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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ith+] 인간이라는 녹음기

    [with+] 인간이라는 녹음기 지면기사

    오랜만에 소설가 친구와 저녁 약속이 생겼다. 산책하다 골목 안쪽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막걸리도 한 병 곁들여 사는 안부와 소설 안부를 두루 묻다보니 음식이 나왔다. 밥술을 다 뜨고 마지막 잔을 먹는데 주인 할머니가 다가와 여덟 시에 식당 문을 닫는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괜찮다, 다 먹었다고 자리를 정리하려는데 할머니는 아니다, 천천히 먹다 가도 된다면서 손사래를 치더니 "요즘에는 일하는 사람 쓰기가 너무 어렵다. 임금을 넉넉히 줘도 식당 문 닫을 시간되면 손님을 내쫓는다. 그래서 마무리는 주인인 내가 한다"고 푸념을 늘어놓으셨다. 그러시군요, 라고 대답한 것을 시작으로… 장장 삼십분 간, 할머니의 인생 이야기가 펼쳐졌다. 다시 찾은 식당서 버튼눌린것처럼또 듣게된 주인할머니 인생이야기손님마다 수십번도 더 감았을 말들반복해 퇴고한 글처럼 높은 완성도장전된 기억, 종이로 불러오고파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할머니의 인생이 쏟아져 나오는데 흥미로워서 말을 끊을 수도 없었다. 대구 사투리와 구순 노인의 어눌한 발음으로 세 아들들, 합정동에서 크게 열었던 한식당, 영특하고 발이 넓은 둘째 아들, 그리고 영화를 하는 막내 아들 이야기가 청산유수로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 식당이라면 십오 년 전쯤 나도 가 본 적이 있는 곳이다. 내가 그 식당 안다고, 나물이 환상이었다고 말하자 할머니는 쪼끌쪼글한 주름살이 다 펴질 것처럼 활짝 웃었다. 이야기의 1부는 상승, 2부는 하강이다. 이후 똑똑한 둘째 아들이 죽고, 막내의 영화가 실패하고, 그런데 식당이 너무 잘 된 나머지 카페까지 열다가 여차저차 망하고, 코로나가 오고, 이 골목에 자리 잡게 된 과정이 흘러나왔다. 소설가 둘이 만나서 소설 얘기 좀 해보려다가 진짜 소설같은 인생 이야기만 실컷 듣고 나온 밤이었다. 계산하면서 보니 이야기의 '증거'처럼 첫 식당의 나무 간판이 놓여있었다. 흥망성쇠를 다 듣고 나온 터여서 그런지 내 눈에는 난파된 배의 잔해처럼 보였다.한 달쯤 지나 다시 그 동네에서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나는 맛집을 안다고 예의 그 식당으

  • [with+] 혜성처럼 나타났다 유성처럼 사라진 천재 시인 '이언진'

    [with+] 혜성처럼 나타났다 유성처럼 사라진 천재 시인 '이언진' 지면기사

    다산의 '여유당전서'를 최초로 독파했던 최익한은 자신의 저서인 '실학파와 정다산'에서 다산 정약용의 학문이 성호 이익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가 성호학파에 이언진(李彦璡, 1740~1766)이라는 시인의 이름을 올려놓았다는 사실이다.이언진의 자는 우상(虞裳)이며, 호는 송목관(松穆館)이다. 그는 성호의 조카이자 제자인 이용휴의 제자다. 이용휴는 18세기 조선 문단의 큰 별이었다. 정약용은 말하기를 "이용휴는 명성이 한 시대의 으뜸이어서 무릇 글을 새롭게 바꾸고자 수련하는 자들이 모두 와서 수정을 받았다. 몸은 포의의 반열에 있으면서 손으로는 문원의 권력을 30여 년 동안 쥐었으니 예전에 없던 일이다"라고 이용휴의 위상을 평했다. 성호 이익 조카인 이용휴의 제자정해진 틀 탈피 새로운 문학 시도그의 글쓰기 단약 굽듯 했다는 것 이용휴는 성호의 경세학을 학문의 바탕으로 삼았다. 그러나 당시 학자들이 외면하던 양명학을 비롯하여 불교와 도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아들 이가환은 조선 제일의 천재로 꼽혀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문사이자 정치가였다.이언진이 이런 이용휴를 스승으로 모실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으며 그의 빼어난 재주 덕분이었다. 이용휴는 이언진의 시에 대한 첫인상을 '시집을 펼치자 빛이 괴상하고 번쩍번쩍하여 무어라 형용하기가 어려웠다'고 쓰고 있다. '시는 투식을 없애고, 그림은 격식을 따르지 말자. 정해진 틀은 뒤집고, 남이 가던 길을 벗어나자. 앞의 성인이 가던 길을 가지 말아야 비로소 훗날에는 참다운 성인이 되리라'라는 게 이언진의 시에 대한 생각이었다. 이언진은 정해진 틀, 남이 가던 길을 벗어나 새로운 문학을 시도했다. 이언진을 가장 잘 이해해 준 사람은 스승 이용휴였다. 스승은 제자의 시집 '송목관집'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시문을 짓는 작가는 남의 견해를 받아 제 견해를 세운 사람과 제 스스로 견해를 만들어 견해를 세운 사람이 있다. 제 스스로 견해를 만들어 견해를 세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완고함과 편견이 개입되지

