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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죽음이 다가와도 괜찮아 지면기사
림프종 3기 기자가 쓴 투병기 읽고허술한 내인생 다시 연습하는 기분쫄지않고 사는법 등 힌트 배운느낌그저 작가의 건강·가족 평안을 기도내가 더 배울 세상은 아직도 많았다두어 달에 한 번은 구내염을 앓는다. 피곤해서 그렇겠지, 생각하지만 여기저기서 들리는 소리가 많다. 입 안이 쉬이 헐고 빈도가 잦다면 암을 의심해보는 편이 좋다고. 그러면 덜컥 겁이 난다. 무언가 정밀 검사를 받아봐야 하는 걸까? 나는 아직 젊고, 아이도 어린데.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는데.늘 가던 동네 가정의학과 의사에게 나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말했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요. 저, 정밀검사 받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의사는 내 입 안에 약을 발라주며 풉 웃었다. "그럴 상황은 아니고요. 검사가 필요하다 싶으면 제가 말씀드릴 테니 과로만 하지 마세요." 얼마 전에는 가슴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져서 화들짝 놀랐다. 협심증일까? 이러다 심장마비가 오는 거 아니야? 하마터면 119에 전화를 걸 뻔했다. 통증은 금세 가라앉았고 또 동네 가정의학과 의사를 찾아갔다. "조금만 불편해도 병원에 오는 습관, 좋아요. 오래 사시겠어요." 역류성 식도염이라고 했다. 역시나 과로를 하지 말란다.겁이 많아진 거다. 조부상, 조모상에 부의금을 보내던 시기를 훌쩍 지나 부모상은 이제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종종 들려오는 본인상은 먼 인연이라도 온종일 우울하다. "우리가 벌써 그런 나이인 거야? 뭔가 좀 아찔하다고." 장례식장에서 만난 친구들은 일회용 숟가락으로 육개장을 퍼먹으며 훌쩍였다.아침마다 출판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를 들여다본다. 나에게 그건 아침 신문을 읽는 것과 비슷한 습관이다. 또 얼마나 새로운 출판 아이디어가 펀딩 사이트에 올라왔을까. 또 얼마나 새로운 작가들이 데뷔 전 숨 고르기를 하고 있을까.그곳에서 책 한 권에 펀딩했다. '죽음이 다가와도 괜찮아'. 연합뉴스 김진방 기자가 쓴 책이다. 이제 마흔. 마흔이라는 나이에 나는 벌써 슬펐다.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이 있는 작가는 림프종 3기 판정을 받았다. 그 이야기를 써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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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공원 돗자리, 헤테로토피아의 목소리 지면기사
아이들 비밀기지·연극 무대처럼'잠깐 열렸다가 닫히는 유토피아'페르시아서 양탄자는 정원 의미친구들과 돗자리 앉아 '삶을 논평'다른 나로… 유토피아 따로 없어늦게 도착한 봄이 야속하게도 이른 여름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 아쉬운 봄의 끝자락, 내가 펼쳤던 돗자리들을 생각한다. 돗자리만큼 점유했던 사각형의 시간들도.호수공원 근처에 사는 나는 걸핏하면 돗자리를 끼고 나간다. 산수유와 목련에 이어 벚꽃이 절정을 이루는 시기에는 꽃그늘마다 빈틈없이 돗자리가 펼쳐지고, 그러면 공원 전체가 대가족의 야외거실처럼 변하는 느낌이 든다. 그 한가한 소란이, 캐노피처럼 드리워진 나무 그늘 사이로 차곡차곡 겹을 이루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묘법으로 그린 그림처럼 하나의 풍경을 이루는 것이 좋아서 나도 한구석을 차지하려 한다. 공원이 가장 아름답게 부풀어 오르는 봄과 가을의 한때를 놓치는 것은 쉽게 붙잡을 수 있는 행복을 놓치는 아쉬운 일이기에.호수공원이 거대한 고래라면 우리 가족은 자리를 옮겨가는 따개비마냥 올 때마다 이쪽저쪽으로 장소를 바꿔가며 돗자리를 펼친다. 김밥 네 줄, 과일 약간, 부스럭거리며 먹을 수 있는 과자와 집에서 내려온 커피, 이 정도면 아주 풍요로운 느낌이 든다. 가방에 넣어온 살림살이를 차곡차곡 풀어놓고 각자의 시간으로 흘러들었다. 나는 책을 보는둥 마는둥 하고, 남편은 음악을 듣는둥 마는둥 하는데 아이만 뭔가를 열심히 만들어 풀밭에 늘어놓고 사진을 찍고 있다.