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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적 칭찬을 많이 받았는데… 지면기사

    6월 월드컵 대회에서 우리 축구대표팀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우리 국민들은 월드컵을 통해 국제사회를 감동시켰다. 우리 역시 우리 국민들의 엄청난 에너지 분출을 보고 스스로 놀랐다. 모든 세계 언론들이 한국과 한국 국민들의 단결과 질서의식, 공정한 태도를 격찬하고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한일월드컵 대회의 “진짜 챔피언은 한국 국민들”이라고 결론을 내렸다.우리는 월드컵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는 이때 해외의 '칭찬 홍수'속에서 우리 자신을 새삼스럽게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국내 신문과 방송에 보도된 몇가지 대표적 사례들을 짚어 보며 생각해 보자.중미(中美) 에콰도르 기자의 월드컵 기간중 '한국 체류기'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한 어린이가 축구 경기가 끝난 후 먹고 있던 과자 봉지를 관중석 바닥에 던지고 일어섰다. 앞서 나가려던 엄마가 돌아섰다. 그리곤 아이에게 봉지를 줍게 하더니 쓰레기통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무언가 얘기를 해주는 것이었다. 너무나 교육적인 경험이었다. 이번 월드컵에서 터지는 멋진 골만큼이나 산뜻한 충격으로 다가왔다.”미국인 제프 제라드씨는 “한국인들은 광화문 거리응원에서 열광하다가도 승부가 갈린 뒤에는 침착하게 주변을 치웠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한국에 대해 호감 이상의 감정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수백만명이 참가했던 거리응원이 끝난후 쓰레기를 치우고 뒤를 정리하는 응원단들의 모습에 해외언론과 외국인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국인의 수준높은 시민의식을 칭찬했다.그러나 우리는 월드컵 대회 개막 전까지만 해도 많은 국내 경기장이 관중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로 뒤덮인 부끄러운 모습을 흔히 보아왔다. 이를 청소하는데 많은 환경미화원들이 밤을 새워야 했다. 여름 휴가철 유명 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은 음식물 찌꺼기와 쓰레기로 뒤덮였고 텐트촌 주변은 밤새 젊은이들의 고성방가와 취중난동으로 난장판이 되기 일쑤였다. 또한 젊은 엄마들은 “애들 기죽인다”고 공공장소에서 소란을 피우는 아이들을 야단치거나 제지하는 경우가 드물었다.이번 월드컵 대회 기간중 우리 국민이 보여준 질서의식과 공중도덕심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

