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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ith+] 공원 돗자리, 헤테로토피아의 목소리

    [with+] 공원 돗자리, 헤테로토피아의 목소리 지면기사

    아이들 비밀기지·연극 무대처럼'잠깐 열렸다가 닫히는 유토피아'페르시아서 양탄자는 정원 의미친구들과 돗자리 앉아 '삶을 논평'다른 나로… 유토피아 따로 없어늦게 도착한 봄이 야속하게도 이른 여름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 아쉬운 봄의 끝자락, 내가 펼쳤던 돗자리들을 생각한다. 돗자리만큼 점유했던 사각형의 시간들도.호수공원 근처에 사는 나는 걸핏하면 돗자리를 끼고 나간다. 산수유와 목련에 이어 벚꽃이 절정을 이루는 시기에는 꽃그늘마다 빈틈없이 돗자리가 펼쳐지고, 그러면 공원 전체가 대가족의 야외거실처럼 변하는 느낌이 든다. 그 한가한 소란이, 캐노피처럼 드리워진 나무 그늘 사이로 차곡차곡 겹을 이루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묘법으로 그린 그림처럼 하나의 풍경을 이루는 것이 좋아서 나도 한구석을 차지하려 한다. 공원이 가장 아름답게 부풀어 오르는 봄과 가을의 한때를 놓치는 것은 쉽게 붙잡을 수 있는 행복을 놓치는 아쉬운 일이기에.호수공원이 거대한 고래라면 우리 가족은 자리를 옮겨가는 따개비마냥 올 때마다 이쪽저쪽으로 장소를 바꿔가며 돗자리를 펼친다. 김밥 네 줄, 과일 약간, 부스럭거리며 먹을 수 있는 과자와 집에서 내려온 커피, 이 정도면 아주 풍요로운 느낌이 든다. 가방에 넣어온 살림살이를 차곡차곡 풀어놓고 각자의 시간으로 흘러들었다. 나는 책을 보는둥 마는둥 하고, 남편은 음악을 듣는둥 마는둥 하는데 아이만 뭔가를 열심히 만들어 풀밭에 늘어놓고 사진을 찍고 있다.미셀 푸코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는 이 풍경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산문이다. 원래는 '다른(hetero)' '장소(topos)'가 합쳐져서 만든 합성어로 엉뚱한 데 붙은 신체기관을 지칭하는 의학용어라고 한다. 푸코는 이를 가져다가 '잠깐 열렸다가 닫히는 유토피아'라는 개념을 담아 뜻을 펼쳐 보인다. 예를 들어 아이들의 비밀 기지, 한 곳에서 여러 장소가 겹쳐지는 연극 무대 같은 곳도 다른 차원의 시공간이 된다는 점에서 헤테로토피아에 속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오래된 헤테로토피아는 '정원'일 것이다. 페르시

  • [with+] 다시 맨발걷기

    [with+] 다시 맨발걷기 지면기사

    지난해 아파트 뒷산에 생긴 황톳길부드러운 감촉에 가벼운 '첫걸음'사람들 입김에 편리한 쪽으로 변해리플릿 나눔·꽃길 만드는 사람들도맨발로 걷다 감기로 고생 '과유불급'숲이 연한 초록빛으로 흔들리고 있다. 휑하니 드러나던 황톳길도 이제는 나뭇잎이 무성해지면서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지난해 7월 하순, 내가 사는 아파트 뒷산에 황톳길이 생겼다. 이미 수년 전부터 맨발로 걷는 열풍이 불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나는 우연히 산을 올랐다가 이제 막 공사를 끝낸 황톳길을 보고는 호기심에 맨발로 걸어보았다. 말캉말캉한 흙을 밟으니 발에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다리와 발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무엇보다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계단만 오르면 될 정도로 가까웠기에 그동안 해왔던 등산이나 걷기운동을 작파하고 그때부터 황톳길에 매진했다. 나한테는 이 길이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복덩이였다. 실제 멀리서 오는 사람들은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좋겠다. 나도 이사 오고 싶어"하면서 부러워하기도 했다.새벽 5~6시면 일어나 그 길에 올라가면 벌써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다. 더러 젊은 사람도 있지만 그보다는 중년의 아저씨와 아줌마들, 그리고 퇴직한 지 20년은 되었음직한 노인과 지팡이를 짚고 올라오는 할머니들이 주를 이루었다. 동일한 사람이 매일 그 시간대에 오는 경우가 많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벌써 익숙해져 인사를 나누고 오래된 사이처럼 지내기 시작했다. 특히 아줌마들의 붙임성은 대단했다. 목소리가 크고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자석처럼 붙이고 다녔다.그러나 숫기가 없는 나는 같은 사람들을 만나는 게 제일 힘들었다. 말을 붙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가급적 눈을 피하는 것으로 모면하려 했지만 마냥 무심한 성격이 아니어서 내내 신경이 쓰였다.막 생긴 황톳길은 사람들의 입김에 따라 하루가 다르게 편리한 쪽으로 바뀌어갔다(주변 환경이 망가지기도 했다). 걷기를 끝내고 흙발을 닦으라고 수도를 설치해놓았는데, 처음에는 샤워기가 없었다. 그런데

  • [with+] 김소월과 진달래꽃

    [with+] 김소월과 진달래꽃 지면기사

    1925년 24세때 유일한 첫 시집 출간스승 김억의 詩전문지 지원 위한것33세때 '삼수갑산' 등 많은 시 발표그해 세모에 운명 달리한 민족시인소월의 또다른 봄의 염원은 '봄바람'산그늘마다 진달래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진달래꽃무더기를 보고 환장할 것 같다고 말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 무언가 아련하면서 뜨거운 것이 가슴속으로 올라오는 것은 진달래꽃이 유년의 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산그늘 가득한 진달래꽃은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마법의 꽃이다.진달래꽃무더기를 보고 있노라면 생각나는 시인이 있다. 김소월이다. 소월 역시 진달래꽃을 보면 가슴이 먹먹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영변에 약산/진달래꽃/아름 따다/가실 길에 뿌리우리다//가시는 걸음걸음/놓인 그 꽃을/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라고 노래했을 것이다. 이 시는 21세 때인 1922년에 '개벽'지에 발표되었으며 불후의 명작이다.김소월(1902~1934)의 본명은 김정식이다. 평안북도 안주군 곽산면 태생이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 태어난 곳은 구성군 서산면 옥인동 외가다. 1909년인 8세에 곽산면 소재 남산학교에 입학했고 1917년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했다. 이때 교장이 조만식이었고 은사 가운데 시인 김억이 있어 그에게서 시 창작 지도를 받았다. 4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상대'에 입학한다. 그러나 그해 9월에 일어난 동경 대지진으로 귀국한다. 그 후 학업을 다시 계속하지 못하고 만다. 22세 되던 1923년 3월, 배재고보를 졸업한다. 재학 중에는 교지 '배재'에 '옛 이야기' '길손' '봄바람' 등의 시와 모파상의 단편소설 '떠돌아가는 계집'을 번역 수록한다.1923년, 22세 때 '님의 노래' '길손' '봄바람'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삭주구성' 등의 시를 발표한다. 1924년, 23세 때 '신앙' '서로 믿음' '밭고랑 위에서

