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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중 대통령의 아름다운 퇴장을 위하여... 지면기사

    “우리의 단풍은 이미 아름답게 물들어 국민들에게 보여졌으며 이제 마지막 잎새는 21일이 남았다. 그 마지막 잎새들이 낙엽으로 떨어져 노무현 정부의 밑거름이 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이 4일 비서실 월례조회에서 한 말이다. 김대중 정부의 업적에 대한 자부(自負)를 느낄 수 있다. 또 역사의 순환을 깨달은 사람의 달관도 엿보여 듣기에 좋다.'국민의 정부'를 표방한 김대중 정부에 헌신한 박지원 실장이기에 가능한 귀거래사다. 국민들은 박 실장의 표현대로 김대중 정부의 마지막 잎새가 아름답게 추락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일의 희망을 잉태하는 숭고한 소멸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어찌하랴. 5년 임기중 20일만을 남겨놓은 지금 김대중 정부의 마지막 잎새는 '대북송금' 의혹의 광풍을 만나 아름다운 나선형 추락이 힘들게 됐다. 그 잎새가 노무현의 대지 위에 떨어지는 그 순간의 비장함, 숙연함을 공감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지금 정치권에서는 대북송금 의혹 해결을 위한 다양한 방안이 속출하고 있다. 처음에는 검찰수사에 모두 동의한 듯 보였다. 그러다 문희상 새정부 대통령 비서실장 내정자가 정치적 해결을 제안하더니,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국회에서 진상조사 방법을 결정하라고 최종적인 입장을 밝혔다. 야당은 특검제, 국정조사를 들먹이며 이 문제를 대선패배의 고통을 상쇄할 절호의 계기로 삼으려 하고 있다. 청와대 입성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겠다며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반면 야당은 분열된 전열의 수습 차원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형국이다. 정치권이 이렇듯 들썩이자 정작 법질서의 마지막 수호자인 검찰은 수사를 유보하겠다며 강 건너 불보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그런데 대북송금 진상규명을 놓고 벌이는 작금의 혼란이 불가피한 것인지 의문이다. 대북송금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는데도 이를 알아내기 위해 정치권이 논쟁을 벌이고 국민적 에너지를 낭비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얘기다. 더군다나 새정부 출범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 아닌가.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말해야 한다.

  • 대북 거액지원의 미스테리 지면기사

     독일 패망 이후, 분단 44년동안 서독은 동독을 소련의 허수아비로 단정, 철저히 무시하는 정책으로 일관해 왔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1969년 사민당의 브란트가 자민당의 도움으로 집권하면서 돌변했다. 브란트는 서독의 안정과 번영은 공산권과의 우호협력이 필수적이라고 보고, 소련·폴란드·체코 등과 우호조약을 맺고 동독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1970년 3월19일 동독의 에르푸르트에서 첫 총리회담을 열었을때, 빌리 슈토프 동독총리가 즉각 수교와 함께 서독이 동독의 발전을 가로막았다며 300억달러의 보상금 지원을 요구하고 두달 뒤 서독의 카셀에서 있은 2차회담서도 억지주장을 되풀이하자 브란트는 에곤 바르 보좌관을 내세워 동독과 비밀협상에 착수하여 수교, 유엔가입 및 상호대표부 교환 등을 골자로 한 기본조약을 완성했다. 1970년대 초부터 통일될 때까지 서독이 동독에게 지원한 것은 대체로 4가지 방법으로 약 62조원에 달한다. 동독에 있는 친척을 만나러 갈 때 안내비 등으로 지불한 입국료, 약 3만4천여명의 동독정치범들을 석방해 인수받으면서 낸 비용, 동독의 기업지원을 위한 차관제공, 그리고 동독의 농산물을 애써 비싸게 수입해서 유럽공동시장에 판매한 것 등이다. 62조원이란 거액이지만 60% 정도가 기업지원을 위한 차관이어서 실제 제공한 것은 30조원 미만이다. 문제는 비밀협상은 물론, 어떠한 지원과 차관도 야당에 모두 알려주고 협의해서 결정을 했다는 점이다. 여야는 소위 동독에 대한 초(超)당파적 정책으로 4가지 원칙을 설정했다. 검은 돈을 주지 않고 뒷거래를 하지 않으며 원칙과 명분이 없는 지원을 금하며 모든 교섭내용을 국민에게 알리기로 한 것이다. 설 직전에 드러난 거액의 대북지원사실로 정치권이 긴장하고 국민들 역시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감사원이 소위 현대 상선의 4천억원 행방 논란을 감사한 결과, 그중 2천235억원(2억달러)이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직전에 북한에 제공됐다고 밝힌 것이다. 대북거액지원은 의문점과 해괴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첫째, 남북정상회담 직전에 산업은행으로부터

