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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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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칼럼]잊지 말아야 할 것 지면기사
코로나로 美 일간지 부고 2배 이상인류 진화사상 죽음의 경고도 의미바이러스와 온몸 투쟁 역사에 동참고대 로마 개선행렬 '메멘토 모리'승자와 모든 산자들에 대한 경계로미국의 어느 일간지에 16개면에 달하는 부고(訃告)가 실렸다는 기사를 읽었다. 기사에 따르면 코로나19로 사망한 사람들의 수가 많아 평소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 것이라 한다.기사에 실린 해당 신문의 부고면 사진이 또렷하지 않아 내용을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부고면에 이름을 올리는 이들이라면 저명한 인사들은 아니고 평범한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라면 신문 기사에 이름이 실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본 부고면에는 부고 당사자의 이름과 사진, 그리고 아마도 그들의 삶이 적혔을 법한 짧은 글들이 빼곡히 배열되어 있었는데 지면을 주의 깊게 살피다가 나도 모르게 숙연해졌다.신문의 부고면은 일종의 묘비명이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의 이름이 묘비명에서나마 기록되기 시작한 건 동서양을 통틀어 그다지 오래된 일이 아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알랭 코르뱅의 '사생활의 역사'에 따르면 서양의 경우 19세기에 접어들어서야 자기 자신만을 위한 독창적인 이름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고 개별화된 묘비명이 세워지기 시작했다고 한다.이 점은 이름을 각별히 중시하는 문화전통을 지니고 있는 우리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해야 세울 수 있는 5천자가 넘은 신도비는 말할 것도 없고 그보다 훨씬 적은 수의 글자를 새기는 묘갈명이나 묘지명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경제적으로 넉넉한 양반 신분 계층이 아니면 꿈도 꿀 수 없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름이 작품에서나마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일러야 패관 문학이 유행하기 시작한 18세기 후반이었으며 묘지명을 새길 수 있게 된 것은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생각해보면 인류는 진화의 긴 세월 동안 수많은 병원체와 싸우며 삶을 이어왔다. 그 과정에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이름은 역사에 기록되지 못했다. 하지만 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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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칼럼]비누 두 장과 118만원 지면기사
코로나19 발생하자 대구서 '사투' 다큐멘터리 방송 후원품 개봉장면시가보다 배송비큰 비누등장에 떨려암보험 해지해 기부한 지체장애인우리는 '무언가' 넘어서고 있는 것한 달 전 대구 경북지역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 집단감염이 대규모로 발생하자 온 나라의 의료진과 소방대원, 자원봉사자들이 대구 경북지역으로 달려가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였다. 당시 한 방송사에서는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으로 제작하여 방송했다.방송 중에 코로나19 환자를 천안으로 이송하는 소방대원들이 출발 전에 기저귀를 챙기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취재기자가 환자용이냐고 묻자 그중 한 대원이 해맑은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저희들이 사용하는 겁니다. 감염의 우려가 있어 중간에 주유소를 들러도 보호복을 벗을 수 없기 때문에 기저귀를 차는 겁니다."이어서 간호사들이 잠시 마스크를 벗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카메라에 비쳤다. 콧등에는 다들 밴드를 붙이고 입가에는 마스크 자국이 완연했는데 이마에는 저마다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다. 그들의 주름은 근심의 흔적이 아니라 방호복을 착용한 흔적이다.방송에 따르면 방호복을 입고 움직이면 전신이 금세 땀으로 흠뻑 젖고 고글까지 착용하면 습기가 차서 앞도 잘 보이지 않는데 그렇게 24시간을 3교대로 근무하며 환자를 보살피다보니 코피를 쏟거나 탈진해 쓰러지는 간호사들이 하루에 한 명 꼴로 나온다고 한다.밤샘근무를 마치고 나오는 한 자원봉사자에게 기자가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할 거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애초 기약 없이 왔습니다."갓 스물이 된 그 청년은 앞으로 소방대원이 되어 인명을 구조하는 일에 함께 하는 것이 꿈이라고 이야기했다.대구에 답지한 후원물품을 개봉하는 장면에서는 카메라가 자원봉사자들의 분주한 손놀림을 따라가다가 작은 종이봉투를 비추었다. 봉투를 열어보니 달랑 비누 두 장이 들어 있었다. 봉투를 연 사람의 손이 잠시 떨렸고 화면을 보고 있던 내 마음도 따라서 떨렸다.아마 저 비누 두 장의 시가(市價)는 배송 비용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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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칼럼]우한(武漢)과 우정 지면기사