  • [with+] 우리라는 착각

    [with+] 우리라는 착각 지면기사

    어릴적 '단일민족국가' 교육 받아품넓은 '우리' 진짜 의미 잊고 살아다양한 사람 여행 기쁜표정 다 닮아산속 나무들 잎·줄기·꽃 다르지만물러나 보면 다를게 없는 숲이다출근 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가서 창이 넓은 승객 쉼터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출근 인파가 몰리기 전에 좀 서둘러 출근하면 공항철도에서 앉을 확률이 올라가기 때문이고, 피곤에 지친 퇴근 후의 밤보다는 자고 일어난 아침이 더 맑은 정신으로 책이 잘 읽히지 않겠는가 하는 심산이었다.아침 해는 진작에 솟았고 창밖으로는 드문드문 승객들을 기다리는 비행기들이 보인다. 그리고 여행객들은 각자 색색의 여행가방을 들고 기대감에 들뜬 표정으로 분주히 공항을 오간다. 국제공항임을 증명하듯 외국인의 비율이 매우 높다. 국적도 인종도 다양하여 평생 봤을 외국인들의 수보다도 많은 외국인들을 매일 만나고 있다.어떤 사연을 품고 이곳에 왔을까, 어떤 곳에서 어떤 경로로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을까, 상상을 하며 그들의 스쳐지나가는 얼굴을 보면 당연하게도 모두가 너무나 다르게 생겼다. 다양한 피부색, 다양한 얼굴 그리고 그들이 대화할 때 들리는 다양한 언어.그런 혼재된 풍경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문득 이곳이 낯선 생태계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이라는 동일한 종들이 모여있는 것이 아닌, 모두가 다른 개개의 종들이 모여있다는 생각.외국인을 처음 본 것은 일곱 살 때쯤이었던 것 같다. 부모님 손을 잡고 어린이 대공원에 놀러 갔다가 처음 외국인을 만났다. 물론 TV에서 종종 외국인을 보았지만 실제로 대면한 것은 처음이었다. 피부색도 눈동자색도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때 내 세계에서 외국인이란 영화에서나 나오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TV 영화에서 나오는 외국인들의 대사는 모두 더빙으로 녹음되어 우리말을 쓰고 있었다.우리 민족, 우리나라, 우리말, 우리라는 말엔 좀 묘한 구석이 있다. 어릴 때는 이 단어를, 남들을 배제할 때 자주 썼던 것 같다. 이건 우리 거야, 여긴 우리 집이야, 여긴 우리 학교야.하지만 뜻을 되새겨보면 우리라는 말은 품이

  • [with+] 뛰다가 걷다가

    [with+] 뛰다가 걷다가 지면기사

    호주 직장 생활때 생전 처음 '조깅'쉽지 않을땐 브리즈번강 거닐기도지금 나의 시간 많다 느껴지지 않아유쾌한 할머니 되고 싶을때가 많다그 인생도 꽤 재밌지 않을까 싶어서젊은 날, 호주에서 직장을 다닌 적이 있었다. 브리즈번이라는 도시는 사계절 내내 맑았고, 한겨울에 발가락이 다 드러나는 샌들을 신으면 발은 좀 시려도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볼 정도는 아닐 만큼 따스한 곳이었다. 회사는 브리즈번 시티 가장 번화가 한복판에 있었고 내가 살던 집 역시 회사에서 강변 산책로를 따라 십여 분쯤만 걸으면 나오는 곳이었다. 출근은 아침 아홉 시, 퇴근은 오후 다섯 시 반이었다. 친구가 별로 없었으므로 당연히 나에게는 시간이 혹독할 만큼 많았다. 집에 가는 길에는 대형 마트에 들러 마감 세일을 하는 스테이크용 고기를 사고, 보틀숍에 들러 맥주도 샀다. 된장찌개를 끓이고 고기를 구워 저녁을 먹어도 일곱 시가 채 되지 않았고, 온종일 영어만 나오는 텔레비전 앞에 앉으면 그걸 애써 듣느라 금세 피곤해졌다. 그때 내 소원은 설거지를 하며 뉴스를 듣는 거였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면, 설거지 물소리에 섞여 대충대충 들리는 뉴스도 단박에 알아먹을 수 있는 것. 그 꿈은 여태 이루질 못했다. 영어란 나에게 거대한 산 같은 것이었다. 뉴스는커녕 심슨 만화영화만 틀어놓아도 나는 금방 졸렸다. 소파에서 끄덕끄덕 졸다 결국 침대에 눕는 시간은 아홉 시도 되지 않았다. 그러니 침실 커다란 창으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 잠을 깨면 새벽 네다섯 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맙소사, 새벽 다섯 시에 이토록 강렬한 햇살이라니. 더 자고 싶어도 얇은 흰 커튼 사이로 햇빛은 사정없이 쏟아져 들어왔고, 선크림이라도 바르고 다시 자야 하나 고민을 하다 나는 별수 없이 일어나고 말았다.그러면 또 할 일이 없어 나는 점심 도시락을 쌌다. 식빵을 구워 슬라이스 햄과 치즈를 끼워넣는 것이 전부인 도시락은 십 분이면 완성했고, 급기야 나는 아침 조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집을 함께 쓰던 플랫메이트는 일본인 유학생이었다. 간호대학을 다니던 그녀의 이름을 이제