  • 한국인으로 산다는것의 의미 지면기사

    축구영웅들이 '월드컵 4강 오디세이'의 신화를 써내려갔던 6월이 꿈결속에 지나갔다. 한국인은 '황홀한 6월의 기억'에서 깨어나기 싫어 7월의 첫머리를 영웅들을 위한 축제일로 바치고 있다. 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하루를 쉬었고 어제는 수도 서울이 온통 개선 영웅들을 맞는 환희로 넘쳤다. '대~한민국이여 이대로만 영원하라'고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외치고 있었다.축제는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영웅들이 그들의 모험에 마침내 웅장한 마침표를 찍으려던 그날 신은 우리에게 값진 희생을 요구했다. 우리의 '주적(主敵)'이 겨눈 정조준 포화에 꽃보다 아름다운 젊은 영혼들이 우리 곁을 떠났다. 7월의 첫머리에 우리는 찬물을 뒤집어 쓴 채 냉정한 현실이 우리 것이었음을 깨달아야 하는 잔인한 하루 하루를 살고 있다.같은 시간, 같은 장소인데도 우리는 축제를 즐기는 사람이기도 하고, 비극에 분노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월드컵 찬가(讚歌)에 환호하면서 냉전(冷戰)의 장송곡에 고개를 숙여야 하는 우리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인류와의 공존을 희망하는 발신부호이지만 '대한민국'은 적과 대치중인 긴장된 공간의 상징이기도 하다. 태극기는 월드컵 패션이면서도, 전사 장병의 관을 휘덮고 있을 때는 여전히 수호해야 할 절대(絶對)의 표상이다.지금 국민들은 축구영웅들의 4강신화 대장정으로 시작해 서해상의 작은 전쟁으로 매듭된 6월을 보내고, 그 축제와 전쟁이 남긴 희비의 감정을 어떻게 추슬러야 할지 난감한 심리상태에서 7월을 시작하고 있다. 성취감과 낭패감을 동시에 처리해야 하는 감정 과부하 상태에 걸린 셈이다. 자연히 한국인으로서 21세기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삶의 정체성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나의 기호와 상징에 대한 해석이 극(極)을 달리하고, 같은 공간에서 축제와 전쟁을 같이 치러야 하는 우리는 삶의 좌표를 어디에 맞추어야 할 것인가. 글쎄, 어차피 현실을 인정하는데서 삶의 좌표를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의 공간과 시간을, 그리고 우리의 기호와 상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 'W세대'의 저력 지면기사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난 것이 너무 자랑스러워요. 지구상의 그 어떤 나라도 부럽지 않아요' '그동안 조국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이젠 정말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감격할 따름입니다'. 박지성 안정환 홍명보의 슛이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의 골문을 흔들면서 파죽지세로 한국팀이 승승장구할때 감격의 모습을 지켜보던 이른바 '월드컵 세대'들이 눈물을 왈칵 쏟아내며 하는 말들이었다. 태극기로 만든 ‘배꼽티’를 입고 열심히 응원하는 스무 살의 여성,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승리의 환호 속에서도 어디서 나타났는지 주변을 열심히 청소하는 청소년들, 저마다 얼굴에 갖가지 태극문양을 하고 '대~한민국'을 죽어라 외치는 중학생들.정말로 한국에서 태어난 것이 이유없이 무조건 좋고 자랑스런 우리의 'W(WorldCup)세대'들이다. 현재로서는 아무런 걱정도 없는 세대다. 붉은 악마에서 '레드 콤플렉스'를 느끼는 기성세대들의 고정관념마저도 타파시킨 무서운 청년들이 아닐 수 없다. 공산주의자를 연상시켰던 빨간색을 '정열'과 '환희'의 상징으로 변화시킨 내재적 힘을 가진 그들이다. 태극전사들의 경기가 있을 때마다 100만명에서 시작해 700만명까지 건국 이래 최대의 인파를 거리응원의 장(場)으로 이끌어낸 괴력의 소유자들이다. 20여년전 검정교복에 빡빡머리로 연상되는 475세대(40대 70년대학번 50년대출생)들은 교련반대시위를 벌였다. 386세대는 15년전 광화문 그 자리에서 '호헌철폐, 직선쟁취'를 외치며 6월 항쟁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 그 자리에서 애국가와 아리랑을 록 음악에 맞춰 부르는 'W세대'를 보노라니 감회가 새롭다.응원인파가 거리를 뒤덮었다는 의미에서 ‘거리응원 세대’로도 불리는 이 젊은이들은 '대한민국이니까 그렇지, 뭐'하며 매사에 자조섞인 불평을 늘어놓던 기성세대들의 푸념들을 일순에 날려버렸다. 딱딱하기 이를데 없었던 '국가'와 '애국심' 그리고 '태극기'라는 단어들을 사랑스럽고 친근하도록 만들었고, 국가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선생님이 하라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참여하는 자발적인 국민적 축제에