미셀 푸코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는 이 풍경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산문이다. 원래는 '다른(hetero)' '장소(topos)'가 합쳐져서 만든 합성어로 엉뚱한 데 붙은 신체기관을 지칭하는 의학용어라고 한다. 푸코는 이를 가져다가 '잠깐 열렸다가 닫히는 유토피아'라는 개념을 담아 뜻을 펼쳐 보인다. 예를 들어 아이들의 비밀 기지, 한 곳에서 여러 장소가 겹쳐지는 연극 무대 같은 곳도 다른 차원의 시공간이 된다는 점에서 헤테로토피아에 속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오래된 헤테로토피아는 '정원'일 것이다. 페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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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다시 맨발걷기 지면기사
지난해 아파트 뒷산에 생긴 황톳길부드러운 감촉에 가벼운 '첫걸음'사람들 입김에 편리한 쪽으로 변해리플릿 나눔·꽃길 만드는 사람들도맨발로 걷다 감기로 고생 '과유불급'숲이 연한 초록빛으로 흔들리고 있다. 휑하니 드러나던 황톳길도 이제는 나뭇잎이 무성해지면서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지난해 7월 하순, 내가 사는 아파트 뒷산에 황톳길이 생겼다. 이미 수년 전부터 맨발로 걷는 열풍이 불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나는 우연히 산을 올랐다가 이제 막 공사를 끝낸 황톳길을 보고는 호기심에 맨발로 걸어보았다. 말캉말캉한 흙을 밟으니 발에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다리와 발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무엇보다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계단만 오르면 될 정도로 가까웠기에 그동안 해왔던 등산이나 걷기운동을 작파하고 그때부터 황톳길에 매진했다. 나한테는 이 길이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복덩이였다. 실제 멀리서 오는 사람들은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좋겠다. 나도 이사 오고 싶어"하면서 부러워하기도 했다.새벽 5~6시면 일어나 그 길에 올라가면 벌써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다. 더러 젊은 사람도 있지만 그보다는 중년의 아저씨와 아줌마들, 그리고 퇴직한 지 20년은 되었음직한 노인과 지팡이를 짚고 올라오는 할머니들이 주를 이루었다. 동일한 사람이 매일 그 시간대에 오는 경우가 많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벌써 익숙해져 인사를 나누고 오래된 사이처럼 지내기 시작했다. 특히 아줌마들의 붙임성은 대단했다. 목소리가 크고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자석처럼 붙이고 다녔다.그러나 숫기가 없는 나는 같은 사람들을 만나는 게 제일 힘들었다. 말을 붙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가급적 눈을 피하는 것으로 모면하려 했지만 마냥 무심한 성격이 아니어서 내내 신경이 쓰였다.막 생긴 황톳길은 사람들의 입김에 따라 하루가 다르게 편리한 쪽으로 바뀌어갔다(주변 환경이 망가지기도 했다). 걷기를 끝내고 흙발을 닦으라고 수도를 설치해놓았는데, 처음에는 샤워기가 없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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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김소월과 진달래꽃 지면기사
