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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ith+] 수트케이스

    [with+] 수트케이스 지면기사

    내내 비혼·극강의 역마살 자랑하다출산하며 꼼짝없이 집에 갇히게 돼 떠나는 방법도 잊은 듯이 살았지만작은 수트케이스 하나에 마음 동요과거여행은 "적금같은 기억" 곱씹어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에서 가방 하나를 샀다. 가죽으로 만든 작은 수트케이스다. 한참을 기다려 받은 그 가방의 포장을 풀며 나는, 아무래도 어디로든 한 번은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그동안 참아도 너무 오래 참았지.나는 한때 극강의 역마살을 자랑하는 사람이었다. 출판사나 잡지사에서는 원고 청탁을 하려다가 내게 하소연을 했다. "아니, 작가님이랑은 연락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전화할 때마다 한국에 없어요." 데이터로밍이 비쌌던 시절이라 나는 걸핏하면 전화를 끊어놓고 돌아다녔다. "나는 그냥 이렇게 인생을 탕진하려고. 어차피 한번 놀러 온 인생이잖아." 그런 말을 풀풀 웃으며, 우습게도 뱉던 시절이었다. 건방졌다. 인생이 쉬운 건 줄 알았다.그랬던 삶이 꼬인 건 아무래도 출산이었다. 사는 내내 비혼일 줄만 알았던 나는 어느 날 화들짝 아기 엄마가 되었고, 나는 꼼짝없이 집에 틀어박혔다. 매달 월급 꼬박꼬박 받아오는 워킹맘도 아니면서 베이비시터를 둘 핑계를 찾을 수 없었기에 나는 몇 년 얌전히 지냈다. "베트남 한번 뜰 건데 너도 가능?" 이렇게 묻는 친구들에게 "미안, 이번엔 안 돼." 몇 번 대답하다 보니 친구들도 더 이상 함께 떠나자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 혼자 마냥 서운해하며 여행을 떠난 친구의 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 고양이의 밥을 챙겨주었다. 곧 코로나 시국이 시작되었고 모두가 떠나지 못하는 시절이 오자 차라리 다행이었다. 나만 못 가는 것이 아니니 덜 심술이 났달까.코로나 시국이 지나갔지만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나는 떠나는 방법을 잊은 사람 같았다. 한 해 절반씩 집을 비워두었던 지난날이 다 농담 같았다. 기껏해야 연례행사 뛰듯 아이와 제주도를 간다거나 부산을 간다거나 할 뿐이었다. TV 여행 프로그램을 보며 "엄만 저기도 갔다 왔어. 몰타. 저 도시 너무 예쁘지?" 한다거나 "이탈리아에 가면 정말

  • [with+] 수수밭에서 책 읽기

    [with+] 수수밭에서 책 읽기 지면기사

    엄마의 강렬한 기억 남은 독서는열두어살 무렵 밭에 간다 말하고수수밭 한가운데서 읽었던 순간육남매중 다섯째가 고른 은신처책장 넘기는 장면 생각하니 애틋어렸을 때부터 책벌레였던 나는, 한참 책 속에 빠져 있는데 말을 시키는 사람을 너무 싫어했다. 그렇게 독서의 흥을 깨는 사람 중 단연코 1위는 엄마였다. "밥 먹어라." 이 말 한마디면 셜록 홈즈의 놀라운 추리도, 다리 기둥에 매달린 빨강머리 앤도 멈춰서야 했으니까. 그러면 읽던 페이지 사이에 손가락을 끼우고 불만스럽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 나는 투덜투덜 밥상에 앉으며 책을 읽을 때는 제발 아무 말도 시키지 말아달라고 누차 강조했다. 지속적인 호소 때문인지, 성장기 내내 엄마는 내가 책을 읽고 있으면 밥 먹으란 소리 말고는 아무 말도 걸지 않는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 엄마는 내가 쓴 책이 아니면 구태여 독서를 하지 않는다. 엄마가 섭취하는 활자는 주말에 성당에서 나눠주는 주보와 '매일미사' 외에는 없는 듯 보인다. 딸이 고생해서 쓴 글이니까, 하는 마음으로 내 책도 의무감으로 겨우 보시는 듯하다. 그런 엄마에게도 일평생 강렬한 기억으로 남은 독서의 순간이 있었다.엄마가 열두어 살 무렵, 어떤 이야기 책 하나가 손에 들어왔다. 읽다보니 너무 재미있어서 밭에 일하러 간다고 말하고 집을 나왔다. 그리고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수수밭 한가운데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고 한다."보영이랑 진숙이. 그 둘이 주인공이야. 하나는 부잣집 딸이고 하나는 가난하고. 그 둘이 친구인데 이야기에 너무 빠져가지고….""근데 왜 수수밭이야? 수수가 옥수수를 말하는 건가?""옥수수가 아니라 밥에 놓아먹는 노란 조 있잖아. 그거랑 비슷한 잡곡이 열리는 거지. 수수는 높게 자라니까 밭 가운데 들어가 앉아있으면 아무도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나는 엄마의 목소리에 실려 높다란 수수가 자라는 시골풍경을 떠올려보았다. 육남매 중 다섯째였던 엄마는 집에서는 조용한 곳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 몸을 숨길 수 있는 은신처를 골랐던 것이다. 방해받고 싶

