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분단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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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수탈의 오랜 상처… 안양 박달동, 다시 '호랑이가 살던 마을'로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1)] 지면기사
광복 - 일제 안양~안산 병참기지 잇던 박달교 최적 요지 이유 '도로공사' 일부 건설 추정목조로 지어진후 미군 승계 콘크리트 재건 인근 기지 헬기장 사용… 전술핵 보관 기록도북측 난간 없어 큰 중화기 지나게 개축 흔적'박달2동' 호현동으로 변경 10월까지 투표안양시는 만안구 박달2동 이름을 '호현동'으로 바꾸려 한다. 오는 10월까지 조사에서 주민 다수가 찬성하면 박달2동 명칭은 호현동으로 바뀐다. 호랑이 호(虎)에 고개 현(峴)자를 쓰는 호현은 우리말로 하면 범고개다. 호랑이가 사는 고개에 있는 마을이라 호현동이라고 하는 것이다.박달동에는 모두 12개 마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고개와 가장 가까운 마을은 웃말(上村)이었다. 말 그대로 가장 위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윗말 주민이 호랑이에게 잡혀 죽자 아래쪽으로 이주했고 그곳에 정착지가 형성됐다. 현재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에 있는 조선 태종의 아들 후령군 이간의 묘도 이 지역에 있었다고 하니 박달동에 사람이 모여 산지 얼마나 오래됐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박달동 주민들은 음력 10월 2일에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호랑이에게 잡혀가지 않고 공생하길 바라는 데서 시작한 전통이었을 것이다.웃말 외에도 가장 위쪽에 있는 박달리라고 해서 불린 웃박달리, 부자가 많아 부자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붓골, 안개가 자주 끼어 선녀가 산다해서 붙여진 선녀골(이상 안양시지) 등 박달동 12개 마을이 사라진 건 1930년의 일이다. 안양에서 수원으로 후령군 묘역이 이장된 것도 같은 시기다. 바로 일제 강점기, 일제가 이곳에 병참기지를 만들며 마을이 사라졌다.지금이야 시흥에서 안양, 안양에서 시흥으로 이동하려면 고개를 우회하는 자동차 도로를 이용하면 되지만 일제시대만 해도 '곤두레미 고개'가 유일한 교통로였다고 한다(시흥문화대전). 안양시 박달동과 시흥시 목감동을 잇는 곤두레미고개는 강도가 많아 빨리 곤두박질치듯 지나가야 한대서 곤두레미라고 불렀다는 설과 곤드레만드레 취한 사람이 고개에 많아 곤두레미라고 했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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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돌베개… 애국지사들 '역사의 퍼즐' 찾아서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0·광복)] 지면기사
집터·묘소로 보는 독립유공자 파주 만세운동 주도 심상각 선생 집터·묘소종손 심재만씨가 지켜… 방문한 이들 '가이드"찾는 발길 줄지만 광복절 다시 손님맞이 준비학도병 탈출 6천리 여정·'사상계' 발간 장준하파주시, 통일동산 4천㎡ 터에 기념 공원·조형물아직 개발로 사라지고 방치된 공간들 대다수■ 심상각 선생 집터 뒷산의 묘소'애국지사 심상각 선생의 묘'파주시 광탄면 심상각 선생의 집터 뒷산을 10분여 올라가니 건국훈장 애국장 비석과 팻말이 선생의 묘소를 친절히 알려준다. 수풀이 우거져 있지만 팻말과 비석 덕분에 단번에 심상각 선생의 묘소를 찾을 수 있었다.1919년 3월, 우산 심상각 선생은 파주 만세운동을 주동한 인물 중 하나다. 광탄면사무소 앞에 집결한 2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고 봉일천리 장터에 있던 1천여명과 합세해 봉일천 헌병주재소를 습격했다. 파주 만세운동은 경기 북부지역 최대 규모였다고 전해진다.격렬한 만세운동 이후 심상각 선생은 중국 상해로 망명해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당시 상해임시정부 내무부 장관인 박찬익 선생의 협조로 합류한 심상각 선생은 상해에서도 독립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심상각 선생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건 약 15년만이었다. 