1925년 24세때 유일한 첫 시집 출간스승 김억의 詩전문지 지원 위한것33세때 '삼수갑산' 등 많은 시 발표그해 세모에 운명 달리한 민족시인소월의 또다른 봄의 염원은 '봄바람'산그늘마다 진달래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진달래꽃무더기를 보고 환장할 것 같다고 말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 무언가 아련하면서 뜨거운 것이 가슴속으로 올라오는 것은 진달래꽃이 유년의 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산그늘 가득한 진달래꽃은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마법의 꽃이다.진달래꽃무더기를 보고 있노라면 생각나는 시인이 있다. 김소월이다. 소월 역시 진달래꽃을 보면 가슴이 먹먹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영변에 약산/진달래꽃/아름 따다/가실 길에 뿌리우리다//가시는 걸음걸음/놓인 그 꽃을/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라고 노래했을 것이다. 이 시는 21세 때인 1922년에 '개벽'지에 발표되었으며 불후의 명작이다.김소월(1902~1934)의 본명은 김정식이다. 평안북도 안주군 곽산면 태생이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 태어난 곳은 구성군 서산면 옥인동 외가다. 1909년인 8세에 곽산면 소재 남산학교에 입학했고 1917년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했다. 이때 교장이 조만식이었고 은사 가운데 시인 김억이 있어 그에게서 시 창작 지도를 받았다. 4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상대'에 입학한다. 그러나 그해 9월에 일어난 동경 대지진으로 귀국한다. 그 후 학업을 다시 계속하지 못하고 만다. 22세 되던 1923년 3월, 배재고보를 졸업한다. 재학 중에는 교지 '배재'에 '옛 이야기' '길손' '봄바람' 등의 시와 모파상의 단편소설 '떠돌아가는 계집'을 번역 수록한다.1923년, 22세 때 '님의 노래' '길손' '봄바람'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삭주구성' 등의 시를 발표한다. 1924년, 23세 때 '신앙' '서로 믿음' '밭고랑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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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우리라는 착각 지면기사
어릴적 '단일민족국가' 교육 받아품넓은 '우리' 진짜 의미 잊고 살아다양한 사람 여행 기쁜표정 다 닮아산속 나무들 잎·줄기·꽃 다르지만물러나 보면 다를게 없는 숲이다출근 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가서 창이 넓은 승객 쉼터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출근 인파가 몰리기 전에 좀 서둘러 출근하면 공항철도에서 앉을 확률이 올라가기 때문이고, 피곤에 지친 퇴근 후의 밤보다는 자고 일어난 아침이 더 맑은 정신으로 책이 잘 읽히지 않겠는가 하는 심산이었다.아침 해는 진작에 솟았고 창밖으로는 드문드문 승객들을 기다리는 비행기들이 보인다. 그리고 여행객들은 각자 색색의 여행가방을 들고 기대감에 들뜬 표정으로 분주히 공항을 오간다. 국제공항임을 증명하듯 외국인의 비율이 매우 높다. 국적도 인종도 다양하여 평생 봤을 외국인들의 수보다도 많은 외국인들을 매일 만나고 있다.어떤 사연을 품고 이곳에 왔을까, 어떤 곳에서 어떤 경로로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을까, 상상을 하며 그들의 스쳐지나가는 얼굴을 보면 당연하게도 모두가 너무나 다르게 생겼다. 다양한 피부색, 다양한 얼굴 그리고 그들이 대화할 때 들리는 다양한 언어.그런 혼재된 풍경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문득 이곳이 낯선 생태계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이라는 동일한 종들이 모여있는 것이 아닌, 모두가 다른 개개의 종들이 모여있다는 생각.외국인을 처음 본 것은 일곱 살 때쯤이었던 것 같다. 부모님 손을 잡고 어린이 대공원에 놀러 갔다가 처음 외국인을 만났다. 물론 TV에서 종종 외국인을 보았지만 실제로 대면한 것은 처음이었다. 피부색도 눈동자색도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때 내 세계에서 외국인이란 영화에서나 나오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TV 영화에서 나오는 외국인들의 대사는 모두 더빙으로 녹음되어 우리말을 쓰고 있었다.우리 민족, 우리나라, 우리말, 우리라는 말엔 좀 묘한 구석이 있다. 어릴 때는 이 단어를, 남들을 배제할 때 자주 썼던 것 같다. 이건 우리 거야, 여긴 우리 집이야, 여긴 우리 학교야.하지만 뜻을 되새겨보면 우리라는 말은 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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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뛰다가 걷다가 지면기사