  • 국민이 대통령입니다? 지면기사

    요즘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좌정(坐定)할 때마다 등뒤로는 어김없이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는 자막이 보인다. 그런데 그 말이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아둔한 머리로는 영 헤아리기 어렵다 못해 고통스럽다. 도대체 '대통령'이면 대통령이고 '국민'이면 국민이지 '대통령이 국민'이라니?그럼 앞집 아저씨도, 뒷집 아줌마도 대통령이고 4천몇백만 대한민국 국민이 깡그리 대통령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대통령 선거는 거창하게 날 잡아 따로 왜 하고 '대통령 당선자'라는 호칭은 왜 생뚱맞게 숱한 입들에 오르내리는 것인가. 혹여 4천몇백만 국민이 모두 대통령은 대통령이로되 노무현 당선자가 대표 대통령, 수석 대통령, 대통령 중 대통령이란 그런 뜻인가. 그러면 '대대통령' 또는 '대중대통령(大中大統領→대통령 중 대통령)'이라는 호칭쯤이 어떨까. 하기야 대통령 당선자도 국민의 한 사람이니까 뒤집으면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는 말도 괜찮을지 모른다.하지만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는 표어는 속된 말로 입술에 침도 안 바른 입에 발린 소리처럼 들린다. 요즘 애들 말로 느끼하고 썰렁하다 못해 닭살 돋는 말이고 멀쩡한 국민을 우롱하고 약을 올리는 말 같기만 하다. 물론 국민이 주인이다, 국민을 받들겠다, 국민 위에 군림하지 않겠다는 비슷한 취지로 지어낸 말인지는 모르지만 노 당선자가 5년차 수련 대통령이자 전문 대통령으로 큰 일을 하기 전에 우선 해야 할 일은 실소를 자아내는 그런 쓸데없는 조어(造語)부터 없애는 게 어떨까. 왜 그래야 하는가. '대통령'이라는 말뜻이 무엇인지 단 한 번이라도 염두에 두었더라면 그런 표어는 만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대통령'이란 '크게(大) 통치(統)하고 영도(領)하는' 사람이다. 한 마디로 대단한 사람이며 그야말로 '대권(大權)'에나 어울릴 엄청난 사람, 어마어마한 사람이다. 중국의 '대총통(大總統)'이나 '총통'이라는 호칭도 비슷한 뜻이다.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 문물을 수입하면서 영어 프레지던트(president)를 '大統領'으로 번역, 표기하면서 비롯된 말이 '대통령'이다. 그런데도, 그