  • 더 성숙한 사회를 향해 지면기사

     온 나라가 월드컵 열기로 뜨겁게 달아 오르고 있다. 일터에서, 학교에서 혹은 거리에서조차 어느곳 어디에서나 화제는 단연 월드컵이다. 또 한국 대표팀의 승전보에 온 국민이 열광하고 환호한다. 밤하늘에 폭죽이 터지고 응원단의 함성이 넘쳐 흐른다. 거리는 붉은 물결로 뒤덮이고 뜨거운 열정이 가득하다. 하여간 즐거운 시간이 흐르고 있다. 월드컵 경기는 경제위기 이후 침체됐던 사회분위기를 바꾸는 일대 사건이었으며 배움의 터였다. 우리 대표팀은 꿈에 그리던 16강 진출을 일궈내면서 우리에게 '하면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알려줬고 자긍심을 심워줬다. 그리고 희망을 갖고 도전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 일으켜 주기에 충분했다. 한편으로는 월드컵 경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변화를 감지하고 놀랐다. 다름아닌 붉은악마의 응원이며 이에 동참하는 전 국민의 열기 때문이다. 응원문화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고 창조적이란 단어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붉은 티셔츠를 입은 응원단이 매 경기마다 수백만명씩 거리응원에 나서는 모습은 이전만 해도 우리의 모습은 분명 아니었다. 속내를 행동으로 표현할 줄 아는 자유분방한 생활양식이 어느 틈엔가 우리의 생활속에 파고 들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이제까지 감춰졌던 우리의 참모습이 숨어 있었다. 인파의 환호속에 성숙한 질서의식, 열기속에서 느껴지는 일체감과 동질성이 바로 진정 우리의 모습이었다 할 수 있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이 벌어진 날 거리는 400만명이 넘는 응원인파가 모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부탁한 일도 아닐 것이다. 국민들은 그냥 좋아서 했으며 이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 잠재해 있던 역동적인 힘의 원천이 분출된 통일된 행동 양식으로 분석된다. 여기서 우리는 변화의 트렌드를 감지할 수 있다. 부언하면 우리사회가 유행을 따라가는 시대에서 유행을 만들어 가는 패션사회로 변하는 전환점에 있다는 점이다. 거리의 붉은 물결은 19세기 중엽 이탈리아 통일운동 당시 가리발디에 의해 창설됐던 '붉은 셔츠단'이란 애국단과는 전혀 다른

  • 다음은 정치 차례다 지면기사

    지금 온 나라, 모든 국민의 화제는 단연 월드컵이다. 내일로 닥친 지방선거나 대선 정국의 이야기는 뒷전에 밀린지 오래다. 월드컵 경기가 없었다면 무슨 재미로 이 어지러운 세상을 보낼 수 있을까. 때이른 6월의 무더위를 넘기는데 더욱 허덕이지 않았을까. 무슨 무슨 '게이트' 추문에 분노하고 계속되는 부정부패, 비리사건에 놀라야 했던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줄 만한 것은 그동안 아무것도 없었다.그러나 우리 축구팀의 월드컵 선전(善戰)은 이 모든 시름을 날려버렸다. 한국 축구사의 새로운 신화가 시작되면서 국민들은 민족적 자긍심을 되찾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거국적 응원을 통해 국민이 하나 되고 우리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귀중한 체험을 갖게 됐다. 월드컵 대회와 우리 대표팀의 승리는 기적과 같은 놀라운 일들을 만들어내고 있다.이런 가운데 월드컵 대회가 끝나면 어떻게 하나 벌써부터 걱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게이트'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정치판의 이전투구가 재등장할 것을 염려하는 국민들이 많다. 이제 한국 정치에도 새로운 신화창조가 이루어져야 한다.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 국민들이 미래를 밝게 보고 기대할 수 있는 정치가 있어야 한다.이러한 '정치신화'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정치인과 정치지도자들이 히딩크 감독의 리더십을 배우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 지금 각계에서는 '히딩크학'을 연구하고 본받자는 것이 유행이라고 한다. 경제계에서 '히딩크 경영'을 기업경영에 접목시키기 위한 방안을 찾고 있다고 한다. 히딩크 리더십은 사실 따지고 보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우리도 알고 있는 원리 원칙을 소신껏 실천한 것에 불과하다.히딩크 감독은 '실력'을 대표팀 선수 선발의 최우선 기준으로 삼았다. 로비나 연줄, 기득권과 유명세 등을 철저히 배제했다. 그리고 기초체력 강화를 위해 혹독한 훈련을 반복했다. '월드컵 16강 진출'이란 비전을 제시하고 선수들을 독려했다.반면 우리 정치는 어떠했나. 정계에는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편승하는 병폐가 여전했고 연줄과 지연에 따른 파행인사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 한국정치, 월드컵에서 배워라 지면기사

