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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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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칼럼] 분향소 지면기사
佛철학자 장켈레비치 죽음을 분류사랑하는 사람 '너의 죽음' 남달라내면의 슬픔 육체적 고통으로 인지이태원 참사 유족들 상처 치유 필요시민분향소 철거 요구는 옳지 않아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Vladimir Jankelevitch)는 죽음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첫 번째는 일인칭 죽음 곧 '나의 죽음'이다. 이 죽음은 내가 살아 있는 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수수께끼와도 같다. 두 번째는 삼인칭 죽음으로 '그의 죽음'이다. 이 경우 그가 맡았던 역할을 다른 사람이 대신하면서 극복된다. 마지막으로 이인칭 죽음이 있다. 이는 '너의 죽음'으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다. 이인칭 죽음은 타인의 죽음이지만, 그로 인해 한쪽 팔이 잘려나간 듯이 아파하거나 망연자실해 버릴 수 있다. 장켈레비치는 "우리는 이인칭 죽음을 겪을 때 비로소 죽음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고 했다.장켈레비치의 이 견해는, 인간에게 죽음은 감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전제 위에 성립된 것이며 그 까닭은 죽음은 일체의 감각이 사라진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일인칭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까닭은 죽음이라는 조건 속에 놓이게 되면 경험의 주체인 '나'가 사라지기 때문이고, 삼인칭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까닭은 경험의 대상인 '그'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에서라면 이인칭 죽음이라 할지라도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경험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너'는 더 이상 살아 있는 자의 경험으로 접근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켈레비치가 이인칭 죽음을 통해 죽음을 감각할 수 있다고 한 말은 실은 우리가 관계 맺고 있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 비로소 죽음의 고통과 슬픔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는 의미로 죽음 자체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인칭 죽음의 경우에도 죽음은 여전히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불가지의 영역에 머물러 있으며 이것이 살아 있는 자의 한계다. 그럼에도 이인칭 죽음은 죽음이라는 추상적 의미를 구체적인 감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준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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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칼럼] 후생가외(後生可畏)와 사반공배(事半功倍)의 가르침 지면기사
지난달 은사이신 상허(尙虛) 안병주(安炳周) 선생께서 타계하셨다. 선생은 유학의 우환의식(憂患意識)과 맹자 민본사상(民本思想)의 권위자일 뿐 아니라, 한국유교학회와 동양철학연구회를 창립하여 동양철학의 학문적 저변을 확대하고 퇴계학연구원장과 국제퇴계학회 회장을 지내며 퇴계학의 위상을 세계적 수준으로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민족문화추진회와 전통문화연구회를 통해 고전 번역의 초석을 놓았고 대학을 비롯한 각급 기관에서 수많은 제자와 후학을 길러낸 스승으로 한국 동양철학계의 태두라 할 만한 분이다.대학시절 나는 선생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공부했다. 학교의 정규 강의는 말할 것도 없고, 민족문화추진회와 퇴계학연구원 등 선생이 강의하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맹자와 논어를 비롯한 유학의 고전은 물론이고 묵자와 노자와 장자 등 제자백가서까지 배웠다. 내가 들었던 선생의 모든 강의는 다른 사람의 강의로는 대체할 수 없을 만큼 경이롭고 흥미진진했다. 특히 맹자를 강의하실 때면 맹자와 제자들, 당시의 임금들이 강의실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선생은 마치 스스로 맹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연기를 하며 강독하셨는데, 맹자와 대화를 나누던 제자가 실망스러워하는 대목에서는 스스로 그 제자가 되기라도 한 듯 입을 삐죽이 내밀며 강의하셨고 제나라 임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고 할 때는 선생의 안색도 따라서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지금도 맹자의 그 구절들은 선생의 표정과 목소리로 내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수많은 후학 기른 동양철학계 태두은사이신 상허 안병주 선생 '타계'선생은 자신이 이룬 학문적 권위에 기대는 법이 없었다. 고전을 함께 읽을 때 새로운 견해를 이야기하는 제자가 있으면 선생의 풀이와 다르더라도 아낌없는 칭찬으로 높이 평가하셨으며 제자가 작은 성취라도 보이면 언제나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말씀으로 격려하셨다. 논어의 한 구절로 '두려워할 만한 존재는 후생(後生)'이라는 이 말씀은 아마도 제자의 성취에 대한 칭찬에 그치지 않고 선생 스스로 분발을 촉구하는 경계의 말씀으로 입에 즐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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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칼럼] 이순(耳順)의 이명(耳鳴) 지면기사