  • 相生의 정치, 막(幕) 오르나 지면기사

    '국회의 다수당인 야당 여러분에게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오늘의 난국은 여러분의 협력 없이는 결코 극복할 수 없습니다. 저도 모든 것을 여러분과 같이 상의하겠습니다. 나라가 벼랑 끝에 서 있는 금년 1년 만이라도 저를 도와주셔야 하겠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98년 2월25일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한 말이다. 거창한 국정 청사진으로 가득 차는 게 보통인 대통령 취임사에서 ‘읍소’에 가까울 정도의 표현으로 여야 협력을 당부하던 모습이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실상은 정쟁의 연속이었음은 물론이다. 중간 중간 대화와 타협은 있었지만.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도 새 정부의 총리 내정사실을 야당에 통보하고 서청원 한나라당 대표에게는 회담을 제의하는 등 대야(對野) 관계에서 이런 식의 ‘낮은 자세’가 일단 국민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엊그제는 양당의 총무도 만나 국정협력 합의도 했다. 유세 때부터 노 당선자는 낡은 정치를 깨고 새 정치를 시도하겠다고 누차 강조한 것을 실천하려는 의지로 풀이되고 있다. 국민들은 정치에 모처럼 생기가 돌 것 같은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이번 만큼은 5년 내내 대권을 잡기 위해 선거운동을 하는 식의 정치는 이제 곤란하다는 인식이 여·야 모두에게 깔려 있는 듯도 하다. '섀도 캐비닛'을 두고 정책을 세워나가면서 공통적인 국가적 사안에는 여야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는 이상적인 의회정치의 모습을 꿈꾸고 있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우리는 여태까지 의회민주주의보다는 정치판에서 일상화된 투쟁의 역사(?)에 익숙해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늘상 보는 것은 정치인들이 마치 유도선수 아니면, 시정잡배들처럼 치고 받고, 멱살잡이 하는 등 살벌한 모습들 뿐이었다. 요즘도 여당은 살생부 파동으로, 야당은 당내 개혁 등으로 일부 의원들의 경우 목숨을 건 투쟁에 나선 전사들과 다름 없다. 이전투구(泥田鬪狗)하느라 민생은 제쳐두었고 국정은 난맥이라는 질타와 탄식의 소리를 늘 들어왔지만 마이동풍(馬耳東風)일 뿐이었다. 그 속에서도 대화와 타협의 정치, 상생(相生)의 정치를 해야 한다는 소

  • 북핵문제와 우리의 자화상 지면기사

    나라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다. 북한의 돌연한 핵개발프로그램 언급에 이어 계속되는 핵위협은 우리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하다.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에 이은 미사일 발사까지 언급하는 북한의 돌출행동에 그저 아연실색할 뿐이다. 북-미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우리의 안전에도 비상이 걸렸다고 볼 수 있다. 조만간 유엔안보리는 이 문제에 대한 협의에 나선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의 염려는 더욱 깊어지고 있다.이럴 경우 북한핵 문제는 북-미 간의 양자간 분쟁에서 국제적 문제로 바뀌면서 북한은 국제사회로부터 규탄받는 공동의 적이 될 것은 분명하다. 이것이 북한이 원하는 것인지 그들이 주장하는 벼랑끝 전술의 각본에 포함되어 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현실이 이런데도 북한은 상식을 넘는 모험주의 환상에 빠져 무모한 행동으로 일관하고 있다. 평양에서는 100만명의 군중이 모여 미국을 규탄하고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 박길연 유엔주재 북한대사는 유엔안보리의 제재가 북한에 대한 선전포고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으며 이에 동조한 북한의 언론매체들은 적과의 대결에서 배짱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불바다론을 주장하고 있다. 누구를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것인지 그들의 주장은 실로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불바다론의 재등장은 우리의 안보를 깰 수도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해석된다.그러나 대결의 직접 당사자인 미국은 의외로 조용하다. 물론 언론과 의회지도자들의 발언은 날로 격화되고 있지만 정작 이 문제를 다루는 그들의 모습은 일관되고 차분하다고 하겠다. 우리는 이 점에서 미국의 합리성과 실용주의적인 면을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찬미(讚美)를 위한 것은 아니며 그들의 장점을 귀감으로 삼기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지난 9·11테러 당시의 미국정부와 국민들의 위기 수습 국면을 지켜본 바가 있다. 복잡하고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뒤섞여 있는 미국민들이 위기에는 일치단결하고 스스로의 애국심에 불타 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또 미 정부의 위기 수습의 조치들을 보면서

