는 날은 잔칫날이라도 되는 듯, 온 식구들이 모여서 북적댔다. 방문이며 창문을 모두 떼어 안마당에 내놓은 뒤, 물을 끼얹고 솔로 문질러 가며 박박 닦아낸다. 웬만한 종이들은 북북 뜯어내면 되지만 문살에 달라붙은 종이들을 말끔히 떼어내지 않으면 새로 종이를 붙였을 때 얼룩이 지고 눈에 거슬리기 때문이다.종이를 북북 뜯어내는 일은 어린 사람들이 신나서 해치우는 일이었다. 이날만은 문에 구멍을 내도 꾸중도 안 들으니 뽕뽕 소리내며 구멍을 낸 다음 손을 넣어 종이를 잡고 주욱 찢어내는 맛도 경쾌하였다. 그러나 문살에 달라붙은 종이를 긁어내는 일은 그리 만만치 않다. 요즘처럼 솔의 품질이 좋기나 했던가, 모지라진 수세미, 칫솔까지 동원하여 문살을 깨끗이 닦는다. 그리고 한쪽에 세워 잠깐 말리면서 마당을 아주 깨끗이 치우고 물기도 말린다. 새로 풀칠하는 종이가 젖거나 더러워지면 안되니까.잠시 식사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면서 마당과 문살을 말리고 나면 새로 창호지를 바를 차례이다. 우선 신문지 따위를 바닥에 넓게 펴고 그 위에 창호지를 펼친다. 멍울이 없도록 깔끔하게 쑨 풀을 고르게 창호지 전체에 펴 바른다. 풀에 젖은 종이를 들어 문살에 붙이는 것은 혼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혼자서도 해보려고 문살에 풀을 먼저 칠하고 종이를 붙여봤는데 실패했고 어른들에게 꾸중만 들었다. 문살 옆으로 풀이 비어져 나와서 얼룩이 생기고 그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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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남용하는 사회 지면기사
[경인일보=]지인이 전자우편으로 발송하는 '우리말 편지'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지인의 조카가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맥주를 마시러 갔는데 가게 이름이 'beerlaon'이었답니다. 한글은 온데간데없고 그냥 영어 알파벳으로만 적혀 있었답니다. 'laon'이란 말이 너무 생소해서 외국인 친구에게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 친구가 먼저 영어에는 'laon'이란 낱말이 없다면서 무슨 뜻이냐고 묻더랍니다. 결국 가게 주인에게 물어보니, 놀랍게도 laon은 '즐기다'는 뜻을 지닌 순우리말이라는 거였습니다. 기절초풍까지는 아니었는지 모르지만 상당히 충격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라온'이라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왜 영어 알파벳으로 적어 놓았는지, 왜 우리나라 사람도 못 알아보고 외국인도 못 알아보게 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답니다. 그 조카의 주장은 아름다운 우리말을 우리 한글로 적자는 것이었겠지요. 그런데 다음날 재미있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정말로 '라온'이 '즐기다'라는 뜻인가요? 제 딸 이름이 '나온'인데, 이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순 한국말이지요. '즐거운, 기쁜'이란 뜻이 있습니다. '라온'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듣네요. 답변을 기다릴게요.'우리말 편지' 애독자의 질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라온'이란 말은 틀리고 '나온'이 맞는 말인가? 사전에서 '나온'을 찾아보았습니다. 옛말 '납다'의 활용형이고, 뜻은 '즐거운'이었습니다. '납다'를 찾아보니 형용사로 '즐겁다'는 말이었습니다. "엇디 납디 아니료"라는 예문까지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라온'도 있었습니다. 역시 옛말로 '즐거운'이라는 풀이가 붙어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라온과 나온 둘 다 맞는 말이고, '비어라온'은 '즐거운 맥주' 아니면 '맥주를 즐기자' 정도가 되겠지요.뜬금없이 'beerlaon'이란 표기로 인해 제법 긴 얘기가 돼버렸습니다만, 요즘 한글보다 영어 알파벳을 더 많이 쓰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수년 전 대학의 어느 영어 강사께서 1980년대 혜화동 로터리에 'yield'란 교통 표지판이 있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저도 그런 걸 본 듯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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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의 온기가 사라지고 있다 지면기사
[경인일보=]인간의 거주 공간 가운데 가장 신성한 곳은 서재나 침실이 아니라 부엌이다. 부엌은 기원전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Empedocles)가 말했던 물질의 기본 원소가 무궁무진한 경우의 수로 결합하는 연금술의 공간이다. 음식의 다양한 재료들은 물, 불, 공기와 더불어 반죽되고 끓여지고 발효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형태와 맛으로 재탄생된다. 흙에서 자란 것과 물에서 자란 것이 서로 만나고, 쓰고 맵고 짜고 시고 단 것들이 서로 어우러져 기묘한 맛으로 변화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질적인 것들이 순식간에 조화를 이루는 부엌은 인간이 거주하는 곳 가운데 가장 독특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이질적인 재료들을 서로 합쳐 조화로운 음식으로 탈바꿈 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다. 부엌에 들어선 사람은 풍부한 상상력과 감각과 정성을 가지고 재료를 다루어야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 특히 정성이 많이 들어간 음식일수록 그 맛이 깊다. 어머니의 손맛이 맛 중의 맛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정성 때문이다. 거기에는 음식을 나누어 먹을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존중과 건강에 대한 염려가 담겨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의 부엌은 가족의 몸과 마음을 지켜내는 약제실이다.사람들이 가장 행복해하는 순간은 아마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눌 때일 것이다. 음식을 나누는 순간에는 즐거움과 휴식과 정감이 함께 있다. 싸움을 한 사람들은 함께 밥을 먹지 않는다. 아니 함께 밥을 먹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수저를 놀리는 손길이 어색해지고 마주한 얼굴을 보는 것이 곤혹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천하의 산해진미도 모래를 씹는 듯 변질되고 만다. 관계가 어그러지면 밥상도 치워야 하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음식은 관계의 회로를 돈독히 하는 매개이다. 가장 맛있는 음식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맛의 쾌락을 함께 나누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요리를 하는 사람은 요리 하기 전에 누구와 이것을 먹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상대가 싫어하는 것을 감안하면서 요리에 넣을 것과 뺄 것을 정한다. 그 마음이 훌륭한 밥상을 완성하는 것이다.그런데 요즘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