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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호근 칼럼] 사당동 추억

    [전호근 칼럼] 사당동 추억 지면기사

    우리 가족은 1990년대 초반부터 줄곧 서울 사당동에서 살고 있다. 교통이 편리해 이곳저곳 출강하던 시간강사 시절의 나에게 안성맞춤이기도 했지만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점이 있었던 것도 좋았던 점 중 하나다. 아파트 초입 삼거리에 태성루라는 중국음식점이 있었는데 칠순이 넘은 노부부가 운영하고 있었다. 구슬이 꿰어진 주렴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가면 테이블 두 개와 온돌이 있었는데 손님이 꽉 차도 열명 정도 간신히 앉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이었다. 작고 이름 없는 식당이었지만 음식은 정갈했고 특히 자장면이 맛있어서 나는 휴일이면

  • [전호근 칼럼]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는 대통령

    [전호근 칼럼]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는 대통령 지면기사

    얼마 전 이재명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올리버 트위스트를 언급했다는 이야기를 접하고 적잖이 놀랐다. 이 나라에서 직위가 가장 높은 이들이 국정을 토론하는 자리에서 올리버 트위스트라는 이름이 등장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뒤늦게 유튜브에서 영상을 찾아보았더니 사실이었다. 대통령의 해당 발언은 김영훈 노동부 장관과의 대화 중에 나왔다. “제가 어릴 때 ‘올리버 트위스트’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는데, 어릴 때는 몰랐는데 나이가 들어서 알고 보니까 그게 소년 노동의 잔혹함을 풍자한 책이었어요.” 이어서 이 대통령은 노동자 사

  • [전호근 칼럼]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다

    [전호근 칼럼]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다 지면기사

    지난 7월14일, 동양철학 연구자 이현구 선생이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저명한 학자는 아니었다 하겠으나 동양철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선생의 책을 읽지 않은 이가 드물 것이다. 선생이 30여 년 전에 펴낸 ‘동양철학 에세이(김교빈·이현구 공저, 동녘)’는 그야말로 해당 분야의 베스트셀러였고 지금까지 명저로 손꼽히는 책으로 이 책을 읽고 동양철학에 입문한 이가 심심치 않게 있는 걸 보면 선생이 학계에 기여한 공이 적지 않다 하겠다. 선생은 기철학 연구에 평생 매진한 탁월한 연구자였다. 특히

  • [전호근 칼럼] 가장 어려운 강의

    [전호근 칼럼] 가장 어려운 강의 지면기사

    지금까지 강의를 하면서 진땀 흘렸던 기억이 몇 차례 있다. 가장 먼저 나는 기억은 2008년 세계 철학대회가 아시아권 최초로 우리나라에서 열렸을 때이다. 그때 나는 중등부 철학 올림피아드 강의를 담당했다. 청중은 중학생들이었지만 철학 올림피아드에 참가한 학생들답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레는 마음도 잠깐, 나는 강의를 진행하면서 적잖이 당황했다. 학생들이 내가 하는 이야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직감한 나는 청중의 주의가 흐트러질 때 으레 쓰는 나만의 필살기(?)까지 동원하면서 안간

  • [전호근 칼럼] 가난한 이들의 성자

    [전호근 칼럼] 가난한 이들의 성자 지면기사

    불교 경전 중 하나인 ‘금강경’을 처음 접했을 때 무척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첫번째 이야기를 전하는 다음의 기록을 읽고서이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인가 세존(世尊)이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머물며 제자들과 함께 하셨다. 이윽고 밥때가 되자 세존은 장삼을 걸치고 바리때를 든 채 사위국 성으로 들어가 성안에서 걸식(乞食)하셨다’. 나는 ‘걸식어기성중(乞食於其城中, 성안에서 먹을 것을 구걸했다는 뜻)’이라는 여섯 글자를 읽으면서 눈을 의심했다. 석가세존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기수급고독원은 사위국의 태자였던 기타와

  • [전호근 칼럼] 층간소음

    [전호근 칼럼] 층간소음 지면기사

    한달전쯤부터 밤마다 정체불명 소음 가족들도 같은 소리에 불안하다고 아내, 소음의 정체 알아낸거 같다며 몸 불편한분 보행기 미는 소리 같아 이웃집 소리는 살아있다는 신호다 우르렁 우르렁… 쿵! 한 달 전쯤부터 내가 사는 아파트 위층 어느 집엔가에서 밤마다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소음이다. 처음에는 먼 데서 울리는 천둥소리처럼 들렸는데 맑은 날에 그럴 리는 없기에 무슨 소린가 싶어 귀 기울여 들어보면 무거운 물건을 끌고 가다가 내려놓는 소리 같기도 하고 드릴로 벽에 구멍을 뚫거나 못질하는 소리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다. 물건을