코로나19로 봉쇄 한 달 지난 '우한''지음' 백아·종자기 우정 자리한 곳인류가 만나보지 못했던 바이러스감염 우려로 인한 '혐오'를 멈추고최선 다해 싸우는 이들을 응원해야나는 2009년 여름에 우한(武漢)에 다녀온 적이 있다. 당시 우한은 내게 중국이 혼돈의 국가라는 인상을 남겼다. 고색창연한 고대의 유적과 현대식 마천루가 마주 보고 있었고 화려한 백화점과 이웃한 곳에 오래된 전통시장이 불을 밝히고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한마디로 전통과 현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혼재하는 불가사의한 도시라 하겠지만, 또한 내가 아는 우한은 가장 오래된 우정을 간직한 고장이기도 하다. 백아와 종자기의 우정이 깃든 고금대(古琴臺)가 자리한 곳이기 때문이다.백아와 종자기의 우정은 동아시아에서 벗에 관한 가장 오래된 이야기다. 백아는 거문고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다. 그가 거문고를 타면 말들이 춤을 출 정도로 아름다운 연주였지만 동시대의 사람들은 그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백아가 산속에서 홀로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는데 나무꾼 종자기가 그곳을 지나다가 그의 연주를 듣게 되었다. 그때 마침 백아는 태산을 생각하면서 거문고를 타고 있었는데 종자기가 듣고는 "훌륭하구나, 거문고 연주여! 태산처럼 높고 높구나!"라고 했다. 잠시 뒤에 백아가 흐르는 강물을 생각하면서 거문고를 연주하자, 종자기가 또 말하길 "참으로 훌륭한 연주다. 넘실대는 것이 흐르는 물 같구나!"라고 했다. 백아는 비로소 자신의 음악을 알아듣는 벗을 만난 것이다.종자기가 죽었을 때 백아는 자신의 거문고를 부수고 줄을 끊어버렸다. 이후로 죽을 때까지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는데 이를 백아절현(伯牙絶絃, 백아가 거문고 줄을 끊어버림)이라고 한다. 백아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거문고 연주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고 여긴 것이다. 여기까지가 《여씨춘추》에 전해져오는 이야기이고 우한의 고금대는 이 두 사람이 우정을 나눈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두 사람이 처음 만날 때 백아가 연주한 두 곡이 고산곡(高山曲)과 유수곡(流水曲)이다.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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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칼럼]탕임금의 목욕통 지면기사
통에 '날마다 자신 새롭게한다'는 뜻'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글귀새겨세상이 변함없이 진부하게 느껴질때자신이 낡은건 아닌지 되돌아보고주관 새롭게하면 객관세계 새로워져동아시아 역사상 최초로 혁명을 일으켜 세상을 바꾼 인물은 탕(湯)임금이다. 3600년 전 그는 폭군이었던 하나라의 마지막 임금 걸(桀)을 쳐부수고 상나라를 세워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는 어떻게 세상을 바꾸었을까? 그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무리를 규합하거나 군대를 양성하여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일이 아니라 놀랍게도 날마다 목욕을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일이었다. 그의 목욕통에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는 유명한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이를 탕지반명(湯之盤銘, 탕임금의 목욕통에 새겨진 글이라는 뜻)이라 하는데 그 내용이 유학의 고전 '대학'에 전해온다. 완전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구일신 일일신 우일신(苟日新 日日新 又日新)'.평범한 내용을 담고 있는 짧은 문장이지만 이해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고대의 한문은 글자 수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뜻을 전달하는 데 꼭 필요하지 않은 조사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주어나 목적어까지 생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문장도 그렇다. '구일신(苟日新)'은 '만약 날마다 새로워진다면'이라고 옮길 수 있는데, 원문 어디에도 주어나 목적어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읽으면 누가 무엇을 새롭게 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무의미한 동어반복이 되기 십상이다.번역하는 이들은 이런 경우를 만나면 앞뒤의 맥락을 더듬어 주어와 목적어를 찾아 넣어서 문장을 완성한다. '대학'의 앞뒤 문장을 참고하면 이 문장의 주어는 '나'이고 목적어는 '나 자신', 정확하게는 내 안에 있는 '덕(德)'이다. 그러니까 '구일신(苟日新)'은 '만약 내가 나 자신을 새롭게 할 수 있다면'으로 옮길 수 있다.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이어지는 '일일신(日日新)'의 뜻은 저절로 분명해진다. '일일(日日)'은 하루하루, 그러니까 매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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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칼럼]책 도둑 지면기사