  • 지역감정은 21세기의 반동(反動) 지면기사

    얼마 전 지인(知人)으로부터 전해들은 얘기다. 대구에 맛으로 유명한 음식점이 있는데 최근 들어 거의 망하기 일보직전이라는 것이다. 호남 사람이 주인인 이 가게는 15대 대선의 고비는 잘 넘겼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지역내 식자층에선 모두 그 가게의 안위를 걱정했으나 별 탈이 없었다고 한다. '김대중'이니까 95% 안팎의 호남 지지율을 이해했다나. 그런데 노무현 당선자에게 호남에서 또 95%급 지지율이 나오자 이번에는 '뭐 이런게 있노'라는 격한 반응이 터져나왔고, 그래서 이심전심 그 가게에 발길이 끊어졌다는 것이다.말을 전해준 사람도 전해들은 얘기라 한다. 무릇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유언비어는 이런 식이기 마련이다. '그쪽에선 그런 일이 있었다대' 아니면 '저쪽에선 그런 말이 나돌던데…' 하는 식이다. 문제는 이같은 유언(流言)이 흐르고 비어(蜚語)가 난무하면 대중은 알게 모르게 집단적으로 세뇌 당해 특정한 대상에 대해 오도된 신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TK 사람들은 지난 대선에서 호남 만큼 뭉치지 못한 것을 자책하면서 절치부심, 다음 선거에서의 단결을 도모하고 있는지 모른다. 대구의 한정식집 이야기는 TK 각성의 상징으로 장치된 '특별한 사실'이거나 '고안된 허구' 둘 중 하나인 셈이다.새삼스럽게 호남의 투표성향을 복기(復棋)하고 영남권의 좌절(?)을 얘기하자니 매우 조심스럽다. 말 꺼내는 자체가 부담스럽고 심란하다. 그런데 바닥에 깔려있는 지역감정의 양상이 이렇듯 흉흉하니 문제다. 누가 당선되면 이민을 가겠다고 말한 사람들은, 이민은 안가고 여전히 조국의 땅에 감정의 멍울만 키우고 있는 게 현실이다. 도대체 이번 대선을 통해 지역대결 구도가 퇴조했다는 분석이 어떻게 가능한지 모를 일이다. 충청권의 지지율을 그 근거로 삼기에는 허전하다. 지역감정이 단어를 폐기하고, 수준을 격하시킨다고 해서 없어질 문제도 아닌데 모두 애써 없는 것으로 여기거나 말 꺼내기를 주저하고 있는 형국이다.더 큰 문제는 지역감정이 매우 세련된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반호남 정서의 사람들은 새로운

  • 7천만이 베토벤의 '합창'을… 지면기사

    연필 한 다스(dozen)의 무게는 열두 개가 똑같다. 가야금 열두 줄의 무게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러나 1년 열두 달의 무게는 모두 다르다. 시각적으로야 28일뿐인 2월이 가장 가벼울 것 같고 31일 달보다는 30일 달이 가벼울 듯도 싶다. 또 온통 앙상하게 가지마다 헐벗은 나무들하며 모든 열매와 곡식을 거둬들여 텅텅 빈 논밭서껀 12월이 가장 가벼울 것도 같고 반대로 한껏 우거진 숲과 곡식 열매로 무성한 8, 9월이 가장 무겁게 보일지도 모른다.하지만 심정적, 심증적(心證的)인 열두 달의 무게는 단연 1월이 가장 무거우리라. 왜 그럴까. 그야 12월까지만 해도 없었던 저마다의 새로운 계획과 각오와 다짐이 1월1일 '땡…땡' 시작과 함께 1월 자락에 쌓이고 새삼스런 무게의 꿈이며 희망들이 이 1월 한 폭에 미어져라 포개지고 엎어지고 어빡자빡 산더미처럼 쌓이기 때문이 아닌가.1월의 무게란 벅찬 희망의 무게요 꿈의 무게며 계획과 다짐의 무게인 동시에 사색과 철학의 무게다. 이런 1월의 무게 잡힌 벅찬 희망을 가리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눈을 뜨고 꾸는 꿈'이라 했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1월1일 이 찬란한 아침 햇살에도 크게 눈을 뜬 채 영롱하고도 확연한 꿈을 꾸지 못한다면 이제 그만 희망 없는 삶 부스러기들일랑은 모두 거둬 포개 이고 지고 절망의 피안 저쪽으로 떠날 채비를 갖춰야 할지도 모른다.한데 새해가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 시작되는 나라도 있다. 유태인의 달력은 정월 초하루가 9월 중순이다. 팔레스타인의 아라파트 의장은 2001년 9월18일의 신년을 맞는 이스라엘을 배려해 그 전날인 17일 공격 정지 명령을 내렸다. 이슬람력(曆)의 새해는 3월15일경이고 태국의 신년은 세 가지나 된다. 양력과 음력 1월1일 말고도 '손그라인'이라 불리는 타이력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새해는 새해다워야 한다. 새 해 새 다짐과 새 꿈, 새 희망이라면 아무래도 지구촌의 가장 많은 나라가 함께 맞는 양력 1월1일이 제격이다. 싸늘하고도 엄격한 소한 문턱에서 냉엄하기 짝이 없는 온도로 꾸는