  • [with+] 두 번째 일곱 살

    [with+] 두 번째 일곱 살 지면기사

    이제 한국식 나이 셈법은 사라졌다. 내 또래 친구들은 신이 났다. 원래 나이에서 한 살 빼고 두 살 빼고, 도로 어려졌다. 하지만 우리 집 꼬맹이는 잔뜩 뿔이 났다. 작년, 만 나이 법이 곧 시행된다는 뉴스가 떴을 때 나는 여덟 살 딸아이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너 이제 내년 되면 도로 일곱 살 된다? 아홉 살 아니고?"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소리야?" 상황을 설명해줬더니 아이가 발을 동동 구르며 떼를 썼다. "싫어! 내가 얼마나 힘들게 아홉 살이 되는 건데!" 웃음이 났다. 아니, 밥 먹고 잠자는 거로만 저절로 나이를 먹었으면서 이게 무슨 소리람. 하지만 아이의 반응은 격했다. 열심히 나이 먹은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등교를 하려던 아이가 문득 멈춰 섰다. 심각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엄마, 그러면 나 내년에 2학년 못 되고 유치원 도로 가야 하는 거야?" 고민은 또 있었다. "엄마, 설마… 키가 다시 작아지는 건 아니지?" 알고 보니 우리 집 아이만 그런 건 아니었다. 꼬맹이들 키우는 집들마다 아이들의 한탄에 웃음보가 터졌다.딸아이의 두 번째 일곱 살이 이제 시작되었다. 뙤약볕 비추는 날에 새 나이를 갖는 건 꽤 멋지다. "두 번째 일곱 살이야. 지난 일곱 살에 못 했던 일, 아쉬웠던 일, 다시 해봐." 내 말에 아이가 코웃음을 흥, 친다. "난 아직도 마음이 안 풀렸거든! 일곱 살 된 거 속상하거든!" 푸푸 웃으며 등교시킨 후 나도 출근을 했다. 이제 사라진 한국식 나이 셈법여덟살 딸, 도로 일곱살에 심각 내게도 두 번째 일곱 살이 왔으면 좋겠다. 나의 일곱 살은 언제나 마룻바닥의 기억에서 출발한다. 방 세 개짜리 단독주택이었으나 우리 다섯 식구에게 주어진 방은 한 개뿐이었다. 방 한 개는 작은 부엌을 덧대 신혼부부에게 세를 주었고, 나머지 한 개는 총각 아저씨에게 세를 주었다. 딸기와 포도나무가 있던 작은 마당 닭장에는 신혼부부가 겁도 없이 들여놓은 칠면조 두 마리가 있었고, 엄마는 옥상 장독대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 수돗가