  • [with+] 종이 주머니와 우산 안테나

    [with+] 종이 주머니와 우산 안테나 지면기사

    딸과 도서관 가면 끄적이고 싶어져종이에 쓰면 주머니서 꺼내는 느낌딸이 끄집어낸 그림에 기억이 새록미화원의 기부에 담긴 인생 이야기경이로운 삶 수신하듯 우산 돌려봐딸과 도서관에 함께 가면 우리는 각자의 책을 찾아 1층과 2층으로 흩어진다. 딸은 어린이 자료실이 있는 1층 창가 쪽 소파로, 나는 종합자료실이 있는 2층 책상으로 향한다. 평일 오후 5시의 공공도서관 창문으로 길어진 오후 햇빛이 깊숙이 들어오고, 드문드문 책을 찾는 사람들이 서가에 서성인다. 도서관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쾌적한 침묵으로 채워져 있다. 이렇게 완벽한 순간에는 종이를 펼쳐 뭔가를 끄적이고 싶다. 쓸 게 있어서가 아니라 쓰는 감각을 느끼고 싶어서 쓸 것을 찾게 되는, 손가락이 몹시 간지러운 느낌. 뭔가를 적다보면 내가 쓴 것이 아니라 종이에 달린 주머니에서 끄집어내는 것처럼 여겨진다.종이에 달린 주머니에서 내가 꺼낸 것은 전부 글자로 되어 있다. 돌돌 말린 리본처럼 문장의 형태를 띠고 있어 그걸 풀어서 펼치는 것이 글쓰기가 된다. 그런데 여섯시가 되어 어린이자료실이 문을 닫자, 내 옆에 앉은 딸의 경우에는 또 다르다. 딸의 '종이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글자보다는 그림이다. 다섯 손가락을 그린 후 각각의 손가락을 휘감고 있는 나무 덩굴, 보석이 달린 철사, 초록색 뱀, 색실을 그린 후 손바닥에는 기하학적 패턴의 연못을 만들고 물고기 두 마리가 헤엄치는 그림을 그려놓았다. 바퀴모양의 보석 그림을 보다가 내 노트로 돌아왔는데, 문장은 어느새 기억으로 바뀌어 있었다.작가가 되기 전에 나는 잡지사 기자로 일했는데, 한번은 바퀴를 테마로 여러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꼭지를 맡은 적이 있다. 환경미화원을 섭외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신문을 뒤지다가 조그마한 미담을 발견했다. 재활용처리장에서 일하는 어느 환경미화원이 버려진 소파에서 나온 동전들을 수년간 모아 전액 기부했다는 기사였다. 신문에 나온 곳으로 전화해 연결이 되어 그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사실 그 코너는 글보다 사진이 중요했고, 인터뷰는 몇 줄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런데

  • [with+]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with+]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지면기사

    날카롭게 쏘아보는 한용운 사진사형 당한 독립투사들의 모습들손톱 찌르기·대못 박힌 상자 등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고문기구역사적 현장 이제 왔다는게 죄송"김 선생님, 우리 서대문형무소 한번 가요."지난 2월22일 겨울의 끝자락에 소복히 내린 눈으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온통 하얗게 덮여 있었다. 망루가 있는 붉은 벽돌 건물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니 벽면 두 곳에 거대한 태극기가 부착되어 있다. 그 사이 눈이 왔다고 누군가 눈사람을 만들어 놓아 마음을 살짝 누그러뜨려 주고 있었다.나와 주위의 몇 사람이 몇 년 전부터 서울·경기지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고 있지만 한 회원의 거듭된 요청이 없었다면 내가 자발적으로 이 형무소를 찾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회원은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곳을 관람하시고는 그렇게 많이 우셨어요"라고 말했다.간수들이 업무를 보았던 보안과 청사였던 전시관 1층에 들어서니 퀘퀘한 냄새가 올라왔다. 냄새 하나로 과거 고문을 당했던 독립투사들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아픔이 일어났다. 바로 이어지는 전시물. 1936년에 한반도 전역에 있었던 형무소 지도였다.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해 경성, 평양, 원산, 대전, 공주, 광주, 부산 등 전국에 뻗어있는 28개의 형무소와 소년원, 형무지소는 일제에 대한 우리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2층 전시관에는 죄수들을 옥죄는 수형 기구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사상범 4천800명의 사진이 붙어있는 수형기록카드가 사방 벽을 다 채우고 있다. 익히 알려진 이들도 많이 보이는데, 그중 한용운의 사진은 자세가 남다르다. 한용운은 정면 사진에서 비웃음을 띠며 날카롭게 앞쪽의 누군가를 쏘아보고 있다. '저렇게 저항했으니 변절하지 않을 수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스쳤다.지하실에 전시된 사형장과 시신을 내가던 시문구에 이르니 모골이 송연했다. 사형장 안에는 목밧줄이 있는 사형대와 그곳에서 죽어간 독립투사들의 사진이 십수 장 붙어있다. 사형을 앞두고 최고령 독립투사 강우규(1855~1920) 의사가 남긴 "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 [with+] 아름답다는 착각

    [with+] 아름답다는 착각 지면기사

    볼수록 매력에 빠져드는 '명품'누구는 브랜드·디자인 가격 강조아름다움, 노동가치 상회 부도덕수많은 디자이너·생산·수송자…문득 그들의 손·발 기억하고 싶다수레를 아득바득 소처럼 끌어도 쳐다보는 사람들이 없다. 주목받고 싶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들이 내가 끌고 가는 술 상자가 가득 담긴 수레에 부딪히면 안 되기 때문이다. 짐을 가득 실은 L-Cart의 무게는 수백 킬로그램이라서 거기에 발목이라도 부딪힌다면 골절상을 입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나가는 수레를 그렇게 심각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은 없다. 조금 이르게 거리를 두고 피할 수 있음에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다. 사람이 끌고 있으므로 위험한 순간이 오면 금방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내 몸무게의 세 배가 넘는 수레를 한번에 세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내가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앞을 보지 않고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며 걷거나 옆쪽으로 화려하게 늘어선 면세점 상가의 상품들을 바라보며 걷는다. 사람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바라본다. 누구나 알만한 익숙한 이름의 브랜드에서 생전 처음 들어보는 브랜드까지 온갖 상품들이 면세점 구역 양쪽으로 화려하게 펼쳐져 있다. 닿지 않는 것에는 경탄 아니면 경멸이라고 했던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그런 명품 브랜드들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천만원 넘는 가격의 상품들이 이렇게 많다니. 브랜드가 다르지만 같은 종류의, 평소에 내가 마트에서 사는 상품들의 가격에 0자가 하나씩 더 붙어 있다. 혹은 두 개. 면세가임에도.하지만 다니면 다닐수록 빠져드는 매력, 아름다운 상품들-그래서 호칭도 명품이다-그 매력에 점차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계속 보게 되니 알 것 같았다. 아 저게 마감이 좋고, 색이 좋고, 디자인이 좋고, 아름답구나. 빛나는구나.무거운 수레를 끌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휘황찬란한 아름다움에 넋이 나가 있다가 문득 생각에 잠긴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가격이 올라갈수록 아름다움도 올라가는 것일까. 누구는 브랜드 값이라고도 하고 누구는