  • 신뢰받는 대통령을 바란다 지면기사

    오랜만에 50대 대통령이 등장했다. 여전히 상대방에 대한 흑색선전과 비방으로 유권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는 했지만, 그래도 이번 선거는 역대 어느 선거보다 돈 안 쓰는 깨끗한 선거로 치러졌다고 평가됐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통령 선거는 새천년 들어 처음 치러진 선거답게 우리 정치사의 새로운 장을 열면서 사회 문화적 변동을 체감할 수 있는 새로운 양상도 많이 나타났다. 특히 30년 이상 이 나라 정치를 지배해왔던 ‘3김 시대’를 사실상 청산했고, 미디어 선거의 시대를 열었고, 정치인 그들만의 리그에서 시민참여축제로 발전시켰다.당선자가 확정된 순간 대통령 후보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가족 구성원간에도 희비가 엇갈렸다.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던 어느 아버지 어머니는 혀를 끌끌 차며 안타까워했지만 반면 노무현 후보를 지지한 자식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폈다. 20대의 62.1%, 30대의 59.3%가 압도적으로 '노짱'으로까지 지칭되는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고 이회창 후보에 대한 지지율은 각각 30%대에 머물렀다. 그동안 정치에 거의 무관심을 보였던 세대들이었지만 이들이 주도한 선거혁명이었고 노무현 당선자는 이같은 시대적 흐름을 탔다. 그동안 월드컵축제에서 보여준 자발적인 단합의 모습과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 이후 촛불시위 등을 겪으며 변화를 갈망하는 이 세대들의 욕구가 분출됐다. 기성세대는 솔직히 이 흐름을 진솔하게 읽어내는데 인색했다고 사회학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또한 이번 선거를 계기로 세대간의 입장차가 지나치게 드러나 한국 사회의 주요 과제로 부각됐다는 것이다. 변화와 개혁도 중요하지만 노 당선자의 첫 당선회견에서 '나를 반대했던 사람까지 포용하겠다'고 밝혔듯이 전체 국민들을 함께 아우르는 치유책이 필요한 것이다. 2030세대에 대한 짐을 생각한다거나 95% 이상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은 일부 지역에 대한 부채(負債)를 의식해서도 안된다.어떻든 이제 새로운 시대를 이끄는 대통령은 선출됐다. 노 당선자는 국민들과 약속한 일들을 하나 하나 실천하고 또한 자신에게 보낸 질책들을 겸허하게 수용해야 한