호주 직장 생활때 생전 처음 '조깅'쉽지 않을땐 브리즈번강 거닐기도지금 나의 시간 많다 느껴지지 않아유쾌한 할머니 되고 싶을때가 많다그 인생도 꽤 재밌지 않을까 싶어서젊은 날, 호주에서 직장을 다닌 적이 있었다. 브리즈번이라는 도시는 사계절 내내 맑았고, 한겨울에 발가락이 다 드러나는 샌들을 신으면 발은 좀 시려도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볼 정도는 아닐 만큼 따스한 곳이었다. 회사는 브리즈번 시티 가장 번화가 한복판에 있었고 내가 살던 집 역시 회사에서 강변 산책로를 따라 십여 분쯤만 걸으면 나오는 곳이었다. 출근은 아침 아홉 시, 퇴근은 오후 다섯 시 반이었다. 친구가 별로 없었으므로 당연히 나에게는 시간이 혹독할 만큼 많았다. 집에 가는 길에는 대형 마트에 들러 마감 세일을 하는 스테이크용 고기를 사고, 보틀숍에 들러 맥주도 샀다. 된장찌개를 끓이고 고기를 구워 저녁을 먹어도 일곱 시가 채 되지 않았고, 온종일 영어만 나오는 텔레비전 앞에 앉으면 그걸 애써 듣느라 금세 피곤해졌다. 그때 내 소원은 설거지를 하며 뉴스를 듣는 거였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면, 설거지 물소리에 섞여 대충대충 들리는 뉴스도 단박에 알아먹을 수 있는 것. 그 꿈은 여태 이루질 못했다. 영어란 나에게 거대한 산 같은 것이었다. 뉴스는커녕 심슨 만화영화만 틀어놓아도 나는 금방 졸렸다. 소파에서 끄덕끄덕 졸다 결국 침대에 눕는 시간은 아홉 시도 되지 않았다. 그러니 침실 커다란 창으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 잠을 깨면 새벽 네다섯 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맙소사, 새벽 다섯 시에 이토록 강렬한 햇살이라니. 더 자고 싶어도 얇은 흰 커튼 사이로 햇빛은 사정없이 쏟아져 들어왔고, 선크림이라도 바르고 다시 자야 하나 고민을 하다 나는 별수 없이 일어나고 말았다.그러면 또 할 일이 없어 나는 점심 도시락을 쌌다. 식빵을 구워 슬라이스 햄과 치즈를 끼워넣는 것이 전부인 도시락은 십 분이면 완성했고, 급기야 나는 아침 조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집을 함께 쓰던 플랫메이트는 일본인 유학생이었다. 간호대학을 다니던 그녀의 이름을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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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종이 주머니와 우산 안테나 지면기사
딸과 도서관 가면 끄적이고 싶어져종이에 쓰면 주머니서 꺼내는 느낌딸이 끄집어낸 그림에 기억이 새록미화원의 기부에 담긴 인생 이야기경이로운 삶 수신하듯 우산 돌려봐딸과 도서관에 함께 가면 우리는 각자의 책을 찾아 1층과 2층으로 흩어진다. 딸은 어린이 자료실이 있는 1층 창가 쪽 소파로, 나는 종합자료실이 있는 2층 책상으로 향한다. 평일 오후 5시의 공공도서관 창문으로 길어진 오후 햇빛이 깊숙이 들어오고, 드문드문 책을 찾는 사람들이 서가에 서성인다. 도서관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쾌적한 침묵으로 채워져 있다. 이렇게 완벽한 순간에는 종이를 펼쳐 뭔가를 끄적이고 싶다. 쓸 게 있어서가 아니라 쓰는 감각을 느끼고 싶어서 쓸 것을 찾게 되는, 손가락이 몹시 간지러운 느낌. 뭔가를 적다보면 내가 쓴 것이 아니라 종이에 달린 주머니에서 끄집어내는 것처럼 여겨진다.종이에 달린 주머니에서 내가 꺼낸 것은 전부 글자로 되어 있다. 돌돌 말린 리본처럼 문장의 형태를 띠고 있어 그걸 풀어서 펼치는 것이 글쓰기가 된다. 그런데 여섯시가 되어 어린이자료실이 문을 닫자, 내 옆에 앉은 딸의 경우에는 또 다르다. 딸의 '종이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글자보다는 그림이다. 다섯 손가락을 그린 후 각각의 손가락을 휘감고 있는 나무 덩굴, 보석이 달린 철사, 초록색 뱀, 색실을 그린 후 손바닥에는 기하학적 패턴의 연못을 만들고 물고기 두 마리가 헤엄치는 그림을 그려놓았다. 바퀴모양의 보석 그림을 보다가 내 노트로 돌아왔는데, 문장은 어느새 기억으로 바뀌어 있었다.작가가 되기 전에 나는 잡지사 기자로 일했는데, 한번은 바퀴를 테마로 여러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꼭지를 맡은 적이 있다. 