  • [with+] 열 살 풍경

    [with+] 열 살 풍경 지면기사

    '마음 읽는데' 책 가져왔다는 딸놀랍고 감동… 그래서 후끈해졌다몰래 본 일기장엔 예쁜 말만 가득절반은 MBTI 이야기… 혼자 '푸실''들키면 어쩌나'… 어이없는 한숨내 딸은 이제 만 여덟 살, 그러니까 우리에게 아직 익숙한 나이로는 열 살이다. 예비 초등 3학년이다. 늘 아기라고 생각했는데, 또 그럴 일이 아니다 싶었던 건 나의 열 살 무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열 살 적 나는 생각이 몹시 많았다. 청개구리 손에 쥐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남자아이들이 유치했고, 걸핏하면 삐치고 울어버리는 짝꿍 아이도 한심하긴 마찬가지였다. 한 세계를 단숨에 건너뛴 것처럼 짐짓 골몰히 생각에 빠지곤 하던 시절이었다. 유독 한 날이 또렷이 기억난다. 아마도 피아노 학원에 다녀오던 길이었을 텐데, 아이들로 빼곡한 놀이터를 가로질러 집으로 가던 나는 가방끈을 고쳐 쥐며 가만히 생각을 했더랬다."엄만 아직도 그 날이 생생해. 열 살이었거든.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 나는 누굴까? 나는 대체 누굴까?" 내 말에 딸아이가 대답했다. "엄만 김서령이지." "그런 거 말고 그냥… 나란 사람은 누구지? 나는 왜 김서령이지? 왜 신욱이가 아니고 영애가 아니고 지현이가 아니고 하필 김서령으로 태어났지? 나는 어디서 온 걸까? 어쩌다가 김서령으로 살게 되었을까? 나는 앞으로 어디로 계속 걸어가게 될까? 나중엔, 아주 나중엔 어디로 갈까? 그런 생각. 그런 생각을 했던 게 아직 또렷하게 기억나." 말을 하면서도 웃었다. 고작 열 살 먹은 그 시절의 내가 조금 우스웠다. 공기놀이를 하자고, 땅따먹기를 하자고 친구들이 나를 불렀지만 미간 한 번 살짝 찌푸리고는 대답 없이 걸어갔던 나. 도대체 얼마나 새침데기였던 걸까. 내 이야기를 듣던 딸아이가 한참 입을 다물고 있기에 내가 물었다. "이상해? 그런 생각?" 아이가 대답했다. "엄마, 요스타케 신스케가 쓴 '이게 정말 나일까?'란 책이 있어. 그거 말고도 '이게 정말 마음일까?'랑 '이게 정말 천국일까?'라는 책도 있는데, 일단 엄마는 '이게 정말 나일까?

  • [with+] 희망과 시무룩의 쌍곡선

    [with+] 희망과 시무룩의 쌍곡선 지면기사

    우연히 펼쳐본 '32살 시절의 일기'아주 못생기지도 가난치도 않은 나현재 돌아보니 크게 안 바뀌었지만병속 편지처럼 다가온 그때 무지개오늘 내 스스로에게 기분 북돋아줘연휴기간에 마감이 맞물려서 꼼짝없이 작업에 붙들려 보냈다.도서관이 문을 닫으니 카페로 가는데 모처럼 집중이 잘 된 날의 풍경을 묘사해보면 이렇다. 오후 내내 똠양꿍과 같이 뜨겁고 맵고 시고 짜고 달콤한 수프를 끓여대고 있다고.물론 가상의 수프다. 정확히 해두자면 두뇌 전골수프라고 할까, 우선 이 요리를 끓이는 냄비는 내 두개골이다. 소재랄 수 있는 새우나 고기는 이미 있지만 그것 만으로 찌개가 끓여질 리 없지 않은가. 그래서 자극을 줄 것들을 열심히 집어넣는다. 일단 '부팅용 독서'를 하기 시작하는데, 다양한 책을 펼쳐 서퍼가 파도를 가르듯 아무렇게나 읽기 시작한다. 그러다 줄을 쳐 놓은 책 속의 문장을 노트에 옮겨 적으며, 말과 개념을 횡단하는 것으로 일상의 리듬을 작업의 리듬으로 바꿔나간다.이 사이에 내 마음속에서 캐낸 문장을 노트에 휘감고 있으면 노트는 금속으로 된 원통으로 변하고, 코일들이 감기면서 자기력을 띨 때까지 회전하며 일종의 자력을 만드는 것이다. 자력이 생긴다면 철가루와 같은 금속들이 달라붙어 이야기를 만들어줄 것이다.그러나 일이 그렇게 원만하게 돌아갈 리가 없다. 정신 차려보면 웹의 바다에 휩쓸려 시간을 잔뜩 허비한 나를 발견한다. 한탄하는 일기를 적으려고 파일을 열다가, 실수로 서른두 살 때의 일기를 클릭했다. '어쩌면 내가 가장 잘하는 짓은 한심하게 시간을 보낸 후 신랄한 말로 자신을 질책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오려서 붙여도 다를 바 없는 자책이다.그런데 다음 문장에서 느닷없는 자기진단이 이어진다. '나는 아주 못생기지도, 아주 가난하지도 않다. 사고무친 고아라거나 원수 같은 누군가가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성격마저 낙천적이다. 나 같은 타입은 살아가긴 좋아도 작가가 되기에는 생긴 꼴이 틀려먹은 것이 아닐까'. 그때는 정말 돈 한 푼 없던 백수시절인데, 가난하지 않다고 해