    객석이 텅빈 무대에서 대사를 읊어야 하는 배우는 얼마나 외로울까. 관중이 없는 그라운드에 선 비인기종목 선수의 비애는 또 얼마나 클까. 6·13 지방선거를 앞둔 한국정치가 관객없는 배우, 관중없는 경기 꼭 그 꼴이다. 유권자의 관심이 모두 월드컵으로 쏠렸기 때문이라고 변명을 하지만 과연 그럴까. 한국정치가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경쟁력이 없기 때문이다. '퇴출의 벼랑'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부도난 정치'이기 때문이다. 아니 정치보다는 월드컵이, 정치인들 보다는 축구스타가 좋다는데야 할말이 없는 것 아닌가.국민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월드컵은 화합과 상생과 활력을 제공하는 이벤트다. 16강을 향한 염원으로 한국인은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뿌듯한 화합의 기쁨을 맛보고 있다. 97년 매서운 북풍을 타고 IMF위기가 급습했을 때 첫애 돌반지까지 달러로 바꾸면서 우리가 하나임을 느꼈던 벅찬 감동 이후 모처럼 맛보는 '하나'의 기쁨이다. 더구나 그때는 살기 위해서 하나가 되어야 했지만 이번에는 '업그레이드 코리아'를 위한 하나이니 감동의 차원이 더 높을 수밖에 없다. 또 이번 월드컵은 88서울올림픽 이후 모처럼 우리가 주인이 된 세계인의 축제다. 이번 월드컵을 통해 우리는 한반도와 아시아를 벗어나 명실공히 지구촌의 떳떳한 일원으로 등장했다. '한국'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세계'라는 열린 공간으로 진입해 지구촌 모든 국가와 민족과의 상생(相生)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우리가 하나'라는 감격적인 자기확인을 바탕으로 '세계인과의 상생'을 꿈꾸는 한국인은 그래서 요즘 활력이 넘치고 있다. '붉은악마'들의 정열적인 응원을 보라. 한반도에는 그 어느때 보다 국민적 에너지가 용솟음치고 있는 중이다.그러면 한국정치는. 시쳇말로 게임이 안된다. 월드컵이 국민에게 제공하는 화합의 기쁨, 상생의 희열, 미래를 향한 활력. 이중 하나도 제공하지 못한 채 거추장스러운 퇴물 취급을 받고 있다. 유권자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기네들 마음대로 텃밭을 나누어 표를 독점하려는 분열의 상혼(商魂)을 보이고 있다. 각 정당 지

  • 지방선거, 축제의 장으로 지면기사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그동안 우여곡절의 과정을 거쳐 지방자치가 출범한지도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선거판만큼은 변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조기과열과 혼탁이라는 단어는 선거때마다 등장하는 단골메뉴다. 선거문화가 갈수록 조금이라도 나아져야 하는데 더욱 타락하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최근까지 불법선거운동 등으로 입건됐던 지방선거사범은 모두 530명으로 지난 98년 지방선거를 한달 앞둔 시점의 40명보다 무려 14배 이상 늘었다. 현역 광역 및 기초지방자치단체장 16명도 불법선거운동을 한 혐의로 입건되기도 했다. 때문에 지방자치가 반드시 필요한가에 대한 회의도 생겼고 그동안 적지않은 사람들이 지방자치제도를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는 극한적인 주장까지 등장했다.검찰도 지난 13일 대검청사에서 전국 공안부장검사 회의를 열고 금품선거, 흑색선전, 공무원선거관여, 공직수행빙자 금품수수 등 '공명저해 4대 선거사범'을 집중 단속키로 천명했다. 검찰이 선거사범에 대한 철저한 단속과 공정한 처리를 통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초석으로 삼겠다고 벼르고 있는 것이다. 선거때마다 나오는 검찰의 발표이지만 선거현장이 어떻게 달라질지는 두고 볼 일이다. 선거사범을 뿌리뽑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선거문화를 바꾸는 것이 근본 해결책이지만 선거과열을 막기 위한 공명정대하고도 단호한 조치는 일단 검찰과 경찰 그리고 선거관리위원회의 몫일 수밖에 없다.특히 정치권에서 지방자치의 취지가 무색할 정도로 지방선거를 항상 대선의 전초전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도 과열, 혼탁의 요인이 되고 있다. 여·야도 잇따라 지방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6·13선거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이미 당 지도부가 총출동한지 오래여서 선거분위기는 과열되고 있다.아직 역사가 길지 않은 우리나라 지방자치제도의 정착과 발전을 위해서라도 지방선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구태여 풀뿌리 민주주의니 민주주의의 훈련장이니 하는 얘기를 끌어다대지 않더라도 지방선거는 성격상 전국선거인 총선이나 대선과는 여러 면에서 구별된다 할 것이다. 지역을 위해