  • [with+] 의도적 눈감기와 집단행동

    [with+] 의도적 눈감기와 집단행동 지면기사

    딸과 함께 길을 가던 어느 여름밤이었다. 한 모텔 앞에 젊은 두 남녀가 마주보고 서 있었고 그 광경을 스무 명쯤 되는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었다. 남의 연애에 관심이 없어 가려는데 딸이 내 팔을 잡아 걸음을 멈추게 하더니 "저 여자가 위험해 보여"라고 말했다. 가만히 보니 남성은 여성을 모텔로 끌고 들어가려 하고 여성은 모텔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여성이 비틀거리는 걸로 보아 술에 취한 것 같았다. 그제서야 내 눈에도 여자가 위험해 보였다. 그런데 두 남녀를 구경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 일에 끼어들지 않았다. 딸이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내려고 하며 경찰에 신고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때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더니 경찰차가 도착했다. 어떻게 경찰차가 오게 됐는지 알 수 없었으나 경찰차를 본 남성이 그곳을 떠남으로써 그 위험한 상황이 종료됐다. 그 당시 이십 대 초반의 딸이 남을 돕기 위해 경찰에 신고하려던 것이 대견했다. 그리고 타인에 대해 무관심한 나 자신을 반성했다. 만약 그때 누구도 도와주지 않고 경찰차도 오지 않아 남성의 힘에 못 이겨 여성이 모텔에 끌려들어 갔다면, 여성은 어떻게 되었을까? 길거리에서 우리의 아들딸들이 어떤 곤경에 처해 있는데 그걸 보고도 도와주는 이가 없다고 상상해 보라. 끔찍하지 않은가. 실제로 '방관자 효과'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 '방관자 효과'는 주위에 사람이 많을수록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나설 것으로 생각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는 현상을 말한다. 말하자면 의도적으로 눈을 감는 것이다. 불쾌하고 성가신 일 못 본척 하면'방관자 효과'로 끔찍한 일 발생다급한 상황엔 집단행동 더 낫다 마거릿 헤퍼넌의 책 '의도적 눈감기'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인식하는 데 한계가 있어 입력된 정보를 편집하고 걸러야만 한다. 이때 '우리 대부분은 연약한 자아와 중대한 신념을 뒤흔들어 놓는 것들을 편리하게 걸러 내고, 우리를 기분 좋게 만들어 줄 정보들만 통과시킨다'라고 책은 말한다. 즉 우리는 불쾌하거나 성가신 일에

  • [with+] 망각의 아름다움

    [with+] 망각의 아름다움 지면기사

    초등학교 3학년인 내 딸은 '그림책의 시대'에서 빠져나온 것 같다. 그 자리에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 같은 환상적인 이야기책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림은 '삽화'로 축소되어 몇 페이지만에 한 컷씩 등장하지만, 완전히 물러나지는 않았다. 이렇게 삽화가 곁들여진 책 가운데 문득 에리히 캐스트너와 조우했다. 도서관에서 '하늘을 나는 교실'을 만난 것이다. 그날 밤 딸에게 책을 읽어주다가 향수에 푹 젖었다. 어렸을 때 좋아하던 책을 다시 읽는 것은 그 문장을 처음 읽던 나와 마주치는 일이니까. 딸이 잠든 후에도 책을 마저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겁쟁이 울리, 걸핏하면 먹을 것 타령인 마티아스, 냉소적인 재담가 제바스티안, 배에 버려진 고아 요니, 금연 선생과 사감 선생님까지. 오래된 친구들과 재회하는 기분으로 행복한 독서를 이어가다가 가난한 마르틴이 여비가 없어 크리스마스에도 기숙사에 남아있어야 하는 에피소드와 마주쳤다. 사감 선생님의 도움으로 마르틴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고, 부모님과 눈물 젖은 재회를 한 후 선생님께 감사의 편지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밤하늘의 별똥별을 바라본다. 이 장면에서 스치듯 나온 마르틴의 대사에 나는 벼락을 맞는 심정이 되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별빛은 벌써 몇 천 년 전의 별빛이에요. 저 빛이 우리들의 눈에 닿을 때까지는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거죠. 지금 보이는 별은 대개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사라졌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 빛은 아직까지 여행을 계속 하고 있어요."딸에게 읽어준 '하늘을 나는 교실'10년전 쓴 '개그맨' 같은 구절 놀라 이 장면에서 왜 놀랐냐면 10년 전에 쓴 내 단편 '개그맨'에 이런 구절이 나오기 때문이다. '문득 그가 들려준 이야기. 우리가 보고 있는 별이 오래전에 죽은 별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영원한 것은 별이나 그걸 바라보는 우리가 아닌 빛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죽은 별이 내고 있는 빛이 여전히 우주를 가로지르고 있다는 이야기를 과학책에서 읽을 줄 알았는데, 시작은 어린 시절에 읽은