30년전 '논어 완질' 훔쳐갔던 청년새삼 그 일이 떠오른 까닭은얼마전 논어 번역서 탈고하며올바로 읽고 풀이했는지 두려움과그에게 뭘 훔치진 않았나 의심 때문나는 대학원을 다닐 때 양현재(養賢齋)라는 곳에서 조교로 일한 적이 있다. 그곳에는 금속활자본 고서가 소장되어 있었고 그중에는 7책으로 구성된 논어 완질도 있었다. 그 책과 얽힌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도둑이 들어 논어 완질을 훔쳐간 것이다.그날 아침 출근해서도 도둑이 든 줄 모르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책을 들고 와 이 책이 여기 있던 물건이 맞느냐고 물었다. 나는 비로소 서가의 한 곳이 텅 비어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깜짝 놀라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그는 경찰서에서 나온 형사였다. 이야기인즉은 그날 도둑이 이곳에 들어와 책을 훔쳐 가지고 나가다가 경비의 눈에 띄어 붙잡혔다는 것이다. 이어 나에게 경찰서로 가서 참고인 진술을 하고 책을 도로 찾아가라고 했다.밖에 나갔더니 경찰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앞쪽에는 경비 아저씨가 앉고 나는 뒷자리에 앉았는데 뒷좌석에는 이미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옆에 있던 경찰로 보이는 이에게 말을 걸었다."유식한 도둑인가 봅니다. 아니 어떻게 그 책이 귀한지 알아보고…."대꾸가 없어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사람의 얼굴을 살피려던 나는 흠칫 말꼬리를 흐렸다. 경찰인 줄 알고 말을 걸었던 그 사내의 손목에 채워진 금속물질이 어두운 차 안에서도 차갑게 반짝거렸던 때문이다.그제야 그의 초라한 행색이 눈에 들어왔다. 피의자는 대략 20대 후반으로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그는 낡은 청바지에 때 묻은 운동화, 항공점퍼 비슷한 윗도리를 걸치고 있었는데 몸에서 다소 불쾌한 냄새도 났다.그는 이미 모든 걸 체념했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숨소리마저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전문적인 고문서 도둑 같아 보이지는 않았고 일시적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책을 훔치다 잡힌 것으로 보였다. 차를 타고 경찰서까지 가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도둑이 도둑다워 보이지 않는 데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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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칼럼]그레타 툰베리 지면기사
영향력 커진 스웨덴의 중학생매주 금요일 학교수업 거부하고의사당 앞에서 홀로 '기후 시위'급기야 선생님까지 함께 피켓들어인류의 미래 감히 빼앗을 수 있나얼마 전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를 조롱하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간 보아온 트럼프의 인격을 감안할 때 전혀 놀랄 일이 아니지만 전 세계에서 화석 연료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국가의 대통령이 어떻게든 의견을 표명해야 할 정도로 툰베리의 영향력이 커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놀라운 일이다.내가 툰베리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지난 학기 '세계와 시민' 교과목을 강의하면서였다. 학생들에게 '세계 시민 교육'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면서 일국 단위의 시민운동이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 설명한 다음 그런 한계를 돌파한 사례를 찾다가 툰베리를 알게 된 것이다.툰베리는 스웨덴의 중학생으로 올해 열여섯 살이다. 애초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알고 나서 어른들이 대책을 마련하고 실행에 옮기리라 기대했으나 어리석은 어른들에게 자신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는 걸 금방 깨닫는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한 끝에 그는 매주 금요일 학교 수업을 거부하고 스웨덴 의사당 앞에서 홀로, 기후를 위한 스트라이크를 시작했다.시간이 흐르면서 처음에 툰베리의 제안을 거절했던 친구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하고 급기야 선생님까지 함께 피켓을 들더니 마침내 학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학교 측은 자신들의 학생에게 일어날 수업결손을 보충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고 학생을 돕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다. 나는 정말 놀랐다. 학생이 수업을 거부하고 하는 일에 선생이 참여하고 학교가 따르는 일은 다른 곳에서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기 때문이다.처음 툰베리가 수업을 받지 않고 피켓을 들겠다고 했을 때 그의 부모와 선생, 다른 어른들 모두 반대하면서 한 말은 이렇다. 지금은 열심히 공부하고 장래 뛰어난 기상과학자가 되어 기후문제를 해결하라고. 하지만 툰베리는 그들의 거짓말을 믿지 않았다. 과학자들은 이미 세상에 넘칠 정도로 많지만 문제는 점점 심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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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칼럼]아침에 도를 듣고자 하면 지면기사