  • 한표의 의미를 생각하자 지면기사

    민주사회의 가장 소중한 가치는 개개인이 자유롭게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를 인간활동 가운데 최고의 고귀한 활동으로 규정했고 또 아테네 사람들도 정치 현안이 있을 때면 만사를 제쳐두고 민회에 참석하기 위해 광장에 모였다고 한다. 이는 정치 참여가 다른 어떤 사회활동보다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하겠다.그래서 어쩌면 우리도 지금 우리 민족사에 커다란 획을 긋는 분수령에 직면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제16대 대통령 선거가 하루 앞으로 다가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유권자들은 이번 선거에서 어떤 기대나 흥분보다는 떠밀리듯 투표소로 가야 하는 의무에 그저 떨떠름한 것 같다. TV에서 열변을 토하는 후보자들의 연설이나 신문 광고에 나오는 그들의 공약들이 모두 가슴에 와닿지 않고 허공만 맴돌고 있어서가 아닌가 한다. 선거의 핵심 쟁점으로 떠오른 행정수도 이전 공방이나 북핵문제와 이에 따른 색깔론 시비, 듣기에도 섬뜩한 '전쟁이냐, 평화냐' 그리고 '안정이냐 불안이냐'는 이분법적 선거 캠페인도 유권자들의 불안심리를 자극하고 있다. 그리고 교묘한 형태의 지역감정, 사이버 공간상의 폭력, 중간지대를 인정하지 않는 선택의 강요 등 이런 것들이 한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그래도 어쨌든 우리 유권자들은 앞으로 5년 동안 국가의 장래를 결정한다는 의미에서 반드시 한표를 행사해야 한다. 선거는 국민의 대표, 지도자를 국민이 스스로 선택할 기회를 갖고자 하는 것이다. 그 선택행위 자체를 바르게 해야 국민이 자신의 권리를 옳게 행사하는 일이 된다. 그 권리를 옳게 행사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민주시민이라 할 수 없다. 선택은 중요하고 그 결과에는 당연히 승복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칙이므로 더욱 신중함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한표의 의미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이와 함께 이번 대선은 대통령을 뽑는 선거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면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숨은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동안 건국이래 우리를 괴롭혀

  • TV 선거의 한계와 유권자 자세 지면기사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TV방송연설에 출연한 찬조연설원의 신분을 놓고 도덕성 시비를 벌이고 있다. 한나라당은 민주당 노무현 후보 찬조연설원으로 나선 '자갈치 아지매'를 “친민주당 위장서민”이라고 발가벗겼다. 민주당은 한나라 이회창 후보 연설원으로 출연한 '평범한 주부'가 “한나라당 국회의원 보좌관”이라고 까발렸다. 모두 객관적인 증거들이 있는 모양인데 시비는 저들끼리 가리라고 하자. 다만 양당의 폭로로 영상미디어 정치의 '이미지 조작'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점은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이다.정당과 정치인은 기본적으로 대중을 선동한다.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다. 지지의 결과는 권력획득으로 이어진다.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했던 그리스-로마시대부터 대의민주주의가 시스템을 갖춘 현대에 이르기까지, 정치인들은 대중의 '지지 함성'이나 '지지 표'를 얻기 위해 그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이성에 호소하는 선동을 반복해왔다.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 3막 2장에 실린 안토니우스의 웅변 대목은 민중선동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저의 장례식날 암살자 부르투스는 “시저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시저를 죽였다”고 열변을 토해 로마 민중의 환호를 받는다. 암살자에서 로마를 구한 구국의 영웅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어 등장한 안토니우스는 시저의 유언장을 흔들며 군중들의 시선을 고정시킨 뒤 위대한 시저의 일생을 상기시켜며 “내가 부르투스였다면 여러분의 마음을 격분케 해 시저의 무수한 상처 하나 하나에 혀를 주어 로마의 돌까지도 일어서서 폭동을 일으킬 만큼 흥분의 소용돌이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라고 선동한다. 대중들에게 부르투스가 변설에 능한 배신자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위대한 시저가 난자당해 숨진 현실을 각인시키며 암살자들에 대한 폭동을 유도한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의 시오노 나나미는 안토니우스의 연설은 순전히 셰익스피어의 창작임을 강조했지만, 로마사 전반에서 대중연설 능력은 정치인의 기본이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대중 선동을 통한 정치는 이제 낡은 유물이 됐다.영상미디어의 은총을 받고 인터넷 세례를 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