심상각 선생은 국내에 돌아와서 신간회에 가입해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파주 광탄면에 광탄보통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역임하는 등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광탄보통학교에 관한 별도 기록이 없기 때문에 설립 및 운영과정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그후 심상각 선생은 자신과 함께 만세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동지들을 위한 위령제를 하는 등 애국지사 선양사업에 힘쓰다가 1954년 11월 9일, 향년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심상각 선생의 집터와 묘소는 선생의 종손인 심재만(82)씨가 지키고 있다. 집터 바로 옆에 지은 집에서 살고 있는 심재만씨는 할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해 찾는 이들을 위한 '가이드'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다.심재만씨는 심상각 선생이 독립운동가로 인정받게 된 문서와 사진자료 등 그동안 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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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개발에 '허물어진 역사(歷史)'… '만세운동 주춧돌' 기억을 세우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9)] 지면기사
광복 - 집터로 보는 독립유공자 파주 3·1운동 주도 심상각 선생집터 소실… 안내판·표창장 남아수원 김세환·이선경 선생도 비슷道, 유적지 실태조사·보존 노력다른 방식이라도 기억할 곳 필요"3월 28일, 파주 군민은 봉일천 장으로!"1919년 3월 28일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 대규모 시위는 파주시의 대표적인 3·1운동으로 꼽힌다. 3월 10일 와석면 교하리 공립보통학교의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27일 청석면 만세 운동이 이어져 28일 봉일천 장날 만세운동이 촉발됐다.봉일천 장날 만세 시위대는 봉일천 시장으로 향하면서 3천여명으로 규모가 불어났다. 봉일천 만세운동은 헌병주재소와 면사무소 등 일제 통치 기관을 공격하면서 가장 격렬한 시위로 기억에 남았다. 만세 시위대는 광탄면사무소 앞에 집결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봉일천 시장으로 행진해 군중과 합세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봉일천 장날 만세 운동의 중심엔 우산 심상각 선생이 있었다. 시위는 심상각 선생이 기획했으며 김웅권, 권중환, 심의봉 등 19명이 주축이 됐다. 그들의 회의 장소는 파주시 광탄면 신산리 58-1번지. 심상각 선생이 살던 집이었다. 심상각 선생의 집에서 시위 주축 19명은 동지회를 조직하고 시위 시기, 작전 등을 수립하고 일본의 감시를 피하면서 파주 주민들에게 전달했다.지난 26일 파주에서 만난 심상각 선생의 손자 심재만(82)씨는 "경찰 때문에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만세 시위를 기획했다고 들었다"며 "조부님이 시위를 이끌면서 사람들이 집으로 모여 회의를 많이 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심재만씨는 봉일천 만세시위가 파주 탄현면, 적성면, 법원읍 등 지역 곳곳의 대표들이 모여 주도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주민들의 대다수인 농민들도 참여해 주축을 이룬 점을 강조했다.심상각 선생은 만세 시위를 벌이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고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이후 귀국해 파주시 광탄면에 광탄보통학교를 설립, 후학 양성에 힘썼다. 박정희 정부는 심상각 선생에 지난 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고 노태우 정부도 1991년 건국훈장 애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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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노역의 상처 잊혀도… 연천 폐터널 역고드름은 기억한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8)] 지면기사