지난해 환갑을 맞이하면서 귀에 이명이 찾아왔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앉아 있다가 일어서거나, 세수하다가 머리를 들 때, 운전을 마치고 차 문을 열 때면 귀에서 소리가 난다. 어떤 때는 시계태엽 감는 소리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쓰르라미 우는 소리 같기도 한데 자세히 들어볼라치면 또 들리지 않는다. 어느 날 이른 아침에는 덜컹거리는 기차 소리에 잠을 깼다. 집 주변에 기찻길이 없기 때문에 기차 소리가 들릴 턱이 없었지만, 분명히 레일을 덜컹거리며 달리는 기차 소리와 똑같았다. 잠결에 이제는 귀에서 기차 소리가 들릴 정도로 이명이 심해졌구나 싶었는데 깨어나 확인해보니 이삿짐 차량의 사다리에 연결된 운반용 트레일러가 오르내리는 소리였다.그다지 거슬리지도 않고 생활에 지장이 있는 정도는 아니라 딱히 치료할 마음까진 생기지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이 그냥 놔두면 청력을 잃을지 모른다고 겁을 주기에 가까이 지내는 이비인후과 의사 선생님에게 어떻게 치료하는 게 좋을지 물어보았다. 의사 선생님은 이명에는 별다른 치료법이나 특효약이 없고 그저 충분한 휴식과 잠이 필요하다고 조언하며 본인도 가끔 귀에서 소리가 들린다고 덧붙인다.별다른 치료법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던 것은 병원을 오고 가며 이런저런 검사를 받는 일을 번거롭게 여겼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토록 시끄러운 세상에 나만 조용히 살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만 아는데 남들은 모르는 이명남들 아는데 나만 모르는 코골이 일찍이 연암 박지원은 이명과 코골이를 글 짓는 일에 비유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한 어린아이가 뜰에서 놀다가 갑자기 귀가 울자 놀라 기뻐하면서 이웃집 아이에게 말했다. '너 이 소리를 들어봐라. 내 귀에서 앵앵 소리가 나는데 마치 피리 소리 같아서 동글동글 별 같다.' 이웃집 아이가 귀를 기울여 서로 대보았지만 끝내 듣지 못하자 아이는 슬피 울면서 자기에게 들리는 소리를 남이 듣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했다.""한번은 시골 사람과 함께 잠을 자는데, 코 고는 소리가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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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칼럼] 교양 교육의 어려움 지면기사
대학은 상품이 아니다. 하지만 대학이 상품으로 취급되는 현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오히려 한국 사회의 대학은 일반적인 상품만큼 평등하지 않다는 점에서 대단히 불합리하고 불완전한 상품이다. 일반적인 상품은 돈만 내면 누구나 구매할 수 있지만 대학이라는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자격시험을 통한 경쟁을 거쳐야 할 뿐 아니라 그 결과에 따라서 원치 않는 상품이라도 구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등록금을 지불하고 대학이라는 상품을 구매한 학생들은 강의를 듣고 학점을 취득할 권리를 가진다. 이 권리가 침해되었을 때 학생들은 등록금이 아깝다고 생각하며 반발하게 된다. 심지어 등록금 냈는데 왜 학점을 안 주느냐고 주장하는 학생이나 학부모가 있을 정도다.학생들은 대체로 전공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등록금이 아깝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항변은 합목적적이다. 애초 대학이라는 상품을 구매한 목적이 전공을 충실하게 익혀 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학의 교양 교육은 그 반대다. 전공은 충실하게 가르치지 않으면 등록금이 아깝다고 생각하는데 교양은 충실하게 가르치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전공 시간에는 착실한 학생이 교양 강의에는 결석을 자주 하거나 교양 시간에 전공 공부를 하는 학생이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많은 학생이 교양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현상을 학생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 뒤에는 교양을 등한시하는 사회구조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교양 없는 한국 사회가 교양 교육을 어렵게 하는 주범이다. 무조건 들어야 졸업 '번들상품' 비슷물리학도에게 詩 알려주기 어렵듯타전공생에 교양교육 쉬운일 아냐 대학에서의 교양은 전공에 견주면 더욱 불합리한 상품이다. 싫든 좋든 무조건 들어야 졸업이 되니 선택의 여지 없이 받는 번들 상품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아니 끼워 팔기 강매 상품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구매자의 처지에서는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데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상품이기 때문이다.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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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칼럼] 분필 지면기사