  • [with+] 낭중지추

    [with+] 낭중지추 지면기사

    다큐 '…달은 가장 오래된 TV' 보고한동안 잊었던 백남준 다시 떠올려그의 예술 총체적 이해·외로움 공감일방 아닌 쌍방 비디오아트로 소통韓국적 지켜 34년만에 '금의환향'도날고 기던 사람도 죽으면 거의 잊혀진다. 지난해 가을 서울시가 창신동의 백남준기념관을 폐관한다고 했을 때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 같았다. 백남준마저 지워야 한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언론보도에 부담을 느꼈는지 폐관하지 않는다는 후속기사가 나왔다.나는 백남준(1932~2006)을 '낭중지추(囊中之錐)'의 작가로 기억하고 있다. 1990년대 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중견작가들의 작품전이 열렸을 때 저쪽 한 구석에서 내 눈을 확 사로잡는 그림이 있었다. 누군가 하고 다가갔더니 다름 아닌 '백남준'이었다. 색동옷을 표현한 듯 여러 색채를 이용해 죽죽 내려그은 자그마한 그림이었다. 아이들 그림 같은 한 장으로 내로라하는 작가들을 압도하는 장면에 나는 '재능은 숨길 수가 없구나' 하는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또 1992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백남준 회고전이 열렸는데 그때 보았던 작품들도 기억에 남아있다. 화초 속에 보석처럼 빛나던 'TV 정원'과 12개의 모니터에 달의 여러 형상을 담은 '달은 가장 오래된 TV', 예쁘장한 불상이 모니터와 마주보고 있는 'TV 붓다' 같은 작품들은 새롭고 신선했으며 아름다웠다. 그때 나는 '달은 가장 오래된 TV'라는 제목을 보고 그 기발함에 놀랐다. 모니터를 조작하다 우연히 발견한 달의 형상을 보고 백남준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달을 발견했어요. 텔레비전에서 우연히요.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은 달이에요."한동안 잊고 있었던 백남준을 다시 떠올린 건 현재 상영되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 '백남준 : 달은 가장 오래된 TV' 덕분이다. 한국계 미국 영화감독인 아만다 킴이 5년을 공들여 만든 백남준 영화는 어려운 백남준의 예술세계를 잘 정리해주고 있다. 처음 영화를 보고는 백남준의 예술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

  • [with+] 봉직과 파직의 풍운아 허균

    [with+] 봉직과 파직의 풍운아 허균 지면기사

    의병과 왜군 물리쳐 선무원종공신기생과 구설수·조카 부정합격 유배파란만장한 삶… 문학적 능력 인정새로운 시풍 실험엔 언제나 정점에詩에 자기만의 목소리 '개성론' 주장허균(1569~1618)은 국문소설 '홍길동전'의 작가이며 '성수시화(惺搜詩話)', '학산초담(鶴山樵談) 등의 시화를 엮은 당대 최고의 비평가다. 스스로 200 상자가 넘는 경전을 읽었다고 전한다. 그뿐만 아니라 '제자백가'에서 명나라 대가들의 문집에 이르기까지 그의 눈을 거치지 않은 책이 없었다.그는 강릉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운 공로로 선무원종공신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 1594년(선조 27년) 문과에 급제하고 1597년(선조 30년) 다시 중시문과에 급제하여 공주 목사를 거쳤으나 탄핵받아 파면되고 유배당했다.시류에 영합하지는 않았지만 기생과 놀아나다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고 과거시험에 조카를 부정합격 시킨 사실이 드러나 유배를 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불교를 신봉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27일 위성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는 등 벼슬은 정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겸 예조 판서에 이르렀다.그는 자유주의자였다. 사회가 금기시 하는 문제에 과감하게 도전했다. 자각된 민중의 힘을 역설한 호민론(豪民論)은 오늘의 시각에서 보아도 진보적인 주장이다. 그의 사상이 배경으로 깔린 작품이 '홍길동전'일 것이다.광해군 10년인 1617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신분제도와 서얼 차별에 항거하려고 서자와 불만하는 계층을 규합하여 혁명을 계획하다 발각되었다. 그를 비판하던 기자헌을 제거하려다가 역으로 반역을 도모하려 했다는 기준격의 밀고를 받게 된다.서얼들과 허물없이 어울렸다가 옥사에 연루되기도 했지만 관리들이 매달 치르는 시험에서 매번 일등을 했다. 그를 비방하던 사람들조차 그의 문학적 능력을 인정했다. 허균은 여러번 탄핵당해 파직되어 귀양 갔지만 다시 일어나 벼슬길에 복귀하곤 했다.그는 언제나 현실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목표를 세우면 수단

  • [with+] 친절하다는 착각

    [with+] 친절하다는 착각 지면기사

    인천공항서 수레 끌며 먹고사는 일"비켜주세요" 대부분 사람들 무반응걸린 수레를 살짝 들어주는 여행객감사할것 없다는듯 쿨한 모습 멋져힘들기만하다 친절이 이렇게 달다시 쓰기로 먹고사는 일이 여의치 않아 인천국제공항에서 수레 끄는 일을 하고 있다. 커다란 화물트럭이 한가득 상품을 실어오면 그걸 내려서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면세점의 요청에 따라 상품을 수레에 실어 가져다주는 것이 내게 주어진 일이다. 200㎏ 이상 실은 수레를 끌며 수백 미터로 펼쳐진 대리석 바닥을 하루종일 오가야 한다. 처음엔 발바닥이 칼로 찌르듯 아팠다. 신발의 쿠션이 충분하지 않은가 싶어 신발을 몇 차례 바꾸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신발이 문제가 아니었다. 대리석 바닥은 너무 단단하고 수레는 너무 무겁고 공항은 너무 길었다. 몇 개월의 시간이 흘러 발바닥이 압력에 적응하고 발의 하부를 단단한 근육으로 채운 후에야 통증은 사라졌다.무거운 수레를 끄는 일은 관성의 법칙을 체험하기 좋은 일이다.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수레는 멈추기 어렵고 멈춘 수레는 다시 움직이기 힘들다. 수레를 멈췄다가 다시 움직이려면 끌고갈 때 보다 몇 배의 힘을 더 내야 한다. 그리고 수레가 다니는 길은 면세점 쇼핑을 위해 수많은 여행객이 오가는 곳이다. 수레가 사람과 부딪히면 큰 사고가 날 수 있기에 사람이 붐비는 구간을 지날 때는 신경이 곤두서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짐을 가득 실은 커다란 수레가 지나가면 모두가 알아서 비켜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앞을 거의 보지 않는다. 화려한 명품 브랜드 상점의 전시된 상품들을 고개 돌려 바라보며 걷거나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을 보며 다가온다.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것들에 눈을 맞춘 채 무작정 다가오는 사람들의 시선을 앞쪽으로 가져오기 위해 "잠시만요"라고 부드럽게 말하며 지나갔다. 큰소리로 말하면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기분이 상할 수 있으므로 최대한 친절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반응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상품들은 빛을 발하지만 대비되는 풍경을 더욱 어둡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스마트