  • [with+] 시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다

    [with+] 시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다 지면기사

    이덕무(1741년 6월11일~1793년 1월25일)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서예가다. 호는 영처(處)·형암(炯庵) 등 무려 40여 개나 된다. 조부는 이필익, 부친은 이성호, 모친은 박사렴의 딸 반남박씨다. 처는 백사굉의 딸 수원백씨이며, 아들은 이광규, 사위는 유선과 김사황이다.그는 서얼 출신으로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으나 박제가와 유득공, 그리고 서상수와 성대종 등 서얼들과 어울리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북학파였던 홍대용, 박지원, 이서구 등 사대부와 강세황, 심사정 등의 서화가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했다. 자신을 '책 읽는 바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학문하기를 즐겨 문자학과 금석학, 그리고 서화에 조예가 깊었다. 혈기 왕성한 20대부터 서얼시사집단인 백탑시사(白塔詩社)의 중요한 일원으로 활동을 주도했다. 1777년 간행된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이 청나라에 알려져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듬해에는 중국으로 가는 외교사절단의 지휘부인 서장관으로 왕복 5개월 동안의 사행 기간에 보고 들은 각종 정보를 기록하여 국왕에게 보고하고 사행단의 비리나 부정을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뿐만 아니라 청나라의 기균, 이조원, 반정균 등의 석학들과 교유했다. 그는 관직에 있는 15년 동안 정조로부터 520 차례의 하사품을 받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정조는 그의 문집을 간행하게 했다.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관직을 그대로 잇게 하는 은전을 베풀었다.연암 "문학이 추구해야할 두가지"갓 태어난 아이가 울고 웃는 '천진'곧장 울음이 터져 속일수없는 '진정' 이덕무는 천성이 소심하고 온건하며 섬세한 사람이었다. 후리후리한 키에 몸은 가냘팠다. 젊은 시절 지독한 가난으로 어머니와 누이가 영양실조로 폐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세상이 알아주는 독서광이었으며 책에 대한 욕심이 많아 귀한 책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멀고 가까운 것을 따지지 않고 빌려다 베꼈다. 추위로 손가락에 동상이 걸려 부었는데도 베껴 쓰기를 쉬지 않았다. 그

  • [with+] 아욱국 향기

    [with+] 아욱국 향기 지면기사

    얼마 전부터 아예 요리를 그만두었다. 그만두었다, 라기보다는 포기했다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재능도 없고 집념도 없는 내가 마트에서 장을 보고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프라이팬을 놀리는 일이 그야말로 시간 낭비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이제 매주 금요일 저녁, 일주일 치 반찬을 사러 간다. 밑반찬 다섯 종류와 메인요리 다섯 종류, 그리고 국이다. 밑반찬은 반찬통에 담아두고 메인요리와 국은 냉동실에 넣어둔다. 덕분에 내 삶은 제법 여유로워졌다. 지난주 금요일에도 나는 반찬가게엘 들렀다. 2인분씩 담아놓은 국 진열대를 지나다 보니 어라, 아욱국이다. 슴슴하게 된장 풀어 오로지 아욱만 넣고 끓인 국. 국이 담긴 지퍼백을 열면 아욱 향기가 보드랍게 코를 찌르겠지. 두 봉지를 집는다. 오래전 소설 퇴고 위해 횡성 시골로주인 할머니 마당서 뜯어온 채소 중유일하게 제대로 먹은 것은 '아욱' 벌써 오래전, 삼십 대의 나는 어느 날 짐을 싸 들고 횡성 어디쯤 시골 마을로 기어들어갔다. "또 왜! 대체 왜! 너는 나를 잡아먹으려고 이 회사엘 들어왔니?" 상사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걸핏하면 한 달씩 두 달씩 쉬겠다고 생떼를 쓰는 나를 익히 보아와서 아주 인연을 끊을 듯 굴지는 않았다. "올 때 로얄살루트 21년산으로 두 병 사 올게요, 진짜로요." 새벽 구름이 지붕에 닿을 듯 낮게 내려앉는 시골집에 수트케이스 두 개를 풀며 나는 마냥 신이 났다. 어영부영 붙잡고 있던 장편소설을 마무리하고 돌아가겠다는 야심이 있었지만 나는 쓸데없이 마당에서 빨래를 삶거나 방바닥을 구르며 음악을 듣거나 했다. 언젠가는 써지겠지, 그깟 장편소설, 언젠가는 나에게 오겠지, 나는 세상만사 다 내려놓은 사람처럼 흥얼흥얼 놀았다. 주인 할머니는 마당에 무언가를 많이도 키웠다. 마당뿐 아니라 골목이 다 텃밭이었다. "아무거나 뜯어먹어. 남의 집 것들도 괜찮아." 토끼 새끼도 아니고, 아무거나 뜯어먹으라니 나는 할머니의 말이 우스워 정말 무얼 뜯어먹을까, 동네를 시시껄렁한 얼굴로 걸어다녔다. 내가 제일 먼저 뜯어온 건 옥수수였다.

