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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talk)!세상] 경기(京畿)의 유래는 언제부터일까? 지면기사
대한민국은 산과 강이 어우러진 나라다. 산과 산이 이어져 도시가 되고, 강과 강을 사이에 두고 도시가 발달하였다. 강이 없는 도시가 없고, 천이 없는 동네가 없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은 산과 강으로 이어져 있다. 서울은 삼각산과 관악산이 이어져 거대 도시가 되었고, 삼각산과 관악산의 물길이 한강으로 모여 수도를 지켰다. 서울의 중심은 한강이요, 한강을 만나야 비로소 서울이다. 한강의 물줄기는 한반도 동쪽인 금강산과 오대산에서 흘러 양평 두물머리(양수리)를 거쳐 서쪽인 강화도 서해까지 이어져 하나가 된다. 경기는 1천여 년 전부터 있던 도시다. 고려의 수도가 개경일 때 개경으로부터 500리 주변에 경현(京縣)과 기현(畿縣)이 모여 '경기'라 하였다. 다시 말해 개경을 중심으로 도성(내성·외성으로 이루어진 도읍지 성곽)과 그 주변 임진강까지 도시 즉 개성, 장단, 정주, 덕수, 강음, 송림, 임진, 임강, 적성, 파평, 마전이 고려시대의 경기다. 하지만 고려말 경기는 한강을 중심으로 좌도와 우도로 나누어져 남경(지금의 서울), 금주(시흥), 과주(과천), 당성(화성) 및 포주(포천)까지 경기의 범위가 넓고 거대해졌다.경기는 고려 이래 조선까지 수도를 품은 도시다. 600여 년 전 조선의 수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겨지며 한양도성 성저십리 밖이 경기가 되었다. 1천년전 고려 수도 개경으로부터500리 주변 경현·기현 모여 명명600년전 한양도성 성저십리 밖 북한산성이 있는 고양, 행주산성이 있는 덕양, 한강 아래에서 남한산성까지 광주, 중랑천 건너 아차산성까지 양주가 모두 경기였다. 또한 경기 좌·우도는 경기로 합해지며 양주, 광주, 수원, 여주, 안성까지도 경기였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군사적 요충지인 유수부(留守府)에 군영이 설치되어 수도와 왕실·왕릉까지 지켰다. 유수부는 개성·광주·수원·강화로 관리영·수어청·총리영·진무영이 그 지역의 행궁과 성곽을 지키는 전략적 직할 도시로 경기였다.경기는 1천년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도시다. 한양도성을 벗어나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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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talk)!세상] MZ 세대가 맞닥뜨린 일자리 (1부) 지면기사
지난 2021년 고용노동부와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하반기 민간사업체의 구직자리 중 미충원 인원이 11만여 명에 달하였다. 미충원의 사유로 근로조건이 구직자 기대에 맞지 않아서라는 이유와 요구 경력을 갖춘 지원자가 없어서 또는 학력 자격을 갖춘 지원자가 없어서의 순으로 나타났다. 특히, 2022년 교육부의 고등교육기관 졸업자 취업 통계조사에 의하면 최종학력이 대졸 이상인 경우 취업률이 65.1%로 나타났으며 이는 통계작성을 시작한 이래 가장 낮은 수치였다. 이러한 결과는 취업준비생은 제대로 취업을 못하고 중소기업의 경우에는 적합한 인재를 뽑지 못하는 미스매치를 전형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이미 지난해에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는 것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작년 대졸이상 취업률 65.1% '최악'직업 불만족 이직·실직 위험성 커져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2021년 한국경제원의 발표를 보면 우리나라 대졸자의 전공과 선택한 직업 간의 미스매치율이 50%에 달하여 OECD국가 중 1위를 차지하였고, 같은 해 통계청 조사에서도 일자리와 전공 불일치율이 52%로 취업자의 절반 이상이 전공과 불일치하는 일자리를 선택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 중에서도 매우 불일치한다는 응답이 40%로 나타나 그 심각성을 더한다. 뿐만 아니라 고학력자의 하향취업(자신의 학력이나 기술 수준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 직업을 선택)하는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이들이 향후 직업에서 오는 불만족으로 인한 잦은 이직이나 실직의 위험성이 동시에 높아지고 있다. 일자리 수요자와 공급자 간의 미스매치의 결정적인 이유는 첫째, 대졸 인력의 증가율과 고학력에 맞는 소위 고퀄리티 일자리 증가율 간의 차이 때문이다. 실제로 대졸자의 비율은 연평균 3% 증가한데 반하여 고학력에 맞는 일자리는 연평균 1.3%밖에 증가하지 않았다. 둘째, 산업구조가 급변함에 따라 기존의 취업처 자체가 감소하는 실정에 잠정적으로 제조업의 경우 지속적으로 일자리수가 감소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금융, 보험, 전문과학 기술의 분야도 미래 일자리 상실의 고위험군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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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talk)!세상] 나는 회의한다, 고로 희망한다 지면기사
정치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숭고한 일이라 생각했다. 한동안 정치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다. 그게 아니었다. 정치는 너무나도 뻔하고 자명한 것을 아니라고 우기기 위해 패거리를 만들어서 싸우는 기술일 뿐이다. 작금의 정치 현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정치에 대한 회의가 쓰나미처럼 밀려들고 있다.사는 게 답답하고 회의가 들 때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프랑스의 회의주의자 몽테뉴다. 몽테뉴는 자신의 서재 천장에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만이 확실하다"는 문구를 붙여 놓았다. 그의 회의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무려 20년 동안 아무런 물리적 강요나 제약도 없는 상태에서 단 한 권의 책 집필에만 몰두했을 정도다. 그렇게 탄생한 책이 '에세(Les Essais)'다. 프랑스인들은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프랑스의 고유한 지적 계보를 형성한 작가와 사상가들을 모랄리스트(moraliste)라 불렀다. 그의 가장 앞자리에 몽테뉴의 이름이 있고, 그 뒤로 파스칼과 라 브뤼예르, 라 로슈푸코 등이 포함된다. 모랄리스트 몽테뉴의 정신은 이렇게 압축된다. "뒤흔들고, 의심하고, 따져 묻고, 어떤 것도 단정하지 않고, 어떤 것도 다짐하지 않는 것."(이환 '몽테뉴와 파스칼'에서) 정치혐오, 자체 부정하는듯 해도진영이라는 이름의 '패거리 산물'상대 불신·적개심 극대화 음모론 몽테뉴의 정신을 한마디로 말하면 회의를 통한 희망 찾기다. 일테면, 역설적 도그마다. 몽테뉴는 기본적으로 학자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학자들이 하는 말은 마치 새들이 모이를 맛도 보지 않고 새끼들의 입속에 넣어주는 것과 같다. 그들은 갈레누스는 잘 알지만, 아픈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머리를 법률로 가득 차게 하지만 소송의 요점은 모른다."(박홍규,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에서) 정권에 빌붙는 어용학자가 미디어를 활보하고, 선거 때만 되면 어김없이 '폴리페서'가 들끓는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몽테뉴의 회의는 크세주(Que sais je, 나는 무엇을 아는가)에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