  • [with+] 관계, 세 사람

    [with+] 관계, 세 사람 지면기사

    매주 월요일 안부 전화 최근 끊겨A와 멀어진후 '일방통행' 깨달아내 감정 쏟아내고 괴롭혀 '자책감'C는 종교인 그에게 질문거리 많아 얼마전부터 고민 상의 '평형 유지' 나는 매주 월요일 세 사람한테 전화하는 것으로 한 주를 시작한다. 셋은 모두 나보다 연장자들이다. 그들에게 일주일간 일어났던 나의 일들을 털어놓고 상대방의 안부도 묻는다. 벌써 10년 이상 되었다.그런데 올 봄을 지나면서 세 사람한테 큰 변화가 찾아왔다. 한 사람은 50년을 해로한 남편이 암에 걸려 전이된 상태고, 다른 한 사람은 딸이 암에 걸려 가슴 철렁한 순간을 맞고 있다. 그 밖의 한 사람은 15년 동안 틀어박혀 책만 팠는데 갑자기 취직이 되어 매일 험한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어쨌든 그래서 정기적으로 하던 전화는 끊어졌다. 그중 가장 친했던 A는 자기애가 강한 사람으로 섬세하고 예민하며 직관력이 뛰어나다. 나는 가끔 그에게 "마이크로의 세계에 산다"고 이야기했다. 아주 미세한 것까지 감지하기 때문에 사람의 심리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잘 알아챘다. 그래서 대화가 잘 되었고 나는 그 점이 무엇보다 좋았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는 '찍어 먹어봐야 똥인지 된장인지' 아는 타입이고 그는 느낌이 이상하면 아예 발을 담그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매번 인간관계에 상처를 받으면서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나를 보면서 그는 무척 답답해 했고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그 지겨운 실패담을 강산이 바뀌는 시간만큼 들어주었다. 게다가 내가 나한테 매몰되지 않도록 일침을 가했다. 그것 때문에 더 그에게 의지했다.대화의 9할 이상이 내 수다였고 그는 듣고 맞장구쳐주는 역할을 했다. 나는 나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까지 들추었고 그는 해야 할 말도 아꼈다.그와 거리가 생긴 지금에서야 우리의 관계는 일방통행이었음을 깨닫고 있다. 너무 내 감정을 쏟아내 그를 괴롭혔다는 자책과 함께 한편 서운하기도 하다. 나를 진정한 대화 상대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과연 그의 입장을 한번이라도 생각해봤던가?그런가 하면

  • [with+] 윤동주 시인과 서시

    [with+] 윤동주 시인과 서시 지면기사

    '죽는날까지… 한점 부끄럼 없기를'읽으면 서러움·고절감 파도처럼 와18세 나이 '삶과 죽음' 등 첫시 써내아직까지도 '별 헤는 밤'은 사랑받고'참회록'을 남겨 독자들 숙연하게 해'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인 윤동주의 서시를 읽노라면 순결한 청년의 서러움과 고절감이 파도처럼 밀려온다.윤동주는 1917년 12월30일 아버지 윤석영과 어머니 김룡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9세 되는 1925년 4월4일 명동소학교에 입학했다. 12세 1928년부터 14세 1930년까지 급우들과 함께 '새명동'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청소년기의 꿈이었다.15세인 1931년 3월15일 명동 소학교를 졸업하고 16세에는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18세인 1934년 12월24일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 등의 시를 썼다. 이 작품들은 그의 최초의 시편이다.19세인 1935년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로 편입한다. 같은해 숭실중학교 문예지인 '숭실활천'에 시 '공상'이 처음 활자화 되었다. 20세인 1936년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하여 숭실학교를 자퇴하고 광염학교 중학부에 편입한다.간도 연길에서 발행되던 '카톨릭 소년' 11월호에 동시 '병아리'를 발표하고 이어서 12월호에 '빗자루'를 발표한다. 22세인 1938년 4월9일에 서울의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문과에 입학한다. 23세인 1939년 산문 '달을 쏘다' 시 '유언'을 발표한다. 25세인 1941년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27세인 1943년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고 작품과 일기가 압수된다. 28세인 1944년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된다. 29세인 1945년 해방되기 여섯 달 전, 2월16일 큐슈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 [with+] 일하는 사람을 설득하는 법

    [with+] 일하는 사람을 설득하는 법 지면기사

    급하단 전화에 중단된 동료 밥시간밥 넣은 배밑으로 자존심 흐르지만숟가락 놓게 만드는건 존중의 태도어디서 일하든 직원식당에 모이니우대 아니어도 '같은 대접' 해주길예전 직장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들과 밥을 먹는데 상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른 사무실 문을 급히 열어야 하는데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K뿐이라는 것이다. 당시 우리가 쓰던 사무실은 번호키였고 잘 안 쓰던 사무실이 하나 더 있었는데 갑자기 그 사무실을 열어야 하는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K는 식당에서 막 주문한 음식을 받아서 겨우 몇 술 뜨자마자 급하다는 전화에 그대로 상을 물리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우리가 보기엔 그게 그리 급한 일이 아니고 밥 다 먹고 가서 열어도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일이었는데 상사의 판단은 달랐던 모양이다. 아니 달랐다기 보다는 우리의 식사에 큰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남은 우리는,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둥의 속담을 주워섬기며 밥도 다 못 먹고 자리를 뜬 동료를 안타까워하고 상사를 욕했다.당시 다니던 직장이 박봉이라지만 지붕이라도 가린 곳에서 일하느라 눈치를 좀 더 보게 되어서 그렇지, 지붕 없이 뙤약볕에 찬바람에 부평초처럼 휩쓸리며 오면 그만 가면 그만인 노가다판에서는 점심시간이 되었다 하면 바쁜 일에 뛰어나가기는커녕 하던 일도 다 멈추고 흙더미에 삽 던져 꽂아두고 밥 먹으러 가버리곤 했다. 육체노동을 하면 배도 쉽게 꺼지고 허기도 더 심하게 오기도 하거니와 몸 쓰는 사람들이 어디서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체득하게 되는 은은한 배짱과 자존심이 밥 넣은 배 밑으로 도도히 흐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몸 쓰는 사람들이 밥 챙기는 자존심만 있고 다른 일은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아니다. 목숨을 건 파업과 엄중한 대치 속에서도 사측이 노조를 해산시키려고 점거농성 중인 공장의 물과 전기를 끊자, 차량용 페인트가 굳지 않게 발전기로 기계를 돌렸다는 쌍용자동차의 파업 이야기는 자존심만큼이나 강했던 일하는 사람의 책임감을 떠올리게 한다.그럼 일하는 사람들이 먹던 밥숟가락 내려놓고 나서게 설득하는 방법은 뭘

  • [with+] 사람이 어떻게 다 잘해?