  • [with+] 애착하기보다 무심하기를

    [with+] 애착하기보다 무심하기를 지면기사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다 일반이나 '딸 바보', '아들 바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사랑이 각별한 부모가 있다.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자녀에 대해 더 많은 애정과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식을 품에 안고 어떤 일이든 다 해 주려는 '캥거루 맘'과 자녀의 주위를 맴돌며 학업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챙겨 주고 관여하는 '헬리콥터 맘'이란 말까지 있다. 그러나 부모의 과잉보호는 의존적인 아이를 만드는 등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 쉽다.아들이 결혼한 경우엔 어머니가 아들의 결혼 생활에 사사건건 간섭하면, 고부간의 갈등이 심해져 가정불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고부 갈등으로 생긴 우울증으로 정신과를 찾는 사람들이 있고, 고부갈등 때문에 이혼한 사례가 있을 정도다. '고부간 나쁘고 잘되는 집 없다'는 속담이 있다. 아들을 끔찍이 사랑한 나머지 며느리 또는 예비 며느리에게 시기나 질투를 느끼는 어머니라면 이 속담을 기억해 두는 게 좋겠다.자녀바보 넘어 헬리콥터·캥거루 맘자식 집착 다룬 서머싯 몸 '어머니'아들이 사랑하는 여자를 죽인 비극지나친 사랑도 '조절' 관계유지 지혜 서머싯 몸의 단편소설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강한 애착이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잘 보여 준다. 한 마을에 얼굴이 사나워 보이는 사십 대의 여자가 이사를 온다. 그녀가 살인죄로 감옥에 있다가 출소했다는 추문이 퍼진다. 그녀에게는 일요일마다 찾아오는 스무 살의 아들이 있다. 아들이 오면 그녀는 애틋한 몸짓으로 아들을 귀여워했다. 그녀는 맹렬한 열정으로 아들을 사랑했다. 아들이 젊은 여자를 쳐다보면 참을 수가 없었고, 아들이 젊은 여자에게 구애하는 상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그런 그녀가 아들이 로살리아라는 예쁜 아가씨와 춤을 추는 것을 보자 분을 이기지 못해 신음을 토했다. 춤을 춘 이후 그녀의 아들은 로살리아에게 사랑을 고백했다.마침내 그녀는 로살리아의 앞을 막고 자기 아들과 무슨 짓을 했냐고 캐물었다. 로살리아가 길을 비키라고 해도 놓아주지 않았다. 로살리아는 그이가 결혼하자고