바라던 일 이루면 여한 없다던 공자윤봉길, 문자 그대로 목숨 바쳐 거사논어 어떻게 읽었는지 알 수 있어 선서문 말미 적힌 국호 '대한민국'그가 지키려 했던 나라 명명백백논어를 읽다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는 대목에 이르러 책을 덮고 생각에 잠긴 적이 있다. 매사에 중용을 따르는 공자가 어찌하여 '죽어도 좋다'는 과격한 말을 했을까? 설마하니 도를 듣고 나면 죽어야 한단 말인가? 목숨 바칠 만한 도가 과연 있기나 한 걸까? 공자는 나이 오십에 천명을 알았다고 하니 그때 도를 들었다고 할 법한데 왜 죽지 않고 73세(혹은 74세)까지 살았을까?별의별 의심이 꼬리를 물어 생각이 길어졌지만 이 말을 꼭 죽겠다는 결연한 각오가 아니라 간절히 바라던 일을 이루고 나면 더 이상 여한이 없겠다는 일상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 예컨대 나도 한때는 십삼경을 모두 풀이하고 나면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물론 그때도 정말 죽을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이렇게 기억의 한 구석으로 밀려났던 논어의 이 대목이 다시 염두에 놓인 건, 언젠가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장부가 한번 집을 나서면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음)'이라고 적힌 글씨를 보았을 때였다. 처음에는 어떤 허풍쟁이가 저런 허튼소리를 했는가 싶어 아연했다가 종내 그 말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글을 남긴 사람이 매헌 윤봉길이었고 그의 삶이 과연 저 말과 부합했기 때문이다. '조문도 석사가의'를 문자 그대로 목숨을 바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아, 그렇구나. 죽기를 기약하지 않고는 도를 들을 수 없는 것이로구나. 그렇다면 저녁에 죽고자 함은 아침에 도를 듣기 위해서구나. 이 사람은 논어를 제대로 읽었구나. 논어에 이르길 지사(志士)와 인인(仁人)은 삶을 구하기 위해 인(仁)을 해치는 일은 없고 자신을 죽여 인을 이룬다 하지 않았던가.그는 1930년 3월 6일 고향 예산을 떠나 중국 상해로 망명했는데 2년 뒤 일제가 상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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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칼럼]오지 않은 학생들의 이야기 지면기사
저마다 다른 사연으로 결석한 학생열외자·꼴찌들의 이야기에 가까워내가 궁금한 이유는 재미있기 때문모든 것을 던져 이룬 일등의 성취사람들 삶을 보려하지는 않아…지난 학기 학교 축제 기간 중 강의에 출석하는 학생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강의를 듣기 위해 한결같이 출석하는 성실한 학생들을 바라보고 정성을 다해 강의했지만 나오지 않은 학생들에게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왜 결석했을까? 나는 강의 들으러 온 학생들이 왜 왔는지는 궁금하지 않았지만 결석한 학생들의 사정은 무척 궁금했다. 학생들이 강의에 출석하는 이유는 거개가 같을 테지만 결석한 이유는 다 다를 것이었기 때문이다.축제가 끝난 뒤 나는 지난 시간 출석하지 않았던 학생들에게 무슨 재미난 일이 있어서 강의에 나오지 않았는지 물어보았다.한 학생은 신종 독감에 걸렸는데 친구들에게 옮길까 봐 안 왔다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이 학생은 친구들의 건강을 염려하는 이타적인 이유로 결석한 것이다. 거룩한 학생이다.또 다른 학생은 학과대표로 뽑혀 축구 시합에 나가느라 강의에 오지 못했다고 했다. 시합에 이겼느냐고 물었더니 아깝게 졌다고 했다. 나는 그 학생에게 축구에 인저리 타임이 있는 것처럼 내 강의에도 인저리 타임이 있으니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뛰라고 이야기했다.또 한 학생은 게임을 하느라 밤을 새워서 아침에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아주 솔직한 학생이다. 자신에게 불리함에도 진실을 밝힌 학생에게 칭찬을 해주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또 어떤 학생은 미리 나에게 사정을 알리고 허락을 구했다. 학교에서 개교 7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이 있어 티켓을 신청했는데 운 좋게 당첨되었단다. 무슨 공연인지 물어보았더니 무려 프랑스 오리지널팀을 초청하는 레미제라블 뮤지컬이란다. 나라도 강의 빼먹고 갈 것이라고 이야기해줬다.또 병무청 신체검사를 받느라 참석하지 못한 학생도 있었다. 국가의 정당한 부름에 따른 이런 학생은 국가가 보호해야 할 것이다.결석하지 않고 강의실에 온 학생 중에는 지난밤 학과 주점에서 과음한 탓에 강의시간 내내 책상에 엎드려 잔 학생도 있었다. 내 강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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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칼럼]아버지의 아버지생각 지면기사