  • [with+] 십 년 만에 작업실

    [with+] 십 년 만에 작업실 지면기사

    출산 이후론 사라진 '당연한 공간'예전의 오피스텔 맞은편 새로 계약한권씩 묶일 책들 생각하면 실웃음딸도 이것저것 챙기느라 바쁜손길매주 한번씩 복층서 같이 자야겠다스마트폰 인터넷뱅킹 앱을 켜놓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각각의 통장을 들고나는 액수를 가만히 본다. 한 달에 얼마큼씩 빠지면 티 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다시 말해, 화면에 도도독 찍힌 잔액 중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돈은 얼마큼일까. 물론 그런 액수란 애초 존재하지 않겠지. 잔액이란 크면 클수록 좋은 것이지 들어내서 좋은 액수란 없는 거니까. 그래도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곰곰 계산했다.하지만 내 계산 따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오피스텔 임대인의 마음이다. 뱅킹 앱을 접고 다시 부동산 앱을 켰다. 양재역 뱅뱅사거리 근처 오피스텔 월세는 만만치 않다. 게다가 관리비까지 보태야 하니 말이다. 나는 작업실로 쓸 오피스텔을 구하는 중이었다."네가 왜? 작업실을 왜 따로 구해?" 친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말이다. 나는 집에 어엿한 서재가 있다. 커다란 책상이 두 개나 있고, 편백나무로 짠 책장이 있고, 편안한 의자도 있다. PC도 새로 세팅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나는 작업실이 필요할까. 나는 우물쭈물하다 친구에게 대답했다. "그냥, 갖고 싶어서." 그런 거다. 그냥 나는 작업실이 갖고 싶은 거다. 내 대답이 나도 어처구니없어 웃었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작업실은 구해야겠다. 평소 갖고 싶은 것이 많아 카드빚 쌓는 사람도 아닌데, 내 인생에 작업실 하나쯤 선물하는 게 뭐 어떻다고.끝내 오피스텔 계약을 마치고 이번에는 평면도를 들여다 보았다. 소설을 쓰는 책상은 창가에 두고, 그림 작업을 할 긴 책상은 가운데에 두고…. 그렇게 색연필로 표시를 하고 있으니 열 살 딸아이가 참견을 한다. "이건 뭐야? 이 네모난 건?" 아이가 가리킨 건 복층 도면이다. "그건 이층이야. 거긴 매트리스 두고 가끔씩 피곤하면 누울 거야."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층이 있다고? 여기가 이층집이라고?" 엄마

  • [with+] 기억의 날개

    [with+] 기억의 날개 지면기사

    나를 무아경에 빠지게하는 '나비'기억이 활짝 날개를 젖히는 순간몰두했던 밤 생생하게 되살아나시간을 안 믿지만 부디 탈출하는 멋진 순간 새해엔 더많이 만나길최근에 쓰고 있는 소설에는 꿈과 현실이 반대로 작동하는 주인공이 나온다. 현실이 진창일수록 꿈속이 찬란해지는 주인공은 어느 날 거래를 하게 되고…. 독자들이 나중에 읽으셔야 하니까 이하 내용은 생략, 아무튼 지금 내게 필요한 자료는 독특하고 풍성한 꿈들이다. 그래서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은 강력한 꿈, 사실상 유래가 있는 꿈, 꿈꾼 지가 너무 오래되어 어느 순간부터 소설가의 언어로 오염된 꿈들을 캐고 있다. 그러다 꿈과는 상관없는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십여 전에 해외 레지던스 작가로 선정되어 쿠바에 3개월간 체류한 적이 있다. 그때 알게 된 이들과 2박 3일간 동행했다. 스페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K, 그녀의 다섯 살짜리 아들 J, 일 때문에 이들 모자와 함께하는 대학을 갓 졸업한 R. 이 세 명과 어느 리조트에서 주말을 보내기로 했다. 듣자니 하루에 2만5천원만 내면 숙박은 물론 식사와 수영장, 무제한의 맥주와 닭튀김이 제공되는 리조트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 종일 리조트 앞 바다와 수영장을 오가며 물에서 나오지 않았고, 닭튀김도 실컷 먹었다.저녁이 되자 일행은 태양과 수영에 지쳐 일찍 곯아떨어졌다. 선잠에서 깨어난 나는 살그머니 밖으로 빠져나와 수영장 가장자리에 앉았다. 야자수 너머 달이 떠있고, 멀지 않은 곳에서 밴드의 음악이 들려왔다. 라틴 특유의 시끌벅적하고 쿵짝거리는 리듬, 춤추는 사람들의 환호성이 아득히 메아리쳤다. 내 옆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키 큰 화초가 서 있었는데 달빛을 받아 음영이 칼날처럼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어 큰 창처럼 보였다.몸에서 잠과 더위가 빠져나가자 미지근한 욕망이 고였다. 무언가 쓰고 싶다는 욕망. 다행히 늘 들고 다니는 펜이 끼워진 수첩이 손에 있었다. 쓸 것은 오로지 묘사뿐. 우선 숙소의 일행이 떠올랐다. 나무로 만들어진 방갈로 안에는 선풍기가 돌아가고 엄마와 아들, 젊은 처녀의 잠은 탐욕스럽고 적나