    [with+] 사람이 어떻게 다 잘해? 지면기사

    "엄마가 미안, 요즘 왜 이리 까먹지"초등3 딸 휴대전화 찾아 갖다주자…자잘한 위로 들으러 학교에 왔나보다"엄마, 수업 잘해! 지각하지 말고!"내가 살살 말하면 다정하게 대답해초등학교 3학년 딸아이가 휴대전화를 놓고 등교했다. 학교 끝나고 학원에 가면서 휴대전화로 늘 보고를 하는데, 그걸 두고 갔으니 하교 후에 집으로 돌아올 것이 빤했다. 나는 일찍부터 작업실에 나갈 작정이었다. 학교 강의가 있는 날이라 작업실에 일찍 나가 다른 일들을 처리해야 했던 거다. 하지만 아이가 빈집에 혼자 들어와 주섬주섬 휴대전화가 든 가방을 챙길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혼자 엄마, 아빠를 기다리는 일이 많은 아이인데. 이렇게 일하는 엄마와 아빠는 걸핏하면 혼자 죄책감 타령에 빠지곤 한다. 별수 없다.결국 작업실 나갈 시간을 미루고 하교 시간에 맞춰 학교로 갔다. 삽시간에 꼬마들이 학교 건물에서 와르르 쏟아져 나왔고 나는 행여 아이를 놓칠까봐 눈을 부릅떴다. 친구와 종알종알 떠들며 실내화를 갈아신던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엄마, 학교 안 갔어?" "응, 너 휴대전화 주고 바로 갈 거야." "지각 아니야? 안 늦어?" "괜찮아." 그러는 사이 딸아이 곁으로 친구들이 병아리 같이 모여들었다. 정말 병아리 같다. 키도 제법 크고 덩치도 작년보다 자랐지만 여태 3학년은 아기들이다. 안녕하세요, 아줌마! 방글방글 웃으며, 조금은 쑥스러운 얼굴로 다 인사를 한다. 딸아이가 한 명 한 명 소개했다. 엄마, 얘는 지율이고 얘는 서빈이, 유담이랑 민채는 알지? 엄마, 얘가 태윤이야! 그러고는 큰 소리로 덧붙였다. "다 내 절친들이야!" 절친이라니. 초등 3학년에게도 절친이 있구나. 마냥 귀여워서 하나하나 이름 불러주며 나도 인사를 건넸다. 친구 엄마 나타난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이리 몰려왔을까. 바람 한 점 불어도, 꽃잎 하나 날려도 그저 즐거운 게 그 나이라지만.아이들은 학원 시간이 조금 남았다며 놀이터에서 놀아야겠단다. 나는 놀이터까지 함께 걸었다. 날이 몹시도 더웠다. "아줌

  • [with+] 마차 이야기

    [with+] 마차 이야기 지면기사

    여러 승객 모시느라 혹사한 '마부'피로조차 너무 피곤해 잠이 들어작가만 이따금씩 뒤척이며 중얼잠잠해지면 의식의 작은 등불만깜박거리며 밤과 꿈 가로질러 가어쩌다보니 일년 반째 마감의 연속이다. 나는 피로에 사로잡혀 있다. 피로는 아침 햇살에 닿으면 툴툴거리며 육중한 몸을 옆으로 비켜준다. 뇌가 호통을 치며 오늘 할 일들을 읊어대기 때문이다. 우선 강의가 있고, 강의에 앞서 그보다 긴 강의준비가 있다. 짧은 글이지만 서평 마감도 있고, 무엇보다 단편소설 마감이 발등에 떨어져있다.나는 사륜마차의 마부석에 올라 채찍을 휘두른다. 지붕에는 강의에 쓸 책, 학생들의 습작, 어제까지 작업한 인쇄물, 점심으로 먹을 빵과 커피 등 되는대로 꾸려놓은 짐이 실려 있고 안에는 '작가'라는 승객이 미간에 인상을 팍 쓰며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그는 마차에 오르는 다른 승객들을 민폐꾼처럼 노려본다. "내가 마감을 제때 못하면 전부 당신들 때문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강사'라는 승객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이봐요, 빨리 좀 못 가겠어요?"라고 마부에게 조바심을 드러낸다. '필자'라는 승객은 코너를 회전하느라 로데오 말처럼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급히 서평을 완성한다. 그는 항상 마감의 스릴을 즐기며 이럴 때 글이 더 잘 나온다고 너스레를 떤다. 구석에 자고 있던 '나무늘보' 승객이 하품을 쩍 하더니 무례하게도 모두의 무릎위로 길게 누워 스마트폰을 보거나 이번 달 생활비 등등을 한가로이 계산한다. 잘 달리던 마차가 급정거를 하는 통에 나무늘보는 바닥으로 고꾸라진다. '엄마'가 벌컥 문을 열고 소리를 지른다. "다들 비켜! 딸이 올 시간이야." '꼬마'가 들어온다. 꼬마는 열한 살짜리지만 마차에 탄 승객 누구보다 무겁다. 꼬마가 아기였을 때는 이보다 몇십 배로, 믿을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얼마나 무거웠던지 마차의 바퀴가 바스라질뻔 했고, 승객들은 모두 이대로 죽는 게 아닌가 벌벌 떨 정도였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강사가 나서 힘겹게 진창에 빠진 바퀴를 건져냈고, 그 후 만 세 살이

  • [with+] "땅값 떨어지게…"

    [with+] "땅값 떨어지게…" 지면기사

    청계산 입구 도로가 위치한 장군탑문화재 살리려 인근 주민들 告祀중땅 주인이라는 남자가 나타나 행패깨끗이 치우고 가꿔온 여현섭 선생무례함에 상처받아 "사회 험악해져"지난 5월14일 석가탄신일 전야, 의왕시 청계산 입구의 도로가에 위치한 유적 '청계산 장군탑'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잊혀져가던 문화재를 살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인근 주민 몇이서 떡과 술, 포를 놓고 고사(告祀)를 지내려는 찰나, 갑자기 땅 주인이라는 남자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나타났다. 그는 어른들에게 눈을 부라리고 삿대질을 하면서 떡시루를 엎어버리겠다느니, 장군탑 비석을 넘어뜨려 땅에 묻어버리겠다느니 하면서 거칠게 대들었다. 주장인즉, "땅값 떨어지게" 남의 땅에서 지금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사람들이 마을과 집안의 안녕을 빌던 서낭당을 이렇게 철저하게 외면하는 땅 주인과는 달리 마을 노인들은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이곳에서 제사 지내는 걸 봤다고 증언하고 있다. 아마 새마을운동이 벌어지면서 미신이라는 이유로 제사 풍속이 일소되었을 것이다. 이 장군탑은 돌무지 구조가 뚜렷한 고분(삼국시대로 추정)으로 지름 5~6m, 높이 3~4m의 크기이며 봉분 위에는 오래 전에 잘려진 고목 밑둥이 박혀있다. 봉분의 하단에는 커다란 바위가 드러나 있으며 주변에는 30~40㎝ 크기의 냇돌이 많이 쌓여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돌을 던진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무덤 앞에는 비석이 서 있는데 '장군탑의 역사는 팔천만 년 전으로 추정되며, 청계노인회에서 단기 4323년(1990)에 탑을 다시 세워 헌상(獻上)한다'라고 적혀있다.'장군'이라는 명칭은 민속에서는 최영, 임경업, 강감찬, 남이 장군 같은 인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들은 굿을 할 때 무당의 몸주(혼령)가 되어 신의 원한을 풀어주고 집안의 행운을 빌어주는 선신(善神)이다. 한 마디로 '청계동 장군탑'은 만만치 않은 위인의 무덤으로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역사가 오래되었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신성하게 여겨져 제사도 지내고 소원도 빌던 마을 공동체 공간이었던 것