커다란 고무신 물끄러미 바라보며할아버지 그리워하던 아버지 얼굴그후로 기억에서나마 만날수 있어공광규 시인 '소주병' 뜻밖에 읽고초라해진 나의 부친 초상과 같았다"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가 읽던 책을 읽지 못하는 것은 손때(手澤)가 남아있기 때문이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가 쓰던 그릇을 쓰지 못하는 것은 입때(口澤)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유학의 고전 '예기'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왜 아버지의 경우에는 '책'이고 어머니의 경우에는 하필 '그릇'을 예로 들었는지 다소 유감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 문제를 따지는 일은 다른 기회로 미루기로 하자. 어쨌거나 이 말은 지금 곁에 없는 어떤 사람을 추억하는 데 평소 그가 애용하던 사물이 때로 긴요한 역할을 한다는 작은 진실이 담겨 있으니 말이다.나에게도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사물이 있다. 나는 중학교 시절 이후로 지금껏 서울에서 살고 있지만 이곳에서 아버지와 함께한 기억이 거의 없다. 내가 어릴 때부터 집을 떠나 서울에서 홀로 생활했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아버지가 서울에 오신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어쩌다 학교에서 학부모 면담이라도 하게 되면 아버지가 올라와서 선생님을 만나곤 했고 그런 경우는 일 년에 한두 번도 되지 않았다. 그만큼 아버지는 생전에 서울 땅을 밟아본 적이 별로 없었다.아무튼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을 적 진학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아버지가 서울에 왔을 때의 일이다. 둘이서 시장 길을 지나고 있었는데, 문득 아버지가 보이지 않기에 뒤돌아보았더니 아버지는 어느 가게 앞에 우두커니 서 계셨다. 뭘 보시나 했더니 아버지의 눈길은 신발 가게에 진열된 커다란 고무신에 멈춰 있었다. 그리곤 혼자 말처럼 "아버지가 살아계시면 저 고무신을 사다 드릴텐데…" 하셨다.어촌의 농사꾼이었던 할아버지는 발이 유난히 컸다. 그 때문에 꼭 맞는 신을 구할 수 없어서 고무신 뒤축을 가위로 잘라서 신고 다니기 일쑤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장이 들어서는 날이면 큰 고무신을 찾아 돌아다니곤 했지만 물자가 부족하던 시절이라 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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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칼럼]어벤져스와 초원의 집 지면기사
예나 지금이나 '히어로물'에 열광원더우먼등 에피소드는 기억 안나가족이야기 다룬 '초원의 집' 인상공동체의 평화, 영웅의 헌신 아닌가난한 사람 협력으로 지켰기때문마블 스튜디오에서 만든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6일 한국 관객 수 천만을 돌파했다고 한다. 이번 작품은 동명의 시리즈뿐 아니라 영화 역사상 최고의 흥행을 기록할 전망이란다. 영화의 줄거리는 기존의 히어로물과 별 차이가 없다. 캡틴 아메리카를 비롯하여 아이언맨, 토르, 헐크, 호크아이, 블랙 위도우 등 이른바 슈퍼히어로들이 한 팀이 되어 악의 세력으로부터 지구를 지킨다는, 매번 같은 이야기다.예나 지금이나 히어로물에 열광하는 이유는 늘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가 그만큼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들 개인의 능력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곤경에 처했을 때 어디선가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영웅이 나타나 자신을 구해주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다만 전에는 탁월한 히어로 한 명이면 너끈히 지구를 지킬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만큼 악의 무리도 힘이 커져서 한 명으로는 턱도 없다. 이른바 드림팀을 이뤄서 단체로 달라붙어야 간신히 이기는 지경이 된 것이다.나 또한 어린 시절부터 이런 종류의 드라마를 자주 보았는데 중학생 무렵에는 '육백만불의 사나이', '소머즈', '원더우먼' 등 주로 초능력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미국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다. 매주 빼놓지 않을 정도로 즐겨 보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단 한 개의 에피소드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매번 지구를 구하는 식상한 이야기가 반복되었기 때문일 것이다.반면 당시 미국 드라마 중 서부 개척시대의 가족이야기를 다룬 초원의 집은 그다지 자주 보지 않았는데도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몇 개 있다. 그중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이야기를 소개한다.어느 날 주인공 소녀의 아버지가 거부였던 먼 친척으로부터 상속을 받게 되자 고요하고 평화롭기만 하던 마을에 심상찮은 변화가 일어난다. 아버지는 졸지에 유명인사가 되어 가는 곳마다 극진한 대우를 받는가 하면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은 말할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