일제 경원선 철도노선 일부… 현재 교각·터널만 남아 6·25 당시 탄약고… 폭격 균열로 특이 자연현상 발생유사사례 일본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관광지 변모역사적 의미 되새겨야… 착취 역사 재조명 노력 강조연천군 신서면 경원선 폐철교에서 남쪽 방향으로 200여m. 여기에 연천 폐터널이 있다. 조금만 더 이동하면 강원도 철원이다. 일제 강점기, 서울 용산에서 출발한 경원선은 연천~철원을 거쳐 원산까지 이어졌다.콘크리트 교각만 남은 철교 흔적과 인접한 폐터널은 일제가 기획한 추가 노선의 흔적으로 보인다. 폐터널 서쪽으로 경원선이 지나는데 1912년 경원선 개통 이후 새로 터널을 뚫어 신규 노선을 신설하려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는 의도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철도도 사라져 교각과 터널만 남아 있을 뿐이다.연천 폐터널 역고드름은 6·25 전쟁 당시 미국의 폭격으로 터널 상판에 균열(7월 2일자 11면)이 생기면서 나타났다. 위에서 아래로 맺히는 게 일반적인 고드름인데 균열 사이로 물이 흐르며 바닥에서 위로 솟는 모양의 역방향 고드름이 형성된 것이다. 길이 100m, 폭 10m의 폐터널이 전쟁 당시 북한군의 탄약고로 활용됐기 때문에 폭격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철도용 터널로 만들어졌으나 노선 신설을 앞두고 일제가 패망하며 활용되지 않았고 잠시 탄약고로 쓰였다 폭격 이후엔 관광지가 됐다. 안전사고를 우려해 펜스가 둘러쳐진 지금은 터널 안으로 접근할 수 없다. 터널→탄약고→관광지로 변모하게 된 폐터널의 과거는 기구한 한국 근현대사와 포개진다.비슷한 운명이면서 더 알려진 사례도 있다. 경원선이 개통한 해(1912년)에 일제는 시흥광산 개발을 시작했다. 시흥광산은 황금광산으로 개발됐다. 191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수백kg의 황금이 이곳에서 발굴된 것으로 전해진다. 1972년까지 쓰인 시흥광산은 이후 최근까지 40년 동안 새우젓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였다. 동굴의 저온이 저장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경기도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탈바꿈한 이곳은 광명동굴이다. 황금광산과 새우젓 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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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 도구에서 평화 상징으로… 경원선 연천역 철마는 분단 딛고 통일 향한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7)] 지면기사
1912년 일제 대륙 침략 목적 이용 개통 수송 크게 기여… 6·25 후 일부만 운행남북정상회담 당시 복원 논의·현재 중단이제는 관광지… 주민들 철도연장 희망■ 수탈을 위해 탄생한 철도, 그리고 경원선경원선 연천역이 문을 연 건 1912년 7월 25일 일이다. 용산과 의정부를 거쳐 연천으로 이어진 경원선은 철원을 넘어 북한 원산까지 연결됐다. 경원선은 서해안과 동해안을 서북으로 횡단해 두만강에서 일본의 서북지방~한반도~만주 동북부 지역을 잇는 간선철도였다. 전구간 222.7㎞로 일본이 대한민국을 강제병합한 직후 착공된 경원선의 목적은 다름 아닌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만드는 것이었다. 경원선의 착공과 동시에 일본은 호남선의 착공도 추진했다. 이전에 개통된 경부선(용산~부산), 경의선(용산~신의주)까지 포함해 일본의 'X자' 철도망이 완성됐다. 19세기 말부터 이어오던 일본의 대륙침략 구상의 시작이었다.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따르면 철도를 통한 화물 수송량은 1910년 90만3천t에서 1940년 2천562만5천t으로 증가했다. 경원선은 경부선과 경의선의 뒤를 이어 3번째로 많은 화물량인 199만8천여t을 수송했다. 경원선을 이용해 다량의 화물이 서울에서 원산을 통해 일본과 대륙 방면으로 원거리 수송이 이어졌다.일제시기 철도가 운반했던 화물은 식민지 경제의 단면을 반영한다. 1910~1930년대까지 철도에 의한 물자 수송은 농산품이 압도적이었고 공산품도 2배 이상 증가했다. 대전을 중심으로 연결된 경부선과 호남선은 전라도의 농산물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주요 교통로였다. 또한 경부선과 경원선 등을 활용해 일본과 만주를 빠르게 연결해 병참노선화했다.수탈의 창구로 사용된 경부선과 호남선은 현재 주요 교통로가 됐고, 경의선과 경원선 일부는 전철로 시민의 발이 됐다.