환경미화원을 섭외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신문을 뒤지다가 조그마한 미담을 발견했다. 재활용처리장에서 일하는 어느 환경미화원이 버려진 소파에서 나온 동전들을 수년간 모아 전액 기부했다는 기사였다. 신문에 나온 곳으로 전화해 연결이 되어 그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사실 그 코너는 글보다 사진이 중요했고, 인터뷰는 몇 줄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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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지면기사
날카롭게 쏘아보는 한용운 사진사형 당한 독립투사들의 모습들손톱 찌르기·대못 박힌 상자 등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고문기구역사적 현장 이제 왔다는게 죄송"김 선생님, 우리 서대문형무소 한번 가요."지난 2월22일 겨울의 끝자락에 소복히 내린 눈으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온통 하얗게 덮여 있었다. 망루가 있는 붉은 벽돌 건물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니 벽면 두 곳에 거대한 태극기가 부착되어 있다. 그 사이 눈이 왔다고 누군가 눈사람을 만들어 놓아 마음을 살짝 누그러뜨려 주고 있었다.나와 주위의 몇 사람이 몇 년 전부터 서울·경기지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고 있지만 한 회원의 거듭된 요청이 없었다면 내가 자발적으로 이 형무소를 찾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회원은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곳을 관람하시고는 그렇게 많이 우셨어요"라고 말했다.간수들이 업무를 보았던 보안과 청사였던 전시관 1층에 들어서니 퀘퀘한 냄새가 올라왔다. 냄새 하나로 과거 고문을 당했던 독립투사들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아픔이 일어났다. 바로 이어지는 전시물. 1936년에 한반도 전역에 있었던 형무소 지도였다.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해 경성, 평양, 원산, 대전, 공주, 광주, 부산 등 전국에 뻗어있는 28개의 형무소와 소년원, 형무지소는 일제에 대한 우리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2층 전시관에는 죄수들을 옥죄는 수형 기구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사상범 4천800명의 사진이 붙어있는 수형기록카드가 사방 벽을 다 채우고 있다. 익히 알려진 이들도 많이 보이는데, 그중 한용운의 사진은 자세가 남다르다. 한용운은 정면 사진에서 비웃음을 띠며 날카롭게 앞쪽의 누군가를 쏘아보고 있다. '저렇게 저항했으니 변절하지 않을 수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스쳤다.지하실에 전시된 사형장과 시신을 내가던 시문구에 이르니 모골이 송연했다. 사형장 안에는 목밧줄이 있는 사형대와 그곳에서 죽어간 독립투사들의 사진이 십수 장 붙어있다. 사형을 앞두고 최고령 독립투사 강우규(1855~1920) 의사가 남긴 "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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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아름답다는 착각 지면기사
볼수록 매력에 빠져드는 '명품'누구는 브랜드·디자인 가격 강조아름다움, 노동가치 상회 부도덕수많은 디자이너·생산·수송자…문득 그들의 손·발 기억하고 싶다수레를 아득바득 소처럼 끌어도 쳐다보는 사람들이 없다. 주목받고 싶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들이 내가 끌고 가는 술 상자가 가득 담긴 수레에 부딪히면 안 되기 때문이다. 짐을 가득 실은 L-Cart의 무게는 수백 킬로그램이라서 거기에 발목이라도 부딪힌다면 골절상을 입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나가는 수레를 그렇게 심각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은 없다. 