  • [with+] 백석 시인과 여우난골족

    [with+] 백석 시인과 여우난골족 지면기사

    1912년 평북 정주군 익성동서 태어나이광수 등 걸출한 문인들 배출한 곳아버지 백시박, 장남 교육열 대단오산학교에 '기부금 10원' 기록도큰댁 '여우난골' 유명한 詩로 남아백석(1912~1996)은 1912년 7월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1013번지에서 태어났다. 갈산면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갈지면과 오갈산면으로 바뀌게 되었다. 백석이 태어날 당시에 익성동은 오산학교가 자리 잡은 오산면 관할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1952년 북한의 군·면·리 통폐합조치에 따라 갈산면은 신설한 운전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산학교가 익성동 940번지였으니 백석의 집은 오산학교 바로 앞에 있었다.정주와 오산학교는 걸출한 문인들을 많이 배출해 왔다. 백석보다 20년 앞서 춘원 이광수가 정주군 갈산면 광동동 신리에서 태어났으며 백석보다 열 살 많은 김소월이 구성군에서 출생하여 곽산군에서 성장했다. 소월의 스승 김억도 곽산군에서 출생하여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일이 있다. 그런가 하면 백석보다 10년 후에 태어나 1980년까지 조선일보 주필로 활동한 선우휘는 정주읍 남산리가 고향이다. '창작과비평'이라는 리얼리즘 계열의 유명한 계간지를 발행하고 있는 문학평론가 백낙청은 1938년 외가인 대구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친가는 정주군에 있었다.백석의 어릴 때 이름은 백기행이었다. 1933년 12월 방응모의 장학금을 받은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의 회보 제1호 표지에는 백석(白奭)으로 표기되어 있다. 백석의 연인이었던 '자야 여사'는 청진동으로 부쳐오던 편지의 겉봉에 백기영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고 기억한다. 훗날 잡지와 신문에 작품을 발표할 때는 모두 백석(白石)을 사용했다.백석은 아버지 백시박과 어머니 이봉우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백시박은 젊은 시절 백용삼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가 백석이 오산학교를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백영옥으로 개명했다. 백석의 아버지는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남인 백석에 대한 교육열은 대단했다. '오산백년사'에 따

  • [with+] 금분세수

    [with+] 금분세수 지면기사

    주짓수제자 블랙벨트 약속 못지킨채코로나 여파 5년만에 체육관 문닫아사범 그만두고 직장 적응 핑계 삼아수련도 게을러져… 제자들 보기 민망 선생 자리에서 내려오고 도복 물려줘무협지나, 무협영화의 세계관에 '금분세수(金盆洗手)'라는 말이 있다. 강호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협객이나 무사가 무림의 모든 은원을 끊어내고 물러나기 위해 금대야에 손을 씻으며 은퇴를 선언하는 것을 이야기한다.'손에 피를 묻히다'라는 관용구가 있듯이 대야에 손을 씻으며 그 세월 동안의 죄과와 피값을 흘려보내고 그 바닥을 뜨는 것으로, 강호한정(江湖閑情)과 평화를 바라는 무림인들에게는 하나의 꿈과 같은 마무리다. 그러려면 무공은 바라는 만큼의 성취를 이뤄야 하고 그간 악당들을 물리치는 수많은 전투 속에서도 자신은 목숨을 부지하고 있어야 하며 틈틈이 가르친 제자는 어느새 청출어람(靑出於藍)하여 스승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리하여 끝끝내 더 노력하여 얻어낼 성취도 없고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는 이미 죽고 되갚아야 할 원한도 대부분 갚아주었으며 목숨 바쳐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새로운 원한을 만들 만큼의 혈기도 쇠진하게 되면 어디 방짜기술 좋은 놋점에 기별이라도 보내 손을 씻을 놋대야라도 하나 주문하여야 하는 때가 이르는 법이다.얼마전 주짓수 체육관 제자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제자들이 운동을 하는 곳을 그동안 좀 뜸하게 방문했는데, 이번 스승의 날을 앞두고 한번 와달라는 소식이었다. 입시학원 국어강사 생활을 하며 자본주의의 모순 속에서 깊어가는 번뇌를 좀 잊어볼까 하여 배운 외국무술이 어느덧 수련한 지 10년이 넘어서 체육관을 차렸고, 마침 차리고 몇년 안되어 코로나19가 창궐을 하여 몇차례 대출로 지싯지싯 버티다가 내 손으로 블랙벨트를 매어주마던 제자들과의 약속도 지키지 못한 채 5년만에 문을 닫고만 터였다. 폐업하고 첫 일년은 후배 체육관에서 사범 일을 하며 꾸준히 주짓수를 수련했지만 그후 사범 일도 그만두고 인천공항에 취직하여서는 직장 적응에 매진해야 한다는 말을 핑계 삼아 근 일년을 한달에 한두번 하는둥 마는둥 게으르게 주짓수