  • [전호근 칼럼] 개소리에 대하여

    [전호근 칼럼] 개소리에 대하여 지면기사

    메타윤리학 업적 남긴 프랭크퍼트 강제된 악행도 도덕적 책임은 중요 내란사태 둘러싼 한국 사회 난장판 개소리는 거짓말과는 전혀 다르게 진실이 밝혀져도 계속돼 훨씬 위험 최근 한국 사회에서 갑자기 유명해진 미국의 철학자가 있다. 바로 메타윤리학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해리 프랭크퍼트 프린스턴 대학교 명예교수다. 일찍이 그는 악행에 대한 강제나 처벌과 상관없이 개인의 도덕적 책임은 여전히 중요하다는 통찰을 제시한 바 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강제된 상황이라면 범죄를 저지른

  • [전호근 칼럼] 과거는 어떻게 현재를 돕는가

    [전호근 칼럼] 과거는 어떻게 현재를 돕는가 지면기사

    계엄 이후 새해까지 시간 더디 흘러 남태령대첩·은박담요 두른 우주전사 세상 온갖 빛이 가득했던 이 겨울은 광장에 선 사람들의 연대일뿐 아니라 생명의 연대가 피어난 계절이었다고 지난해 12월3일 밤, 불법 계엄으로 시작된 내란 사태 이후 새해를 맞이하기까지 대한민국의 시간은 참으로 더디 흘렀다.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불법 계엄을 선포한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 가결, 직무 정지된 대통령 체포를 촉구하거나 반대하는 수십 차례의 집회와 시위, 새해를 사흘 앞두고 일어난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 [전호근 칼럼] 소년이 온다

    [전호근 칼럼] 소년이 온다 지면기사

    계엄선포에 평화로운 일상 산산조각 최고권력자의 어이없는 불장난 분노 45년만 반복된 비극, 희극으로 재현 한강 ‘소년이 온다’ 기시감 어른거려 올겨울, 내 안의 소년도 광장에 설 것 ‘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나와주십시오. 지금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함께 나와서 싸워주십시오. 그 목소리가 멀어진 지 십 분이 채 되지 않아 군인들의 소리가 들렸다. 그런 소리를 그녀는 처음 들었다. 박자를 맞춘 군홧발 소리, 보도가 갈라지고 벽이 무너질 것 같은 장갑차 소리, 그녀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 [전호근 칼럼] 선한 의지의 가치

    [전호근 칼럼] 선한 의지의 가치 지면기사

    근대 윤리학 서막 연 임마누엘 칸트 선한 의지, 행위 그 자체만으로 선해인류 평화 기원한 그의 철학과 달리 무력함 증언하듯 지구촌 곳곳에 전란 그럼에도 '선한 의지' 가치 줄지 않아 1724년 4월22일, 프로이센의 항구도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는 살아서 한 번도 자신의 고향을 벗어난 적이 없었으며 죽어서도 그곳에 묻혔다. 그는 평생 책과 논문을 쓴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그는 혼란을 종식시킨 위대한 정치가도 아니었으며 새로운 것을 발명하거나 생명을 구하는 약을 만들지도 않았지만, 그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을 때 도시 전체가 조종을 울렸다. 독자들이 짐작하듯 그는 바로 임마누엘 칸트다."이 세상 어디에서든 아무 제한 없이 선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선한 의지뿐이다. 선한 의지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만으로 무언가를 원하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 선하다. 비록 이 선한 의지가 자신의 의도를 실현할 능력을 전혀 지니지 못하며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선한 의지만 남는다 하더라도 선한 의지는 자신 안에 완전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보석처럼 빛난다. 유익함이나 무익함은 선한 의지의 가치에 아무것도 더하거나 뺄 수 없다."근대 윤리학의 서막을 알리는 이 문장은 칸트가 정언명령에 앞서 인간이 윤리적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자질인 선한 의지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밝히는 대목이다. 그는 '도덕형이상학 서설'에서 선한 의지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의지 자체가 선하기 때문에 가치를 지닌다고 이야기한다. 칸트는 종교적 신앙이나 공동체의 관습 등 기존의 권위가 모두 무너져 가던 혼란의 시대를 살면서 개인의 덕성이나 경향성에 의존하지 않고 누구나 따르기만 하면 윤리적으로 올바른 행위를 할 수 있는 법칙이 무엇일지 고민한 끝에 정언명령이라는 도덕률을 창안했다.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행위에 앞서 세 가지 단계의 판단을 거친다. 첫째,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다. 인간은 누구나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