조금 이르게 거리를 두고 피할 수 있음에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다. 사람이 끌고 있으므로 위험한 순간이 오면 금방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내 몸무게의 세 배가 넘는 수레를 한번에 세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내가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앞을 보지 않고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며 걷거나 옆쪽으로 화려하게 늘어선 면세점 상가의 상품들을 바라보며 걷는다. 사람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바라본다. 누구나 알만한 익숙한 이름의 브랜드에서 생전 처음 들어보는 브랜드까지 온갖 상품들이 면세점 구역 양쪽으로 화려하게 펼쳐져 있다. 닿지 않는 것에는 경탄 아니면 경멸이라고 했던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그런 명품 브랜드들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천만원 넘는 가격의 상품들이 이렇게 많다니. 브랜드가 다르지만 같은 종류의, 평소에 내가 마트에서 사는 상품들의 가격에 0자가 하나씩 더 붙어 있다. 혹은 두 개. 면세가임에도.하지만 다니면 다닐수록 빠져드는 매력, 아름다운 상품들-그래서 호칭도 명품이다-그 매력에 점차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계속 보게 되니 알 것 같았다. 아 저게 마감이 좋고, 색이 좋고, 디자인이 좋고, 아름답구나. 빛나는구나.무거운 수레를 끌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휘황찬란한 아름다움에 넋이 나가 있다가 문득 생각에 잠긴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가격이 올라갈수록 아름다움도 올라가는 것일까. 누구는 브랜드 값이라고도 하고 누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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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열 살 풍경 지면기사
'마음 읽는데' 책 가져왔다는 딸놀랍고 감동… 그래서 후끈해졌다몰래 본 일기장엔 예쁜 말만 가득절반은 MBTI 이야기… 혼자 '푸실''들키면 어쩌나'… 어이없는 한숨내 딸은 이제 만 여덟 살, 그러니까 우리에게 아직 익숙한 나이로는 열 살이다. 예비 초등 3학년이다. 늘 아기라고 생각했는데, 또 그럴 일이 아니다 싶었던 건 나의 열 살 무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열 살 적 나는 생각이 몹시 많았다. 청개구리 손에 쥐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남자아이들이 유치했고, 걸핏하면 삐치고 울어버리는 짝꿍 아이도 한심하긴 마찬가지였다. 한 세계를 단숨에 건너뛴 것처럼 짐짓 골몰히 생각에 빠지곤 하던 시절이었다. 유독 한 날이 또렷이 기억난다. 아마도 피아노 학원에 다녀오던 길이었을 텐데, 아이들로 빼곡한 놀이터를 가로질러 집으로 가던 나는 가방끈을 고쳐 쥐며 가만히 생각을 했더랬다."엄만 아직도 그 날이 생생해. 열 살이었거든.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 나는 누굴까? 나는 대체 누굴까?" 내 말에 딸아이가 대답했다. "엄만 김서령이지." "그런 거 말고 그냥… 나란 사람은 누구지? 나는 왜 김서령이지? 왜 신욱이가 아니고 영애가 아니고 지현이가 아니고 하필 김서령으로 태어났지? 나는 어디서 온 걸까? 어쩌다가 김서령으로 살게 되었을까? 나는 앞으로 어디로 계속 걸어가게 될까? 나중엔, 아주 나중엔 어디로 갈까? 그런 생각. 그런 생각을 했던 게 아직 또렷하게 기억나." 말을 하면서도 웃었다. 고작 열 살 먹은 그 시절의 내가 조금 우스웠다. 공기놀이를 하자고, 땅따먹기를 하자고 친구들이 나를 불렀지만 미간 한 번 살짝 찌푸리고는 대답 없이 걸어갔던 나. 도대체 얼마나 새침데기였던 걸까. 내 이야기를 듣던 딸아이가 한참 입을 다물고 있기에 내가 물었다. "이상해? 그런 생각?" 아이가 대답했다. "엄마, 요스타케 신스케가 쓴 '이게 정말 나일까?'란 책이 있어. 그거 말고도 '이게 정말 마음일까?'랑 '이게 정말 천국일까?'라는 책도 있는데, 일단 엄마는 '이게 정말 나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