  • 월드컵을 기회로 지면기사

    현재 우리의 위치는 어디에 있을까? 한마디로 불안과 희망이 교차하는 대로(大路)의 사거리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정치·경제는 물론이고 사회적으로도 무엇인가가 크게 폭발할 것 같은 불안과 위기감이 느껴지는 시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가적 큰 잔치인 월드컵이 목전에 놓여 있어 희망도 접할 수 있다. 그런데도 왜 이런 생각을 뇌리에서 떨쳐 버릴 수가 없는지 모르겠다. 우리에게는 아직 비전과 문제해결 능력이 있기 때문에 분명 그것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우리는 당장 대통령 아들까지 개입된 권력형 비리, 지방선거, 월드컵개최, 탈북자 문제, 국가 경쟁력 상실 우려등 큰 몇가지 문제로 몸살을 앓으면서도 돌출된 문제의 해결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최근 여론의 집중 비난을 받고 있는 최규선게이트와 분당 파크뷰 사전분양사건, 타이거풀스 로비사건 등은 우리 서민들이 감히 엄두도 낼 수조차 없는 비리 덩어리로 비춰지고 있다. 여·야를 넘나든 최규선씨의 녹음테이프 하나에 온나라가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술렁이고 있다. 대통령 아들까지 구속되는 일도 벌어졌다. 타이거풀스라는 도박사업을 벌이기 위해 이들이 벌인 로비 행각에 정치권은 진공 상태에 빠져들고 있으며 구태의연한 폭로정치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이런 일들이 너무 많아 우리 서민들은 헷갈릴 정도며 갈피를 잡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우리를 더욱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탈북자들에 대한 문제 제기다. 이 문제는 주변국과의 외교적 마찰로까지 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으나 정부는 해결책마저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외국 인권 단체들은 월드컵 경기기간동안 1천500여명을 실은 탈북 난민선을 공해상에 띄워 놓고 탈북자 문제를 국제 이슈화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공공연하게 밝히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바로 목전에 다가온 지방선거도 문제다. 경기·인천지역에서 많은 정치지망생들이 나름대로 열의를 갖고 뛰고 있다. 지역개발이나 지역 경제의 활성화, 주민 민원 해결 등을 약속하면서 한 표를 호소하고 있다. 또 주민들은 이들의 인물 됨됨