■ 분단의 아픔이 평화의 상징으로경원선 연천역은 위도 상 38도 위에 있어 6·25 전쟁 이전에 소련군정과 북한에 속해 있었다. 연천역이 있는 연천읍 차탄리는 일제강점기와 북한 점령기에 연천군 전 지역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지만 전쟁 후 연천군 대부분이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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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유정수씨 일기 속 국민방위군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6)] 지면기사
눈물도 얼어붙은 행군… 70여년 묻혀있던 참혹한 비극 졸속·급조 동원 민간인들, 영하 기온서식량도 피복도 없이 '남쪽 이동' 강요"해골같은 꼴로 1만명 이상의 장정들 전염병에 학교강당, 사과창고서 숨져"정부 무능·관리부실에 대규모 피해시간 흘러 과거기록 찾기도 쉽지 않아스물 다섯 유정수는 1950년 12월 23일 오전 8시 수원공설운동장에 섰다. 미 공군 기록(USAF)에 따르면 당시 기온은 영하 1도, 한낮 최고기온이 영상 2.4도에 불과했다. 특히 그가 행군을 한 새벽시간은 영하 4도까지 기온이 떨어졌다. 변변치 못한 옷차림에 체감 기온은 훨씬 더 떨어졌을 것이다.유씨는 방위군이었다. 6·25 발발로 급하게 동원된 '국민방위군'이었다.다음 주면 6·25 발생 74년을 맞는다. 비교적 상세한 국군의 행적에 비해 제대로 된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은 국민방위군의 실상은 지난 2020년 경인일보가 발굴한 고 유정수씨의 일기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유씨 기록을 제외하곤 '전환시대의 논리'를 쓴 리영희(1929~2010) 교수와 고 정진석(1931~2021) 추기경의 증언이 그나마 알려진 편이다.정 추기경은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국민방위군 징집이 종교의 길에 들어서게 된 계기라고 설명했다. 1950년 12월 말 서울 창경원에 모여 남양주 덕소에서 꽝꽝 언 남한강을 건넜던 일이다. 폭설에 눈 위에 지쳐 쓰러져 있다 겨우 강을 건넜는데 얼음이 깨지며 뒤쪽에 있던 무리가 빠져 죽은 것이다. 하루 10시간 이상 걸으며 주먹밥으로 겨우 끼니를 때우고 앞선 사람이 지뢰를 밟아 죽는 모습을 보는 고행이었다.리 교수의 증언도 일맥상통한다. 국민방위군이 진주로 남하했는데 해골같은 꼴을 한 만명 이상 장정이 학교강당, 사과창고에서 죽어간 것이다. 감자 한 알, 고구마 한 개로 겨우 남쪽에 다다랐지만 옷은 누더기에 신발은 해어져 맨발이었고 사람이 넘쳐 교실에 수용되지 않은 사람은 밖에서 얼어죽어야 했다.참상이었다. 이 비극의 원인이 된 국민방위군은 무엇인가. 정 추기경, 리 교수, 그리고 유씨는 왜 국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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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치의 미래, 철거냐 보존이냐… 도심 속 '분단 그림자' 평화 꿈꾼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5)] 지면기사
전차 침입 막는 용치, 고양 덕은동·파주 법원읍에도 설치 지역발전 저해·수해 유발 단점 불구 근대문화유산 가치사진전 개최·공원 조성… 지역사회 일부로서 '공존' 모색태양열 발전기 등 제3의 새로운 활용방안 논의 필요 시점고양시 덕양구 덕은동에 위치한 고양쌍굴(4월 30일자 5면 보도=시간 관통한 '고양 쌍굴'… '역사가 들려주는' 조용한 증언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2)]) 중 하굴 입구에는 2m는 족히 넘어 보이는 콘크리트 돌덩이들이 놓여 있다. 하굴은 폐쇄된 상황에 발목 높이만큼 물이 차 있었고, 사람의 흔적은 온데간데 없이 우거진 풀숲에 뒤덮인 채 벌레들이 날고 있었다.3일 고양시 덕은동에서 발견한 콘크리트 돌덩이는 마치 하굴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굳건했다. 돌덩이는 전쟁의 상흔 중 하나인 용치다.용의 이빨(dragon teeth)을 닮았다고 이름이 붙여진 용치(龍齒)는 적군의 전차 침입을 방어할 목적으로 접경지 하천이나 개활지, 얕은 능선에 설치된 대전차 장애물(2023년 2월 7일자 11면 보도)이다. 1968년 김신조 침투사건을 계기로 1970년대부터 설치된 것으로 알려졌다.50여년간 방호벽으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용치는 그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도 부지기수다.