며칠 전 강의실에서 생긴 일이다. 준비한 강의 자료를 스크린에 띄우려고 컴퓨터를 켰는데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컴퓨터뿐 아니라 빔 프로젝터도 켜지지 않았고 스크린도 내려오지 않았다. 전원 코드를 확인했지만 결국 원인을 알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칠판에 글을 써가며 강의할 생각으로 분필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칠판 한쪽 구석에 부착된 분필통을 열었더니 오랫동안 쓰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이라도 해주듯 허연 분필가루 속에 여러 개의 동강 난 분필이 뒹굴고 있었다. 나는 분필을 손에 잡으면 분필 가루가 손에 묻겠다는 생각이 들어 잠깐 망설이다가 분필을 손에 잡았다. 이윽고 강의를 시작했는데, 강의하는 내내 머릿속에는 이런 물음이 떠나지 않았다."선생인 내가 분필을 두려워하다니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시골에서 자란 내가 서울로 전학해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다. 한 번은 고향의 어머니가 학교에 와 담임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다. 3학년이었으니 아마 입시 관련 학부모 상담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을 만나고 난 뒤 어머니는 담임이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시느냐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선생님 양복 소매에 분필 가루가 묻어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담임선생님의 소맷단에 묻어 있는 분필 가루를 보고 훌륭한 선생님이라 판단한 것이다. 한평생 한복 짓는 일을 업으로 삼아 언제나 깔끔한 옷매무새와 청결을 강조하셨던 어머니였는데, 그런 어머니가 뜻밖에도 미처 털어내지 못한 옷소매의 분필 가루를 훌륭한 선생님의 조건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학창시절 담임 소맷단에 분필가루어머니 눈엔 '훌륭한 선생님' 조건 세월이 한참 흐른 뒤 내가 강단에 서면서 어머니가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저절로 알게 되었다. 직업상 책을 읽고 글 쓰는 일을 자주 하는 내게 가장 중요한 도구는 두말할 것 없이 필기구다. 옛사람들은 지필묵연(紙筆墨硯, 종이·붓·먹·벼루)을 문방사우(文房四友)라 부르며 아꼈지만 지금의 내게는 종이만 그대로일 뿐 붓과 먹, 벼루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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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칼럼] 호모 에로르(Homo Error) 지면기사
음악방송을 듣고 있는데 로드리고의 '아랑훼즈 협주곡'이 흘러나왔다. 평소 좋아하는 곡이라 반가운 마음으로 듣고 있는데 곡이 끝난 뒤 진행자가 "로드리고 아랑훼즈의 '협주곡'을 들으셨다"고 소개했다. 로드리고의 '아랑훼즈 협주곡'을 로드리고 아랑훼즈의 '협주곡'이라고 잘못 소개한 것이다. 실수를 알아차린 진행자가 서둘러 정정했지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끝내 마음에 걸렸는지, 곡 소개를 잘못해서 불편하셨을 텐데 다음부턴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사과까지 했다. 하지만 나는 노련한 진행자가 저지른 뜻밖의 실수에 불편은커녕 안도감마저 느꼈다. 언젠가 비발디의 '2대의 트럼펫을 위한 협주곡'을 '그대의 트럼펫을 위한 협주곡'으로 잘못 소개한 다른 진행자도 있었고 보면 이런 실수는 흔하기도 하고 또 생방송에서만 만날 수 있는 각별한 재미라 하겠지만 무엇보다 요즈음 같은 인공지능(AI)시대에는 실수하는 인간(Homo Error)이 아름답다는 생각마저 들었기 때문이다."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인류는 오랫동안 다른 존재와 인간을 비교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왔다. 고대의 동아시아인들은 인의예지(仁義禮智)와 같은 덕목을 기준으로 도덕적 존재(Homo Ethicus)로서 인간을 규정했고, 근대의 데카르트는 이른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제를 내세워 생각하는 존재(Homo Sapiens)로 인간을 규정했다. 그 외에도 인간만이 미래를 전망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전망하는 인간(Homo Prospectus), 인간만이 예술과 같은 창조적 작업에 몰두한다는 사실을 내세워 창조하는 인간(Homo Creatura), 인간만이 놀이에 몰두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이라는 말을 만들기도 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 '인공지능시대'더 이상 '인간만'이라 규정할수 없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인공지능시대에 이런 말들은 더 이상 인간만을 가리키는 규정일 수 없게 되었다. 가령 흔히 목격하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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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칼럼] 재능에 관하여 지면기사