  • [with+] 죽음이 다가와도 괜찮아

    [with+] 죽음이 다가와도 괜찮아 지면기사

    림프종 3기 기자가 쓴 투병기 읽고허술한 내인생 다시 연습하는 기분쫄지않고 사는법 등 힌트 배운느낌그저 작가의 건강·가족 평안을 기도내가 더 배울 세상은 아직도 많았다두어 달에 한 번은 구내염을 앓는다. 피곤해서 그렇겠지, 생각하지만 여기저기서 들리는 소리가 많다. 입 안이 쉬이 헐고 빈도가 잦다면 암을 의심해보는 편이 좋다고. 그러면 덜컥 겁이 난다. 무언가 정밀 검사를 받아봐야 하는 걸까? 나는 아직 젊고, 아이도 어린데.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는데.늘 가던 동네 가정의학과 의사에게 나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말했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요. 저, 정밀검사 받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의사는 내 입 안에 약을 발라주며 풉 웃었다. "그럴 상황은 아니고요. 검사가 필요하다 싶으면 제가 말씀드릴 테니 과로만 하지 마세요." 얼마 전에는 가슴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져서 화들짝 놀랐다. 협심증일까? 이러다 심장마비가 오는 거 아니야? 하마터면 119에 전화를 걸 뻔했다. 통증은 금세 가라앉았고 또 동네 가정의학과 의사를 찾아갔다. "조금만 불편해도 병원에 오는 습관, 좋아요. 오래 사시겠어요." 역류성 식도염이라고 했다. 역시나 과로를 하지 말란다.겁이 많아진 거다. 조부상, 조모상에 부의금을 보내던 시기를 훌쩍 지나 부모상은 이제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종종 들려오는 본인상은 먼 인연이라도 온종일 우울하다. "우리가 벌써 그런 나이인 거야? 뭔가 좀 아찔하다고." 장례식장에서 만난 친구들은 일회용 숟가락으로 육개장을 퍼먹으며 훌쩍였다.아침마다 출판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를 들여다본다. 나에게 그건 아침 신문을 읽는 것과 비슷한 습관이다. 또 얼마나 새로운 출판 아이디어가 펀딩 사이트에 올라왔을까. 또 얼마나 새로운 작가들이 데뷔 전 숨 고르기를 하고 있을까.그곳에서 책 한 권에 펀딩했다. '죽음이 다가와도 괜찮아'. 연합뉴스 김진방 기자가 쓴 책이다. 이제 마흔. 마흔이라는 나이에 나는 벌써 슬펐다.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이 있는 작가는 림프종 3기 판정을 받았다. 그 이야기를 써 내려

  • [with+] 공원 돗자리, 헤테로토피아의 목소리

    [with+] 공원 돗자리, 헤테로토피아의 목소리 지면기사

    아이들 비밀기지·연극 무대처럼'잠깐 열렸다가 닫히는 유토피아'페르시아서 양탄자는 정원 의미친구들과 돗자리 앉아 '삶을 논평'다른 나로… 유토피아 따로 없어늦게 도착한 봄이 야속하게도 이른 여름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 아쉬운 봄의 끝자락, 내가 펼쳤던 돗자리들을 생각한다. 돗자리만큼 점유했던 사각형의 시간들도.호수공원 근처에 사는 나는 걸핏하면 돗자리를 끼고 나간다. 산수유와 목련에 이어 벚꽃이 절정을 이루는 시기에는 꽃그늘마다 빈틈없이 돗자리가 펼쳐지고, 그러면 공원 전체가 대가족의 야외거실처럼 변하는 느낌이 든다. 그 한가한 소란이, 캐노피처럼 드리워진 나무 그늘 사이로 차곡차곡 겹을 이루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묘법으로 그린 그림처럼 하나의 풍경을 이루는 것이 좋아서 나도 한구석을 차지하려 한다. 공원이 가장 아름답게 부풀어 오르는 봄과 가을의 한때를 놓치는 것은 쉽게 붙잡을 수 있는 행복을 놓치는 아쉬운 일이기에.호수공원이 거대한 고래라면 우리 가족은 자리를 옮겨가는 따개비마냥 올 때마다 이쪽저쪽으로 장소를 바꿔가며 돗자리를 펼친다. 김밥 네 줄, 과일 약간, 부스럭거리며 먹을 수 있는 과자와 집에서 내려온 커피, 이 정도면 아주 풍요로운 느낌이 든다. 가방에 넣어온 살림살이를 차곡차곡 풀어놓고 각자의 시간으로 흘러들었다. 나는 책을 보는둥 마는둥 하고, 남편은 음악을 듣는둥 마는둥 하는데 아이만 뭔가를 열심히 만들어 풀밭에 늘어놓고 사진을 찍고 있다.미셀 푸코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는 이 풍경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산문이다. 원래는 '다른(hetero)' '장소(topos)'가 합쳐져서 만든 합성어로 엉뚱한 데 붙은 신체기관을 지칭하는 의학용어라고 한다. 푸코는 이를 가져다가 '잠깐 열렸다가 닫히는 유토피아'라는 개념을 담아 뜻을 펼쳐 보인다. 예를 들어 아이들의 비밀 기지, 한 곳에서 여러 장소가 겹쳐지는 연극 무대 같은 곳도 다른 차원의 시공간이 된다는 점에서 헤테로토피아에 속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오래된 헤테로토피아는 '정원'일 것이다. 페르시