  • [with+]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공연

    [with+]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공연 지면기사

    이 세상에는 대단치는 않지만 이상한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일은 우리가 알던 세상을 잠시나마 뒤흔들어 놓는다. 지난주 수요일에 내가 겪은 것처럼. 자주 가는 카페가 생겼다. 두 면이 유리 통창으로 되어 실내에 밝은 햇살이 들어오고, 젊은 주인 부부의 바지런한 손길이 구석구석에서 느껴지는 곳이다. 무엇보다 필터 커피가 너무나 맛있어서 원고 마감이 있는 기간에는 출근도장을 찍다시피 드나들었다. 그런데 그날은 들어서는 순간부터 실내의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긴장되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팽배한 것이다. 엉거주춤 서 있는 손님들도 그렇고, 카페 주인은 주문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말을 더듬는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새 한 마리가 카페 안에 들어와 높은 곳에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단골 카페에 새 한마리 들어와한시간 휘젓고 날아… 소동 끝에젊은 남자 손님에게 잡혀 방생 이 카페는 천장에서 육십 센티미터쯤 내려온 곳에 가늘고 긴 주광색 조명을 인테리어 삼아 매달아 놓았는데, 새의 입장에서는 영락없이 나뭇가지처럼 보인 모양이다. 참새도 비둘기도 아닌 새의 정체는 모르겠으나, 당황하는 사람들과 달리 느긋해 보였다. 새는 두 군데의 문이 활짝 열려있지만 도통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문 쪽으로 쫓으려 하면 푸르르 날아 다른 쪽 조명에 앉아버리고, 다시 쫓으면 반대쪽 주방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그렇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카페 안을 휘젓고 다니던 새는 내가 처음 봤던 위치로 돌아가 앉았다. '날개 달린 짐승의 유리함은 대단하구나' 속으로 감탄했다. '아래에서 털 없는 원숭이들이 꺅꺅거리며 잡으려고 애를 써도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여유롭게 따돌리니 말이야'. 이 와중에도 새로운 손님들은 들어오고, 구경꾼은 늘어난다. 급기야 옆의 식물가게 사장님이 잠자리채를 들고 포획에 나섰다. 그물 달린 막대기가 추격하자 새도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만 이럴 수가, 유리창에 부딪치고 만다. 연거푸 두 번이나. 그리고 날기를 포기한다. 우리 모두는 그제야 저 새가 자

  • [with+] 조선 문단의 저울대

    [with+] 조선 문단의 저울대 지면기사

    이용휴(1708~1782)는 여주가 본관이며 자는 경명이고 호는 혜환이다. 정치색은 남인이어서 선대 이잠이 장희빈 사건에 연루되어 장살되면서 가문이 몰락의 길을 갔다. 막내 숙부가 성호 이익이었고 택리지를 쓴 이중환이 그의 조카였으며 당대의 천재로 불리던 이가환이 그의 아들이었다. 아들의 벼슬은 형조판서에 이르렀지만 그는 신유사옥 때 죄인으로 몰려 사약을 받았다.그는 조선 문단의 저울대였다. 그렇게 불려지기에 충분할 만큼 글의 깊이를 보는 눈이 탁발했다. 목민심서로 유명한 정약용은 그를 '마음을 쏟아 문사에 전념하여 동국의 비루함을 씻어내고 힘써 중국을 따랐다. 명성이 한 시대에 우뚝하였으므로 탁마하여 스스로를 새롭게 하려는 자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잘못을 바로 잡았다'고 썼다. 그는 문장의 가볍고 무거움을 잘 알았다.막내 숙부 '이익'이었던 '이용휴'글의 깊이 보는 눈 특별히 뛰어나 이용휴는 '참 나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순수했던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세상이 자신을 위해 움직이고 사물과 나 사이에 조금의 거리도 없었지만 차츰 의문이 생기면서 사물과 내가 멀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침내 나는 시를 원했는데 시가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나는 참을 바랐으나 참은 내게서 떠나갔다고, 나는 나를 만나지 못해 오래도록 슬펐다고, 그리하여 그는 돌아가리라, 떠나왔던 첫 자리로 돌아가리라, 덧없는 명성부터 버리리라, 나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털어버리고 옛 나로 돌아가리라 생각하니 눈이 맑아지고 귀가 밝아졌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얽어매던 것들이 풀어져나가자 세상에 거칠 것이 없었다. 세상이 더 넓게 보이고 사람이 더 밝게 보였다.그는 그토록 바라던 참 나를 되찾았다. 그것이 환아(還我)다. 그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좋은 시는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 나와 만나고 나를 찾아 내가 되는 것이 환아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내 안의 거짓 나를 몰아내고 참 나를 깃들게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러한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