덕은동에서 나고 자라 식당을 운영하는 정모(56)씨는 "어릴 적에 하굴의 기찻길과 용치에서 친구들과 놀고 데이트도 했기 때문에 추억의 장소"라면서도 "요즘은 용치 자체를 모르는 주민들도 많다"고 말했다.접경지 하천이나 얕은 능선에 설치돼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용치도 있었다. 지난달 31일 파주시 법원읍 직천리 용치를 찾았지만 쉽사리 발견하지 못했다. 도로를 따라 대전차 장애물인 도로 낙석이 설치돼 있는데 용치는 도로 옆 비탈길 풀숲에 숨어 있었다.직천리 용치에 가까이 가기도 쉽지 않았다. 비탈길을 내려가도 목까지 올라오는 작은 나뭇가지들과 덩굴들로 접근할 수 없었다. 대부분 용치들은 접근성이 떨어지는 우거진 수풀에 설치돼 잊히기 십상이다.■ 갈등의 원인은 철거해야 vs 근대문화유산으로 재해석해야용치는 대전차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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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 험프리스 지근거리 '선말산·부용산' 방공호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4)] 지면기사
용산에서 평택까지 역사, 시민 품으로… 과거·현재를 톺아보자 1942년 일본군 보급용 비행장 건설하며 조성6·25땐 훈련장 활용… 1951년 미군 제공 협정市, 부지일대 공원·박물관 조성 방안 검토주변 유래·가치 알릴 팻말·안내판 등 없어휘황찬란 용산공원 청사진 비교하면 '초라'용산기지 반환이 결정된 건 2003년의 일이다. 한미 정상이 용산기지 평택 이전에 합의했고 2005년 부지를 공원으로 조성하기로 했다. 2020년 기지 이전이 상당 부분 진행되며 공원 부지 일부가 개방됐다. 예약제이긴 해도 자유롭게 방문이 가능하다. 버스 투어도 이루어지며 방문객이 이국적인 장교 숙소 앞에서 찍은 사진은 SNS(사회관계망서비스)의 단골손님이 됐다.용산기지에 조성될 공원 면적은 300만㎡에 이르고 공원을 둘러싼 역만도 9개에 달한다. 메가시티 중심지에 거대한 공원이 들어서는 건 기념비적인 일이다. 특히 고려말 몽골군 주둔지, 임진왜란 시기 왜군 병참기지, 일제 강점기 일본군에 이어 해방 후 미군이 기지로 쓴 지역이 시민에게 돌아간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렇듯 미군은 용산을 떠나 평택으로 자리를 옮겼다. 미군의 새로운 주둔지 캠프 험프리스가 내다보이는 지근거리엔 일제 강점기 일본이 쓰다 미군이 물려받아 사용한 방공호가 남아 있다. 선말산, 부용산 방공호다. 선말산 방공호는 평택시 팽성읍 함정1리에서 함정2리 방향으로 남에서 서북쪽으로 산을 관통한다. 부용산 방공호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뻗어 있는 모양새다. 함정리 마을은 '서원말', '선말'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조선시대 화포 홍익한을 배향한 '포의서원'이 선말산 동남부 기슭에 있어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이곳의 방공호들은 1942년 일본해군시설대가 안정리와 함정1리 사이에 보급용 비행장을 건설하면서 조성됐다. 두 곳 방공호의 규모는 비슷하나 공사기법이 거칠고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선말산 방공호가 부용산보다 앞서 건설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부용산 방공호는 일제 패망 직전에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1951년 한국 정부가 미국과 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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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하게 숨 쉬는 역사' 수원 경기도청 옛 청사·파주 임진각 방공호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3)] 지면기사