  • [with+] 다시 맨발걷기

    [with+] 다시 맨발걷기 지면기사

    지난해 아파트 뒷산에 생긴 황톳길부드러운 감촉에 가벼운 '첫걸음'사람들 입김에 편리한 쪽으로 변해리플릿 나눔·꽃길 만드는 사람들도맨발로 걷다 감기로 고생 '과유불급'숲이 연한 초록빛으로 흔들리고 있다. 휑하니 드러나던 황톳길도 이제는 나뭇잎이 무성해지면서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지난해 7월 하순, 내가 사는 아파트 뒷산에 황톳길이 생겼다. 이미 수년 전부터 맨발로 걷는 열풍이 불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나는 우연히 산을 올랐다가 이제 막 공사를 끝낸 황톳길을 보고는 호기심에 맨발로 걸어보았다. 말캉말캉한 흙을 밟으니 발에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다리와 발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무엇보다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계단만 오르면 될 정도로 가까웠기에 그동안 해왔던 등산이나 걷기운동을 작파하고 그때부터 황톳길에 매진했다. 나한테는 이 길이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복덩이였다. 실제 멀리서 오는 사람들은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좋겠다. 나도 이사 오고 싶어"하면서 부러워하기도 했다.새벽 5~6시면 일어나 그 길에 올라가면 벌써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다. 더러 젊은 사람도 있지만 그보다는 중년의 아저씨와 아줌마들, 그리고 퇴직한 지 20년은 되었음직한 노인과 지팡이를 짚고 올라오는 할머니들이 주를 이루었다. 동일한 사람이 매일 그 시간대에 오는 경우가 많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벌써 익숙해져 인사를 나누고 오래된 사이처럼 지내기 시작했다. 특히 아줌마들의 붙임성은 대단했다. 목소리가 크고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자석처럼 붙이고 다녔다.그러나 숫기가 없는 나는 같은 사람들을 만나는 게 제일 힘들었다. 말을 붙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가급적 눈을 피하는 것으로 모면하려 했지만 마냥 무심한 성격이 아니어서 내내 신경이 쓰였다.막 생긴 황톳길은 사람들의 입김에 따라 하루가 다르게 편리한 쪽으로 바뀌어갔다(주변 환경이 망가지기도 했다). 걷기를 끝내고 흙발을 닦으라고 수도를 설치해놓았는데, 처음에는 샤워기가 없었다. 그런데

  • [with+] 김소월과 진달래꽃

    [with+] 김소월과 진달래꽃 지면기사

    1925년 24세때 유일한 첫 시집 출간스승 김억의 詩전문지 지원 위한것33세때 '삼수갑산' 등 많은 시 발표그해 세모에 운명 달리한 민족시인소월의 또다른 봄의 염원은 '봄바람'산그늘마다 진달래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진달래꽃무더기를 보고 환장할 것 같다고 말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 무언가 아련하면서 뜨거운 것이 가슴속으로 올라오는 것은 진달래꽃이 유년의 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산그늘 가득한 진달래꽃은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마법의 꽃이다.진달래꽃무더기를 보고 있노라면 생각나는 시인이 있다. 김소월이다. 소월 역시 진달래꽃을 보면 가슴이 먹먹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영변에 약산/진달래꽃/아름 따다/가실 길에 뿌리우리다//가시는 걸음걸음/놓인 그 꽃을/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라고 노래했을 것이다. 이 시는 21세 때인 1922년에 '개벽'지에 발표되었으며 불후의 명작이다.김소월(1902~1934)의 본명은 김정식이다. 평안북도 안주군 곽산면 태생이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 태어난 곳은 구성군 서산면 옥인동 외가다. 1909년인 8세에 곽산면 소재 남산학교에 입학했고 1917년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했다. 이때 교장이 조만식이었고 은사 가운데 시인 김억이 있어 그에게서 시 창작 지도를 받았다. 4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상대'에 입학한다. 그러나 그해 9월에 일어난 동경 대지진으로 귀국한다. 그 후 학업을 다시 계속하지 못하고 만다. 22세 되던 1923년 3월, 배재고보를 졸업한다. 재학 중에는 교지 '배재'에 '옛 이야기' '길손' '봄바람' 등의 시와 모파상의 단편소설 '떠돌아가는 계집'을 번역 수록한다.1923년, 22세 때 '님의 노래' '길손' '봄바람'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삭주구성' 등의 시를 발표한다. 1924년, 23세 때 '신앙' '서로 믿음' '밭고랑 위에서

  • [with+] 우리라는 착각

    [with+] 우리라는 착각 지면기사

    어릴적 '단일민족국가' 교육 받아품넓은 '우리' 진짜 의미 잊고 살아다양한 사람 여행 기쁜표정 다 닮아산속 나무들 잎·줄기·꽃 다르지만물러나 보면 다를게 없는 숲이다출근 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가서 창이 넓은 승객 쉼터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출근 인파가 몰리기 전에 좀 서둘러 출근하면 공항철도에서 앉을 확률이 올라가기 때문이고, 피곤에 지친 퇴근 후의 밤보다는 자고 일어난 아침이 더 맑은 정신으로 책이 잘 읽히지 않겠는가 하는 심산이었다.아침 해는 진작에 솟았고 창밖으로는 드문드문 승객들을 기다리는 비행기들이 보인다. 그리고 여행객들은 각자 색색의 여행가방을 들고 기대감에 들뜬 표정으로 분주히 공항을 오간다. 국제공항임을 증명하듯 외국인의 비율이 매우 높다. 국적도 인종도 다양하여 평생 봤을 외국인들의 수보다도 많은 외국인들을 매일 만나고 있다.어떤 사연을 품고 이곳에 왔을까, 어떤 곳에서 어떤 경로로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을까, 상상을 하며 그들의 스쳐지나가는 얼굴을 보면 당연하게도 모두가 너무나 다르게 생겼다. 다양한 피부색, 다양한 얼굴 그리고 그들이 대화할 때 들리는 다양한 언어.그런 혼재된 풍경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문득 이곳이 낯선 생태계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이라는 동일한 종들이 모여있는 것이 아닌, 모두가 다른 개개의 종들이 모여있다는 생각.외국인을 처음 본 것은 일곱 살 때쯤이었던 것 같다. 부모님 손을 잡고 어린이 대공원에 놀러 갔다가 처음 외국인을 만났다. 물론 TV에서 종종 외국인을 보았지만 실제로 대면한 것은 처음이었다. 피부색도 눈동자색도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때 내 세계에서 외국인이란 영화에서나 나오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TV 영화에서 나오는 외국인들의 대사는 모두 더빙으로 녹음되어 우리말을 쓰고 있었다.우리 민족, 우리나라, 우리말, 우리라는 말엔 좀 묘한 구석이 있다. 어릴 때는 이 단어를, 남들을 배제할 때 자주 썼던 것 같다. 이건 우리 거야, 여긴 우리 집이야, 여긴 우리 학교야.하지만 뜻을 되새겨보면 우리라는 말은 품이