흔히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반은 맞는 이야기다. 한자어 재능(才能)의 '才(재)'는 초목의 싹이 아직 땅 아래에 묻혀 있는 모양을 그린 것이고 '能(능)'은 곰을 그린 상형문자로 곰처럼 강한 힘을 의미하는 글자다. 따라서 이 두 글자가 합쳐진 재능이란 말은 아직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잠재적인 능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곧 재능은 각 개인이 나면서부터 지닌 고유의 능력으로 사회의 영향과 상관없이 타고나는 것이다. 이른바 능력주의는 재능의 유무에 따라 사람마다 역량의 차이가 있게 되므로 이를 기준으로 사회적 재화를 차등적으로 분배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는 재능의 차이가 한 사람이 지닌 역량의 상이함에서 기인하기보다 사회적 분업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주장하면서 지게꾼과 학자를 예로 들었다."사람들이 가진 재능의 차이는 실제로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작다. 성인이 되었을 때 여러 직업의 사람들을 구별 짓는 것처럼 보이는 자질상의 큰 차이도 분업의 결과인 경우가 많다. 가령 학자와 거리의 지게꾼은 전혀 닮지 않은 성격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 또한 선천적인 차이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습관과 풍습 및 교육에 의한 것이다. 그들이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또 그 뒤의 첫 6년 내지 8년 동안은, 그들은 아마 매우 비슷했을 것이고, 그들의 부모나 놀이 친구들도 별로 두드러진 차이를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나이 때, 또는 그 얼마 뒤에 그들은 아주 다른 직업에 종사하게 된다. 그 무렵 재능의 차이가 눈에 띄게 되며, 그것이 차츰 커져서 마침내 학자의 허영심이 지게꾼과는 거의 아무런 유사점도 시인하지 않으려 하기에 이른다." 아직 안 드러난 잠재적 능력 지칭애덤 스미스 '능력주의' 반박 주장"사람들 간 차이, 생각보다 작아" 재능의 형성과 기원에 관한 애덤 스미스의 이 주장을 전적으로 옳다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같은 분야, 같은 조건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재능에 따라 성취에서 현격한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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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칼럼] 내가 못 본 꽃 지면기사
지난 학기에도 학생들과 함께 시를 읽었다. 내가 담당한 과목은 시 창작이나 글쓰기가 아니지만 한 학기 동안 모든 학생이 각자 시 한 수를 마음에 들여놓는다는 목표를 세워놓았다. 그래서 매 학기 한 주는 시를 읽고 낭송하는 데 할애한다. 비록 2년 반 동안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시 낭송 시간을 가지지 못했지만, 지난 학기에 대면 강의를 시작하면서 다시 시를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학생들은 마음에 드는 시를 한 편씩 손글씨로 써왔다. 정성껏,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쓴 시를 친구들과 함께 읽는다. 시를 한 편씩 읽을 때마다 잠깐씩 시간이 멈춰 선다.첫 번째 시 낭송 시간이었다. 한 학생이 낭송하는데 중간중간 숨을 몰아쉬며 떨었다. 듣고 있던 다른 학생도, 보고 있던 나도, 같이 떨었다. 오랜만에 보는 장면이었다. 민영규 선생은 말했지. 지남철이 떠는 이유는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기 위해서라고 떨지 않는 지남철은 버려야 한다고. 손이 떨린다. 목소리가 떨린다. 그렇지. 떨림은 진실의 몸짓이니까.이렇게 그 시간의 떨림은 모두에게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았다. 이렇게 잡아두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덧없이 지워져 버리고 말 것이다.두 번째 시 낭송 시간이었다. 한 학생이 고은 선생의 시를 골랐다. 왜 그 시를 골랐는지 물었더니 학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짧아서 골랐습니다." 뜻밖의 대답에 나는 버럭 호통을 치고 말았다. "짧아서 골랐다고? 자네가 시를 고르는 기준이 고작 분량인가? 상품 고를 때조차도 그렇게 하지는 않겠지. 자네가 시를 고르는 정성이 상품 고르는 정성에 미치지 못하다니, 이건 자네가 고른 시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 하지만 학생의 표정은 진지했다. "교수님, 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말씀드린 겁니다." "아, 그래? 그렇다면 내가 오해했을 수도 있겠구나. 아무렴 비난도 진심이라면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한번 말해보거라." "예, 저는 시를 고르기 전에 다른 시를 많이 읽어보았지만 별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이 시는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받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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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칼럼] 말(言)과 신자유주의 지면기사