  • [with+] 만학의 김득신

    [with+] 만학의 김득신 지면기사

    59세 과거 급제 조선 대표 만학도80세 생마감 때까지 책 놓지 않아김홍도·신윤복 함께 3대 풍속화가'파적도'엔 긴장감·역동성 느껴져그는 둔재였으나 노력으로 극복김득신(金得臣, 1604~1684)은 조선의 대표적인 만학도이다. 그는 회갑이 다 된 59세에 과거에 급제했다. 80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전한다. 백이전은 1억1만3천번을 읽었고 노자전은 2만번을 읽었으며 중용서는 1만8천번을 읽었다. 사기(史記)를 몇 번이나 읽었는지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밖에 유종원, 주책, 중용서, 목가산기, 백리해강을 수없이 읽었다.백이전을 읽은 것은 글이 드넓고 변화가 많아서였고 중용서를 읽은 것은 이치가 분명하기 때문이었고 유종원을 읽은 것은 문장이 정밀하기 때문이었고 목가산기를 읽은 것은 웅혼해서였고 백리해강을 읽은 것은 말은 간략한데 뜻이 깊어서였다. 그는 자신이 노둔함을 알아 매일 같은 책을 읽으면서 횟수를 일일이 기록했다고 전한다.김득신이 태어날 때 아버지 김치가 꿈에 노자를 만났다고 한다. 아이 이름을 노담 혹은 몽담으로 지었다. 그러나 신통한 태몽을 꾸고 태어난 아이는 머리가 나빴다. 열 살이 되어서야 글공부를 시작했고 공부가 늘지 않았다. 주변에서 저런 둔재가 있느냐고 비아냥거렸지만 아버지는 화 내지 않았다. 아들이 노자의 정령을 타고 났으니 반드시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김득신은 10대 후반에 도화서의 화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화원으로서의 활약은 순조 대까지 이어졌다. 그는 김홍도, 신윤복과 더불어 조선의 3대 풍속화가로 일컬어지고 있지만 대중에게는 덜 알려진 화가이기도 하다. 김득신의 본관은 개성이고 자는 현보, 호는 긍재(兢齋), 홍월헌(弘月軒)이다. 1754년(영조30)에 출생하였다고 전하지만, 큰아버지 김응환(1742∼1789)과 나이 차이가 12살밖에 나지 않는다. 둘 중에 한 명의 생몰연도는 오류일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김득신이 처음으로 기록에 등장한 문헌은 1772년(영조 48)에 편찬된 '육상궁시호도감의궤(毓祥宮諡號都

  • [with+] 뻔뻔한 회장 김건우

    [with+] 뻔뻔한 회장 김건우 지면기사

    동화책 속 건우는 '특별한 아이'딸은 "이상한 아이야" 라고 말안해특수학급 다니는 딸 친구 준규를연민했는지 키링선물후 마구 변명난 더 잘크려 다시 한번 책 펼쳤다잠깐 놀고 들어오겠다던 아홉 살 딸아이가 도통 들어오지 않아 집 앞 놀이터로 나가보았다. 미끄럼틀에 대롱대롱 매달려 집에 올 생각이 없다. "조금만 더 놀고!" 그럴 줄 알았다. 나는 별수 없이 벤치에 앉았다. 찬 바람이 부는 놀이터 벤치에 앉아 '놀멍'을 하는 시간은 정말 재미가 없다. 그냥 두고 나는 들어갈까, 생각하던 참에 옆에 서 있던 남자 한 분이 말을 걸어왔다. "따님이 정말 성격이 좋네요. 줄넘기도 진짜 잘하고요." 으응? 고개를 들었는데 "저, 준규 아빠입니다" 하신다. 그러고 보니 준규가 있다. 미끄럼틀 끄트머리에 서서 딸아이와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손짓도 하고 있다. 화들짝 일어나 인사를 드렸다.준규는 딸아이 반 친구인데, 인기가 아주 많다. 딸의 말을 빌리자면, 반 아이들은 대부분 준규와 짝을 하고 싶어한단다. 아홉 살이면 남자아이들이 한참 개구쟁이 짓을 할 때인데 준규는 그와 달리 조용하고 잘 웃는 아이인 데다 색연필도 잘 빌려주고 지우개도 잘 빌려주기 때문이란다. 딸아이도 준규랑 짝이 되고 싶어하지만 제비뽑기를 하다 보니 그게 늘 실패다. 다만 단점도 있단다. 준규는 오전에는 같은 반에서 공부하지만 오후가 되면 특수학급으로 간다. 그래서 준규와 짝이 되면 오후에는 좀 심심해진단다.놀이터에서 만난 준규 아빠는 무척 예의바른 분이었다. 그리고 다정한 분이었다. 미끄럼틀을 잘 오르지 못하고 아래에서만 맴맴 도는 준규에게만 눈을 두어도 바쁠 판국에 이리저리 다람쥐처럼 뛰어다니는 우리 딸에게 계속 소리쳤다. "와아, 너 진짜 멋지다! 정말 용감한데? 아저씨는 너처럼 날랜 아이를 처음 봐!" 그 마음이 뭔지 알 것도 같았다. 우리 준규와 놀아줘서 고마워, 그것이었을지도 몰랐다.아홉 살 내 딸과 반 아이들은 아직 모른다. 준규 아빠의 조마조마함을. 열한 살이 되고, 열두 살이 되면 준규는 '나랑' 조금 달