  • [with+] 뛰다가 걷다가

    [with+] 뛰다가 걷다가 지면기사

    호주 직장 생활때 생전 처음 '조깅'쉽지 않을땐 브리즈번강 거닐기도지금 나의 시간 많다 느껴지지 않아유쾌한 할머니 되고 싶을때가 많다그 인생도 꽤 재밌지 않을까 싶어서젊은 날, 호주에서 직장을 다닌 적이 있었다. 브리즈번이라는 도시는 사계절 내내 맑았고, 한겨울에 발가락이 다 드러나는 샌들을 신으면 발은 좀 시려도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볼 정도는 아닐 만큼 따스한 곳이었다. 회사는 브리즈번 시티 가장 번화가 한복판에 있었고 내가 살던 집 역시 회사에서 강변 산책로를 따라 십여 분쯤만 걸으면 나오는 곳이었다. 출근은 아침 아홉 시, 퇴근은 오후 다섯 시 반이었다. 친구가 별로 없었으므로 당연히 나에게는 시간이 혹독할 만큼 많았다. 집에 가는 길에는 대형 마트에 들러 마감 세일을 하는 스테이크용 고기를 사고, 보틀숍에 들러 맥주도 샀다. 된장찌개를 끓이고 고기를 구워 저녁을 먹어도 일곱 시가 채 되지 않았고, 온종일 영어만 나오는 텔레비전 앞에 앉으면 그걸 애써 듣느라 금세 피곤해졌다. 그때 내 소원은 설거지를 하며 뉴스를 듣는 거였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면, 설거지 물소리에 섞여 대충대충 들리는 뉴스도 단박에 알아먹을 수 있는 것. 그 꿈은 여태 이루질 못했다. 영어란 나에게 거대한 산 같은 것이었다. 뉴스는커녕 심슨 만화영화만 틀어놓아도 나는 금방 졸렸다. 소파에서 끄덕끄덕 졸다 결국 침대에 눕는 시간은 아홉 시도 되지 않았다. 그러니 침실 커다란 창으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 잠을 깨면 새벽 네다섯 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맙소사, 새벽 다섯 시에 이토록 강렬한 햇살이라니. 더 자고 싶어도 얇은 흰 커튼 사이로 햇빛은 사정없이 쏟아져 들어왔고, 선크림이라도 바르고 다시 자야 하나 고민을 하다 나는 별수 없이 일어나고 말았다.그러면 또 할 일이 없어 나는 점심 도시락을 쌌다. 식빵을 구워 슬라이스 햄과 치즈를 끼워넣는 것이 전부인 도시락은 십 분이면 완성했고, 급기야 나는 아침 조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집을 함께 쓰던 플랫메이트는 일본인 유학생이었다. 간호대학을 다니던 그녀의 이름을 이제

  • [with+] 종이 주머니와 우산 안테나

    [with+] 종이 주머니와 우산 안테나 지면기사

    딸과 도서관 가면 끄적이고 싶어져종이에 쓰면 주머니서 꺼내는 느낌딸이 끄집어낸 그림에 기억이 새록미화원의 기부에 담긴 인생 이야기경이로운 삶 수신하듯 우산 돌려봐딸과 도서관에 함께 가면 우리는 각자의 책을 찾아 1층과 2층으로 흩어진다. 딸은 어린이 자료실이 있는 1층 창가 쪽 소파로, 나는 종합자료실이 있는 2층 책상으로 향한다. 평일 오후 5시의 공공도서관 창문으로 길어진 오후 햇빛이 깊숙이 들어오고, 드문드문 책을 찾는 사람들이 서가에 서성인다. 도서관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쾌적한 침묵으로 채워져 있다. 이렇게 완벽한 순간에는 종이를 펼쳐 뭔가를 끄적이고 싶다. 쓸 게 있어서가 아니라 쓰는 감각을 느끼고 싶어서 쓸 것을 찾게 되는, 손가락이 몹시 간지러운 느낌. 뭔가를 적다보면 내가 쓴 것이 아니라 종이에 달린 주머니에서 끄집어내는 것처럼 여겨진다.종이에 달린 주머니에서 내가 꺼낸 것은 전부 글자로 되어 있다. 돌돌 말린 리본처럼 문장의 형태를 띠고 있어 그걸 풀어서 펼치는 것이 글쓰기가 된다. 그런데 여섯시가 되어 어린이자료실이 문을 닫자, 내 옆에 앉은 딸의 경우에는 또 다르다. 딸의 '종이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글자보다는 그림이다. 다섯 손가락을 그린 후 각각의 손가락을 휘감고 있는 나무 덩굴, 보석이 달린 철사, 초록색 뱀, 색실을 그린 후 손바닥에는 기하학적 패턴의 연못을 만들고 물고기 두 마리가 헤엄치는 그림을 그려놓았다. 바퀴모양의 보석 그림을 보다가 내 노트로 돌아왔는데, 문장은 어느새 기억으로 바뀌어 있었다.작가가 되기 전에 나는 잡지사 기자로 일했는데, 한번은 바퀴를 테마로 여러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꼭지를 맡은 적이 있다. 환경미화원을 섭외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신문을 뒤지다가 조그마한 미담을 발견했다. 재활용처리장에서 일하는 어느 환경미화원이 버려진 소파에서 나온 동전들을 수년간 모아 전액 기부했다는 기사였다. 신문에 나온 곳으로 전화해 연결이 되어 그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사실 그 코너는 글보다 사진이 중요했고, 인터뷰는 몇 줄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런데

  • [with+]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with+]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지면기사