벚꽃길·관광지 아래 위치한 호국보훈의 상징들 산책길 바로 밑 지하 1969년 조성 2022년까지 사용작년 경기기회마켓 개최·올해 보물찾기 미션 장소지역명소 중심부 군사용품·DMZ 등 내부 전시공간반지하주택 양식 기원… 대피시설 아닌 활용 '고민'■ 내가 걷는 산책로 바로 밑 비밀공간? 경기도 옛 청사 충무시설경기도청 옛 청사는 수원에서 손꼽히는 벚꽃명소 중 하나다. 팔달산 자락에서 매년 흐드러지는 벚꽃놀이를 즐길 수 있는 이곳 지하엔 사실 은밀한 공간이 있다. 산책길 바로 밑 지하공간엔 방공호가 숨어 있다.지난 3일 찾은 구청사 방공호(충무시설) 출입구는 주차장 구석 한쪽 가벽 뒤에 숨겨져 있었다. 방공호를 목적으로 찾아갔음에도 못보고 지나칠 뻔했다. 입구 주변부터 가벽까지 치렁치렁하게 덮고 있던 위장용 그물 덕분인지 더욱 눈에 띄지 않았다.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듯 색이 바랬어도 얼추 나뭇잎같은 모양새를 갖춰 팔달산을 타고 내려오는 이파리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이 방공호는 1969년 조성된 것으로, 을지훈련 때마다 경기도청 공무원들의 비상대피시설로 쓰이다가 지난해 도청이 광교로 이전하면서부터는 사용하고 있지 않다.구청사 방공호는 총 2천231㎡ 규모로, 내부엔 9개의 방이 있다. 돔형의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좌우로 연결된 통로를 따라가는 구조다. 내부에는 습기 제거를 위해 샤워커튼과 제습기를 가동한다.방공호, 지하시설이라고 해서 어두컴컴하고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한 공간을 생각했다면 구청사 방공호를 보고 놀랄 수도 있다. 일반 건물의 내부라고 해도 믿을만한 깔끔한 회색 복도가 펼쳐지기 때문이다.도청사가 자리를 옮긴 2022년 이전까지만 해도 사용하던 공간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구청사 방공호의 굳게 닫힌 출입문과 '제한구역. 공무 외 출입금지'라는 딱딱한 문구만 보고선 내부에 이런 공간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게 당연하다.물론 이처럼 일반 도민에게 생소한 미지의 공간에 입장하는 게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평상시 구청사 방공호를 걸어 잠그고 있는 자물쇠가 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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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관통한 '고양 쌍굴'… '역사가 들려주는' 조용한 증언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2)] 지면기사
경성수색조차장~경의선 연결한 터널 백석 시인, 일제 강제동원 건설 '고난·강압적 지배' 시로 써 남겨통영해저터널·여수 마래터널, 단순 건축물 아닌 삶·희생 결과물미래세대 교훈적 의미 커… '비등록문화재' 보존·인식 노력 필요'옛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던 낡은 항구의 /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 이름이 많다…' 시인 백석이 쓴 '통영 1'은 이렇게 시작한다. 일제 강점기 저항시인이자 가장 널리 알려진 서정시인인 백석은 통영을 찾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였다.기자가 백석이 찾아간 통영을 방문한 건 2012년 일이다. '남행시초(南行時秒)'라 시인이 이름 붙인 동명의 시 통영엔 이런 구절도 있다. '화륜선 만져보려 선창 갔다 / 오다 가수내 들어가는 주막 앞에 / 문둥이 품바타령 듣다가 / 열이레 달이 올라서 / 나룻배 타고 판데목 지나간다 간다'일제가 가져다 놓은 거대한 배를 보러 선착장에 들렀다 만월이 된 바다에 나룻배가 지나가는 광경을 본 시인의 자취를 좇아 통영 밤길을 걸었다. 판데목은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수장시킨 그곳이 맞다. 판데목 수면 아래엔 일제 때 뚫린 '통영해저터널'이 있다. 길이 483m의 해저터널은 양쪽 물을 방파제로 막고 바닥을 파서 만들었다. 일본 거주인이 늘어나며 일본인의 필요에 의해 지어진 기반시설인데 공사는 조선인들이 맡았다. 1931년 시작해 1932년 공사가 끝난 해저터널을 걷다보니 품바타령이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어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저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공사과정에서 죽어갔는지 모르겠으나 어찌됐든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의 위용은 대단했다.통영에서 조금 더 서쪽으로 가면 여수가 나온다. 2019년 여수에선 신기한 터널을 만났다. 1차로 밖에 없어 반대쪽에서 차가 오면 터널에 진입할 수 없는 '마래터널'이었다. 일제가 군량미를 저장하기 위해 뚫은 자연암반 터널이다. 정확히는 조선인과 중국인이 뚫었다. 중장비 없이 곡괭이와 정으로 만든 굴은 거푸집의 흔적이 없어 마치 자연히 형성된 동굴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