  • [with+] 따끔한 충고에 관한 생각

    [with+] 따끔한 충고에 관한 생각 지면기사

    당사자가 지적 필요하지 않다면친구간 따끔한 말 안하는게 낫다전국 19~59세 꼰대인식 조사결과'굳이 안해도 될 조언·충고' 1위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수 있어그녀는 기차를 탄다. 커다란 짐을 가진 할머니가 손잡이에 매달려 서 있고 빈 좌석이 없다. 할머니 앞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학생이 뭔가를 펴들고 열심히 읽고 있다. 그녀는 금방 학생의 이기주의에 기가 막혀서 울분을 터트린다. "뭐예요? 당신은 젊은 학생이면서 이 무거운 짐을 가진 노인이 안 보여요. 빨리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하세요." 그러나 뜻밖에도 할머니 쪽에서 반박했다. "그만두시오. 나는 아직 노인이 아니고, 첫째로 이 짐은 솜이에요." 차 안의 모든 손님은 웃음을 터트린다.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쓴 '마음껏 참견을 할 것'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에 나오는 이야기다.이 여성처럼 누구나 따끔한 충고를 해 주고 싶을 때가 있으리라. 그러나 그녀가 가벼운 솜을 무거운 짐으로 잘못 알아 남의 일에 쓸데없이 참견한 결과를 낳았듯이, 충고자는 정확한 정보를 얻기 어렵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충고를 하려고 할 때 우리 대부분은 상대편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런데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이 말하더라도 듣는 이의 성품에 따라 충고를 고맙게 들을 수도, 불쾌하게 들을 수도 있으니 충고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여러분에게 도박에 빠져 있거나 외도를 하고 있는 친구가 있다고 가정하자. 여러분은 따끔한 충고를 해야 한다고 보는가, 따끔한 충고를 삼가야 한다고 보는가? 이에 대해 갑과 을 두 사람의 의견을 들어 보자. 충고를 해야 한다고 보는 갑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 친구가 가서는 안 될 길로 가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충고를 하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도박에 빠진 친구는 멈추지 않으면 재산을 탕진할지 모릅니다. 외도를 하고 있는 친구는 멈추지 않으면 결혼 생활이 파탄에 이를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남의 집 불구경하듯 방관하고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충고가 필요 없을 만큼 완전한 사람은 없으며, 충고가 필요한 이에

  • [with+] 죄와 벌

    [with+] 죄와 벌 지면기사

    내 첫번째 단편집 '개그맨' 포함16세 아이에 책 5천권 해킹 당해그에게 50권쯤 읽게하면 어떨까 어쨌든 돈으로 환산 못하는 독서소중한 재산이므로 손해는 아냐이따금 소설가에도 '이건 참 소설 같은데'라는 상황이 찾아온다. 출판사에서 메일을 받았다. 알라딘 커뮤니케이션에서 전자책이 해킹당해 5천권 가량이 유출되었는데, 내 첫 번째 단편집 '개그맨'도 포함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범인은 16세 고등학생으로 텔레그램에 해킹된 책의 일부분을 자랑삼아 올려놓은 뒤 36억원 상당의 비트코인을 지급하라며 회사와 협상을 시도했다. 9월에 범인은 잡혔으나 이미 '손을 탄' 책들의 운명이 가늠되지 않는 가운데 이번에는 알라딘과 50여 개의 출판사 사이에서 보상을 놓고 대립 중이다. 출판사는 초유의 사태에 제대로 된 선례를 남기기 위해 개별 보상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알라딘은 '사회기금'을 조성해 피해 출판사의 전자책을 사서 도서취약계층에 주는 등 사회적 보상을 하겠다는 입장이다. 결국 출판사들이 신간의 전자책을 알라딘에 넣지 않는 사태로 이어진 것이 최근까지의 진행 상황이다.이 뉴스는 나에게 복잡한 마음을 안겨주었다. 내 머리 속에는 5천권의 책들이 인질로 잡혀있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16세의 해커, 그 아이에게 이 책들은 단지 전자화된 프로그램에 불과하고 수십억대의 코인으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일 뿐이다. 비가시적인 세계에서 비가시적인 세계로의 전환과 대박의 꿈만이 책들의 유일한 가치다.그런데 5천권의 책 가운데 한 권인 내 첫 책에는 등단작을 비롯해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대학 졸업 후 8년이 지나 등단을 했는데, 등단작이 은퇴작이 될까봐 겁에 질려 무수히 밤을 새웠다. 젊음과 시간과 에너지와 숱한 불면의 밤들이 통과한 그 이야기들은 내게 소설 쓰기를 가르쳐줬을뿐더러 지독한 육체노동의 결과물이다. 중년이 된 지금, 갈수록 소설쓰기가 육체노동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체감하고 있다. 한마디로 작가에게 책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정신적·육체적 노동의 가시적인 결과물이다. 그 아이는 전혀 상상

  • [with+] 과거시험의 천재 노긍

    [with+] 과거시험의 천재 노긍 지면기사

    답안지 대필해준 죄로 귀양살이여러번 급제했지만 벼슬길 막혀'부패한 당대' 향한 냉소 있었을듯젊은날 꿈과 좌절·절망 다 접고손주의 재롱보는 노년 원했을 것 노긍(1737~1790)은 과거시험을 보기만 하면 급제를 했다. 그러나 관직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에게는 과거시험에 응시하고 훌륭한 답안지를 작성해보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더 행복했었는지도 모른다. 이름을 신중(愼仲)이라했다가 여임(如臨)으로 고쳐 쓴 것을 보면 살얼음을 밟듯 세상을 조심조심 살았던 사람으로 보인다. 또 다른 이름 한원(漢源)은 문장의 근원이 흐르는 물처럼 유장하다하여 얻은 이름이기도 하다. 문체가 꽃 구슬을 흩어놓은 언덕과 같다하여 산주파(散珠坡)라고 부르기도 했고 사는 집이 복사꽃 흐드러지게 피는 골짜기에 있다 해서 도협(挑峽)이라는 호를 쓰기도 했다.정조가 즉위한 후 정권의 주류가 바뀜에 따라 노긍은 벽파의 미움을 사 과거 시험장에서 답안지를 팔아 선비의 기풍을 더럽혔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위원 땅에서 6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과거시험 답안지를 팔아먹은 죗값으로는 가혹하다면 가혹한 형벌이었다. 노긍의 아버지 노명흠은 야담집 '동패낙송'을 엮은 사람이다. 부자 모두 과거시험에는 당대에 어깨를 겨룰 사람이 없었다.영정조 시대 시파와 벽파가 치열한 정쟁을 벌이던 때에도 시파인 홍봉환 집안의 문객으로 수십 년을 얹혀살기도 했다. 이런 사람이 세상을 뜨자 이가환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우리나라 수천 리 둘레에서 하루에 태어나는 자가 몇이며 죽는 자가 몇이던가. 태어나도 사람의 수가 더 많아지지 않고 죽는대도 사람이 수가 줄어들지 않는 그런 자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영조 14년 12월18일 광주부 쌍령촌에 산이 운 것이 세 번이요 시내가운 것이 세 번이었다. 그리고 노긍이 태어났다. 정조 14년 5월3일에 자최로 연복을 입고 예법에 따라 제사를 올리고 그 이튿날 문간에서 손님을 전송하고 정침에 돌아와 갑작스레 눈을 감더니 노긍이 죽었다. 그가 태어나 우리나라는 한 사람을 얻었고 그가 죽자 우리나라가 한 사람을 잃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