    날카롭게 쏘아보는 한용운 사진사형 당한 독립투사들의 모습들손톱 찌르기·대못 박힌 상자 등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고문기구역사적 현장 이제 왔다는게 죄송"김 선생님, 우리 서대문형무소 한번 가요."지난 2월22일 겨울의 끝자락에 소복히 내린 눈으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온통 하얗게 덮여 있었다. 망루가 있는 붉은 벽돌 건물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니 벽면 두 곳에 거대한 태극기가 부착되어 있다. 그 사이 눈이 왔다고 누군가 눈사람을 만들어 놓아 마음을 살짝 누그러뜨려 주고 있었다.나와 주위의 몇 사람이 몇 년 전부터 서울·경기지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고 있지만 한 회원의 거듭된 요청이 없었다면 내가 자발적으로 이 형무소를 찾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회원은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곳을 관람하시고는 그렇게 많이 우셨어요"라고 말했다.간수들이 업무를 보았던 보안과 청사였던 전시관 1층에 들어서니 퀘퀘한 냄새가 올라왔다. 냄새 하나로 과거 고문을 당했던 독립투사들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아픔이 일어났다. 바로 이어지는 전시물. 1936년에 한반도 전역에 있었던 형무소 지도였다.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해 경성, 평양, 원산, 대전, 공주, 광주, 부산 등 전국에 뻗어있는 28개의 형무소와 소년원, 형무지소는 일제에 대한 우리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2층 전시관에는 죄수들을 옥죄는 수형 기구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사상범 4천800명의 사진이 붙어있는 수형기록카드가 사방 벽을 다 채우고 있다. 익히 알려진 이들도 많이 보이는데, 그중 한용운의 사진은 자세가 남다르다. 한용운은 정면 사진에서 비웃음을 띠며 날카롭게 앞쪽의 누군가를 쏘아보고 있다. '저렇게 저항했으니 변절하지 않을 수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스쳤다.지하실에 전시된 사형장과 시신을 내가던 시문구에 이르니 모골이 송연했다. 사형장 안에는 목밧줄이 있는 사형대와 그곳에서 죽어간 독립투사들의 사진이 십수 장 붙어있다. 사형을 앞두고 최고령 독립투사 강우규(1855~1920) 의사가 남긴 "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 [with+] 아름답다는 착각

    [with+] 아름답다는 착각 지면기사

    볼수록 매력에 빠져드는 '명품'누구는 브랜드·디자인 가격 강조아름다움, 노동가치 상회 부도덕수많은 디자이너·생산·수송자…문득 그들의 손·발 기억하고 싶다수레를 아득바득 소처럼 끌어도 쳐다보는 사람들이 없다. 주목받고 싶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들이 내가 끌고 가는 술 상자가 가득 담긴 수레에 부딪히면 안 되기 때문이다. 짐을 가득 실은 L-Cart의 무게는 수백 킬로그램이라서 거기에 발목이라도 부딪힌다면 골절상을 입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나가는 수레를 그렇게 심각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은 없다. 조금 이르게 거리를 두고 피할 수 있음에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다. 사람이 끌고 있으므로 위험한 순간이 오면 금방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내 몸무게의 세 배가 넘는 수레를 한번에 세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내가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앞을 보지 않고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며 걷거나 옆쪽으로 화려하게 늘어선 면세점 상가의 상품들을 바라보며 걷는다. 사람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바라본다. 누구나 알만한 익숙한 이름의 브랜드에서 생전 처음 들어보는 브랜드까지 온갖 상품들이 면세점 구역 양쪽으로 화려하게 펼쳐져 있다. 닿지 않는 것에는 경탄 아니면 경멸이라고 했던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그런 명품 브랜드들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천만원 넘는 가격의 상품들이 이렇게 많다니. 브랜드가 다르지만 같은 종류의, 평소에 내가 마트에서 사는 상품들의 가격에 0자가 하나씩 더 붙어 있다. 혹은 두 개. 면세가임에도.하지만 다니면 다닐수록 빠져드는 매력, 아름다운 상품들-그래서 호칭도 명품이다-그 매력에 점차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계속 보게 되니 알 것 같았다. 아 저게 마감이 좋고, 색이 좋고, 디자인이 좋고, 아름답구나. 빛나는구나.무거운 수레를 끌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휘황찬란한 아름다움에 넋이 나가 있다가 문득 생각에 잠긴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가격이 올라갈수록 아름다움도 올라가는 것일까. 누구는 브랜드 값이라고도 하고 누구는

  • [with+] 열 살 풍경

    [with+] 열 살 풍경 지면기사

    '마음 읽는데' 책 가져왔다는 딸놀랍고 감동… 그래서 후끈해졌다몰래 본 일기장엔 예쁜 말만 가득절반은 MBTI 이야기… 혼자 '푸실''들키면 어쩌나'… 어이없는 한숨내 딸은 이제 만 여덟 살, 그러니까 우리에게 아직 익숙한 나이로는 열 살이다. 예비 초등 3학년이다. 늘 아기라고 생각했는데, 또 그럴 일이 아니다 싶었던 건 나의 열 살 무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열 살 적 나는 생각이 몹시 많았다. 청개구리 손에 쥐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남자아이들이 유치했고, 걸핏하면 삐치고 울어버리는 짝꿍 아이도 한심하긴 마찬가지였다. 한 세계를 단숨에 건너뛴 것처럼 짐짓 골몰히 생각에 빠지곤 하던 시절이었다. 유독 한 날이 또렷이 기억난다. 아마도 피아노 학원에 다녀오던 길이었을 텐데, 아이들로 빼곡한 놀이터를 가로질러 집으로 가던 나는 가방끈을 고쳐 쥐며 가만히 생각을 했더랬다."엄만 아직도 그 날이 생생해. 열 살이었거든.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 나는 누굴까? 나는 대체 누굴까?" 내 말에 딸아이가 대답했다. "엄만 김서령이지." "그런 거 말고 그냥… 나란 사람은 누구지? 나는 왜 김서령이지? 왜 신욱이가 아니고 영애가 아니고 지현이가 아니고 하필 김서령으로 태어났지? 나는 어디서 온 걸까? 어쩌다가 김서령으로 살게 되었을까? 나는 앞으로 어디로 계속 걸어가게 될까? 나중엔, 아주 나중엔 어디로 갈까? 그런 생각. 그런 생각을 했던 게 아직 또렷하게 기억나." 말을 하면서도 웃었다. 고작 열 살 먹은 그 시절의 내가 조금 우스웠다. 공기놀이를 하자고, 땅따먹기를 하자고 친구들이 나를 불렀지만 미간 한 번 살짝 찌푸리고는 대답 없이 걸어갔던 나. 도대체 얼마나 새침데기였던 걸까. 내 이야기를 듣던 딸아이가 한참 입을 다물고 있기에 내가 물었다. "이상해? 그런 생각?" 아이가 대답했다. "엄마, 요스타케 신스케가 쓴 '이게 정말 나일까?'란 책이 있어. 그거 말고도 '이게 정말 마음일까?'랑 '이게 정말 천국일까?'라는 책도 있는데, 일단 엄마는 '이게 정말 나일까?