평소 출석을 부르지 않는 내가 그날은 학생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모두 불렀다. 2022년 10월31일 월요일, 154명의 소중한 목숨을 앗아간 저 참혹한 주말이 지난 뒤 처음으로 강의가 있던 날의 일이다. 중간시험이 막 끝난 뒤라서일까. 한눈에 보기에도 평소보다 수업에 참여한 학생의 수가 적은 게 마음에 걸렸다. 대답 없는 몇몇 학생들에게 강의가 끝난 뒤 전화를 돌렸다. 반가운 목소리가 하나둘 들려온다. 다음날까지 수업에 오지 않았던 모든 학생의 안부를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도 잠깐, 곧바로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슬픔이 몰려왔고 책임져야 할 자들의 말 같지 않은 말을 듣고 분노가 치밀었다.말(言)이란 무엇일까? 또 말이 통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말을 뜻하는 한자 '언(言)'은 입(口)에서 나오는 음파(≡)가 위쪽으로 퍼져나가는 모양을 본뜬 글자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입이 아래에 있다는 사실이다. 아래에 있는 입(口)은 신분이 낮은 사람을 뜻한다. 그러니 말이 통한다는 것은 높은 사람의 말이 아래로 전달된다는 뜻이 아니라 낮은 사람의 말이 위에까지 전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래로 높은 사람의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란 없다.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의 말은 아무리 목소리를 낮게 하더라도 다 알아서 듣기 때문이다. 말, 낮은 사람 言 위까지 전달 의미권력자, 아랫사람 말 잘 듣지 않아 그런데 높은 사람의 말은 말(言)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명령(令)이기 때문이다. 명령을 뜻하는 한자 령(令)은 입(口)이 위쪽에 위치하고 아래에 사람이 엎드려 기는 모양(入)을 본뜬 글자다. 곧 아래에 있는 사람이 신분이 높은 사람이 하는 말에 복종하는 모양을 그린 글자가 령(令)자의 본뜻이다.명령, 곧 권력자의 말이 쉽게 전달되는 것은 그 말이 반드시 옳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의 하수인들이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말은 잘 들리지 않는다. 때로 온몸을 던지며 죽음으로 항거해도 그들의 말은 세상에 반향을 일으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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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칼럼] 붉은털원숭이 실험 지면기사
1961년 사회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은 이른바 '권위에의 복종'이라는 실험을 시작했다. 그는 사람들이 권위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실험대상자에게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질 테니 타인에게 전기 충격을 가하도록 지시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하얀 실험복을 입은 권위적인 인물이 실험대상자에게 레버를 당겨 다른 사람에게 전기 충격을 가하라고 명령하자, 그 대상자는 다른 사람이 그 '충격'에 고통스러운 반응을 보여도(사실은 배우가 연기를 한 것이다) 계속해서 레버를 당겼던 것이다. 밀그램의 실험은 그가 1983년에 펴낸 책 '권위에의 복종'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고통·행복 함께 느끼고 배려하는데인간은 타인 아픔 무관심한듯 보여 1960년대 중반, 두 과학자가 비슷한 실험을 했다. 이번에는 사람이 아닌 붉은털원숭이가 실험 대상이었다. 이 실험은 곁에 있는 다른 원숭이가 전기 충격을 받는 모습을 보았을 때 붉은털원숭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보는 실험이었다. 두 과학자는 먼저 붉은털원숭이에게 그 날치 먹이를 얻으려면 레버를 당겨야 한다는 사실을 훈련시킨 뒤 그렇게 학습된 원숭이의 바로 옆 우리에 다른 원숭이를 넣었다. 그런 다음 실험을 시작했다. 과학자들은 붉은털원숭이가 먹이를 얻기 위해 레버를 당기면, 옆 우리의 원숭이에게 강한 전기 충격이 가해지도록 했다.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옆 우리의 원숭이가 전기 충격을 받고 고통스러워하는 반응을 보이자 붉은털원숭이가 레버 당기는 것을 중단했던 것이다. 과학자들의 놀라움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붉은털원숭이는 레버를 당기지 않아 먹이를 먹지 못하면서도 며칠 동안 그것을 당기지 않았다.붉은털원숭이는 그렇게 굶고 있었지만, 옆 우리에 있는 원숭이는 고통스러운 전기 충격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레버가 있는 우리의 원숭이들은 낯선 원숭이나 토끼처럼 다른 종의 동물이 있을 때보다 한 우리에서 알고 지내던 원숭이가 있을 때 레버를 덜 당겼다. 또 전기 충격을 경험해본 원숭이들은 그런 경험을 하지 않은 원숭이들보다 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