  • 우리시대의 영웅 지면기사

    5월은 신록의 계절이다. 새로 돋아난 나뭇잎들의 푸르름과 싱그러움을 볼 때마다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된다. 그러나 시국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5월의 풋풋함을 느끼기는커녕 한탄이 절로 나온다. 자고 나면 새로운 '게이트'가 등장하고 하루가 지나면 또다른 비리가 터지고 다음날이면 유명한 아무개가 검찰에 소환되고 또 누구 누구가 사법처리될 것이라는 뉴스에 머리가 어지럽다.쉴틈없이 터져 나오는 각종 부정과 의혹들이 너무 많이 그리고 오래 계속되다보니 뭐가 뭔지 모를 지경이다. 서민들은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큰 돈을 몰래 받고도 “대가성 없는 돈”이라고 우기고 검찰에 출두하면서 죄가 없다고 고개를 들고 카메라 플래시를 받는 정치인들이나 유명인사들이 며칠후면 대부분 구속되곤 했다.이들 중에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워 하거나 얼굴을 가리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별로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나만 죄가 있느냐. 너희들은 깨끗하냐”는 무언의 항변 아니면 “재수가 없어서…” “모함에 걸려서…”라고 남을 탓하고 반성할 줄 모르는 몰염치 때문이 아닐까. 계속되는 '게이트'시리즈 속에 한쪽에서는 카드빚 몇백만원 때문에 꽃다운 나이의 여성들을 며칠사이에 몇명씩이나 죽이는 끔찍한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인명재천(人命在天)이란 말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는 설 땅을 잃은 것이 아닌지 두려운 생각이 든다.그러나 이러한 암울한 세상에서 우리를 감동시키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어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 아시아판은 최근 25명의 '아시아의 영웅들'을 선정, 발표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해공항 중국 여객기 참사 당시 20여명의 승객을 구한 설익수씨가 뽑혔다. 25세의 관광회사 직원인 설씨가 한국의 대표 영웅이 된 셈이다. '타임'은 설씨를 “옳은 일이라는 이유로 엄청난 일을 해낸 가장 순수한 의미의 영웅”이라고 평했다.설씨처럼 공인된 영웅은 아니지만 이에 못지않은 큰 일을 하는 인물들이 그래도 우리사회에 적지않게 탄생하고 있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보통 사람들은 생각할 수도

  • '집으로…' 가는 길 지면기사

    아픔 없이 가족의 이름들을 홀로 나직이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과거의 아픈 기억이든, 오늘의 찢어진 관계든, 미래의 불안이든 가족은 생각만으로도 엷은 물기가 촉촉하다. “아버지 된 입장에서 도움이 되지는 못할 망정 이렇게 너의 행복과 전정(前程)을 가로막는 결과만 빚고 있으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느냐.” 어디서 잘못된 걸까. 신록이 사랑스레 푸르른 오월이 가정의 달인 것이 차라리 잔인하다. 모든 못난 아비 어미와 불효자는 카네이션이 눈물겹다.영화 '집으로…'가 벌써 관객 200만명을 넘어섰다. 극장 안은 어린 아들 손을 잡은 아빠 엄마로 가득하다. 저게 원래 가족이야. 켄터키 치킨과 백숙은 도저히 어울릴 수 없지만, 그래도 소통은 가능하단다. 휴대용 전자오락기 뒤에 붙인 외할머니의 2천원처럼, “보고싶다”는 상우의 미리 그린 엽서처럼…. 어른들은 울음을 목울대가 아프게 삼키고, 팝콘을 손에 든 아이들은 을분할매의 꼬꼬댁 수화가 우습기만 하다. '집으로…'는 깨져가는 가정에 대한 헌사일까. '모든 외할머니에게 바치는 영화'를 보고 나오는 마음이 묵직하다.지난달 '사이버 팸'의 기사가 체증인 듯 명치께를 누른다. 사이버와 패밀리의 합성어란다. 어느 포털사이트 한곳에서만도 사이버 팸이 2천 가족을 넘어섰다고 했다. 또래가 엄마고 아빠고 삼촌이고 누이고 형제다. 소꿉놀이라기엔 서글프다. 사이버 팸을 만들었던 여고생 일행이 오프라인에서 만나 성매매로 돈을 벌었다고 했다. 어떤 환경이 이들을 유사가족에게 더 애착을 갖게 만들었을까. 그들을 결코 칭찬할 수는 없지만, 사이버 팸에게서 정을 찾아야 했던 아이들의 외로움만은 또렷하다. '전통가족'은 이미 무너진 걸까.'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홈 스위트 홈'을 지은 존 하워드 펜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했다. 얼마나 가족이 그리웠으면 그런 노래를 다 만들었을까. '젊은 사슴에 관한 은유'(박범신)에서 이 대목을 읽는 순간 '사이버 팸'들의 정처 잃은 마음들이 또한번 아프게 다가온다.소설가의 아버지가 속병을 고치려 '똥물'을 마시고, 충치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